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소문 - Epilogue
- 윤힐데 소문(링크 참조)의 에필로그(단편)입니다. 본편 이후, 연애 중인 어느 날의 이야기.
- 공식 사건 및 설정에 크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적폐날조주의)
최윤과 연애를 한 타이틀에 묶으면 어떻게 될까.
과거 힐데베르트는 당당히 그 질문에 반문했을 것이다. 혹시 그 ‘연애’라는 항목의 분류가 실험에 포함되는 거냐고. 제 부사수 살점도 기쁘게 받아 가는 사수가 이제 인체 실험은 접고 인간 심리학 연구로 돌아서는 건가. 힐데는 두 키워드의 상관관계 추측에 관해 의심 한 톨 없이 그리 생각했으리라.
하지만 인생사는 모른다고, 그렇게 단언했던 힐데가 기어코 우여곡절 끝에 그의 사수와 연애를 시작했다. 과거 힐데가 알게 된다면 그대로 기절하지 않을까 싶은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망하지 않았고, 힐데는 그와의 관계를 인정하고서도 잘 살아갈 수 있었다.
사실 힐데는 처음 그와의 관계의 첫 시작점에 섰을 때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그에게 감히 ‘연애’라는 수식어가 붙는 게 맞는 걸까? 내심 이런 고민을 곱씹는 자신이 제일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와 연애하는 당사자가 되어보니 자연스레 드는 감상인 것을 부정할 순 없었다.
보통의 연애. 그런 기준을 감히 그에게 맞출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가 흔한 연인들처럼 상대를 향한 애틋한 시선을 담아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는 연애를 한다고 누가 생각할 수 있으랴. 그런 상상을 하는 것조차 어딘가 하늘에서 천벌을 받을 것 같았다. 더욱이 힐데라고 타인과 내밀한 감정을 나누는 것에 있어서 익숙하겠는가. 두말하면 입이 아팠다.
그가 힐데의 마음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도 같은 이름의 감정이 되었더라도 이 ‘관계’에 큰 변화가 올 일은 없을 거라고… 힐데는 은연중에 확신을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관계의 변이점을 찍고 난 뒤의 우리는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양상으로 점차 이상해져 가고 있었다.
*
- 오늘도 야근이십니까?
사람의 마음이 이리 뛰든 저리 뛰든 세상은 흘러갔다. 여전히 직장에 다니는 입장으로써 개인사보단 일에 얽매여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는 소리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제 사수도 바쁘긴 마찬가지였고, 유독 근래 집에도 못 들릴 정도로 바쁘다고 들었다. 평소 같았다면 얼굴 한 번은 봤었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힐데는 귀신같이 울리는 폰 진동에 저도 모르게 웃음 짓고 말았다.
[어. 오늘은 못 들어가.]
평소같이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오늘로 간단히 끝날 일은 아닌 듯했다.
“고생 많으십니다. 다른 분들도 같이 야근하고 계십니까?”
[왜. 몇 일간 집에 못 들어갔는지도 알려줘?]
그런 잔혹한 고통의 역사를 물은 건 아니었는데. 힐데는 잔에 물을 따르며 고개를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19시 30분.
“…아뇨. 괜찮습니다. 다만 그분들이 항상 건강하고 무탈하시길 바랄 뿐이죠.”
[그런 건 신경쓸 필요 없고, 너… 지금 옷도 안 갈아입고 물도 안 마시고 전화만 붙들고 있냐?]
“윤. 이거 하나는 확실히 하죠. 정말 오두막에 CCTV 안 달았습니까?”
탁. 힐데는 머그컵을 들고 있다가 깜짝 놀라 테이블에 내려 놓았다. 가끔 아니 꽤 자주, 사수는 분명 곁에 없는데도 자신을 바로 지켜보고 있는 듯이 얘기하곤 했다. 우연으로 치부하기엔 한두 번이 아닌 여러 번의 반복에 힐데는 재빠르게 오두막 안을 둘러보며 미심쩍은 목소리로 윤을 추궁했다.
하지만 이런 합리적인 의심에 돌아온 것은 명백한 윤의 비웃음 소리였다.
[내가? CCTV로 널 감시할 시간이 있으면, 직접 네 얼굴을 보겠지.]
“……”
[너한테 집중하면 이런 별 것 아닌 것들도 다 들리고 보이는데.]
