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편

비화_0

프롤로그

비화(秘話):

1.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

정오를 훌쩍 넘긴 늦은 밤, 달도 빛나지 않는 밤하늘 아래 작은 빛이 어둠을 희미하게 뚫고 빛나고 있었다. 적막한 랩실 안은 풀에 지쳐 책상에 기대 잠든 몇몇 대학원생들의 숨소리와 코 고는 소리가 근근히 들려왔다. 와중에 구석 책상에 틀어박힌 한 남자 역시 약간 기울어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그는 아직 깨어 있는 셈이었는지 도로록, 하고 연필을 굴리며 자신의 논문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버크 섬 헤어리 훌리건 부족의 문화 분석>

- 김준수

그렇게 한참을 책상 위에서 연필을 굴렸다. 경사 때문에 다시 철새처럼 되돌아오는 연필을 또다시 손가락으로 밀어내다가, 한숨을 푹 쉬곤 별안간 자신의 연필을 집어들어 손장난 겸 휘리릭 돌리기 시작했다.

"··· 엇."

그러다 결국엔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먼지 가득한 책상 아래로 연필이 딸그락 소리를 내며 추락했다. 역시 이런 자잘한 소음엔 의식도 하지 않는 동기들을 쳐다보며 아래로 팔을 뻗었다.

연필과 함께 딸려나온 것은 먼지 한 뭉텅이와 언제 떨어뜨렸는지 모를 버크 섬의 지도 사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4개월 전, 버크 섬으로 향했을 때였다. 김준수는 방금 딸려나온 먼지뭉텅이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먼지와 썩은 나무 잔해를 치루는 고된 노역을 감수해야 했었으나, 그 일엔 그만한 대가가 딸려나오는 법이었다. 종이들이 거의 한 몸이 되고 흑탄도 세월에 번져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의 망가진 수첩이었으나 그것 역시 고귀한 중세 바이킹들의 유물인 셈.

그때의 김준수는 끙끙대며 그것들을 간신히 다른 종이에 대략적으로 그려냈다. 이미 붙어버린 종이는 강제로 떼어낼 수 없고, 종이가 찢어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어 신중에 또 신중을 고했던 작업이었다. 그렇게 몇 십분을 달라붙은 종이와 사투하다 보니 어떤 기이한 생명체 낙서 몇 장과 숲을 대충 휘갈겨놓은 그림, 그리고 버크 섬 일부의 지도 같은 것을 그려내게 되었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버크 섬에는 신화의 생명체들을 숭배하는 부족의 기이한 문화를 제외하곤 그다지 유별나지 않은 섬이었다. 그 당시의 사람들간의 문화와 교류 흔적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섬이었고, 지도에 새겨진 낙서를 따라 얼기설기 자란 나뭇가지를 헤치고 목적지에 다다랐음에도 거대한 바위덩어리(아마 시간에 의해 무너졌을 것이었다)가 모든 것을 파묻어 더 이상 자료 수집도 어려웠다. 마치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것처럼,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버크 섬의 부족은 전염병으로 사멸했으리란 가설이 학계에서 가장 유력했으나, 병에 대한 어떤 기록도 없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어째서 기록을 남기지 않았나. 어째서 신화 생물, 즉 용의 머리를 각자의 집에 달아놓았나.

이상한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닌 섬이었다. 그러나 이대로라면 아무런 소득 없이, 아예 없던 일로 되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었다.

김준수는 지도 사본을 가만히 바라보다 파일에 아무렇게나 끼워놓고 기숙사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맡겼다. 버크 섬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더 이상 추적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다. 그렇게 궁금증을 내쳐버리고 불편한 베개에 머리를 묻었다. 조만간 그의 관심은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이었다. 버크 섬은 잊어버린 채.

그리 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점점 짜증이 났다. 왜 그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가 미처 찾지 못한 부분이 있었을까. 석사가 된 지 오래 된 김준수도 이번 일은 자꾸 신경에 거슬렸다. 다음에 간단한 팀을 꾸려서 한 번만 더 찾아보자. 딱 한 번만 더.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Non-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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