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힐데] 무제.
녹안의 시선이 화면 속의 무채색을 더듬어 내린다. 신식 티비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오래된 흑백의 영화. 최고의 음질을 자랑할터인 티비에서는 잡음이 뒤섞여 정돈되지 않은 음성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귀를 간질이는 소리들이 예민한 이에겐 퍽 거슬릴 법도 하였건만, 푹신한 소파에 몸을 한껏 파묻은 채 턱을 괴고 있는 리카르도는 개의치 않은 듯 했다. 그렇다고 그 영화의 내용을 인상깊게 곱씹고 있냐고 묻는다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화면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눈동자는 영화가 아닌 어딘가의 다른 곳을 부유했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침잠하듯 하다 영화가 THE END 라는 투박한 문구로 끝을 맺고 나서야 깜빡, 하며 정신을 도로 끌어당기고는 하였다. 꾹, 리모컨 버튼이 눌리자 흑백의 세상이 지워지고 이제 완전히 새카매진 티비 화면은 흐릿하게 리카르도의 상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비춰진 상은 꼭 리카르도 마저 흑백의 세상에 가둬둔 것처럼 보였다.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색을 담고 있지 않은 모습. 색채를 모조리 빼앗긴 것처럼. 퍽 어울리는 상이 아닌가? 리카르도는 한참이나 그 새카만 화면에 맺힌 제 모습을 바라보다 느리게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겉옷을 느리게 벗으며 리카르도가 느긋한 목소리를 흘렸다. 실례합니다. 예의바른 말투와 함께 리카르도의 뒤를 따라들어온 힐데베르트 역시 걸쳐진 겉옷을 벗으며 옅게 웃었다.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요."
어쩐지 들뜬 모습. 그런 그를 가느다란 눈으로 돌아본 리카르도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그렇네~. 별로 볼 것도 없는 집인데 말이지~."
"볼것도 없다뇨. 제 오두막보다 훨씬 좋잖습니까. 게다가, 매번 고생시켜 드리는 것도 죄송하고요."
두 사람이 그런 사이가 되고 난 이후의 이야기였다. 태양을 꼭 닮은 금안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줄줄이 뱉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대뜸 인적이 드문 복도에서 제 걸음을 막아서더니, 릭,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냥 잊어주셔도 돼요. 제 마음을 강요한다던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예. 더는 숨기기 힘들어져서요. 같은 멋이라곤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투박한 고백을 해왔던가. 그런 고백에 조금 놀라기야 했으나 거부감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썩 괜찮은 기분이 들었더랬다. 자신이 그 고백을 기꺼워하고 있음을 깨닫고 나니, 그의 눈빛과 표정이 거슬렸다. 마치 이런 고백따위 받아주지 않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 그래서 저질렀다. 그의 옷깃을 거세게 쥐어 당기고 냅다 입술부터 부딪히니, 그 짜증나는 확신이 와르르 무너지며 순식간에 시뻘겋게 달아오르던 얼굴은 평생 자신만 알고 있겠지. 멍청하게 붕어마냥 입을 뻐끔뻐끔 대다가 자신의 입을 뒤늦게 덥석 가리던 모습도. 조금 유치하게 표현하자면, 자신과 힐데베르트가 1일을 시작했던 날. 그 후 리카르도는 자신의 집 대신 연인의 오두막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처음엔 힐데도 그것을 좋아하는 듯 보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함을 깨닫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평소처럼 오두막을 방문했던 어느 날 대뜸 '아니, 그런데 후배인 제가 선배님의 댁에 찾아가야 맞는 거 아닙니까?' 하고 묻던 게 얼마나 웃겼던지. 연인 사이에 그런 걸 따질 거냐는 말에 금세 입을 다물었으나 내내 마음에 걸리긴 했던 모양이다. 함께 잠자리에 누웠던 날, 힐데베르트는 꾸벅꾸벅 졸면서도 간만에 우리 집을 오고싶다 주장해왔다. 아직 식지 않은 열기가 머무른 그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내며 그러라고 대답을 건넸었다. 곧장 잠에 빠져든 듯 했는데, 용케도 그 대답은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 상황까지 도달했다.
"편하게 앉아~."
"옙."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둔 힐데베르트가 소파에 몸을 조심스레 앉혔다. 그러다 문득, 금빛의 시선이 어딘가에 멈춰선다. 리카르도 역시 그 시선을 죽 따라가다 짧게 아, 하는 소리를 흘렸다. 흑백영화의 DVD 케이스였다, 정리되지 않은. 힐데베르트가 어느 새 케이스를 조심히 집어들고 있었다. 이리저리 흝어보는 것이 오래된 물건을 보고 있자니 퍽 신기한 모양이었다.
"이런 건 옛날에도 구하기 힘든 물건이였을텐데. 흑백 영화 즐겨보십니까?"
"뭐, 그럭저럭?"
그걸 즐긴다고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저 무의미하게 시간을 죽일 때나 틀어두는 것이였으니. 그렇다고 사실대로 털어두기에도 퍽 우스워서, 애매한 대답을 흘렸다. 다행히 그것에 정신이 팔린 건지 힐데베르트는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거 재밌습니까?"
"볼래~?"
리카르도의 물음에 그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옅게 웃음을 터트린 리카르도가 힐데베르트의 손에서 DVD 케이스를 받아들었다.
잡음이 뒤섞인 소리들에도 리카르도에게 바짝 기댄 힐데베르트는 영화에 꽤나 집중한 것처럼 보였다. 모노톤의 영화가 썩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몇 편 더 보여줄까? 그런 고민을 하며 제게 기댄 몸을 한 팔로 느리게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카락이 드러난 목덜미를 간질인다. 텅 빈 채로 보내던 시간이, 꽉 들어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을 먹고, 그 이후로도 영화를 몇 편 더 봤다. 3번째 영화가 거의 끝나갈 즈음, 힐데베르트의 숨소리가 달라진 것을 깨달은 리카르도가 힐끔 시선을 내렸다. 리카르도의 품에 거의 고개를 박은 그가 어느 새 잠들어 있었다. 아까 저녁 먹고 꾸벅꾸벅 졸더니, 결국 잠에 든 모양이었다. 졸리면 그냥 들어가서 자라고 했더니, 눈을 비벼가며 조금만 더요, 하고 고집을 부렸더랬다. 조심히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끈다. 검은색 화면에 비춰지는 건 저 혼자가 아니였다. 늘 속이 꽉 막힌 듯 갑갑한 기분이였는데……. 힐데베르트가 작게 뒤척이는 소리를 냈다. 화면에서 시선을 돌린 리카르도가 그의 몸을 가볍게 안아들었다. 달칵, 방문이 닫히는 소리 다음으론 정적만이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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