모르는 게 더 어렵다. 마지막 말은 혼잣말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그건 분명 자신의 의심을 비웃는, 평소 같은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말들은 왜 그 모양인 건지. 힐데는 윤이 무심코 제게 보여주는 것들이 가끔 너무 무거워서 어찌할 줄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윤은 더 크게 부풀리지도 않고, 일부러 가려가며 숨기지도 않았다. 그저 최윤이라는 사람에게 있는 것을 그대로 제게 드러냈다. 본인은 자각하고 있을까? 이렇게 감당이 안 될 것들을 예고도, 경고도 없이 제게 안겨주고 있다는 것을.
“…차라리 이쪽에서 달고 싶네요.”
[뭐?]
“아닙니다. 바쁘신데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괜찮으십니까?”
[이제와서?]
“그건, 또 그렇네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너.]
그럼 끊겠습니다. 윤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자신을 불렀지만,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힐데는 여전히 열기가 있는 낯을 문지르며 화면이 꺼진 폰을 미묘하게 찡그린 채로 응시했다.
이내 근처에 벗어둔 외투를 도로 입으며 힐데는 세차게 비가 내리는 밖으로 걸음을 옮기며 다시 집을 나섰다.
*
“오셨습니까?”
“너.”
따뜻한 집을 벗어난 힐데의 목적지는 바로 배저 본부의 과학동, 최 윤의 자리였다.
저녁 시간을 넘어 늦은 야간 시간대에 접어든 본부는 매우 한산했다. 긴급 상황이 된다면 모를까 지금 당장은 큰일이 없으니 낮보다는 배치된 인력이 적은 편이었다. 힐데는 누구 마주칠 일 없이 과학동으로 입성해, 마주한 초췌한 얼굴의 과학자들에게 먼저 두 손 가득 준비해 온 따끈따끈한 피자 박스들을 선물했다.
생각도 못 한 힐데의 방문과 맛있는 야식의 등장에 뜨겁게 환호한 과학자들은 힐데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피자에 전념하는 모습에 잠시 본부가 끼니도 안 챙겨주던가 고민이 들 정도였지만, 힐데는 볼 일이 따로 있어 굳이 되묻진 않았다. 짧게 마틴과도 인사를 나눈 힐데는 아래층에서 먹고 오겠다며 떠나는 사람들에게 잘 먹으라며 인사를 건넸다.
그 ‘볼 일’의 주인께서 잠깐 자리를 비운듯해 힐데는 당당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마틴이 말하기를 뭐 사러 갈 게 있다며 나갔다는데,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금 시간을 확인할 때 저 멀리서 손에 하얀 담뱃갑 같은 걸 들고 들어오는 사람을 보며 힐데는 반갑게 웃었다.
“저 놈들 먹을 시간이 아닌데 웬 피자를 먹고 있나 했네. 그래서, 여긴 왜 왔는데.”
“볼 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런데 존은 어디 가셨습니까?”
“아, 거긴 오늘 쓰러져서 병동에 끌려갔지. 그래서. 네가 지금 이 시간에 여기서 볼 일이 있다고?”
퇴근이라는 단어가 뇌에 절대 존재하지 않는 이가 옆자리에 없어 어리둥절했던 힐데가 물어보자 윤은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대답해주었다. 그리고선 쓸데없는 말로 말 돌리지 말라는 듯 힐데를 눈빛으로 힐난하며 재차 질문했다.
윤은 처음 자신을 볼 땐 기묘한 것을 본 표정이었는데, 이제는 무표정한 얼굴에 미묘한 짜증이 서려 있어 매우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심지어 그 눈초리는 마치 밤늦게 말도 듣지 않고 친구들과 놀겠다며 뛰쳐나온 어린 아이를 보는 눈빛이라 힐데는 아주 살짝 억울함을 느꼈다. 내 나이를 모를 일이 없는 사수는 뭐가 그리 불만족이신지.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 제가 볼 일이 뭐가 따로 있겠는가. 힐데는 일부러 대답도 않고 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윤도 같이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입만 다물었을 뿐이지 표정은 여전히 어딘가 불퉁했으며, 제가 앉아 있는 윤의 의자를 다리로 쭉 밀더니 구석진 코너로 밀어버려 자신을 가둬버렸다. 그리고선 그 앞에 삐딱하게 서는 모습이, 넌 도망칠 구석도 없으니 느긋하게 네가 하는 말을 기다려주겠다고 말하는 듯 아주 뻔뻔했다.
힐데는 이게 무슨 짓이냐는 얼굴로 윤에게 반문했다.
