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힐데] 소문 - 中

- 소문의 진상.

- 분량 조절 실패

- (안타깝게도) 하편까지 이어질 예정입니다. 적폐날조 주의.


어느 날부턴가, 힐데는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게 되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단지 잠에 빠지려 눈을 감아도 잠을 이룰 수 없는 날들이 많아졌고, 그럴 때마다 창가에 앉아 새벽의 밤하늘을 바라보는 게 가장 안식의 감각과도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휘영청 빛나는 달과 별로 수 놓은 아름다운 밤하늘' 같은 아름다운 묘사는 책에서만 볼 수 있었고, 현실은 탁한 매연으로 나빠진 흐린 대기와 밤에도 꺼지지 않는 도시의 불빛으로 별은 커녕, 보였어도 저게 인공위성인지 별빛인지도 분별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힐데는 메마른 눈을 깜빡이며 부유하는 정신을 저 수면 아래로, 더 아래로 가라앉히기 위해 빛 한 점 없이 새까맣기만 한 밤하늘만을 올려다보았다.

힐데베르트 본인도 자신이 불면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점차 쌓여가는 수면 부족에 힐데의 정신은 휴식을 제때 취하지 못 해 개운한 아침의 감각을 잊었다. 그러니 덩달아 환하게 대지를 밝히는 햇빛 한 줌조차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힐데는 이런 불면의 나날들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한숨도 자지 못 하는 것도 아니고, 사지가 멀쩡히 움직이지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이런 사소한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되리라. 힐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되도록 남에게는 이런 자신을 티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본인에게는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남들에게는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주변 이들에게 걱정을 끼치긴 싫었다. 평소같이 웃었고, 피로함을 내리 누르며 걸핏하면 흐려지는 정신을 매번 부여잡았다. 같이 임무를 수행하는 배저들 중엔 기민한 자들이 있어 한 번씩 괜찮냐고 질문을 받았지만, 어제 게임을 하다 늦게 잤을 뿐이라며 머쓱하게 웃는 얼굴만이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 중에서도 절대 그냥은, 못 넘어가는 이가 있었으니.

"힐데베르트."

"네?"

바로, 힐데의 사수인 '최윤'이었다.

*

"사실대로 토로하는 게 신상에 좋아."

"어떤, 사실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갈피를 못 잡는 힐데의 답을 들은 윤은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눈가를 휘었다. 힐데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저건 좋지 않은 웃음이었다. 사람의 웃음에 좋고 좋지 않냐가 따로 있겠냐마는, 지금 힐데의 답변이 자신의 사수의 심기를 거스른 것만은 분명했다. 힐데는 갑자기 자신이 불려온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윤은 괜히 사람을 괴롭히겠다고 시간을 소비하는 부류는 더더욱 아니었으므로, 정말 자신이 숨긴 무언가가 윤을 알아챘다는 소린데.

설마.

"티가 납니까?"

"아무렴."

네 불면이 정말 하나도 티가 안 날까? 하는 눈빛. 힐데는 속으로 탄식했다. 잠을 깊이 자지 못 하는 날들이 두 자리를 수를 넘고, 주를 계속 넘어가고 있었다. 윤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의 상태가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언제 들켰지, 라는 생각보다는 감히 선임을 속일 수 있다 생각한 자신의 미숙한 판단을 짧게 탓했다.

"끝까지 숨기려고 한 건 아니었습니다. 단순히, 잠이 들지 못 한다고 해서 제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그딴 걸 변명이라고 말한 거 보니 아미나 소르디, 예현한테 그대로 말해도 괜찮나 보지?"

최윤은 별 감흥 없이 힐데의 변명을 듣더니, 무심하게 흘린 한 마디로 힐데를 넉 다운시켰다. 자신의 사수는 너무나도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은 그의 앞에 처참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셋을 말하는 건 매우 부당한 일 같았다. 그들이 자신의 사소한 컨디션 난조를 듣고서 보일 반응이 눈에 선했기 때문이다. 힐데는 윤에게 더 항의할 처지가 아닌 걸 잘 알았지만 그들에게 알리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들자마자 바로 윤에게 사정할까 싶어 입을 떼려다 무언가 걸리는 부분이 있어 눈을 깜빡였다.

