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알버] 글로그 모음

[라이알버] 시간의 틈새에서

2022.08.23 백업 로그

* 틱택토 본편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와 외전 소설, 스케이프 고트의 스포일러가 존재합니다.

* The World 이후의 시점입니다.

* 과거의 알버트가 미래의 라이오넬과 만나고, 미래의 알버트가 과거의 라이오넬과 만납니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가 미래로 가는 꿈.

- 1865, 저택에서, 알버트 A. 윌프레드.


실상 둘 사이를 가로막는 거대한 아침에 있어, 노크란 큰 의미가 없었다. 노크 소리를 들으면 듣는 대로, 못 들으면 못 듣는 대로 여러 변명을 꾀하며 단 5분이라도 더 침대에 누워있고자 하는 게,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의 환자였다. 그렇다고 노크 없이 들어가면 트집 잡을 일을 만들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라이오넬은 그의 주치의가 된지 벌써 삼 년여 쯤 흐른 오늘도 노크를 잊지 않는다.

똑똑.

“알버트, 일어났냐?”

평소처럼 평범하게 대답이 없다. 그는 익숙하게 잔소리를 꺼내들며 문을 열었다.

“너 이 자식, 지금이 몇 시인데 아직까지도 잠을…….”

그런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알 수 없는 괴리감이 그를 엄습했다. 무엇이, 어떤 부분이 이상한 거지? 라이오넬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예리하게 주변을 훑었다. 잘 정돈된 방 안, 침대 옆 협탁에 고스란히 놓인 두꺼운 책, 벽난로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아 적당히 따뜻한 공기, 커튼 너머로 스며드는 햇살, 그리고 침대 위에 이불을 돌돌 싸매고 웅크린 채 아직 꿈나라인 환자.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의 위화감은 결코 라이오넬의 눈썰미를 벗어날 수 없었다. 라이오넬은 침대 위의 이불 덩어리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어 잘 보이지 않지만, 확실한 건 번데기 같은 이 덩어리의 부피가 평소보다 작다. 설마 시저인가?……라고 생각하기엔, 그는 오는 길에 이미 시저를 마주쳤다. 그렇다고 이 병약한 남작님이 서재에서 불편하게 잠들진 않았을 터였다. 지난 밤, 늦게까지 잠들지 않으려고 떼를 쓰는 유치한 남작님을 침대 위에 억지로 눕혀 재운 건 다름 아닌 그였으니까. 만일 중간에 깼다면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무턱대고 서재로 향할 수는 없었다. 저 작은 부피의 이불 속에 공기가 있는지, 본인이 있는지는 확인하고 가야될 것 아닌가.

“해가 중천에 떴다. 얼른 일어나.”

잔소리에, 이불이 작게 꾸물거린다. 잠에 취한 목소리-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듯한-가 신음하는 것도 들려왔다. 그럼 그렇지. 그냥 평소보다 몸을 더 웅크리고 잔 모양이다. 방이 추웠나? 또는 오한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건조한 공기에 목이 타서 반사적으로 움츠렸을 수도. 본인에게 상태를 물어보고 조치를 취하든 해야겠다. 그런 생각에 라이오넬은 우선 이불을 들췄다.

……그러나, 이불 속에 있는 건,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남작이 아닌, 웬 소년 한 명이었다.

라이오넬은 일순 당황하여 이불을 걷은 채로 멈췄다. 공기가 얼은 듯한 침묵이 지나고, 라이오넬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우선, 이 소년의 신원부터 알아내야 했다. 라이오넬은 분석하듯 소년의 모습을 눈으로 뜯어보았다.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칼 아래로 기다란 속눈썹이 늘어져 있었다. 유령처럼 새하얗고 창백한 피부는 푸른 핏줄을 그대로 내비쳤다. 살짝 미간을 좁힌 표정이 예민함을 드러냈고, 숨소리조차 고요했다. 라이오넬에게는 익숙한 외양의 소년. ……그러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소년은 굉장히, 아주 굉장히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를 닮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숨겨진 자식이라거나? 하지만 기껏해야 십 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이 소년이 그의 자식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만한 아이가 있는 게 자연스러운 나이가 되려면 그가 앞으로 십 년은 더 살아야 할 터.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그를 그대로 축소시킨 것만 같은 소년이 나타났단 말인가. 우선 라이오넬은, 일어날 기색이 없는 소년에게 다시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당장 집사와 메이드를 호출해 알버트의 행방을 찾게 했다. 머지않아 들려온 답은, 저택 내 외부를 아무리 둘러봐도 그가 보이지 않으며, 밖으로 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무슨 일이냐며 묻는 니나에게, 라이오넬은 두 사람이 그를 찾는 사이에 그가 침실로 돌아왔다며 적당히 둘러댔다. 윌프레드 가에 머무르는 동안, 알버트를 제외한 타인에게는 결함 없이 번듯한 모습으로 대한 덕분인지 다행히도 별다른 의심 없이 넘어갔다.