“제가 뭘 했다고 이러십니까.”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모르니까 친절한 부사수께서 나한테 알려주면 되겠네.”
그 말을 끝내고 나서야 윤의 기색이 조금 풀어지는 듯 보여 힐데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목적이 뭔지도 모르면서 지금 자신이 본인 통제 하에 놓이니까 만족하는 거야?
“윤은 이제부터 이런 강압적 태도를 재고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한 번 계속 있어 보죠. 전 괜찮습니다.”
“그러던가.”
이 사람이?
힐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힐데의 ‘볼 일’은 바로 제 눈 앞에서 말도 안 되는 겁박을 하고 계시는 사람의 얼굴을 보는 거였으니까. 일에 방해될 생각은 없어 잠깐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는데, 앞의 헛다리 사수께선 어디에서 뭘 생각하신 건지 저를 추궁하고 있지 않는가. 제가 무슨 윤을 두고서 결백하지 못 한 사람처럼 대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윤은 처음부터 자신의 착각을 스스로 깨달을 의지가 없어 보였고, 힐데는 그것을 정정해줄 의지를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말도 없이 이 넓은 3층 연구실 한 구석에 건장한 남성 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응시하는 -양 쪽 다 눈초리가 곱진 않았다-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런데 둘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을 공간에서 갑자기 다른 소음이 끼어들어 둘 다 소리의 진원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아, 아니…죄송합니다. 그, 힐데씨가 윤이랑 있을 테니 마틴이 피자를 갖다 드리자고…는 아닙니다. 볼 일들 보세요!”
안색이 새파래진 이는 희희낙락 피자를 먹으러 아래층으로 떠난 과학자들 중 한 명이었는데, 힐데가 사 온 피자를 코 앞에서 떨어트린 모양이었다. 자신들이 쳐다보자 사시나무 떨듯 말을 더듬으며 횡설수설했다. 거기에 마치 굉장히 봐선 안 될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처럼 떨고 있는 게 굉장히 의아했다. 여기서 무서운 거라도 발견했나? 최윤이라는 인간을 보기만 해도 떠는 건가? 그 정도는 아닐 텐데. 힐데는 굉장히 무례한 생각을 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그런 자신과 달리 윤은 돌연 피자를 수습하던 과학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마틴? 마틴이 뭐라고 했는데.”
“예? 아…. 힐데씨가 윤이랑 같이 있을 테니까 피자를 가져다주자고….”
“아니, 그거 말고. 마틴이 힐데랑 얘기를 했어?”
“예. 당연하죠. 지금은 저희랑 같이 있긴 했는데, 아까 마틴에게 윤을 보러 왔다고 힐데씨가 말씀해주셨는 걸요.”
“…아하.”
콜록. 힐데는 뭘 먹지도 않았는데 당황스러움에 잔 기침에 저도 모르게 콜록거리고 말았다. 뜬금없이 저런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뭔가 싶었는데, 제 ‘목적’을 이제서야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눈치를 챘다기보단 당사자 앞에서 캐물어서 알아낸 모양새였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럼 지금까지 자신을 보러 왔다는 가능성도 생각을 하나도 못 했다는 거야? 힐데는 저 뇌 구조를 알 도리가 없었다. 아니 정정하자. 언제든 알 도리는 없었다.
문답 시간이 끝난 것을 눈치챈 과학자는 ‘그, 그럼.’이라는 중얼거림과 함께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버렸다. 힐데는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자신을 보고 있는 제 사수를 다시 바라보았다.
“말 해.”
“뭘 말입니까.”
“나한테 따로 일로 볼 일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그냥 날 보러 온 건지 말 해.”
그렇게 말하는 사수는 꽤 집요해 보이기까지 했다. 힐데는 윤이 이미 답을 알면서도 저러는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그만큼 윤 답지 않은 모습에 돌려 말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이실직고했다.
“그냥은 아니고… 알겠습니다. 말할게요.”
“…….”
“얼굴 보러 왔습니다. 지금 눈앞에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상대가, 너무 바빠서요.”
그래서 직접 와 버렸습니다. 힐데는 끝에 가서는 윤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리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덤덤한 척 하려 해도 이걸 제 입으로 직접 말하는 건 너무, …아주 많이 어려웠다. 손 끝이 저리고 다시금 낯이 뜨거워지는 감각에 힐데는 애써 몰래 주먹을 쥐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윤은 어떤지 모르겠다만 자신은 많은 시간의 생을 살았어도 이런 낯 간지러운 관계가 익숙해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당신을 보고 싶어서 왔어요, 라고 말하는 달큰한 로맨스 영화 엔딩의 주인공처럼 말하는 건 꿈꾸지도 않았지만 이렇게 에둘러 본심을 말하는 것도 힐데에게는 기절할 것 같은 난이도였다.