잠시만.

"선배님. 그럼, 말을 안 해주실 수도 있다는 겁니까?"

말하겠다, 가 아니라 말해도 괜찮나 보지? 이건 하겠다는 통보가 아니라 조건에 따라 주어지는 선택지가 있다는 말이었다. 시들시들했던 힐데의 눈이 금세 빛나는 걸 본 윤이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힐데를 얼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세상에. 눈에 넣으면 당연히 아플 자신의 현명하고, 자애로운 사수시여. 힐데는 기쁨으로 저절로 웃음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수의 합리적인 판단에 감동을 한 힐데는 자신의 살점도 일부(?) 떼어줄 수 있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 살벌한 생각을 하는 힐데의 머릿속과 달리 근래 보이는 모습 중 제일 밝게 웃으며 생기가 도는 힐데의 얼굴은 잘 키운 대형견과도 비슷해, 윤은 속으로 잠시 '내가 부사수를 키운 게 아니라 강아지를 키웠나'라는 생각을 했지만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선 생각해둔 자신의 조건을 힐데에게 들려주었다.

힐데는 윤의 목소리에 점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

ㅡ힐데베르트에게는 있는 그대로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 사람이 있다면, 시간을 내어보는 게 어떨까요?

힐데는 상담을 마치고 병원 건물을 빠져나왔다. 오늘은 날이 좋았다. 탁한 공기가 걷히고 눈이 시리도록 청명한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눈이 따가워. 힐데는 눈가를 문지르며 길을 걸었다.

윤이 제게 던진 조건 카드는 전문의에게 상담을 받는 것 하나였다. 윤은 자신의 상태가 정신적, 심리적인 요인에서 오는 불면일 수 있으므로 상담을 받아보라는 이야기를 했다. 물론 이 상담까지도 주변 이들에게는 비밀에 붙이는 것으로. 힐데는 그 말을 들으면서 방금까지도 윤이 내미는 조건을 어떤 것이든 달게 받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마음 한구석에 드는 반발심을 느낀다는 사실에 자신을 비웃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꺼낸 이야기에 자신은 반박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더 상태만 나빠져 이도 저도 되지 못 하고 여럿에게 최악의 민폐만을 끼칠 수 있었다. 힐데는 웃던 얼굴 그대로 윤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이잉.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자신을 현실로 끄집어낸 폰의 진동에 놀라 얼른 통화 상대를 확인하니, 윤이었다. 힐데는 별 생각 없이 통화를 수락했다.

"네."

"상담 끝나면 연락해. 네가 부재중일 때는 내가 부른 것으로 말을 맞출 테니까."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상담은 방금 마쳤습니다."

아무래도 긴급시에는 바로 전투로 빠져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부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미처 생각하지 못 한 부분을 윤이 챙겨주어, 약속을 지켜주는 모습에 감사함을 느꼈다. 거기에 자신도 사수와의 약속을 지킨다는 보고 정도는 해도 좋지 않나 싶어 말을 꺼냈다. 윤은 거기에 별 반응이 없었는데 힐데는 한껏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을 느끼며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얘기까지 꺼내고 말았다.

"지금 저를 얘기할 상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물론 그런 상대가 있다면 그러면 좋을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나는 상대가 있냐?"

"…글쎄요. 밑도 끝도 없이 자신에 대해 말하라는 것부터가 꽤 난해합니다. 애시당초 이런 대화를 꺼내기 위해선 제 상태부터 얘기해야 하는 조건이 따라붙는데. 아무래도 상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을까요?"

"그럼 답은 정해졌네."

