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루버틴] 용기

드루비스 x 버틴

드루비스는 버틴을 사랑할지도 모른다.

동경? 선망? 연모? 이 감정에 어떤 단어를 붙이든 드루비스는 그걸 부정할 수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믿어주고 손을 내밀어준 버틴을 동경한다. 타인을 위해서라면 위험에 뛰어드는 버틴을 선망한다. 모두에게 친절하여 닿고 싶은 버틴을 연모한다. 하지만 드루비스는 이 모든 것을 인정하기엔 겁쟁이였다. 버틴을 따라다니기만 했을 뿐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드루비스는 버틴과 떨어지고 싶을지도 모른다.

미래를 함께하자는 약속을 지키고 싶다. 버틴의 손을 잡고 웃으며 나아가고 싶다. 좋아하는 차를 알려준다거나 숲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본다거나, 하고 싶은 건 많았지만 돌아보면 드루비스가 먼저 버틴에게 제안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많이 변한 도시를 소개해주는 것도,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전부 버틴이 알려준 것들이었다. 일방적인 애정에 드루비스는 속이 거북하다. 지금도. 분명 앞으로도 그러겠지.

드루비스는 자신이 지쳤다는 걸 인정한다.

친절했던 사람들도 버틴이 없을 때면 못 볼 걸 봤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때로는 마녀가 나타났다며 우리 마을을 불태울 것이라며 돌을 던지는 사람들도 있었다. 숲에서 사는 이상한 여자라며, 숲에 들어간 아이들이 사라지는 일이 있었을 땐 드루비스의 오두막을 태웠다. 저 마녀가 아이들을 잡아먹은 것이 틀림없다면서. 익숙했다. 평생 당해온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달콤한 오아시스를 발견한 뒤에는 이 모든 것들이 다시 괴로워졌다. 버틴은 그런 존재였다. 마녀라 불리는 자신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했던 버틴을 보고 싶었다.

드루비스는 마지막으로 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사람이 그리웠기에. 버틴을 못 만난 지 벌써 한 계절이 지났기에. 걱정됐다. 아니, 사실 두려웠다. 자신을 두고 떠나버렸을까 봐. 재미없는 자신에게 실망해서, 겁쟁이인 자신을 한심해해서 질린 게 아닐까 싶어서.

밤늦게 오랜만에 찾아간 마을은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소리치고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거 같았다.

"찾아!"

"찾으면 바로 불태워버려!"

"저쪽에서 봤대!"

"그 마녀의 집을 뒤져!"

웅성웅성, 마을의 남자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살벌한 말을 한다. 누구를 찾는 건지 죽여버리겠다는 고함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을하는데

아,

눈이 마주쳤다.

"마녀다! 잡아!"

드루비스를 발견한 남자가 일렁이는 불꽃을 들고 뛰어온다. 모두를 감싸주던 숲, 아낌없이 주던 숲, 버틴과 처음 만난 숲, 숲을 태워버린 불, 모두를 집어삼킨 불, 혼자만 남게 만든 불. 숨이 막혔다. 잡아먹힐 거 같아서, 그들처럼 새까맣게 스러질 거 같아서. 목에 드리우는 죽음의 공포가 드루비스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악마들이 자신을 붙잡으려 손을 내미는데도 드루비스는 움직이지 못했다. 그래, 이대로 그냥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모든 걸 포기한 채 가만히, 가만히…

도망쳐.

지금 바로.

뛰어, 드루비스!

누군가가 소리친 것도 같았다. 스쳐 지나간 바람이 전해준 걸까. 메두사의 시선에 당한 것처럼 굳어버려 꼼짝도 하지 않던 몸이 풀려났다. 목소리를 따라 뒤돌아서 어둠으로 뛰어 들어간다.

가지가 얼굴을 찌르며 상처가 난다. 얽혀있는 풀들이 방해한다. 언제나 길을 비켜주는 것 같던 자연이 드루비스를 거부한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살고 싶었던 걸까, 죽고 싶지 않다는 감정으로 머리가 가득 찼다. 시야를 가리는 눈물을 팔로 닦으면서도 멈추지 않고 달린다.

