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소문 - 下(完)
-완결편
-공식 사건, 설정에 크게 기반하지 않습니다 (적폐날조주의)
형태도 없이 순식간에 활활 타오르던 소문이 진화(鎭火)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말들이 나왔지만, 소문의 상대가 '최윤'이었다는 사실이 억측 난무에 있어 탁월한 방패막이 되어주었다. 하나 예상하지 못 한 점은 힐데의 '연애설'로 들끓었던 입들이 이제는 힐데 동정 여론을 조성한다는 사실이었다. 최윤이 얼마나 본인 부사수인 힐데를 굴렸으면, 전화만 받아도 사람 눈치를 보게 만들었냐며 힐데에 대한 깊은 안타까움을 전했다.
하지만 이런 불합리한 상사의 권력 남용(?)에도, 부당한 사내 권력 남용 타파를 위해 최윤에게 직접 대거리 할 대담한 이는 없었는지 아직 최윤에게 처참하게 깨진 배저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 말이 어떻게 전해지면, 저렇게 변모하는 거지?'
분명 자신이 전한 얘기는 최윤의 듣기 힘든 미담이었을 텐데. 어떻게 말이 전달되면 미담이 개꼰대 악담으로 변할 수 있지? 평소 최윤에 대해 주변 배저들이 영 떨떠름하게 굴었다는 건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와전돼도 괜찮은 건가 싶었다. 힐데는 그렇게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자신이 제 사수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최윤은 본인이라는 방어막이 든든하게 실존했지만, 자신은 소문이 해명되고서부터 두말할 것 없이 주변 배저들에게 걸레 쥐어짜듯 탈탈 털려졌다. 가벼운 연애설이야 귀엽게 듣고 넘길 일이었지만, 겉보기엔 멀쩡했던 힐데가 불면증이었다니. 그것도 꽤 오랫동안 자신들에게 숨겼다는 사실이 한꺼번에 밝혀진 파동으로 힐데는 그들의 서운함과 걱정 그리고 분노를 직격탄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 직격탄에 가장 많은 변화점이 온 건 역시 '휴대폰'이 아닐까. 이 정 많은 이들이 어떤 결론을 돌출하게 됐는지는 몰라도, 밤에 접어드는 시각이 되면 힐데의 폰에는 여러 건의 통화 기록이 찍히게 되었다. 그들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전화를 거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너무 당황스러워 누워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난 지금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받을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지잉.
그렇다고 이 전화 발신 상대한테 긴장하지 않는 법은 아직 터득하지 못 했는데.
"네. 총사령관님."
[아직 안 자고 있을 것 같아서 연락했어. 잠깐 통화 괜찮을까?]
"…네.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힐데는 기껍게 웃으며 예현의 전화를 받았다. 예현은 힐데에 얽힌 소문의 진상을 듣고서도 유일하게 힐데에게 무슨 말도 꺼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힐데도 거기에 굳이 말을 덧붙여 변명하진 않았다. 예현은 이 사태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상대가 비교적 지척에 있으니, 그 쪽에게서 들었으려나 하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밤에 울린 전화에 이번엔 누군가 싶어 본 화면에 뜬 예현의 이름에 무슨 일이 터졌나 놀라 집 밖을 뛰쳐나갈 뻔도 있지만 정작 전화를 건 예현은 여느 배저와 같이 일 얘기를 떠나 힐데에게 일상 안부만을 물었다. 그 이후로도 예현에게 몇 차례 연락이 오게 되었는데, 오늘의 통화도 그 연장선이었다.
"그래서 방금 전에 연락오신 로는 제게 죽음의 자장가로 절 보내버리겠다며 성화셨죠. 그러다가 갑자기 일이 생겼다며 끊으셔서 자장가는 듣진 못 했습니다."
[어디로 보낸다고?]
"그…아무래도 잘 자라고 말씀하신 것 같았습니다."
표현 방식이 다소 색달랐지만, 아무래도 그게 로만의 안부 인사가 아닐까. 단지 제 이름이 아닌 다른 유사한 이름을 부르는 것 보아하니 폰에 제 이름이 잘 저장은 되어 있는 지가 의문이었다. 제 목소리에 담긴 어이없음을 느꼈는지 예현이 통화 너머로 웃는 것이 느껴졌다.
[힐데. 다음 상담이 마지막 상담이라고 했지?]
"네. 내일입니다. 사실,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러 가는 거나 마찬가지죠."
