✶3 통화
얼른 낫고 싶다|릭아미
* 스포 多
* 날조 有
* 많이 늦긴 했는데 한참 배저들 아프던 시기에 쓰기 시작한 친구..입니다.
높은 열이 정신을 흐물흐물하게 만드는 것이 느껴졌다. 입 밖으로 색색 새 나가는 숨이 뜨거웠다. 부은 목이 따끔거리고 머리가 무거웠다.
삐, 삐이- 기계 소리가 아프게 귀를 파고들었다. 주위 상황을 인식하는 것도 힘들어 흐릿한 시야를 계속 깜빡였다.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뼈마디를 꿰뚫을 것처럼 고통스럽게 들려왔다.
“소르디 씨, 소르디 씨.”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알아들은 것은 가까스로였다.
“전화 왔어요.”
“…누군데…~?”
“아미요.”
아미.
듣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그 이름에 입꼬리를 힘 없이 올렸다. 어쩔 수 없었다. 그 이름을 듣고 기쁨을 느끼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니.
“전화 줘요~…”
여기 선배님이나 사령관님이 있던가… 무거운 머리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둘은 같은 격리실을 쓴다고 했었지.
머리가 느리게나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름을 들었을 뿐인데 이렇게 몸 상태가 괜찮아질 수 있다니, 역시 아픈 건 어지간하면 정신의 문제인 모양이다. 생각을 안 하고 사는 로도 상태가 괜찮은 편이라고 들었던 것을 떠올리면 말이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힘들여 일으켰더니 곁에 있던 이가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화면에 나타난 더없이 사랑스러운 이름을 뚫어져라 보다가, 녹색 버튼을 눌렀다.
[어 받았당. 릭!]
“안녕 아미~ 오랜만이야…”
[헉, 목소리 다 쉬었네. 상태 많이 심각한가보당…]
“뭐 그렇지… 그래도 네 목소리 들으니까 좀 낫네…”
[뭐야 그게. 자주 전화해야겠넹.]
수화기 너머에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픈 것 같지는 않다. 걱정했는데 그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래도 목소리만 들어선 혹시 모르는 거니까. 나는 휘파람 소리 같은 아미의 청명한 웃음에 따라 짓고 있던 미소를 줄이고 입을 열었다.
“넌 좀 괜찮아…?”
[난 괜찮아. 양성도 안 나왔구.]
“안 아프다니 다행이네…”
[음, 안 아프진 않아.]
얼핏 물기가 서린 것 같은 그 말에 순간 머리가 덜그럭 멈췄다.
안 아프진 않다고. 그럼 아프다는 거잖아. 병에는 안 걸렸다면서, 왜… 어디가 아픈데. 또 그린 드림이야? 아니면, 혼자 임무를 다니다가 다쳤어? 혼자라서 지친 거야? 그럼 내가 대신 나서고 싶은데. 내가 아픈 건 다 상관 없으니까, 네가 힘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온갖 불길한 것들이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아파서 그런가 사고가 온통 부정적으로만 흘렀다.
정신을 차린 건, 이어진 아미의 말을 듣고서였다.
[다 아프잖아. 병문안도 못 가구, 너무 속상해.]
“아.”
차가운 냉수를 머리에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뜨겁게 열이 오르던 머리가 그제야 식었다. 내가… 우리가 아픈 것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라는 것을 차분하게 머릿속에 정리했다.
나는 실수로 부숴버릴 뻔한 핸드폰을 다시 조심히 고쳐 들고 무거운 눈을 감았다. 할 말이 없었다.
윤 선배님도, 사령관님도, 조나단도, 로도…… 나도. 힐데베르트네 동족들 말고는 거의 다 확진되었으니까. 그녀의 외로움엔 모두가 한몫하고 있을 테니까.
“……그건 미안해.”
[릭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 얼른 나아. 내가 얼른 나으면 에스프레소도 같이 먹어줄겡.]
“뭐야 그게…”
장난스러운 어조의 목소리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밝았다. 내 선호에 맞춰주겠다는 드문, 그녀 입장에선 큰마음을 먹은 미끼에 하릴없이 웃음이 나왔다.
에스프레소를 같이 먹어주기는, 그 꼴도 보기 싫은 아메리카노도 잘 못 마시면서.
“프라푸치노 먹어… 에스프레소 못 먹잖아.”
[그치만, 릭이 좋아하는 건 에스프레소잖아?]
“같이 커피 마시는 시간이 좋은 거지, 못 먹는 거 먹으려고 애쓰는 모습 보는 게 좋은 게 아닌걸…~”
[그래…? 그럼 같이 커피 마시는 걸로! 난 자바칩 프라푸치노 시킬게!]