버틴! 버틴! 보고 싶어요… 어디 있나요? 제발….

추워서 걸쳤던 숄은 어딘가에 떨어졌다. 구두도, 모자도. 그녀에게 남은 거라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찢어진 드레스와 숲을 헤매며 상처 입은 발뿐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는다. 숲도 거칠게 풀을 꺾으며 달리는 자신을 막지 않았다. 얼마나 뛴 건지, 얼마나 깊게 들어온 건지 모르겠지만 더는 뛸 수 없었다. 숨을 몰아쉬면서 천천히 비틀비틀 걸었더니 거대한 나무 밑에 기대고 있는 누군가가 보였다.

"버틴!"

"…드루비스 씨. 좋은 밤이네요."

평소 입던 고급스럽고 잘 다려진 양복이 아니라 도망쳐 나온 듯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음에도 버틴을 한눈에 알아봤다. 버틴의 갈라진 목소리에 드루비스는 급하게 다가갔다.

"보고 싶었어요. 괜찮으신가요?"

"아무 말 없이 떠나서 미안해요. 드루비스 씨야말로 괜찮은 건가요? 상처가…"

버틴의 차가운 손이 드루비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매만진다. 여전히 당신은 상냥하네요. "심호흡, 들이마시고… 내쉬고…" 꽉 안아준다. 차갑지만 뜨겁다. 모순적인 감각에 버틴의 품에 힘을 빼고 안긴다. 다정한 토닥임에 불안하게 뛰던 심장이, 덜덜 떨리던 손이, 답답하던 속이 조금씩 진정된다. 엉망진창이던 몸이 제자리를 찾아가자 감정이 널뛴다. 눈물이 흐르지만 닦을 생각도 못 하고 그저 버틴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네요, 감사해요."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

버틴의 왜소한 체형과 앳된 목소리에 문득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안겨있던 건지. 겨우 품에서 벗어나 물어보지 못했던 걸 우다다 쏟아낸다.

"어떻게 된 건가요? 무슨 일이 있던 거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이 피들은 대체…"

"아… 음, 별건 아니에요."

대답하기 싫은가요?

이런 걸 물어보는 게 곤란한가요?

눈을 피하며 대답을 꺼리는 버틴을 보니 그를 만나 들떴던 마음이 점차 식었다. 평소에도 그렇게 말을 많이 하던 사이가 아니었지만 오늘은 더더욱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드루비스는 자신의 앞에 거대한 벽이 세워진 것만 같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절대 무너지지도 그 두드리는 소리도 전해지지 않는 그런 벽이…

두드리긴 했던가? 그저 까끌까끌한 벽에 손을 한번 올려보고 단념하고 돌아간 건 아닐까? 이 벽이 얼마나 두꺼운지, 얼마나 길게 세워져 있는지 확인이라도 했던가? 겁쟁이, 마녀, 괴물… 드루비스를 옥죄던 말들.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알려주세요."

"…."

"버틴."

재차 버틴을 불렀다. 피범벅이 된 망토로 얼굴을 가리려 한다. 어디를 다친 건지,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지. 불을 들고 달려오던 이들이 생각났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버틴의 상처를 지혈하고 강제로라도 일으켜서 안전한 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그는 그것도 원하지 않는 거 같았다. 빛이라곤 달빛밖에 없는 이 어두운 숲에서 유난히 잘 보이는 버틴의 눈에는 드루비스가 비치지 않았다. 다 포기하고 싶다는 감정밖에 담겨있지 않았다. 쫓길 때의 드루비스처럼.

한 발짝.

딱 한 발짝만이라도 내디딜 수 있는 용기를 주세요.

버틴을 위해서, 그리고 저를 위해서.