[음. 그러면….]
"…?"
[이제 윤과는 따로 통화하지 않으시는 건가 싶어서요.]
예현이 잠시 망설이다 꺼낸 말에 힐데는 소리를 죽여놓은 텔레비전를 보는 시선이 멈췄다. 이런 질문은 처음이 아니었건만, 예현에게서 나온 말은 누구나 제게 보였던 동정이 아닌 이유 모를 염려를 담고 있어 잠시 말을 잇지 못 했다. 그 사이에 예현이 이 화제에 관해 말을 한 적도 없었지만 말을 꺼낸다 하더라도 자신의 불면증에 대한 얘기일 거라고만 생각했지, 사수인 최윤을 언급할 줄은 몰랐다. 갑작스레 말을 높인 것 또한 총사령관이 아닌 대자인 예현으로서 말을 전했다는 뜻이었다.
"아뇨. 일에 관한 연락이라면 드릴 예정입니다."
우연찮게도 아직까진 업무 상의 연락이 필요가… 없었다. 예현은 자신이 윤과의 연락을 피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건 아닌데.
예현이 꺼낸 얘기가 원하는 답이 이게 아닌 것은 알았다. 하지만 예현이 원하는 '그것'을 먼저 제 속을 헤집어 꺼내 입에 담기가 어려웠다. 말하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정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어려웠다. 차라리 불면증을 숨긴 것에 대한 원망이라면 몇 번이고 사과할 수 있을 텐데. 어렵네. 힐데는 짧게 침음했다.
[…알고 있어요. 어떤 대답을 원한 건 아니에요. 그저, 힐데가 이런 저런 말들로 하고 싶은 것들을 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고르진 않았으면 해서요.]
"그런 말들을 신경 쓰진 않습니다. 그리고 예현의 걱정처럼 그다지 매사 참고 살지는 않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대부는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렇죠, 하지만 제 말은 진심이에요. 힐데는 무엇이든 해도 좋고, 원치 않은 것들은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만 기억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네. 내일 상담 잘 받고 오세요.]
그 말을 끝으로 통화는 종료됐다. 예현과의 통화는 끝났지만, 제 머릿속은 더 시끄러워진 기분이라 힐데는 어둠 속에서 밝게 빛나는 티비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예현은 분명 무언가가 바뀌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뭐가? 힐데는 자신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심정 한 끝자락에는 분명 '최윤'이 있음을 부정하진 않았다. 최윤이 자신에게 어떤 선 이상을 허락해주었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그것은 그의 선의였다. 물론, 아주 드물고 귀한 선의인 건 분명했지만 말이다. 힐데는 저도 모르게 웃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이 선의에는 조건이 있었다. 이것들은 자신이 잠들지 못 한 밤들에 대한 선의였다. 자신은 왜 이것들이 당연해질 거라고 생각했을까. 상태는 이미 호전된 지 오래였다. 자신은 상담도 내일이 마지막이었고, 이제 약 처방도 받지 않는 아주 건강한 상태인데. 잠이 들 수 있게 됐던 이후에도 윤은 무엇 하나 이상할 거 없이 평소처럼 얘기를 들어줬고, 이 선의의 끝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착각하고 있었다.
윤에게는 당연해질 게 하나도 없었는데.
*
"왜 여기에 있는데."
"제가 선배님이랑 통화만 하면 그렇게 난리가 나서 말입니다. 그냥 대면 대화가 좋지 않을까요?"
"상담은 오후에 있을 테니 그전까진 여기서 노닥거리겠다?"
"…그것까지 기억하십니까? 아니, 그냥 놀러 온 건 아닙니다. 물어볼 것도 있고."
"뭔데?"
힐데는 잠이 깨자마자 준비를 하고 집을 벗어났다. 어디로? 한참 일하고 있을 배저 본부의 윤에게로. 어제의 무겁던 마음과는 달리 걸음은 가벼웠다. 과학동에 도착하자마자 반기는 얼굴들. 표정은 밝았지만 낯은 언제 집은 언제 갔는지 모를 꾀죄죄함이 묻어나왔다. 그 면면들에게 인사하고 바로 윤의 자리로 향했다. 그러자 바로 보이는 얼굴. 최윤이었다.
