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힐데] 취중고백


* 합니다. 망상날조.

* 없습니다. 개연성.

* 캐붕 있을 유. 가벼운 마음으로 봐주세요.

* 스포일러 포함.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해가 져버린지도 몇 시간이라, 옥상의 시커먼 하늘을 풍경 삼아 스카와 함께 담배나 태우고 있던 그런 하루. 그런 하루 사이로 불쑥 끼어든 건 한 통의 전화였다.

'힐데베르트 탈레브.'

화면에 쓰여진 이름을 훑어내린 리카르도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요 며칠 제 속에 걸려들던 후임의 이름이었다. 그 녀석은 자신이 눈치채길 바라지 않았을지도 몰랐겠으나, 리카르도는 길다면 긴 생을 사는 인간 중 하나였다. 눈치 하나는 꽤 발달해있다는 소리였다. 그런 리카르도에게 최근 후임의 행동거지가 살살 거슬리기 시작했다. 남들이 보면 고개를 기울일지도 모르는 아주 작은 차이. 늘 단정히 맞춰오던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미묘하게 빗겨나간다던가, 자연스레 자신과 단 둘이 있을 상황을 피해버린다던가 하는 그런 작은 변화. 리카르도는 그런 작은 변화가 어쩐지 무척이나 거슬렸다. 왜일까. 문득 그가 당돌하게 뱉던 말이 떠올랐다. 자신이 두 번째로 정을 붙인 인간이라 했던가.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후, 불어낸 이가 계속 울리던 전화를 받았다.

"계속 피해다니는 것 같더니, 어쩐 일이래~?"

그래서였을거다. 받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뚱한 목소리를 흘리고 만 건.

[릭…….]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고장난 카세트 테이프처럼 늘어졌다. 뭐지, 이런 목소리 전에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매실주를 한 병 쳐먹고 제 뇨끼가 맛있었다는 둥 주절대던, 그때와…….

[좋아합니다.]

하지만 리카르도의 생각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담배를 도로 물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채 멈춰서있었다. 생각도, 행동도, 전부. 힐데가 다시 말을 느릿하게 이을 때까지.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요……. 거절당할 것, 같아서, 피해다녔습니다……. 죄송함다…….]

죄송하다며 바닥에 고개라도 쳐박은 건지 작게 쿵, 소리가 났다.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담배를 비벼 끈 리카르도가 고저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옆에서 스카가 의아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그걸 신경쓸 틈이 없었다.

"…… 너 어디야? 오두막?"

[네에…….]

"혼자?"

[네…….]

이후 '릭한테 전화하려고 부하들을 다 내쫓았다. 고백했다가 차이면 너무 부끄러우니까. 안 가려고 어찌나 버티던지. 이 좁아터진 오두막에 왜 굳이 발을 들이려고 애쓰는지 모르겠다. 내가 차이는 거 구경하고 싶었나? 못된 녀석들이다.' 같은 맥락없는 한탄이 이어졌다. 리카르도는 그제서야 웃음을 흘렸다.

"알았으니까 얌전히 기다려~."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뚝 끊었다. 스카의 시선이 여전히 와닿아 있었으나, 리카르도는 잠깐 그 자리에 멈춰선 채 까맣기만 한 하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나 간다."

"그래."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이였지만 굳이 간다는 이를 붙잡고 캐물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성큼성큼 옥상을 벗어나 주차장으로 향했다.

솔직히, 무슨 정신으로 차를 몰아왔는지 기억이 안 났다. 스스로가 꽤 침착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였나보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임에도 오두막엔 불이 켜져 있었다. 찬 공기를 한껏 들이킨 리카르도가 조금 달아올라 있던 속의 열기를 식힌 후에야 초인종을 눌렀다. 곧 질질 끄는듯한 비척거리는 걸음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누구세, 어……."

전화 너머로 들었던 목소리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늘어지는 듯한 목소리였다. 풀려있긴 했으나, 저 금색 눈동자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본 게 얼마만이더라. 그런 생각을 곱씹은 리카르도의 입가에 느슨한 웃음이 걸렸다.

"들어가도 되지?"

그의 물음에 힐데는 순순히 몸을 옆으로 비켜섰다. 뒤에서 왜 오셨지……. 작게 중얼거리는 힐데의 목소리를 무시한 리카르도가 몇 번 와봤던 집안으로 발을 들였다.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거실 쪽으로 느리게 걸어오는 힐데를 마주했다. 리카르도가 입을 달싹였다.

"그래서 피해다녔어~?"

"예?"

"네가 전화로 그랬잖아."

전화……. 작게 중얼거리던 힐데가 핸드폰을 붙잡은 채 통화목록을 훑었다. 곧 짧게 아,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안 그래도 묵직해보이는 고개가 느리게 끄덕여졌다. 얌전히 서있는데도 몸이 휘청휘청 하는 것이, 곧이라도 바닥에 쳐박힐 것 같아 리카르도는 그의 팔을 붙잡아 바닥에 앉혔다. 힐데는 그 손길에 순순히 이끌렸다. 힐데의 팔을 놓지 않은 채로 리카르도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내가 왜 좋아?"