이거, 처음부터 답이 정해져 있던 대화였나? 윤이 미리 생각해둔 상대가 있나 싶어 힐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

아 그렇군요. 제 사수인 최윤이 그 상대시군요. 비밀을 토로할 상대가 더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저를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는 상대가…까지 충격에 허우적대던 힐데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윤이 지금 자신에게 뭐라고 말을 한 거지? 입을 벌린 채 폰을 귀에서 떼고 통화 상대가 윤임을 다시 확인한 힐데는 떨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윤에게 재차 물었다.

"…제가 잘 못 들은 것 같습니다? 누구라고요?"

"최윤."

"……."

*

힐데베르트 탈레브.

힐데는 마른 눈커풀으로 눈을 덮으며 생각을 했다. 자신을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에 놓인 자신을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을 잊어도 잊지 않은 자신의 이름을 생각했다. 생의 시작부터 눈을 떠 지금의 이 순간까지 다다른 자신을 돌이켜 보았다.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것이 없는데, 누군가 자신에 대해 묻는다고 하면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까. 어려웠다.

거기까지 생각한 힐데는 잠기운 없는 눈을 뜨며, 오늘도 어김없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 왔다는 것에 웃음 지었다. 밤 10시. 누군가는 잠이 들었을 시각에 힐데는 폰을 집어 들었다. 어두운 방 안에 밝게 켜지는 화면에 힐데는 잠금을 풀고 연락처 탭으로 들어갔다.

"한 가지만. 그것만 묻고 끊자."

물어볼 상대도 마땅히 본인께서 정해준 상태지만, 그 상대가 과연 밤 10시에 전화를 해도 좋다고는 대답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힐데는 지금 당장 누군가를 붙잡고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가지만 상대에게 물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용감하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 상대인, 최윤에게 말이다.

[왜?]

받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라는 생각이 무색할 만큼 전화 발신음이 한 번 채 울리기도 전에 받는 그의 사수에 힐데는 내심 움찔했다. 겁도 없이 걸었다는 자각이 지금에서야 들은 것이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 힐데는 자신이 생각한 그 질문 하나를 윤에게 던지고 바로 통화를 마무리하려 했다.

"선배님, 늦은 밤에 연락드려 죄송합니다. 그저,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지금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어.]

"…윤은, 지금의 제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힐데는 사실 윤에게 어떤 대답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애당초 자기 자신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의 대답을, 당연히 타인에게서 듣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이야기였다. 윤이 질색하며 싸늘하게 통화를 끊는 상상을 하며 힐데는 소리 없이 웃었다.

[어르신]

"예?"

[예현의 대부. 블랙배저. 부사수. 입맛에 문제 있음.]

"잠시만요?"

[불면증을 앓고 있는 주제에 주변에 도움 하나 청하기 어려워함]

"…그래서, 지금 도움을 청하고 있잖습니까?"

감히 최윤에게서 폭격과도 같은 답변을 받을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힐데는 하나씩 읊어주는 자신에 대한 나열 중에서 굉장히 반박을 하고 싶은 부분이 하나 있었지만 감히 도움을 청하는 입장에서 꺼낼 수는 없었다. 정말 묻는다고 곧이곧대로 대답해 줄은 몰랐던 힐데는 윤이 진심으로 자신의 상대가 되어주겠다고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왜? 라는 질문이 혀 끝까지 치밀었으나, 힐데는 지금 윤과의 대화에 집중하기로 했다.

처음에 한 걱정들과 다르게 윤과의 통화는 꽤 단순했다. 지금의 자신에 대해 말해보라는 것과 같이 윤에게 저 자신을 숨 쉴 틈도 없이 말하는 그런 부담스러운 대화가 아닌, 근래 있었던 일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물론 상대는 청자의 입장에서 제 얘기를 들어주는 역할이었지만, 중간중간 맥이 끊기지 않게끔 덧붙여주는 대답들로 인해 힐데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통화가 지속됐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흘깃 본 폰 화면의 시각이 11시 3분임을 알렸고, 통화를 1시간 이상 했다는 것에 화들짝 놀란 힐데는 윤에게 곧장 사과했다. 하지만 윤은 의외로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으로, 이제 씻고 자야겠다며 곧 통화를 종료했다.