조금 피곤함이 엿보이는 눈에는 뭐 하러 왔냐는 의사가 분명해보였다. 여느 때와 다를 게 없는 사수의 얼굴에 힐데는 내심 안심했다. 가볍게 인사를 건넨 힐데는 그대로 주변 의자를 끌고 와, 말 그대로 눌러앉았다. 처음에는 힐긋 보고 제 할 일만 하던 윤이 시간이 지나선 자신의 동선에 힐데라는 장애물이 있어 매우 걸리적거렸는지 미간을 좁히고 힐데에게 목적을 밝히라며 독촉했다.
하지만 오늘은 들을 대답이 있으므로 그냥은 못 돌아가겠는데.
"윤."
"어."
"이제 연락드리지 말까요."
의자에 기대서 바닥만 보며 말을 꺼냈다. 말을 꺼내자마자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졌다. 뭔가 싶어 고개를 드니 의미 모를 눈빛으로 할 일을 멈추고 자신을 보는 윤과, 이상하게 너무 조용한 저 너머 과학자들. 그들이 뚝 하고 멈추니 윙 하고 돌아가는 컴퓨터 소음이 더 크게 들릴 지경이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하고 고개를 빼고 보려 하니 우당탕탕 하고 큰 소음과 더불어 멈추었던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우연인가? 싶어 다시 윤에게 고개를 돌리니 이제는 아예 미간을 좁히고 노려보기까지 하는 사수에 힐데는 본능적으로 다리를 움직여 의자를 뒤로 물렸다.
드르륵. 의자 휠이 굴려지는 소리가 멈췄다. 사수께서 직접 제 도망을 저지하셨다.
"그걸 묻는 이유는."
힐데는 그대로 지척에 있는 윤과 시선을 마주했다. 윤의 표정은 그래. 빈말이라도 좋은 쪽은 아니었다. 역시, 뻔한 질문이었나. 힐데는 그 강렬한 시선에 꾹 닫았던 입을 열었다.
"도움을 주셨는데, 그걸 폐로 갚을 순 없으니까요."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절 그렇게 극악무도한 부사수로 키우신 적은 없잖습니까?"
"말은 잘하지."
대답은 그냥 넘어가는 듯 했지만 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힐데는 예상했던 반응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윤에게는 당연한 수순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자신은 참으로 늦되어서, 이제서야 깨달았을 뿐이었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는 것이 뭐가 이상할 게 있을까. 그저 지금의 자신은 이제껏 그의 도움에 깊이 감사를 표하고 좋게 마무리 지으면 될 일이었다.
"그냥… 더 솔직히 말하자면, 기껏해야 연락을 주고 받은 것뿐인데. 윤이 그런 오해를 받으며 좋은 소리 듣지 못 하는 게 그다지 마음에 들진 않습니다."
"……."
"윤은 그깟 소문, 그런 소리 하나도 신경 쓰지 않을 거란 것도 알고. 제가 이런 말을 늘어놓는다 해도 윤은 크게 신경치 않으실 것도 압니다. 하지만 저는 그러기가 싫습니다."
제 말대로 윤은 그런 소음에 하나하나 신경쓸 가련한 인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윤에 대한 잘못된 말들과 억측들을 멋대로 사람들 사이에 굴러가게 만드는 게 자신은 아니었으면 했다. 그에게 받은 시간들을 감사히 여긴다면 자신은 그러지 말아야 했다. 그게 자신의 선택이었다. 예현이 말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큼은 윤의 얼굴을 보며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어. 신경 안 써."
"……."
"그리고 내 모자란 부사수께서 말한 것들도 신경 안 써. 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거지."
"네."
"그렇게 신경 쓰이면 네가 선택해. 헛소리를 나불대는 인간들을 없애든지, 그 헛소리를 듣느라 상처받을 나를 생각해 평생 충실한 부사수로써 나를 받들어 살던지."
"…방금 상처 안 받는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상처받기로 방금 결정했는데?"
힐데는 그게 무슨 억지냐고 반박하려다가 전혀 하나도 상처받지 않는 얼굴로 자신을 보며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윤을 발견하고선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진 윤의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것 같았는데, 지금은 아까보단 괜찮아 보였다. 별 시답지 않은 농담만을 주고 받은 것으로 괜찮아진 건가.
정말인가 싶어 윤의 얼굴을 빤히 보던 힐데는 이내 힘이 빠진다는 듯 따라 웃었다. 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는다 했는데 어느새 휘둘려진 게 분명했다.