마주 보고 버틴의 어깨를 붙잡던 드루비스가 손을 떼더니 버틴의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포기하고 떠나거나 아니면 실망이라고 화를 내거나. 어쨌든 버틴에게는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그래, 항상 드루비스는 겉모습과는 다른 행동을 하곤 했다. 예의 바른 얌전한 듯한 얼굴을 하고선 맨발로 나무 위를 올라간다거나. 겁먹은 것처럼 숨을 몰아쉬다가도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상대를 벙찌게 만든다거나, 요즘 말로 그는 행동파였다. 그 누구보다도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저 계기가 없었을 뿐. 버틴에게 드루비스란 언제나 배우고 싶은, 본받고 싶은 어른이었다. 지금도.

“걱정했어요.”

“…네.”

“사람들이 버틴을 찾고 있는 거 같더군요.”

“….”

“어쩌다가 이렇게 많이 다친 건가요?”

“그건…”

“상처 보여주세요. 알잖아요, 저 이런 거 치료 잘하는 거.”

어지럽다.

울렁거린다.

피를 많이 흘려서일까, 이 과분한 애정에 더욱 고개를 숙였다. 드루비스와 맞닿아있는 팔이 따듯하다. 기다려주고 있구나.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여기 계속 있을 생각이구나. 무릎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시야를 차단한다. 이러다 죽더라도 드루비스에게만큼은 들키고 싶지 않아서. 마녀라 불리던 드루비스가 상처를 받을까 봐, 자신에게 실망할까 봐. 서로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엇갈리고 침묵을 만든다.

계속 피 냄새가 퍼진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 정도로 진하게 난다는 건 버틴의 상태가 생각보다 더 안 좋다는 뜻이기에.

“버틴.”

조용하다.

“버틴.”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버틴!”

조금 차갑던 몸이 이제는 얼음을 만지는 것처럼 시릴 정도다. 아무리 밤바람이 차다고 해도 이건 정상적인 체온의 범위를 벗어났다. 버틴, 괜찮나요? 마음만 같아서는 버틴을 업고 뛰고 싶지만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 버틴은 드루비스가 오고나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그렇겠지. 잘못 움직였다가 상처가 벌어질 수도 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버틴을 깨워서 응급처치라도 하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사람을 불러와야 한다.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상처로 피투성이가 된 발이지만 어떻게든 해야 한다. 소중한 사람을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매마른 입술을 뜯었다. 버틴, 정신 차려 봐요.

“…아.”

깜빡깜빡.

초점이 맞지 않는다. 눈을 뜨기도 힘들어 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앉아 있던 버틴이 나무를 짚으며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피가 잔뜩 묻었다. 버틴의 검은색 망토는 얼룩을 가렸지만 울컥 쏟아져 내리는 피를 숨기지는 못했다.

“버틴, 어디 다쳤어요. 얼른 보여줘요.”

“…괜찮아요.”

드루비스를 뒤로한 채 몇 걸음 걸어가다가 주저앉는 버틴을 겨우 붙잡았다.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안 알려주는 건가요, 제가 싫으신가요?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요? 그때의 상냥함은 한순간의 변덕이었나요? 역시 제가 마녀라서 그런가요?”

“아니야! 아니… 아니에요. 당신이 마녀라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 제가 가족들을 잡아먹고 혼자만 살아남은 괴물이라서 그런가요?”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숲을 울린다. 드루비스는 울고 있었다. 바닥에 후두둑 비처럼 눈물이 떨어졌다.

“제가… 제가 괴물이라서 그래요.”

먹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두컴컴한 숲에 비가 쏟아진다. 빛 하나 없는 숲인데도 버틴의 눈은 짐승처럼 빛났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이걸 밝히기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입술에선 피가 송골송골 맺혔지만 버틴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드루비스 씨가 그런… 일을 당한 건 저 때문이에요. 제가 괴물이라서….”

“….”

“이걸 가지고 가요. 괴물은 죽었다고. 이제 밤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드루비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버틴은 신경 쓰지 않고 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건네주었다. 피가 잔뜩 묻은 손이 드루비스의 손을 스쳤다. 그러곤 드루비스의 등을 밀었다.

“…저를 잊어버리세요.”