"…… 그거 이유가 필, 요한 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힐데가 잡히지 않은 손을 들고 손바닥을 쭉 폈다. 저건 또 뭐하는 건가 싶어 보고 있자니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가며 이유를 늘어두기 시작했다. 안 그래보여도 사실은 상냥해서 좋음. 절 받아줘서 좋고, 잘생겨서 좋고, ……. 그 뒤로도 몇 가지 이유들이 죽 나열되었다. 얌전히 듣고 있자니 어쩐지 견딜 수 없이 간질거리는 기분이라 리카르도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아, 뇨끼도 진짜 맛있음……."

마치 중요한 이유를 빼먹을 뻔했다는 듯 진지하게 말을 잇는 목소리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본 목적인 거 아냐? 짓궂은 질문에 그가 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격한 움직임에 고개가 휘청거렸다. 힐데가 넘어질까 다급히 손을 뻗은 리카르도가 그의 고개를 지탱했다. 자연스레 가까워진 거리감. 짙은 피부 위로 올라온 열기가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다. 위태롭던 고개가 중심을 잡자 그의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을 옮긴 리카르도가 따끈한 힐데의 뺨을 쓸어내며 또박또박 물음을 뱉었다.

"만약 내가 안 받아주면, 그 이후엔 어떡하려고 했어?"

"정리해야죠……. 애초에 그럴 각오로, 한 거고."

"정리 될 때까지 또 피해다닐 생각이었어?"

그 물음에 어물쩍대던 힐데가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을 뱉었다.

"예……."

근데 저 그런 거 잘함. 그러니까 오래 안 걸릴 거예요. 힐데가 웅얼웅얼 말을 이었다.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힐데는 또 다시 리카르도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없이 취한 와중에도 그의 반응이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취기로 달아오른 발간 뺨에서 아직 손을 떼지 못하고 있던 리카르도가 다시금 입을 떼었다.

"만약 내가 받아주면?"

"……."

힐데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먼저 고백한 주제에, 상대방이 받아줄 거라는 가정조차 하지 않았던 건가. 이녀석 답다고 해야하나. 참 한결같은 녀석. 뺨에서 손을 뗀 리카르도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생각해봐."

"예? 뭘요……?"

"내가 받아주면 어떡할지."

"예, 에?"

아무래도 취기에 머리가 안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이런 녀석을 붙들고 대화해봐야 소용없겠네. 눈썹을 치켜올리던 리카르도가 그대로 얼타고 있는 힐데의 몸을 휙 안아들었다. 억, 하고 괴상한 소리가 터져나왔으나 힐데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대로 계단을 성큼성큼 오른 리카르도가 푹신한 침대 위로 그의 몸을 눕혔다. 첫 만남보다 훨씬 길어진 머리카락이 시트 위로 부드럽게 흐드러렸다. 그것을 바라보다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금색 눈동자를 손으로 덮어 가리며 작게 목소리를 흘렸다.

"일단 자기나 해. 대화할 정신은 아닌 것 같으니까~."

"옙……."

다행히 나 멀쩡하다느니 땡깡을 부리는 타입은 아니였던지라, 힐데는 제 눈을 덮은 따듯한 온기를 느끼며 얌전히 잠에 빠져들었다.

아직도 띵한 머리를 붙잡으며 느리게 눈을 떠냈다. 정신이 멍한 와중에도 1층에서부터 올라오는 맛있는 냄새가 퍽 강렬했다. 누가 왔나? 끙끙, 앓는 소리를 흘리며 계단 난간을 붙잡은 채 1층으로 내려섰다. 부엌에 누군가 서있었다. 퍽 익숙한 뒷모습이다.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입을 달싹였다.

"릭, 여긴……."

어떻게, 하고 물으려던 순간, 끊겼던 기억이 파편 조각처럼 뇌를 쿡 찔러왔다.

좋아합니다.

…… 이런 미친.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아찔함에 그대로 굳어 서있자니 인덕션의 불을 끈 리카르도가 몸을 돌렸다. 그의 녹안이 부드럽게 휘며 고개를 까딱였다.

"일어났어~? 앉아."

"……."

엄청난 위기감이 눈앞에 닥치니 배고픔이고 뭐고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 여기서 탈출하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이 느껴졌다. 주춤, 제 걸음이 부엌이 아닌 현관 쪽으로 물러나자 그것을 기민하게 알아챈 리카르도가 픽, 웃음을 흘렸다. 어딘가 사람 오싹하게 만드는 그런 웃음.

"도망치게~?"

힐데가 대답하지 않자 리카르도가 선선한 목소리를 흘렸다.

"해봐. 어떻게 되나 보자."

"그럴리가요. 제가 어떻게 하늘같은 선배님의 말씀을 어기겠습니까."

