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힐데 / 크리그어 au] Christmas


* 청서님의 '클리셰 SF 세계관의 크리쳐는 그어그어 하고 울지 않는다 1~3' 의 시나리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 https://2dtrpgbackup.tistory.com/1 < 크그 로그. (pw. bbkrht00)

부옇게 번지는 입김을 토해낸 힐데베르트가 몸을 움츠렸다. 이놈의 추위는 익숙해질래야 익숙해질 수가 없네. 불만스레 중얼거리자 옆에서 익숙한 음성이 옅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힐끔 시선만 돌리니 검은 군복 사이, 눈에 띄는 붉은 머리카락이 작게 흔들렸다. 태양을 닮은 눈동자는 어느 새 힐데베르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희미한 미소, 눈동자의 색만큼이나 따스함을 담은 다정한 눈빛.

"그러니까 불침번은 나 혼자 서겠다고 했는데 말이지."

"어떻게 그러겠냐. 너, 아까도 크리처랑 싸우다가 다쳤잖아. 환자 혼자 불침번을 두게 놔둬?"

카이로스의 눈동자가 가볍게 굴렀다. 그렇게 크게 다치지도 않았는데, 자네는 걱정이 너무 많아. 힐데베르트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누가 할 소리를. 그 뒤로는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나보다는 자네가 다치는 일이 잦잖나. 아무리 죽어도 되살아나는 몸이라고 해도 사릴 필요가 있다, …… 정정하자. 실랑이 보다는 일방적인 잔소리에 가까웠다. 쏟아지는 잔소리를 견디지 못하겠던지 양쪽 귀를 손으로 틀어막은 힐데가 카이로스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알았어, 알았다고! …… 너 말이야, 꼬막꼬박 대장이라고 불러주면서, 이런 일엔 어떻게 한 마디도 안 져?"

"자네의 몸을 염려하고 충고하는 것도 부하로서 할 일이지."

정말 한 마디를 안 지네. 그런 생각을 흘리며 입술을 비죽이던 힐데베르트가 벌렸던 거리를 도로 꾸물꾸물 좁혔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람의 온기로부터 멀어지니 금세 냉기가 옷깃 사이를 스친 탓이다. 카이로스의 몸에 자연스레 기대고서는 곧 스며드는 온기를 느끼며 눈을 내리 감았다.

"아직도 많이 춥나?"

"조금……."

잠깐의 침묵. 이번엔 카이로스의 몸이 조금 꾸물꾸물 대는 것이 느껴졌다. 혹시 자신이 기대고 있는 것이 불편한건가, 싶어 힐데베르트가 고개를 들려던 찰나였다. 무언가 푹신하고 따듯한 것이 그의 목에 느슨하게 감겼다. 그의 머리카락을 닮은, 붉은색 목도리. 그것을 내내 품고 있었던 것일까? 목도리에는 따끈한 온기와 카이로스의 향이 희미하게 베어있었다. 두텁게 둘러진 목도리에 고개를 잠시 파묻고 있던 힐데베르트가, 고개를 휙 들었다. 다시금 카이로스의 온기 어린 시선을 마주한다.

"웬, 목도리야?"

"그냥, 기분내고 싶어서 말이지."

"기분?"

"몰랐나? 곧 크리스마스잖나."

크리스마스? 눈을 동그랗게 뜨던 힐데베르트가 날짜를 헤아리고는 이내 허, 숨을 토해냈다. 일주일도 안 남았다. 벌써 12월 달도 막바지인가? 물론, 카이로스와 힐데베르트에겐 크리스마스라는 달콤한 휴일이 주어지지 않을테니, 크리스마스의 연휴는 먼 나라 이야기긴 했다만은……. 잠깐.

"그럼, 그, 혹시 이거 목도리, 나 주려고 사온 거야?"

착각이면 부끄러울 것 같아 조금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러나 힐데베르트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카이로스에게서는 퍽 시원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지! 내가 자네 말고 그런 선물을 줄 사람이 누가 있겠나."

원래대로라면 크리스마스에 맞춰 전달해주고 싶었다는 말을 덧붙인 카이로스가 힐데베르트의 어깨에 팔을 두르듯 감싸며 목도리를 한 번 더 여며주었다. 한아름 느껴지는 카이로스의 체온에, 힐데베르트는 어쩐지 뒷목에서부터 뺨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저 몸에 베인듯한 배려인가 싶다가도, 저런 말을 들으면 꼭 특별해지는 것 같은 느낌을 감출 수도 없었다.

"넌 진짜……. 그래, 선물 고마워. 나도 너한테 뭘 줄지 고민해봐야겠다."

"고민할 것도 없지 않나? 난 자네가 몸 잘 챙기고 건강하기만 한다면, 그것만큼 완벽한 선물은 없을텐데."

"…… 아까 잔소리 끝난 거 아니였어?"