드루비스는 순순히 밀렸다. 숲은 드루비스를 빨아들인 것처럼 한순간에 모습을 지웠다.

실망했겠지. 이런 내가 혐오스럽겠지. 진짜 괴물은 자유롭게 인간들 사이를 누비고 다니고 인간은 괴물이 되어 박해받았으니까. 그리고 그걸 방치했으니까. 그들 사이에서 어울릴 수 있게 도와줄걸. 이제 와서 후회가 몰려온다. 한순간에 돌변하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입가의 피를 닦는 자신을 보고 공포에 빠지던 표정이 생생하다. 괴물이지만 온기가 그립다. 괴물도 혼자서는 살지 못한다. 그래서 정체를 숨겼다. 드루비스에게도.

드루비스의 공허하던 눈이 잊혀지지 않는다.

모두를 잃고 나서 마음을 닫아 아무도 믿지 못해 경계하던 첫 만남이.

몇 번 만났더니 해코지를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는지 안심하던 표정도.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던 그 눈에 자신이 담기던 순간도.

떠나려는 자신에게 다음에 또 와달라고 꽃을 선물하던 일도.

혼자 의자에 앉아 달을 쳐다보며 외로워하며 자신의 이름을 부르던 그날의 밤도.

버틴은 드루비스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놓고 드루비스에게 잊으라고 하는 건 너무나 이기적인 말이라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아까의 나무 밑으로 갔다. 드루비스를 처음 만났던 나무다.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이제 상관없는 일이다. 잘 갔을까.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비에 몸이 젖어 춥게 느껴졌다. 따듯한 품이 그립다. 이렇게 죽으면 시체가 남을까. 타올라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동포들이 부러웠다. 드루비스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찰팍.

예민한 귀는 젖은 나뭇잎을 짓밟는 발소리를 들었지만, 눈을 뜨지 않았다.

차라리 태워줬으면 해서. 조금 아프겠지만 아무것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찰팍.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 버틴은 눈을 뜨지 않았다.

드루비스가 보고 싶다. 혹여나 해가 갈까 찾아가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찰팍.

바로 곁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겠지. 욕심이다. 제멋대로다. 원망의 말을 들을 줄 알았지만 드루비스는 아무 말 없이 떠났다.

괴물이니까. 괴물은 싫겠지. 배신당한 기분이겠지. 미안해요, 다음에는…

“…틴….”

누군가 버틴을 흔들었다.

“버틴.”

“…드루, 비스…?”

드루비스가 다시 돌아왔다. 단정하던 머리는 다 풀리고 비에 젖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헛것일지도 몰라. 주마등일지도. 그냥 그리워서 만들어낸 환영이겠지. 눈을 다시 감았다.

“날 물어요.”

헛것이 아니었다.

“다 들었어요. 버틴 씨가 피를 먹는 괴물이라는 걸. 회중시계를 들고 갔더니 좋아하더군요. 드디어 괴물이 사라졌다고. 아가씨 마녀인 줄 알았는데 일부러 괴물을 사냥하려고 혼자 지냈던 거냐고.”

“….”

“피를 먹으면 전부 다 회복한다던데요.”

“….”

쏴아아 하는 빗소리가 목소리를 삼켰지만 버틴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드루비스는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울었다. 겨우 그거였냐고. 그거 때문에 자기를 밀어낸 거냐고. 화내고 원망하고 끝에는 버틴이 보고 싶어서 울었다. 버틴이 괴물이건 아니건 상관없었다. 그냥… 그냥 곁에 있어 줬으면 해. 계속 함께하고 싶어. 용기를 냈다. 한 발짝 나아갔다.

“눈을 떠요, 버틴.”

드루비스. 그러지 마요.

“당신에게 ‘내일’을 줄게요. 당신도 제게 ‘내일’을 주세요.”

드루비스.

“날 물어요.”

드루비스는 버틴을 끌어안으며 입가에 목을 댔다.

망설이던 버틴은 결국 드루비스에게 이를 박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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