그렇게 하여 다시 원점. 라이오넬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었다. 소년은 여전히 조용한 낯으로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이 소년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해결되지 않는 의구심 속에, 라이오넬의 눈에 들어온 건 소년의 차림새였다. 어디에서 많이 보았다 했는데, 기억 속을 더듬어보니 기숙학교에서 제공했던 잠옷이다. 행방이 묘연한 알버트. 그의 침대에 나타난 소년. 꼭 빼닮은 외모와, 익숙한 의복. 비현실적인 사고를 끔찍이 경계하는 라이오넬이었으나, 이 모든 지표가 가리키는 건 비현실 그 자체였다.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났을 리가. 분명 꿈을 꾸는 게 확실했다. 그리 생각하며 손등을 꼬집어봤지만, 통증은 아주 생생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조금 더 그럴듯한 가정은 없을까.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만한.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건으로만 굴러가진 않는다. 종종 초자연적인 일이 일어나곤 하지. 그때가 바로 지금이라는 걸, 라이오넬은 소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깨달았다.

“자, 잠깐……. 여긴…….”

아직 한참 앳된 목소리.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라이오넬은 잠시간 멍하니 소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고독을 바라보는 청회색 눈동자. 슬픔이 맺혀있는 아름다운 눈. 틀림없이, 열다섯 살의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넌 누구지?”

잔뜩 경계하는 목소리가 그 작은 입술로부터 흘러나왔다. 기숙학교 시절에도 알버트의 몸집이 왜소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에 이르러 다시 보니 왜소한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종잇장 같았다. 툭 건드리면 픽 쓰러질 것 같은 인상. 이런 몸으로 잘도 성인까지 컸군. 새삼스러운 경이로움에 라이오넬은 대답도 잊고 한숨 쉬듯 웃었다. 그런데 이 꼬맹이, 표정이 이상하다. 처음에는 잔뜩 경계하는 얼굴이더니, 이내 무언가 고심하는 듯 눈을 굴리다가, 이윽고 초탈한 표정이 되었다. 보나마나 자신의 눈앞에 있는 초면의 남자에 대해 생각하다가 제멋대로 납득하고 결단을 지은 모양이었다. 또 웃기지도 않는 얘기겠지. 그리고 그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나는 네가 누군지 알아.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의 사주를 받았거나, 그로부터 병약하기 짝이 없는 어린 남작님이 엄청난 재산 위에 군림하고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해코지하기 위해 온 거겠지. 맞아, 날 때부터 사형 선고를 받은 내가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라이오넬은 참지 못하고 알버트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별안간 머리를 엄습한 통증에 알버트는 체면도 잊고 “아!” 소리를 지르며 아파했다. 알버트는 억울했다. 분명 자신이 잠든 장소는 기숙학교의 의무실 침대였는데, 눈을 떠보니 자신의 집인데다 눈앞에는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을 꼭 닮은 남자가 있어 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본 결과를 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자신이 떠올린 가정은 제법 그럴듯하며, 사실일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뜸 꿀밤을 맞았다. 그것도 꽤 아프게. 그는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잘 정돈하여 넘긴 밝은 갈색의 머리칼 아래로 적갈색 눈이 빛나고 있었다. 훤칠한 키와 듬직한 어깨, 잘생긴 얼굴, 불퉁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표정까지. 그야말로 라이오넬이 어른이 된다면 그런 모습이라고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남자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 본인일 리 없잖은가! 이게 꿈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프게 맞은 꿀밤 때문에 이 상황은 꿈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그 탓에 더욱 억울해졌다. 위로는 누나밖에 없다던 그에게 형이 있을 리 만무했다. 또한 아버지라기엔 너무 젊어보였고, 그렇다면 역시 그가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친인척이 아닐까 생각했거늘. 저 재수 없는 얼굴은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표정으로 ‘틀렸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뭔데? 누구라는 말인데? 라이오넬은 분명 자신이 싫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와 신분, 재산을 탐내는 것만 같았지. 그러니 이런 일은 자연스러운 걸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초연하게 받아들이려고 했는데……. 그런데 역시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알버트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자신이 있는 장소를 보라! 자신의 저택이다. 그것도 침실, 침대 위이지 않은가! 만일 라이오넬이 사주한 자라면 좀 더 면밀히 일을 처리했을 것이다. 이를 테면 학교에 몰래 잠입해, 자신을 밖으로 유인해내고 살인하여 산에 묻어버렸겠지. 그렇게 하면 본인은 실종된 걸로 널리 알려질 테고 아무도 찾지 않을 거였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저택이었다. 굳이 저택을 무대 삼아 자신을 해치려 든다는 건, 기숙학교보다 저택의 구조가 익숙한 자이며, 이 저주받은 저택에 얽힌 사연을 잘 아는 이였을 것이다. 자신의 주변에 그런 사람이 분명 있지. 그리고, 남자의 말이 곧 확신을 주었다.

