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분 IF] 굴러온 돌?


* 스포일러 존재.

* 전에 쓴 거랑 이어집니다. (https://pnxl.me/fykrju)

* 여러가지 망상 날조, 캐붕, 우당탕 입니다. 뇌 빼고 봐주세요.

그는 고해하듯 모든 사실을 토해내며 고통섞인 울음을 쏟아내는 자신을 질책하지 않았다.

⌜힐데베르트.⌟

여전히 단단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시선을 그는 외면하지도 않았다. 잘했어, 애써줬다. 그 한마디에 불안하게 흔들리던 것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하고 있던, 영영 지워지지 않았을 것이였던 죄책감도.

⌜죄송, 합……, 니다…….⌟

⌜못본 새에 눈물도 많아졌네.⌟

웃음기 서린 목소리에 와중에도 입술을 비죽이며 불만을 표했다. 그가 픽,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자신의 팔을 쥔 손은 여전히 단단했다. 정적을 깬 것은 그의 낮은 목소리였다.

⌜내가 정했던 우두머리는 힐데베르트, 너야.⌟

⌜…….⌟

⌜그리고, 난 지금 그 결정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고.⌟

⌜키시스…….⌟

⌜내가 너를 돕지.⌟

그러니 이번엔 네가 나를 이끌어. 젖은 눈을 크게 떴다. 너무 놀라 눈물도 쏙 들어갔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다. 나는 아직 그에 비해 실력도 한참 모자라다, 게다가 당신은 나보다 더 윗사람이지 않느냐, 내가 이끌었다가 여기가 무슨 꼴이 났는지 듣지 않았냐, 같은 말들을 두서없이 마구 쏟아내는 동안 그는 팔짱을 낀 채 그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의 눈빛을 눈치채고 천천히 입을 다물 때까지.

⌜불만 토로는 끝났어?⌟

⌜제발 진지하게 들어주시길 간청드립니다, 키시스 경. 저는 저보단 당신이…….⌟

⌜하나 묻자, 힐데베르트. 지금 이곳의 체계와 정보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너냐, 아니면 나냐.⌟

입이 다물렸다. 굳이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키시스는 이곳에 떨어진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았고, 나는, 이곳에 대해 그보다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었다. 자신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어물쩍대자 대답할 시간을 더 주지 않겠다는 듯 그는 차가운 자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작전에 있어 중요한 건 주변 환경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대한 것도 있지. 함정을 파든, 잠복을 하든, 그 외의 것을 하든. 그런데, 아는 것 하나 없는 이곳에서 내가 너를 올바르게 이끌거라고, 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냐?⌟

⌜그건, 당신이라면 금방 배울 수 있는…….⌟

⌜정말 겁쟁이가 다 되었어.⌟

⌜…….⌟

⌜자료와 말로만 듣는 정보와 몸으로 직접 겪은 것들이 얼마나 다른지, 더 설명이 필요해?⌟

⌜아닙니다.⌟

결국 꺾인 건 제 쪽이었다. 구구절절 그의 말엔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대화를 되짚고나니,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했는지 실감이 났다. 자신에게 의지할 만한 이가 나타나니 나도 모르게 그에게 전부 맡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마른 세수를 두어번 하며 금세 정신을 차리고 생각을 되감았다. 키시스가 이쪽에 서면 많은 것이 바뀔거다. 그는 자신과 카일도 넘지 못했던 뛰어난 검사였고, 오염을 긴 시간동안 막아섰던 장본인이였으며, 오러를 쓸 줄 아는 강인한 자였다. 어쩌면, …… 카일을 함께,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희망이 희미하게 다시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좋습니다. 그럼, 사령관 님께 보고하고 함께 얘기해보겠습니다.⌟

⌜사령관이라면, 아까 만났던 그 남자?⌟

⌜예.⌟

좋은 우두머리를 두었네. 하는 그의 중얼거림에 어깨가 으쓱였다. 부하직원으로서도, 대부로서도, 가까운 이의 칭찬을 듣는 건 기쁜 일이지. 그가 얼마나 대견하고, 강한 아이인지 자랑을 마구 늘어두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곧장 예현에게 문자를 넣었다. 최대한 간단히 축약해서. 그가 이쪽에 서기로 결정했으며, 이에 대한 더 자세한 보고를 올리고 싶다고. 예현의 답장은 늦지 않게 도착했다. 내일 밤 10시까지 집으로 와 이야기 하자는 답이었다. 키시스도 함께 오길 바란다는 말에 알겠다고 답한 후에야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내일 밤에 이야기 해보기로 했습니다. 당신도 함께 뵙고 싶어해요.⌟