이런 어려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윤은 힐데의 난처하고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얼굴을 보며 말을 꺼냈다.
“어차피 너 내일 볼 예정이었는데.”
“…예? 저는 그런 연락 들은 적이 없습니다만. 혹시 따로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그런 지시가 따로 있었던가. 힐데의 기억상으론 그런 얘기가 없었으니 사수만 따로 아는 정보인가 싶어 힐데는 아까 쩔쩔맸던 기색은 온 데 간 데 없이 침착해진 얼굴로 질문했다. 윤은 대답도 않고 드디어 힐데를 구속했던 다리를 풀어주며 본인 자리로 돌아가 커피잔을 들었다. 본인이 원한 답을 들었으니 풀어주는 윤의 뻔뻔한 뒤통수가 어이가 없었지만 힐데는 잠자코 답을 기다렸다.
“없어. CCTV는 법률상 설치 불가능하니 그냥 널 옆에 앉혀놓고 보자고 아까 결정했으니까. 부르면 와야지, 안 그래?”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기어코 돌아온 답변이 권력을 이용한 횡포를 행하겠다는 말이었다. 힐데는 어이가 없는 수준이 아니라 얼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도무지 지금 드는 것들 중 어떤 감상을 우선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윤이 용케 그 인성으로 적법하게 사시겠다는 것에 대한 일말의 안심? 불법을 저지르는 대신 본인의 권력으로 개인적 욕구를 해결하려 불쌍한 부사수의 자유를 강탈하려고 했던 것에 대한 황당함? 아니면 다른 걸 제치더라도 결국 윤의 목적도 결국 자신과 똑같았다는…묘한 깨달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힐데에게 윤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미리 말해주려고 하니 멋대로 연락을 끊은 건 어디의 성격 급한 어르신이었을까요?”
“아니! 저는 모르는 어르신이니까, 제발 말 좀 높이지 말아주세요.”
윤은 아직도 잊을만할 때 제게 말을 높이며 자신을 괴롭혔다. 제가 예언자도 아닌데 어떻게 그걸 다 압니까. 자신에게 있는 죄라면 더 늦지 않게 윤을 보러 가기 위해 살짝 일찍 통화를 끊은 것밖에 없었다. 부사수로서 사수에게 저런 말을 듣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윤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데. ‘연애’라는 걸 하는 사이에 지금, 저렇게 자신에게 경어를 쓰는 것 자체가 너무 끔찍했다.
윤은 그런 자신의 말에 짧게 웃더니, 손가락으로 본인 쪽으로 오라는 듯 손짓했다. 그러고보니 아직 여기 구석에 처박혀 있었던가. 가면 갈수록 윤과 있으면 정신을 잡을 시간이 없었다. 힐데는 맥 없이 드르륵 매끄럽게 굴러가는 의자 바퀴를 이용해 의자에 앉은 채로 윤에게 굴러갔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서 나 대신 일을 해주겠다고?”
“세상에…그런 무서운 소리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정말, 잠깐 윤 얼굴 보러온 것 뿐입니다.”
세상에 자기 대신 야근을 권유하는 애인이 어딨습니까? 라고 반문하려다가 차마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하기에 입을 다문 힐데였다. 물론 농담이었겠지만 윤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 정말 제 일을 하며 쩔쩔매는 나를 보며 즐거워 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윤 옆에서 이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시답잖은 얘기하는 건 나쁘지 않았지만, 여기는 다른 곳도 아닌 직장이 아니던가.
윤이 딴 생각을 하는지 잠깐 침묵이 흐르는 사이, 힐데는 정신을 붙잡고 시각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보던 윤이 툭 던지듯 말을 꺼냈다.
“내일 부르면 올 거냐?”
“농담이시죠? 윤이 집에 오시는 게 더 빠르겠습니다.”
“농담으로 보였다면 유감인데.……자. 받아.”
“아, 감사합니다.”
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얕게 젖은 외투를 근처 옷걸이 걸어둔 것을 윤이 직접 가져다주었다. 그나저나 피자를 먹으러 갔던 사람들은 왜 아직 안 오는 걸까…라는 생각을 하며 외투를 입으니 뒤에서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힐데가 뒤를 돌아보니 윤이 손에 들린 담뱃갑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 넣으며 불만스레 입을 열었다.