“응, 그걸로~”
[응!]
같이 카페에 가서… 난 에스프레소를 시키고, 아미는 프라푸치노를 시키고. 아미는 단 걸 좋아하니까 단 디저트를 시키겠지. 그러면 또 달다고 에스프레소 한 입 달라고 할 테고, 또 쓰다고 프라푸치노를 들이키고……
아, 상상만 했는데 기분이 좋아졌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귀여울 수가 있을까? 내 애인은.
예민하게 드리우고 있던 경계심이 누그러지는 것이 느껴졌다. 고통이 벼려내던 감각이 둔해졌다. 윤 선배님이랑 사령관님은 다른 방에 계시고, 핸드폰을 건네줬던 힐데의 동족은 다른 방으로 갔고, 조나단은 자니까. 이 넘쳐흐르는 애정을 조금이나마 표현해도 괜찮겠지.
응. 괜찮겠지.
“그럼 자기야…… 뭐 하다가 전화했어~?”
[어, 사람 없어?]
“응, 없어~ 조나단은 자고… 방 둘만 쓰니까~”
[우와. 진짜? 신기하다. 자기가 부르는 그 호칭 새삼스러운데 되게 오랜만에 들어.]
“그거야 자기가 혼자 있는 시간이 드무니까 그렇지~…”
[히히, 그건 그래.]
키득거리는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가 밝게 울렸다. 아무래도 실내로 들어온 듯했다.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얕은 질투를 쓰게 삼켰다. 뭐… 굳이 질투를 숨기면서까지 하는 건 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거니까. 아무렴, 지뢰 같은 인간들의 역린인 사람이랑 연애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우리 선배님과 사령관님은 의외로 발도 넓고 정보력도 뛰어나시니까.
그래도 조금 속이 복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쪽의 속내를 읽었는지 쾌활한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투덜거렸다.
[난 방금 순찰 끝냈엉. 오늘 크리처만 백 마리 넘게 죽인 거 같아.]
“힘들었겠네… 이제 임무 끝이야~?”
[이제에~ 세 시간 쉬고 다시 나가.]
…휴식 시간이 세 시간 밖에 안 된다니.
무의식적으로 굳어지려는 입가를 매만졌다. 아미는 순찰이라고 표현했지만 평상시와 같은 순찰은 아니다. 인원도 없고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에, 병에 안 걸리도록 주의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몇 시간을 소요하는 일이 평시의 여유로운 순찰과 비견될 순 없었다.
그런 와중에 휴식이 세 시간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화 신체를 가진 배저라 해도 너무 적었다. 적어도 다섯 시간은 더 쉬는 것이 옳을 텐데.
“……너무 무리하는 것 같은데… 자기 정말 몸 괜찮지…~?”
[에이, 진짜 아픈 사람이 뭐래는 거얌. 난 힐데보단 안 동원되니까 나 말고 힐데나 걱정해.]
내가 지금 네 걱정 말고 누구 걱정을 해…….
머리가 다시 아파왔다. 아니 물론 힐데도 걱정되지만, 힐데는 그 강함이 있지 않은가. 한동안 골골대긴 했지만 치료도 받았고. 병에도 안 걸리고. 못 움직이다가 간만에 날뛰어서 오히려 날아다니려고 하고 있을 텐데.
물론 선배로서 꼴사납게 병이나 걸려서 부담이 늘게 한 건 미안하지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걱정이랑 이어지진 않았다. 내가 힐데를 걱정하는 이유는 지 몸뚱아리 안 챙기고 다니는 부분 때문이지 무력이 떨어지기 때문은 아니었으니까.
[난 튼튼하고 짱 세니까! 내 걱정은 말고 얼른 낫기나 해. 알겠지, 자기?]
아미가 활기차고 호기롭게 말하며 사랑스럽게 웃는 소리를 내었지만 걱정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힐데와 아미 둘 다 걱정되는 현 상황에서 위험 요소가 더 많은 사람은 아미니까.
기동력을 기반으로 힘을 발휘하는 아미는 인원이 부족할 때 그만큼 일이 가중되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건 지금 역시 마찬가지로, 아예 감염될 위협이 없는 힐데네 동족들보단 덜하지만 배저들 중에선 가장 일을 많이 하고 있을 것이다.
……갑자기 애인한테 애인과 나이가 좀 있으신 후배 중 후배를 고르라고 종용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좀 묘하긴 한데… 어쨌든.