⌜좋아.⌟

이야길 마친 후에야 부엌에서 간단히 식사를 챙겼다. 조촐할텐데도 그는 굳이 불만을 표하거나 하진 않았다. 잘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침대에서 재우고 자신은 바닥에서 자겠다는 말을 단칼에 거절한 그는 푹신하긴 하지만 잠들기엔 좀 불편할 빈백을 고집했다. 아니! 편하게 주무시라니까요?! 난 여기가 편하다고 몇 번을 말해. 말이 됩니까? 안 될 건 뭔데. 그런 실랑이가 몇 번 더 오간 후에 결국 침대는 내 차지가 됐다.

10시까지 뭐하지.

잠에서 깨 그를 깨우고, 아침을 먹이고……. 간단한 일과가 끝난 뒤에 한 생각이었다. 지금 시간은 아침 8시. 약속시간까진 아직 14시간이 남았다.

⌜이곳에서 쓰는 다른 언어가 있지?⌟

⌜아!⌟

뭘 해야할지 고민하는 자신에게 키시스가 물었다. 그렇네. 키시스 역시 코어에 발을 들이고 살아가기로 한 동족이니, 이곳의 공용어를 알려줄 필요가 있겠다. 그렇게 결정한 자신은 2층으로 올라가 펜과 노트를 하나씩 쥐고 내려왔다.

⌜다음에 외출할 때, 책도 사오겠습니다.⌟

빈 페이지를 쭉 피고, 펜을 쥐었다.

…… 진짜 미쳤네.

입을 벌린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키시스의 머리는 정말로 비상했다. 14시간 동안 가르칠 수 있는 게 뭐 얼마나 되겠나 싶었지만, 그는 자신이 영어를 익혔을 때보다 더 미친 속도로 공용어를 익혀갔다.

"별로 어렵지도 않네."

저렇게 벌써 말까지 구사하고. 난 그래도 영어를 다 익힐 때까지 몇 주는 걸렸는데……. 불공평하다며 제국어로 투덜대는 자신을 보며 그가 픽, 웃었다. 어느새 제국어와 공용어로 가득 찬 노트 페이지를 덮으며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 10분 전이었다. 슬슬 가봐야할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도 몸을 피며 일어났다.

⌜그래도 통역은 네가 해. 공용어는 완전히 익힌 게 아니니까.⌟

⌜물론이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충 챙기고 집을 나서자 반대편의 집쪽으로 천천히 멈추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익숙한 차량. 예현과 윤이였다. 둘이 같이 퇴근했나. 아무튼 반가움을 띄며 키시스와 함께 차량 쪽으로 다가갔다. 예현과 윤 역시 자신을 발견하곤 시선을 돌렸다. 예현의 얼굴엔 사무적인 기색은 가시고 말랑하게 풀어진 미소가 떠올랐다.

"수고하셨습니다."

"아냐, 들어갈까?"

키시스에게도 한 번 시선을 준 예현이 몸을 돌렸다. 윤이 그 뒤를 따랐고, 키시스와 내가 윤의 뒤를 따랐다.

얘기는 꽤 길어졌다. 밤 10시에 시작했던 이야기는 새벽 5시까지 이어졌다. 그 긴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예현과 윤, 키시스는 조금도 졸린 기색 없이 진중하게 말을 주고 받았다. 자신 역시도 그들이 오가는 대화를 통역하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의견도 조심스레 얹었다. 긴 이야기의 끝에 이제 됐다는 듯 고개를 느리게 끄덕인 예현이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풀며 소파에 느른하게 등을 기댔다.

"좋아, 이정도면 충분한 것 같아."

그의 말에 키시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끝났다는 제스쳐를 잘 캐치한 그 역시 단정히 세우고 있던 몸을 조금 풀었다. 소파에서 일어나던 예현이 짧게 아, 소리를 내며 자신과 키시스를 번갈아보며 입을 떼었다.

"그의 전력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예현의 말을 전달하자 키시스는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이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시스의 반응을 살피던 예현은 여전히 사무적인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자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힐데, 괜찮다면 네가 그와 대련해보겠어?"

"제가 말입니까? …… 얼마 못가서 나가떨어질텐데."