“담배 사러 가야 해. 같이 나가.”
“……담배 이미 사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소리야. 돛대 하나밖에 없어.”
분명 자리로 돌아올 때 담뱃갑을 들고 있었는데? 제 기억이 잘못 됐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정말 그건 담배 같아 보였는데…? 하지만 당사자가 저렇게 귀찮게 혀를 차는데 아니라고 재차 우기기도 이상해서 힐데는 잠자코 윤을 따라 연구실을 벗어났다. 복도를 따라 윤과 함께 계단 쪽으로 향했는데, 힐데는 거기서 이상한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힐데가 아까부터 왜 안 돌아오는 걸까 고민했던 과학자들이 계단 통로에서 단체로 옹기종기 모여있는 게 아닌가. 이 비좁은 데서 왜? 힐데는 깜짝 놀라 말도 못 했는데 윤은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당장 돌아가라는 듯 윤이 턱짓 하니 그제야 안색이 밝아져선 빠른 발걸음으로 과학자들은 사라졌다. 이제 돌아가는 것을 알아서인지 힐데에게는 ’조심히 들어가세요.’ ‘다음에 또 놀러 오세요~’ ‘힐데씨 정말 화이팅이에요!’라는 인사말을 남기며 자리를 떴는데, 마지막 말은 뭔가 싶었다.
윤은 저들이 왜 저러는 아는 것 같았지만, 딱히 대답해줄 필요성은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저렇게 눈치를 보는 거면 아마 우리 대화 때문인 것 같은데. 예의 그 소문으로 겪었던 파장 때문인지 -아미가 아침부터 찾아와서 힐데가 구제 불능의 변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어! 라는 말을 들었던 충격적인 기억- 왠지 비슷한 느낌이 와서 미심쩍은 얼굴로 윤에게 말을 꺼냈다.
“또 저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소문이 퍼질까 걱정됩니다.”
“무슨 소문?”
“…윤이 야밤에 절 불러내서 직장 내 괴롭힘을 행사했다던가?”
아까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과학자 직원을 회상하며 말을 꺼내니 윤이 아주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했다. 힐데는 자신의 농담이 윤에게 잘 먹힌 것 같아 만족스레 웃었다. 하지만 그런 농담이 먹히지 않는 최윤은 그런 소문이 퍼지면 바로 우리 사이에 정분이 났다고 정정할 거라며 힐데를 기함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둘은 짧은 얘기를 나누다 로비를 지나 입구에 도착했다. 밖은 아직도 무겁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윤은 아마 본부 로비 쪽에 있는 편의 시설로 갈 예정인 듯했다. 이제는 헤어질 때가 됐음을 깨달은 힐데는 장우산을 펼치며 윤에게 인사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정 심심하시면 연락 통화 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
“아량이 너무 넓으신데…. 힐데. 한 번이라도 제때 못 받으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네? 여기서 얼마나 더 수많은 각오를 하며 살아야 하는 거죠?”
“이제 시작이지. 들어가라.”
짙은 어둠과 차가운 비가 내려오고 있는 밤. 윤은 챙겨온 우산을 들고 먼저 자리를 떠났고, 힐데도 시원한 비내음을 맡으며 제가 돌아가야 할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늦은 밤의 거리를 환한 불빛으로 밝혀주는 가로등 아래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힐데는 멈춰서서 저 멀리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내일도 오늘처럼 계속 비가 내릴까?
아마 윤에게 물으면, 바로 기상청의 확률 퍼센트를 읊어줄 것 같았다. 힐데는 윤의 반응을 상상하며 작게 웃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바람이지만, 내일 아침에는 비가 그친 맑은 하늘 아래 따스한 해가 떠올랐으면 했다. 당연히 누군가께선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하시겠지만 말이다.
아마 이런 차갑고 어둑한 비가 내리는 하늘보단 더 기분 좋은 무언가가 될 것 같았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윤에게도. 이제는 뭘 봐도 윤이 생각난다며 혀를 찬 힐데는 멈췄던 다리를 움직여 집을 향했다.
그나저나, 그럼 윤은 뭘 사 들고 온 거지?