윤은 힐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그 시간들을 단순한 선의로, 의무적으로만 하는 행위라고 여길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착각이었구나. 가끔 들렸던 웃음 소리가, 지금 보여주는 모습들이 힐데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제 사수 또한 그 시간들 속에서 즐거워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겠습니다."
"전혀 못 알아먹은 얼굴인데."
"아뇨. 지금에서야 저는 윤의 진심을 깨우쳤습니다. 당분간 연락 안 할 겁니다. 윤의 말대로 가볍게 세치 혀를 놀리는 자들을 없애려면 이제부터 바빠질 예정이므로 다시 뵙는 그 날까지 몸 건강히 예현을 챙겨주십시오."
"뭐?"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윤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그러자 윤은 또 제가 헛소리를 한다는 듯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힐데는 자리를 박차고 과학동을 벗어났다.
*
ㅡ오늘은 여기에서 마무리해볼까요. 아, 오늘이 마지막인가요? 그간 고생하셨네요. 축하드립니다. 힐데베르트씨.
의사 선생님의 밝은 미소와 함께 마지막 상담이 끝났다. 상태가 호전된만큼 상담에서 얘기한 것은 그 사이에 불면 증세를 들킨 점과 그 여파로 여러 이들에게 밤마다 연락을 받고 있다는 근황이었다. 그 연락들이 불편하냐는 질문에 힐데는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에 미소 짓는 의사 선생님을 보아하니 마치 이제껏 관심을 받지 못 한 어린아이를 보는 듯한 시선이라 힐데는 조금 겸연쩍었다.
축하의 작별 인사를 나누고 힐데는 병원을 나섰다. 미리 상담 전에 무음으로 돌려놓았던 폰의 화면을 켜보니 메신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상담 일정까지 말한 적은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하나같이 상담 잘 끝내고 왔냐는 연락이었다. 하나하나 그들이 보낸 문자를 읽다가 문득 허전하다는 느낌에 시선을 굴리던 힐데는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이렇게 상담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윤에게 연락했었지.
이젠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 갑자기 실감이 났다. 힐데는 새삼 드는 허전한 감정이 우스워 소리 없이 웃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기간 사수가 내어준 선 안 쪽을 고민도, 걱정도 없이 쉽게 밟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 밖으로 나오는 게 더 힘들 줄도 모르고.'
윤에게 말한 것처럼 정말 소문이 종식되도록 가볍게 나불거리는 입들을 다 봉하고 윤에게 더 폐를 끼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자신은 이전처럼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체감했다. 힐데는 시끄럽기만 한 제 마음과 달리 해가 쨍하고 빛나는 푸른 한 하늘이 야속했다.
아.
"망했다."
불연듯 온 깨달음이 벼락처럼 머리에 꽂혔다. 망했다. 한 마디로 정말 망했다. 본 지 얼마나 됐다고 지금 자신은 그 얼굴이 보고 싶기까지 했다. 그 누구도 아니고 '그' '최윤'을. 힐데는 거기까지 생각한 자신이 소름이 돋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생각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까? 불면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신이 가장 문제 있는 게 아닐까? 힐데는 한 손으로 제 머리를 헤집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자신은 너무 헛된 생각에 그만 충격을 받고 사고 능력이 크게 저하된 게 분명했다. 한숨 자면 괜찮아질 거야. 그럴 거야. 그렇게 중얼거리며 힐데는 빠른 걸음으로 오두막집을 향했다.
*
안타깝게도 저녁부터 밤까지 푹 숙면을 취하고 일어난 이후에도 망해버린 제 정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언제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결론이 나와버린 거지? 힐데는 그렇게 혼몽한 정신을 붙잡고 자신의 폰에 남겨진 부재중을 확인하며 퀭한 눈으로 일일이 일찍 잠에 들어서 못 받았다며 문자를 남겼다. 이상하게 더 맑은 정신에 속속히 생각나는 제 감정이 떠올라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적이 있었어야 뭘 어떻게 대처할지 알 텐데. 꽤 오랜 시간을 살아왔음에도 왜 하나같이 뚜렷한 해결책이 안 나올까.
심지어, 아무리 사수라 할지라도 그렇게 어린. 여기까지 생각이 뻗친 힐데는 또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쓰러졌다.