질린 듯한 힐데베르트의 목소리에 카이로스가 시원스레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어깨에 두르고 있던 팔이 힐데베르트의 몸을 더욱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러면 더 따듯할 거야. 카이로스가 속삭이듯 목소리를 흘리자, 뜻 모를 한숨을 토해낸 그가 얌전히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젠 너무 열이 올라 더울 지경이었다. 카이로스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채, 힐데베르트가 눌린 목소리를 냈다.

"그런 거 말고, 물질적으로 생각해봐. 목도리처럼, 내가 너한테 사줄 수 있는 거 말이야……."

"음, 좋아. 생각해보지."

카이로스의 대답에 힐데베르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 그런 때가 있었던가. 아득히 먼 과거를 더듬는 태양빛 외눈은, 이제 빛을 잃은 채 잿더미만 남은 것처럼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커다란 유리창, 그 너머의 화려한 야경.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얀색 눈보라. 카이로스는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겨울을 홀로 맞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몇 번째일지 모르는 크리스마스 역시. 올해의 크리스마스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하얀 손이 유리창 위로 얹어졌다. 두꺼운 유리창임에도 손바닥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자비없이 파고들었다. 그때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작게 파티를 하자느니 이야기를 나눴건만, 정작 크리스마스 당일은 눈코 뜰새없이 고생했던 기억이 남아있었다. 결국 그때의 크리스마스는 둘 다 녹초가 되어 늘어지게 잠드는 바람에 함께 보냈다고 하기에도 민망한 날이 되고 말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하던가. 힐데베르트는 전투 중에 카이로스가 선물했던 목도리를 그만 망가뜨리고 말았다. 금방이라도 미안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내 불찰이야. 정말 미안해, 카이…….' 하고 사과를 건네왔다. 그의 사과는 카이로스가 정말 괜찮다는 말을 열 번 넘게 하고 나서야 겨우 멈췄다. 딱히 서운해하지도 않았다. 다음엔 더 좋은 걸 사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고, 둘 다 지칠만큼의 전투를 치루었으나, 힐데베르트와 카이로스는 조금도 다치지 않은 채 무사히 복귀하기까지 했다. 그정도면, 목도리와 맞바꾼 아주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납득하지 못했지만. 게다가, 그와 나는 내내 함께할테니, 크리스마스 정도야 언제든지 함께할 기회가 있지 않겠나.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착각이었지."

듣는 이 없는 혼잣말을 흘렸다. 그래, 크나큰 착각이었다. 언제까지고 그의 곁을 지키리라고, 그리고 그 역시 언제까지나 제 옆에 있을 거라는, 그런 착각을 했었다. 그런 믿음을 비웃듯이 힐데베르트는, …… 제 대장은, 이 세상을 자신에게 선물처럼 남긴 채 떠나버렸다. 이런 선물은 결코 원하지 않았음에도. 처음엔 지독한 슬픔에 잠겼다. 그것이 최선이였음을 머리로는 이해했으나, 그의 빈자리 위로 감도는 공허를 더듬을 때마다 그를 원망했다. 누가 이런 선물을 받고 싶다고 했나? 나는 자네만 필요했어. 그 외엔 아무것도 필요가 없었다고. 그 원망이 극에 달할 땐 닿을 리 없는 말들을 토해냈다. 그렇게 고통 속에 몸부림 치면서도, 카이로스는 그가 남긴 세상을 차마 저버릴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이 존재하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힐데베르트의 남은 흔적과도 같았다. 카이로스는 그것에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힐데베르트가 남긴 그의 흔적에, 처절히 매달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곳마저도, 그 누구도 아닌, 힐데베르트가 구해냈던 사람들의 악의로 인해 불타버렸을 때, 간신히 붙들고 있던 무언가가 끊겨나가는 것 같았다.

봐, 힐데. …… 정말로, 이런 이들을 위해 자네가, 자네의 몸을 던졌어야 했나?

웃음이 새었다. 아니, 어쩌면 울음이 터졌을 수도 있었다. 그 끔찍한 악의가 그를 향한 원망에 불을 지폈다. 그럼에도, 여전히, 카이로스는 힐데베르트의 흔적을 놓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이런 세상을 선물하고는 멋대로 떠나버린 그가 밉다. 그러나 딱 그만큼, 그를 향한 그리움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힐데베르트가 남은 흔적만큼은 그 누구도 아닌 내가, …… 지켜야 하지 않겠나. 그런 결론에 다다르자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내내 막혀있던 숨통이 그제서야 트였다. 이렇게나 쉬운 답이 멀리 있지 않았는데, 나는 어째서 그 긴 시간을 방황했던가. 그제서야 웃음이 새었다, 예전처럼.

힐데, 나의 대장, 걱정하지마. 자네가 남긴 이 세계는 내가 지킬거야. 어떻게든.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제 앞길을 막지 못하게 하리라.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문이 열리고, 사무적인 표정을 지은 이가 입을 열었다.

"카이로스 님, 손님이 찾아왔다 연락이 왔습니다."

단정한 목소리가 익숙한 이름을 흘리자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올려보내주게."

설령, 그게 자네라고 해도 말이야.

그때처럼 크리스마스를 딱, 일주일 앞둔, 100년만에 함께 맞이하는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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