힐데는 오두막에 도착해 문을 연 순간 미처 풀리지 않은 의문 하나가 떠올라 멈칫했다. 분명 마틴이 자리는 비운 지 조금 됐다고 했었던 것과 실제로 사러갔던 그를 기억하면 담배는 아니었던 것 같았다. 과연 뭐였을까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순간 등 뒤로 몰아치는 싸늘한 바깥바람에 깜짝 놀라 그 의문은 다시금 기억 저 너머로 밀려났다.
*
지이잉.
잠에선 깼지만 아직 완전히 깨지 못 해 가물가물한 눈커풀만 감고 누워있을 때, 힐데의 머리 옆에서 폰이 울렸다. 아침 일찍 울리는 폰 같은 건 흔했지만, 어제 윤이 말한 게 있어 힐데는 잠이 싹 달아나 곧바로 눈을 떴다.
그런데 더 울리지 않고 폰이 잠잠했다. 윤이 아닌가? 어느 쪽이든 폰을 열어보지 않을 수 없게 된 힐데는 폰의 잠금을 해제했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있는 힐데의 눈에 담긴 것은 한 통의 메세지 알림이었다. 그것도 윤이 보낸 문자. 근래 들어선 문자보단 통화를 더 많이 했던 터라, 꽤 낯선 문자 알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바로 문자를 열어본 힐데는 더 의아스러움이 들어 눈가를 문질렀다. 문자의 내용은 간단했다.
- 깼으면 주머니에 넣어둔 거 확인해.
주머니?
윤이 얘기할만한 주머니가 있었던가. 어제의 행적을 머릿속으로 밟아보던 힐데는 혹시 하는 생각에 이불을 걷어내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윤이 어제 직접 제 외투를 건네줄 때가 기억이 났다. 설마, 그때 내 주머니에 뭘 넣은 건가? 짐작 가는 곳이 거기밖에 없어 옷장에서 어제 입은 외투를 꺼냈다. 주머니 쪽을 만져보니 정말 한 쪽 주머니에 뭐가 들어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정말 뭐가 있잖아. 힐데는 바로 손을 넣어 물건을 꺼냈다.
“어?”
힐데의 손에 쥐어진 것은 직육면체의 작고 하얀 케이스였다. 두 눈을 혼란스럽게 깜빡이다 조심스럽게 부드러운 재질로 이루어진 겉감의 상단 부분을 열어보니 보이는 ‘그것’에 힐데는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 어렴풋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도 모두 달아났다.
힐데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폰을 집어 들어 이 짓을 벌인 당사자에게 연락했다. 신호음이 얼마 가지 않아 연락을 받는 상대에 왼손에 들린 물건의 정체에 관해 물었다. 힐데의 목소리는 아주 처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상대방은 그만큼 놀랄 사안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네가 안 온다며’라는 퉁명스러운 대답만을 돌려줬다.
“아니…윤. 그 말이 아니잖습니까?”
연애라는 게 하루하루가 이런 놀라움으로 가득한 연애일지 알았냐고 힐데에게 묻는다면 그는 단번에 고개를 저을 게 분명했다. 제 사수와의 연애를 상상한 적조차 없었지만 하물며 다른 사람과의 연애를 꿈꿔본 적도 없었다. 정작 그 관계를 시작하게 된 상대가 ‘최윤’이었으니, 매일 제게 닥치는 놀라움을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지금도 힐데는 윤에게 ‘반품…반품이라는 단어는 지금부터 금지입니다’라며 머리가 아프다는 듯 제 머리를 짚고있었다. 이 둘에게는 달콤하기만 한 그런 연애는 해당되지 않는 듯했다.
그런 복잡한 심경과 달리 -힐데는 아마 정신이 없어 눈치채지 못 했지만- 힐데의 오두막 창밖에 보이는 것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하고 깨끗한 하늘이었다. 그가 바랬던, 따스한 햇살 한 줌이 힐데의 손에 들린 반지를 환히 빛나게 하고 있었다.
10800자.
짧은 에필로그만 올리려다가, 둘의 연애를 보고 싶어서 조금 더 길게 써서 올리게 되었습니다.
본편도, 에필로그도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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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미어캣
아 행복하다..........
섬세한 카피바라
마음이 포근해지고 싶을 때마다 읽으러 오는 글이에요ㅠㅠ 힐데의 마음이나 윤과 힐데가 나누는 대화들, 윤을 포함해 힐데를 생각해 주는 주변 인물들 모두 귀여워서 매번 즐겁게 읽고 있어요. 좋은 글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늘 읽다 보면 그 장면의 햇빛이나 불빛의 색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참 신기해요🥹
생각하는 앵무새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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