"나도, 자야 하는데."

힐데도 별 다른 생각 없이 화면이 꺼진 폰을 늘어뜨리며 눈을 깜빡였다. 겁도 없이 용감하게 윤에게 통화를 걸 당시에 실은 내심 굉장히 긴장했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당연히 긴장 해야하지 않을까. 힐데는 평소의 최윤이 보이는 태도를 생각하며 자기 자신을 납득시켰다. 그래도 생각보다, 괜찮았지… 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아. 지금이라면 잘 수 있을 것 같아. 힐데는 자연스럽게 눈을 감으며 수면의 늪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리하야 오랜만에 잠에 빠져들어 맞이한 아침에 기상해버린 힐데는 경악하고 말았다.

정말 효과가 있는 거였어?

*

"그런 이유로, 윤에게 도움을 받고 있었습니다."

힐데는 아미가 오해하지 않도록 천천히, 하나씩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본인이 잠이 들지 못 하는 '가벼운' 컨디션 난조를 겪으면서, 윤의 소개로 상담을 받게 되었고 그에 더불어 윤과의 통화를 통해 컨디션이 많이 회복된 상태라는… 덜 건 덜고 줄일 건 줄인 소문의 진상을 말이다. 여기까지 와서 자신의 비밀을 숨길 생각은 없었다.

아미는 고맙게도 다소 정돈되지 못 한 자신의 이야기에도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제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아미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생각이 다 정리된 듯 꾹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힐데가 불면증이 올만큼 안 좋은 상태였고."

"……"

"그걸 알아챈 오빠는 우리에겐 일언반구도 없이 힐데의 상태를 비밀로 만들었고."

"……"

"오빠와 밤낮없이 통화를 하며 힐데의 불면증이 나았다는 거야?"

힐데는 상담 선생님의 노력과 치료용 약물의 도움이 있었다는 소리를 덧붙이고 싶었지만, 아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틀릴 게 없었지만, 조금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바로 반박하기엔 비밀로 부쳤다는 부분이 상당히 양심에 찔려 힐데는 입을 닫아버렸다. 거기에 아직 통화 연결 중인 제 사수께서도 말이 없으신데. 그런 기묘한 침묵 사이에 아미는 정체 모를 확신을 내리고선 일갈했다.

"힐데!"

"네, 네?"

"왜 나한테는 도움을 안 받는 거야? 나는 의지가 안되는 거야? 나도 힐데랑 하루종일 통화할 수 있엉!"

힐데는 순간 멍해진 정신에 할 말을 잃었다. 아미가 지금 불만이 표하고 있는 부분은 자신도 힐데에게 도움이 되지 못 할 정도로 의지가 되지 못 하는 것이냐라는 논지였다. 그럴 리가요. 힐데에게 있어서 아미는 소중한 선임이자 빛과 소금이었다. 이렇게 귀하고 따뜻한 마음이 제게는 너무도 벅차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뇨, 저는 아미에게 이미 너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말씀드리지 못 한 건 이 이상으로 부담을 드리기 싫은 제 욕심이었습니다."

"힐데…."

[오히려 모두에게 사실을 공개했다면, 내 부사수께선 끝까지 괜찮은 척 했겠지.]

그것 참, 부정도 못 하게 말씀하시면. 어디까지나 제 고집으로 지켜진 비밀이었고, 거기에 누구께서 굳이 들춰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불면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지 몰랐다. 거기에 대해서는 윤에게 조금 많이, 아니 매우 많이 감사함을 느끼고 있었다. 사실 다른 이들에게 도움을 청한 뒤 똑같은 방식으로 이야기를 꺼내라고 하면 지금보다 더 어려웠을지 몰랐다.