단념했다. 말끝을 늘어트리지 않고 조곤조곤 내뱉는 말이 너무 무서웠다. 당장 그를 피하고 싶다는 충동보다 생존 본능이 앞섰다. 여기서 도망치면 붙잡히는대로 죽을지도 몰랐다. 진짜로. 결국 현관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부엌으로 돌린 힐데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느린 움직임으로 식탁 앞 의자에 앉자 접시가 앞으로 놓였다. 매콤한 향이 올라오는 미드나잇 스파이시 파스타. 잘 먹겠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며 포크를 들었다. 그가 제 앞에 앉는 것이 느껴져 거의 접시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분명 그의 요리이니 맛있을 것이 분병함에도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제 신경이 온통 그에게 쏠려있다는 것을 자각하면서도 포크를 끊임없이 놀렸다. 빨리 먹고 약속이 있는 척 나가면…….

"그러다 체한다."

"콜록!"

그가 갑자기 말을 걸자 놀라 파드득 몸을 튕겼다. 그 여파로 사레가 들려 절로 기침이 터져나왔다. 매운 걸 먹고 있어서 고통이 더욱 극심했다. 와중에도 입은 제대로 가린 참이었다. 그의 녹안이 빙그르르 굴렀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참 가지가지한다, 라는 의미가 명백했다. 그가 가져온 물 한 컵을 모조리 들이킨 후에야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죄송, 콜록!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휴지로 입가를 한 번 닦아내며 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앞에 앉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더는 파스타가 들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맛있을텐데. 포크를 내려두고 손을 모아 무릎에 얹어둔 채 어물쩍대다 겨우 입을 열었다.

"그, 어젠, 죄송했습니다. 제가, 제정신이 아니였나봐요."

리카르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뭐지? 이게 아닌가? 시선을 데록데록 굴리며 감을 잡지 못하고 있자니 그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아니였나보다. 곧 입을 열 기세라 입술을 모은 채 얌전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너, 어디까지 기억해?"

"아, 그, 릭한테 전화하고, 그리고……."

그리고? 제 취중 고백을 들은 그가 집에 왔었다. 그 이후에 대화를 나눴던 것 같은데. 무슨 대화를 나눴지? 더듬더듬 떠올리니 기억이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왜 좋냐는 물음에 손가락까지 꼽아가며 열심히 대답했던 기억. 뺨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었다.

"제가, 이유, 말, 하던, 것까지요."

 아. 내 대답은 싹 잊었나보네~."

대답? 그가 대답을 했던가? 다시 기억을 더듬고 있자면, 그의 목소리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이제부터 생각해보라는 말. 자신이 받아준다면, 어떻게 할지. 짧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이 기억해낸 걸 알아챈 건지 리카르도가 길게 웃었다.

"생각해봤어?"

"……."

"어떻게 할지."

분명 취기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음에도, 그의 대답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리카르도는 자신을 독촉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곱씹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는 했다. 그걸 믿을 수 없을 뿐이었다. 손을 들어 제 입가를 가렸다.

"…… 그러니까, 지금, 받, 아주시겠다는, 말씀이신 겁니까?"

"응."

진짜? 진짜로? …… 왜? 그 의문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난 모양이었다.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리카르도가 한숨을 쉬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가늠하는 눈이였다. 미간을 문지르던 리카르도가 힘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안 믿기면, 뭐, 나도 네가 좋은 이유라도 읊어줄까~?"

"으악! 아뇨!"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그런 반응이야?"

아, 너무 격하게 부정했나. 그치만, 그치만 들으면 너무 낯간지러울 것 같았다. 어떻게 주의를 돌리지? 재빠르게 사고 회로를 돌리다 냅다 외쳤다.

"손!"

"뭐?"

그 냅다 뱉은 말이 다분히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자각하곤 급히 덧붙였다.

"어떡하고 싶냐고 물으셨잖습니까. 그, …… 일단, 손, 잡, 잡고 싶은데, 요……."

진짜 아무리 생각해도 개아무말이였다. 무슨 꼬꼬마 유치원생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손을 잡고 싶다는 타령을 한다는 말인가. 리카르도의 감상 역시 다르지 않았는지 허, 하고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식탁 너머의 자신에게로 그의 손이 뻗어왔다. 그것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얌전히 손을 올려 그 손을 맞잡았다. 제 손만큼이나 거칠거리는 손, 하지만 확연하게 품고 있는 따듯한 온기. 희미하게 웃음이 번졌다.

"좋아?"

"예. 좋습니다."

순순히 대답하자 다시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여전히 어이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였지만. 어떡해, 좋은 걸. 그의 손을 매만지다 그에게 간신히 들릴 목소리를 흘렸다.

"좋아합니다, 릭."

그의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것에 웃으려던 찰나 손이 휙 당겨졌다. 제 손 위에 그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익숙할 손등 키스였음에도 열이 쏠렸다. 녹안이 부드럽게 휘었다.

"나도."

부드러운 대답. 쿵쿵대는 심장이 귓가를 요란하게 울렸다.

햇빛이 오두막 안으로 비춰드는, 어느 날의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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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길어질 게 아니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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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집하는 병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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