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루.


* 오늘이 망자의 날이라고 들어서……. (11/2 망자의 날 기념으로 썼던 글입니다.)

* 283화 스포.

힐데.

나직하게 이름을 불리는 소리에 묵직한 눈꺼풀을 밀어올린다. 아른거리는 시야 사이로 마주친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었다. 일어났어요? 아이의 물음에 희미하게 웃었다.

"미안, 언제 잠들었지? 오래 기다렸어?"

아이가 천진한 웃음을 띄우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딱 맞게 일어나셨어요. 그리곤 들고 있던 핸드폰의 화면을 들이밀며 한껏 들뜬 목소리를 흘렸다. 오늘 잊지 않으셨죠? 저 오늘만 기다렸는데! 장난으로라도 잊어버렸다는 말을 꺼낼 수 없을 정도로 기대감에 한껏 부푼 목소리였다. 누워있던 바람에 여기저기 뻗친 머리를 느리게 쓸어넘기며 웃음을 터트렸다.

"기대에 부푼 와중에 미안한데……. 나랑 노는 거 분명 재미없을 거야, 아담."

아이는 모르는 소리 마시라며 고개를 저었다. 힐데, 게임도 잘하지 않아요? 저도 게임 좋아해요. 아담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그랬나? 그건 몰랐는데…….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너무 무심했구나. 자신조차 그 좋아하던 게임을 손에 쥐지 못했으니 말 다했다만, 그래도 아이에겐 좀 더 관심을 기울였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새삼 미안했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입을 달싹였다.

"그래서, 오늘 뭐 하고 싶은지 생각해놨어?"

제 물음에 아이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이죠. 이것저것 엄청 생각해뒀으니 다 해주셔야 해요! 그리고선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으며 아이는 중얼거렸다. 같이 게임하기, 쇼핑하기, 미니 테마파크 가기, 맛있는 거 사먹기 등등……. 그 나잇대 아이들이 해보고 싶어할만한 것들이 우르르 나열된다. 너무 많아서 뭐부터 해볼지 고민돼요. 끄응, 앓는 듯한 소리에 힐끔 시선을 돌렸다. 마침 게임 콘솔이 눈에 들아왔다. 간만에 손 좀 풀까?

"말 나온 김에 게임 먼저 할래?"

아이가 눈을 동글게 뜨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곧장 게임기 앞으로 향하는 그를 느긋하게 뒤따랐다.

으아. 짧은 소리와 함께 길게 기지개를 편 아이가 바닥에 등을 대고 풀썩 누워버렸다. 그리고 나 역시도 손에 쥐고 있던 콘솔을 바닥에 내려둔다. 대장, 잘한다고 말만 들었는데 진짜 잘하시네요. 한 번도 못 이겼어……. 어쩐지 허망함이 담겨있기까지 한 목소리에 아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이 게임 처음 해보는 거라며. 처음치고는 잘하던데?”

제 말에 아이가 진짜요? 하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표정에는 숨길 수 없는 뿌듯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애라니까. 입밖으로 내면 좋아하지 않을 것이 뻔해서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제가 엄마랑 아빠를 닮아서 좀 똑똑하잖아요. 그쵸? 그 물음에 시선을 데굴 굴렸다.

"그래, 검술을 배우는 건 실패했지만 말이지."

아, 진짜, 그건 빼고요. 검은 저랑 너무 안 맞아요. 투덜투덜 대는 목소리에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그 뒷통수를 두어번 쓸어주고는 게임기의 전원을 툭, 껐다. 원없이 게임을 즐겼으니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았다.

"다음은 뭐하고 싶어?"

아이는 주먹을 쥔 손에 턱을 얹은 채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생각났다는 듯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스물 피어오른다. 저, 맛있는 거 사주세요, 대장.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마침 내가 좋아하는 가게가 생각났어. 가자."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신나는 걸음으로 현관 쪽으로 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담에게 렉시크 누들의 영업은 장렬히 실패했다. 한 입 먹어본 아이의 표정이 썩 기묘해졌다. …… 힐데,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게 묻던 아이는 누들을 거의 흡입하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다 멋쩍게 웃었다.

"…… 왜, 입에 안 맞아?"

아이의 눈에 어떤 체념이 스쳤다. 꼭 '이 사람, 진짜 이게 맛있나봐.' 같은 눈빛. 왜지, 맛있지 않나. 나름 마니아 층도 있는 누들인데. 하여튼 아이 입맛엔 영 아니였던 모양이라, 결국 거의 굶다시피한 아이에게 다른 식사를 사주었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입에 문 아담의 표정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어쩐지 좀 씁쓸하네. 왜 사람들은 이 개쩌는 누들의 맛을 몰라주는 거지. 아삭아삭 소리를 내며 아이스크림을 씹어먹은 아담이 앞서가던 몸을 휙 돌려 자신을 바라보았다. 저희 이대로 놀이공원도 가요. 아담의 말에 시간을 살폈다. 4시와 가까워지는 시간. 폐장 시간이, 9시던가? 5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놀이기구 줄 서고 하다보면 몇 번 타지도 못하고 시간이 훌쩍 가버리기 일쑤였다.

"지금가면 많이는 못 놀 것 같은데."