“자기도 만만찮게 목숨 내놓고 다니면서~…”
[으잉, 난 힐데 만큼은 아니징.]
“자기는 이 병 걸릴 수도 있잖아… 꼭 조심해. 나도 열 많이 심해서 하는 말이야…”
[알았어어. 릭은 걱정이 심하다니까.]
왜겠냐고….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한숨이 새 나왔다. 입술을 거쳐 밖으로 내뱉어지는 숨이 뜨거웠다. 느끼기로는 아직 상태 괜찮은데, 괜찮아진 것 같다고 여겼던 건 역시 기분 탓이었던 것 같다.
내가 뭘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상황에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최대한 감정을 추스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진심을 가득 담아서 입을 열었다.
“그야 내가 자기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 아니겠어~?”
사귄지는 제법 되었지만 거의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
호칭을 거의 부르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마음 역시 거의 전하지 못했다. 물론 내가 그녀를 사랑하고,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이 애정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면 의심 따윈 안 하지만.
…그렇지만, 그대의 아픔이 내 고통인 것을 알아주었으면 해서.
[알지! 나도 사랑해.]
아파서인지 어둡고 부정적으로만 이어지던 생각이 대뜸 나온 고백에 끊기고, 실수로 헛숨을 삼켰다. 나는 수화기 너머로 기침 소리가 안 넘어가도록 노력하다가 가까스로 진정했다.
얼마 듣지도 못한 사랑을 이렇게 마음 약할 때 속삭여주다니, 아미는 사실 암살자인 걸까? 날 행복에 취해 죽게 만들려고 한 거라면 성공도 그냥 성공이 아닌데.
“……응, 나도.”
[히히.]
사랑스러운 웃음소리가 가깝고도 멀다. 무슨 얼굴을 하며 그리 웃는지는 대충 감이 오지만 실제로 얼굴을 마주하고 그 웃음을 보고 싶었다.
빨리 나아야 할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과학부에서 언제쯤 약을 다 만들지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생각하다가 평소보다 느리게 말했다.
“그럼 자기야… 쉬는 동안 뭐할 거야~…?”
[으음~ 릭이랑 얘기할까 했는데, 릭 아직 많이 아프지?]
“아미랑 대화할 땐 안 아픈데.”
[뭐야 그게.]
이보다 더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말을 덧붙이는 대신 맑게 웃는 그녀를 따라 웃었다.
“너무 누워있어서 상태가 더 나빠졌던 것 같아… 너랑 대화하니까 진짜 좀 나아졌어~.”
[오오, 그렇구나. 하긴 막내 오빠랑 예현 오빠는 릭만큼 아픈 것 같진 않았엉.]
“그 두 분은 아파도 일 못 쉬시니까~”
[그런가봐! 나로 인해 릭 상태가 좀 나아졌다니 기분 좋은 것 같아. ……아, 릭 아픈 지금이 좋다는 건 아냐!!]
그거야 걱정하지 않아도 알지만.
난 장난스럽게 목소리를 높였다. 최대한 아픈 티가 나지 않도록 기울인 노력이었다.
“조금 서운할 뻔했네~…”
[우우…]
“농담이야~ 화내지 마.”
[…화 안 났는데?]
“화 났는데~?”
[으익, 나 진짜 화낸당.]
“응, 미안해.”
웃음이 실실 새 나오는 것을 갈무리한 채로 작게 속삭였다.
옆에서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을 보니, 잠들어있던 조나단이 곧 깨어날 것 같았기에.
…행복한 일순이 끝나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그럼 이제 끊어야 할 것 같아… 조나단 일어나겠어.”
[헉, 그럼 끊어야지. 릭도 푹 쉬어. 잘 자고, 잘 먹고. 아픈 김에 쉬자. 알겠지?]
“아미도 푹 쉬어야 할 텐데… 안 아프면 좋겠지만.”
[지금 아픈 사람들이 나중에 잘 해주겠징.]
당연히 그래야지. 강한 건 알지만 그래도 작은 사람이 이렇게 고생했는데.
그런 마음을 담아 잠시 침묵을 지키려니, 건너편에서 조심스러운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제 끊을게. 사랑해.]
“…나도 사랑해.”
뚝.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건너편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끊겼다.
이걸 단호하다고 해야 할지, 가차 없다고 해야 할지…
어느 쪽이든 그저 멋있는 그녀를 생각하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내 체온에 뜨거운 이불이 나를 감쌌다.
“……얼른 낫고 싶은데…”
언제쯤 나을 수 있을까.
그리 생각하며 잠들었다.
………대마법사가 쳐들어온 오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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