침대에서 안락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힐데는 또 울리는 진동에 아까 날린 문자에 대한 답장인가 싶어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손을 뻗었다가 한 번이 아닌 계속 울리는 진동에 흠칫 놀랐다. 새벽 1시에 전화? 스팸 전화도 이 시간에는 안울리겠다. 알 수 없는 짜증을 누르며 통화 수락을 하고 귀에 얹었다.
"여보세요."
[……]
"…… 스팸이면 제발 끊어주십시오."
[……]
"…끊겼나?"
분명 수락 버튼을 받았는데 싶어 귀에 얹은 폰을 다시 제 눈으로 확인하다 심장 마비에 걸릴 뻔했다. 최윤이라는 이름과 함께 여전히 통화 중으로 흘러가는 시간 그리고 볼로 누른 건지 귀로 누른 건지 모를 '소리 제거' 상태. 느릿느릿하게 반응하다 보니 벌써 40초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었는데 전화는 안 끊기고 있었다. 그게 더 섬찟해서 힐데는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아 황급히 소리 제거 버튼을 비활성화했다.
"제가 잘못 눌러서 소리가 안 들렸습니다."
[알아. 대놓고 사람을 스팸 취급을 당할 줄은 몰랐지만.]
"……아니. 그,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진짜입니다. 제가 아무리 방금 깨어났다 하더라도 어떻게? 잠시만. 윤, 제가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 새벽에 연락을 하신 겁니까?"
구구절절하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문득 드는 아리송한 기분에 생각을 해보니 자신은 분명 제 사수에게 연락이 안 된다고 얘기를 했는데, 느닷없이 전화하는 게 이 새벽이라고? 출처 모를 고통스러움이 배가 되는 것 같아 힐데는 저도 모르게 윤에게 곱게 말이 나가질 않았다. 이젠 연락할 건덕지도 없는 제 사수가 이 야밤에 제게 무슨 말을 하려고.
[네가 안 한다고 했지. 내가 안 한다는 소리는 안 했지.]
"그건……"
[그리고 내가 왜 네 말을 잘 듣는 사수라고 생각을 하는 거지?]
"너무 당당하셔서 제가 할 말이 없습니다."
눈을 감은 채 듣다가 제 생각 이상으로 더 뻔뻔한 사수의 목소리에 짜증이 난 것도 까먹고 어이가 없어 웃음을 흘렸다. 지금 제 상태가 어떻게 될 지도 모르겠는데 지금 이 목소리를 들으니 좋다는 생각 먼저 들다니 세상이 망해버린 게 분명했다. 세상이 망했는데, 왜 시간은 흐르고 자신은 왜 윤이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한 건가 궁금해지는 걸까. 망할 거면 얼른 망해. 평소 같으면 하지도 않을 생각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오는 걸 무시하고 힐데는 얼른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자신이 매일같이 하던 연락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평소에도 말을 안 듣던 부사수의 반발심에 연락을 하신 건지 알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통화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서 창문 열어.]
그러거나 말거나 윤은 당연하듯 제게 명령을 하달했다. 이 야심한 새벽에 말입니까? 앞도 없고 뒤도 없는 윤의 문장력에 큰 감동을 받으며 힐데는 꾸물꾸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문이라 함은 제 침구 지척에 있는 이 창을 말하는 거겠지. 윤의 말대로 착실히 창을 열자 쏟아지는 바람에 잠이 더 깨는 것 같다 생각하는 순간, 힐데는 자신의 눈 앞에 보여지는 풍경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별 보고 싶었다며.]
별. 정말 수 없이 올려다본 밤 하늘에 드믄 드믄 별이 박혀 있었다. 인공위성도 아니고, 정말 별이었다. 한 순간에 자신의 눈을 사로잡은 별들이 이제서야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듯 너무나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 별들을 품은 밤하늘은 생각하지도 못 한 선물처럼 다가와서, 힐데는 그렇게 망하라고 간절히 바라던 세상에게 조금 미안할 지경이었다.
힐데는 여전히 눈에 별들을 담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걸 보여주시려고 새벽에 연락하셨습니까?"
[어.]
"……아. 정말."
자신이 선을 넘지 않겠다 뒷걸음질치니 이제는 이 망할 사수께서 친히 자신의 선 안 쪽으로 건너와버린다. 본인이 제 선 안을 넘는다는 자각은 하고 있을까? 아마 모르겠지. 힐데는 아까 받은 감동이 무색하게 억울함이 울컥 올라왔다.
"이건 전부 윤의 탓입니다."
[내가 뭘.]