아담은 다시금 웃었다. 괜찮아요. 그러니 같이 가주세요, 힐데. 모든 동족들이 그렇듯 자신 역시 아담에게 약했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응하자 아이는 다시 들뜬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평일이라 그런지 그렇게 북적이진 않았다. 날 잘 잡았네. 안으로 들어서자 여기저기 크고 작은, 재미있는 놀이기구들이 잔뜩 보였다. 뭐부터 타야하나. 조금 아득함을 느낄 즈음, 아이가 제 손을 답삭 잡아 이끌었다. 역시 놀이공원의 근본은 롤러코스터죠! 그렇게 외친 아이는 자신을 롤러코스터 쪽으로 이끌어갔다.

"너무 뛰지마. 넘어진다, 아담."

그 손에 순순히 이끌리며 잔소리를 얹었다.

어느 덧 해가 져물고 짙은 밤이 찾아왔다. 5시간 내내 아이는 쉬지도 않고 자신을 이리저리 끌며 모든 놀이기구를 한 번씩 탑승하는데 성공했다. 이게 되네? 되지 않은 건 내 체력 뿐이군……. 비실거리는 걸음으로 벤치에 풀썩 앉았다. 체력으로 따지자면 어디가서 뒤쳐지지 않는데, 그 체력과 이 체력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게 날아다녔는데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아담이 걱정스레 자신을 살피며 옆자리로 앉았다. 힐데, 괜찮아요? 그 물음에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괜찮아. 넌 지치지도 않나보네……."

아담이 웃었다. 놀때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쳐지지 않을 자신 있어요. 자신도 마주 웃음을 터트렸다. 칠흑같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아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듯이. 마지막으로 가고 싶은 곳이 있어요. 가주실거죠? 눈을 깜빡이다 그의 손을 쥐었다.

"당연하지, 약속했잖아."

아이가 기쁜 듯 소리내 웃었다.

도착한 곳은 느리게 돌아가는 관람차 쪽이었다. 지금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텐데. 하지만 아담이 꽤 들뜬 얼굴이였기에 입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동그란 관람차 안으로 발을 들였다. 느린 움직임으로 관람차가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중간 즈음 올라왔을까, 내내 바깥을 보던 아담이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힐데. 그 부름에 눈을 깜빡였다.

"응."

아이가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웃었다. 오늘 하루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새삼스러운 인사였다. 아이도 만족한 듯 보여서 자신도 덩달아 기뻤다.

"고맙긴. 네가 즐거웠다면 됐어. 다음에 또 놀고 싶다면, 시간 한 번 내볼게. 또 하고 싶은 거 생각해놔."

밤의 어둠에 묻혔음에도 아이의 표정이 더할나위 없는 행복감으로 차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나 좋은 걸까. 조금 더, 진작에 이렇게 시간을 내줄 걸 그랬어. 창밖 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던 아이가 바르게 앉아 자신을 마주 보았다. 괜찮아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저, 이 날을 영영 잊지 않을 거예요.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조금 기묘한 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꼭 어디론가 가버릴 것처럼. 불안감이 목구멍을 틀어막았다.

"아담……."

아이의 이름을 읊조린 순간이었다. 피잉, 하는 소리와 함께 형형색색의 불꽃이 관람차 안을 강렬히 비추었다. 아이의 시선이 다시 바깥으로 향했다. 아이의 눈동자가 오색빛깔로 물들었다. 봐요, 힐데. 너무 예쁘지 않아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해요……. 아이에게서 눈을 떼고 싶지 않았는데, 그 빛에 사로잡힌 듯한 눈동자에 자신의 고개 역시 느리게 돌아갔다.

"아."

아이의 말이 맞았다. 하늘을 수놓는 빛깔은 찬란하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 작별 인사를 건네기에도, 더할나위 없이 어울리는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새 제 뺨이 축축히 젖어들어 있음을 자각했다. 관람차가 가볍게 흔들렸다. 맞은 편에 앉아있던 아이가 제 옆으로 자리를 옮겨온 것이다.

"아담, 미안해."

제 사과에 아담이 자신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아이가 제 품안에 가득 들어왔음에도, 현실감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었을 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 그리고, 이 순간까지 외면해왔던 것. 아이의 어깨가 젖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힐데, 괜찮아요. 아이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오늘, 이걸로 저랑 약속은 지키신 걸로 해요. 작게 숨을 헐떡였다. 아이가 조심스레 제 어깨를 쥐고 뒤로 물러났다. 자신처럼 젖은 눈으로 웃는 아이. 늘 마음의 답답함을 쓸어내려주던 그 천진한 웃음.

목요일 하루, 주셔서 감사해요, 힐데. 감사했습니다.

아이의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폭죽이 터지는 소리도. 미안해……. 다시금 내뱉는 자신의 사과에 손을 잡아오는 온기가, 퍽 선명히 느껴졌다.

다시금 눈을 떴다. 아, 눈가가 따가워. 손을 들어 얼굴을 더듬었다. 물기가 흠뻑 묻어나고 있었다. 덩달아 젖어든 손을 바라보다, 팔로 눈가를 가렸다. 아직도 쏟아질 울음이 남아있었던 모양이라……. 아주 오랜만에 보았던 아이의 웃음을 떠올리며 소리없이 울음을 삼켜냈다. 이 울음이 그치면 아이가 잠든 곳을 찾아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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