"그래도, 지금까지 들은 게 정말이라면 그나마 네가 그의 전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뭐, 어려운 부탁도 아니였으므로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건은 완전히 끝난 듯, 사무적이던 표정이 말랑하게 풀려갔다. 스위치가 내려갔군. 다정한 웃음을 띄운 그가 윤과 함께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약속시간은 일주일 후로 잡았다. 그 이후가 되어서야 겨우 시간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여전히 고생하네. 걱정스러운 눈빛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동안은, 그에게 코어를 소개시켜줘도 될 것 같아."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쉬십쇼."

"응, 너도……."

흐느적대는 걸음으로 윤과 함께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키시스와 함께 집을 나섰다. 그에게도 일주일 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일주일동안 공부하거나, 이곳을 둘러보자는 제안을 했다. 그는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뚱한 얼굴로 의자에 거꾸로 앉아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는 제 친동생을 바라보던 윤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여기로 잘 찾아오지 않는데, 요 며칠 사이에 방문 횟수가 늘었다. 그리고 윤은 그 원인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윤이 느리게 입을 뗐다.

"또?"

"응……."

힘없는 목소리가 대답을 흘렸다.

"힐데가 또 바쁘뎅."

그랬다. 아미가 맥없이 늘어져 있는 이유. 최근 얼굴보고 놀자는 아미의 연락을 미안하다는 말로 거절하고 있는 힐데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포탈에서 튀어나왔던 자, 키시스랬나? 그 자에게 코어 곳곳을 소개시켜주는 중이랬다. 동행을 요청도 해봤지만…….

"그것도 거절당했고?"

"응, 그 사람이 힐데하고만 다니고 싶다고 했대."

어쩐지 뺏긴 기분이야……. 하고 시무룩하게 중얼대는 아미를 보며 윤이 눈을 가늘게 떠냈다. 두 사람은 그 날의 힐데를 기억했다. 포탈로 들어가기 전 우뚝 굳어버리던 몸과 이내 얼굴에 떠오르던 수만가지의 감정, 카운트가 제로를 가리키는 순간 앞뒤 가리지 않고 다급하게 내달리던 몸, 포탈 너머로 도달했을 때, 누군가에게 뛰어가던 뒷모습……. 그리고 처음보는 이의 품에서 더없이 처절한 울음을 쏟아내던 후임. 듣는 사람마저도 가슴이 죄여올 것 같은 울음이었다.

"힐데도 우리보다 그 사람이 더 좋은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불안하게 일렁이는 목소리에도 윤은 덤덤히 대답했다. 힐데베르트는 동족을 살리기 위해 무릎꿇은 이였다. 그가 자신들에게 많은 애정을 쏟는 건 알고 있다. 그 다정한 눈을 보면 모를 수가 없지. 하지만, 동족들 역시 그의 우선순위다. 알고 있는데……. 왜 짜증이 나지? 책상에 놓인 잔을 집어든 윤이 미간을 좁혔다. 아미의 말대로 꼭 제것을 뺏긴 기분이 들었다.

게으른 몸짓으로 의자에 앉은 리카르도가 아직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술로 문 채 까딱거렸다. 며칠 내내 임무를 쉬지도 않았음에도 이상하게 지루한 기분이 들었다. 정확히는, 힐데베르트가 자신의 일상에서 빠져나간 직후부터. 매번 임무를 뛰고 돌아오면 오늘 식사나 같이 어떻겠냐는 물음을 선선히 건네오던 후임. 그 후임이 최근 들어 자신에게 간단한 인사만 남기고 사라지는 일이 잦았다. …… 또 다른 동족이랬던가. 백색에 가까운 백금발을 지니고 있던 남자, 그를 붙든 채 하염없이 울음을 쏟아내던 힐데베르트. 자신의 앞에서 게임 시리즈를 플레이 했을 때도 그렇게까지 울음을 쏟아낸 적이 없었다. 힐데는, 스스로가 그렇게 모든 감정을 토해내는 것이 사치인 양 굴었으니까. 그가 하는 행동을 보면 꽤 친근했던 모양인데……. 그가 의지할만한 이가 생긴 건 다행인 일이다. 힐데가 그 남자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건, 조금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게 우리가 아니라는 건 좀 섭섭한데~…."

그의 어린 선임들이, 여전히 그에겐 그저 지켜야만 하는 존재인건지. 나즈막하게 한숨을 내쉰 리카르도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들었다. 칙, 담배 끝에 불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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