"사람이 포기를 하려고 하면, 직접 도와주셔야지. 사람을 진짜 도망가지도 못 하게 만들면…."
밤하늘 아래 울렁이는 기분에 이제는 마구 튀던 생각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알아듣지도 못 할 사람한테 쏟아내는 투정이 우스웠다. 대답 하나 없던 그 대화 속에서 말했던 별을 보고싶다던 제 말을 왜 기억하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가까스로 남은 이성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된다고 붙잡고 있어 겨우 진정하고선 말을 끊었다.
하……. 저질렀다. 힐데는 말을 쏟아내고선 지금 이 순간 원망할 존재는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자. 어설프게 숨지 말고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당분간 윤과의 연락을 끊자. 나중에 걸리더라도 괜찮았다. 매실차를 마셔서 헛소리를 했다고 하자. 그래. 그러자. 힐데는 그렇게 결정을 내리고선 바로 연락을 끊으려고 했다. 그 말이 들리기 전까진 말이다.
[그러니까 왜 도망을 쳐?]
웃음기 하나도 없는 윤의 목소리가 제 귀를, 뇌를 내리쳤다. 힐데는 통화를 끊으려는 손가락이 저절로 떨리는 걸 느꼈다. 이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네가 도망가는 꼴은 내가 그냥 두고볼 거라고 생각한 건가.]
"윤.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알고 계십니까?"
[그럼 내가 모를까봐?]
윤이 익숙한 비웃음을 흘리며 제게 반문했다. 힐데는 그냥 얼이 빠졌다. 아까 느꼈던 희노애락은 어디 가버렸는지, 제 안의 정신과 몸이 분리되어 있는 듯한 기분에 어안이 벙벙해져 한 마디 말조차 뗄 수 없었다. 이게 바로 금붕어가 되는 감각일까?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입만 달싹일 수 있는 감각이 이런 걸까?
힐데는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 감정의 허용 범위를 훨씬 넘어선 무언가가 터지는 감각에 자신 안의 긴급 버튼을 눌렀다.
"밤이 늦었으니, 부디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너, 또.]
"도망 안 갈 테니까, 그러니까 제발… 괜한 생각은 접어두시고 내일 뵙겠습니다. …정말입니다."
통화를 어떻게 끊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에 어떻게 말을 했더라.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차분하게 폰 전원을 종료하고선 저 멀리 던져버렸다. 이 새벽에 밖에서 세상이 망해버려도 자신은 모르는 일이었다. 말똥한 정신 사이로 몽글거리며 간지러운 감각을 내리 누르며 힐데는 오랜만에 밤 하늘을 올려다 보며 등을 기대 앉았다.
아름다운 별이 빛나고 있었다.
10360자.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윤이 배저들의 사내연애는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설정이 재밌어서 쓰게 됐네요.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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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3
출근하는 미어캣
'이제 연락드리지 말까요' 미간 좁히고 노려보는, 빈말이어도 좋아보이지 않는 표정 <<맛잇다 너무맛잇어요 '그 헛소리를 듣느라 상처받을 나를 생각해 평생 충실한 부사수로써 나를 받들어 살던지.' '아니? 상처받기로 방금 결정했는데?' <<뻔뻔한 최윤 너무 좋아서 관 짜고 누웠어요 상담 끝나자마자 최윤 생각하는 힐데,, 벌써 보고 싶대 함박웃음지음 아너무달아요 [일어나서 창문 열어. 별 보고 싶었다며.] <<입 떡벌림 이..이게 머꼬 털썩 주저앉음 네네 저 여기서 끝낫어요 넉다운 됐어요 치아 모조리 충치생겨서 틀니하러 가요 [그러니까 도망을 왜 쳐?] [겨우 여기까지 왔는데 (중략) 그럼 내가 모를까봐?] << 저 턱 나갔어요 양악하러 가요 orz 너무좋아죽어 저녁 짜게 먹었는데 글이 너무 달아서 단짠단짠 굉장하네요 진짜 맛있다 눈물흐를맛 미슐랭 5스타
사랑스러운 달팽이
세상 달달한 글에 광대가 내려오질 않네요ㅠㅠㅠㅠㅠ 힐데의 말 하나하나 기억해주는 윤...ㅎ ㅏ.....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둠의 코알라
선생님 외전 생각은 없으신지요..? 진짜 간질간질한 썸 보는 기분이라 저까지 두근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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