윤과의 통화는 참 간단했다. 제가 시간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걸어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꺼냈고, 대개는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남들이 보면 그게 대화냐고 반문할 수 있었지만, 힐데에게 있어서는 윤은 정말 괜찮은 청자가 되어주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느끼는 감정들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예전의 기억들이 주는 감정들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그런 것들을 덮고서라도 느끼는 것들이 분명 오늘 하루에는 존재했다. 예현을 만나서 느끼는 기쁨. 릭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끼는 당황스러움, 즐거움. 카이로스의 아드레날린 정키력에 드는 고질적인 걱정, 지금 이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밤하늘의 별들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사소한 일상을 자연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렇게 보낸 시간들은 발목을 죌 정도의 무거움 따윈 없다는 듯 가벼웠고, 덩달아 그 시간만큼 에선 다른 것들을 잠시나마 덜어낼 수 있어 말하는 자신마저 가벼워지는 느낌이었다.

"감사합니다. 윤은 정말 끝까지 저와의 약속을 지켜주셨어요."

[…그래. 평생 두고두고 기억하며 나에게 은혜를 갚아.]

"그 정도였습니까?"

[난 일 때문에 끊는다.]

뚝.

언제나와 같이 제멋대로 통화 연결이 종료되었다. 까매진 화면을 아미에게 보여주며, 항상 이런 식으로 끝났다며 장난스럽게 투덜댔다.

"그리고 아미는 언제든 전화해도 좋습니다. 이런 것에 도움이라 이름 붙이기도 과한 걸요."

얼마 전에도 얼굴을 마주했던 힐데의 얼굴은 어땠더라. 아미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돌이켜서 그 눈빛을 곱씹어보자면 어딘가 피곤함이 어려 보이는 얼굴. 하지만 자신을 반기는 얼굴에서 보여주는 기쁨이 너무 커서 크게 눈여겨보지 않았다. 조금 분했다. 오빠는 알아본 것을 자신은 놓쳤다는 점이. 아미는 조금 불퉁해진 얼굴로 힐데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힐데는… 나쁘지 않았다. 일부러 괜찮다 숨기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정말 괜찮아서 더욱 제게 미안해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래. 그럼 괜찮겠지. 아미는 힐데가 지금 편히 웃을 수 있는 사실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미는 자신이 무언가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다 아! 하고 탄식을 흘렸다.

"힐데. 사실은 소문처럼 정말 사귀는 상대가 없었고? 심리 상담 치료의 일환으로 오빠의 도움을 받은 와중에 오해를 받은 거네."

"네. 맞아요. 맞습니다."

"이제 힐데가 왜 그런 오해를 받았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이거… 괜찮을까, 힐데?"

이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소문은 힐데의 '연애'에 주목한 게 아니었다. 그 무엇보다 이목을 끈 건 힐데의 연애 '상대'였다. 배저들 사이에서도 꽤 핫한 감자였던 이 소문. 힐데 본인이 해명하는 것은 좋았다. 사실 힐데가 소문처럼 연애를 한다고 해도 그럭저럭 괜찮게 마무리 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힐데가 지금 소문의 종착지로 밝힌 사람이 '최윤'이라니. 아미는 자신도 지금 오빠가? 라는 반문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은 오죽하겠는가.

"어떤 점이 큰일인 겁니까?"

"우리 오빠는 누구를 위해 밤낮 없이 할 거 없이 사람을 챙겨줄 사람이 아니야."

"…그,렇군요?"

혈육에 대한 평가가 더 없이 냉철했다. 그런데 자신을 도와준 것은 사실인데. 아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힐데는 감히 윤이 다른 배저를 위해 시간 가릴 거 없이 통화를 받아주며 잠자코 말을 들어주며… 가끔은 웃기도 어이없어하기도 하며 그렇게 대해준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건 좀 이상할 것 같은데. 힐데는 잠시 찡그린 눈가를 의식하며 아미에게 긍정했다.

"이상하네요."

"그치. 그래, 힐데. 차라리!"

"차라리?"

"마틴이랑 연애한다고 하자."

신박한 아미의 아이디어에 힐데는 웃으며 감히 AI 성애자의 길보다는 감히 사수 최윤에게 사랑받는 부사수 힐데베르트가 되기로 결정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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