“난 자객도, 널 데려갈 사신도 아니야.”

“……그렇다면 순순히 정체를 밝혀.”

“네 주치의다, 이 자식아.”

“난 너 같은 주치의를 고용한 적 없어.”

“아니? 있어.”

역시. 고모님 내외가 서명을 위조해 고용한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지금 고모님 내외의 사주를 받고 자신을 해하려 한다……. 그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었다. 잠시 맥이 풀렸다. 죽음이 서린 이 저택에서 결국 목숨을 거두게 되는 건가. 언제나 준비는 되어있었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이렇게 그럴듯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씁쓸했다.

“아!”

알버트는 자신의 머리에 불이 나는 것 같은 통증에 다시 또 소리를 질렀다. 벌써 두 번째 꿀밤이다. 이 남자 뭐야? 알버트는 반항적인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는 어느새 불퉁스러운 표정을 넘어서서,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오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해파리를 보는 듯한 시선……. 재수 없어 죽겠다. 정말이지 라이오넬을 꼭 빼닮았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마한 머리로 좀 예쁘고 행복한 상상은 못 하는 거냐?”

사사건건 말하는 꼴하며. 라이오넬의 현신 그 자체다.

“……고모님 내외가 널 고용했지? 그런 거지?”

알버트의 뾰족한 목소리를 들은 라이오넬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하는지 까마득했다. 자신은 일단 눈앞의 소년이, 어떤 불가사의한 이유로 미래의 자신과 맞바꿈 된 알버트라는 걸 파악했지만-물론,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이해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날 수 없으니까-이걸 이 꼬마 알버트한테 뭐라 설명할지가 문제였다.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는 공상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남자이기도 하니 말이다. 결국 라이오넬은 주치의로서 본인이 해야 할 소임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시죠, 남작님.”

“남작님이라 부르지 마.”

라이오넬은 알버트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며 이불을 완전히 걷어버렸다.

“산책부터 갔다 온 다음에, 씻고 식사하도록 해.”

네가 뭔데?

딱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알버트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라이오넬은 꿀밤을 먹일 요량으로 주먹을 다시 들었으나, 알버트가 움찔하는 것을 보고 다시 주먹을 내렸다.

“좀 고분고분해져 봐라. 어째 어릴 때가 더 말을 안 듣는 것 같지?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남작님이 이런 녀석이었나? 이것 참 감회가 새로워.”

“난 너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데, 넌 나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군.”

또렷하고 힘이 들어간 목소리. 자그마한 주제에 남작이라고 또 위엄 있게 말하려 애쓴다. 그 모습이 제법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하여, 라이오넬은 픽 웃었다.

“내가 누군지 아직까지 모르겠어? 뭐, 믿기 힘든 현실이니 그럴 만도 해.”

“말 돌리지 마.”

“4학년 최고 수석. 교사들의 신임 두텁고 발 넓은 반장이자 기숙사 방장. 보트팀 최연소 주전. 자, 그게 누구지?”

알버트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라이오넬……. 이스터브룩……?”

“잘 알고 있네. 여기 있잖아, 네 앞에.”

혼란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을 보며, 라이오넬은 이죽거리고 웃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내가 뭐, 널 잡아먹기라도 할까봐?”

“하, 하지만…….”

“이거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얼굴이네. 너는 지금 미래로 온 거라고, 남작님.”

물론 나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지만. 라이오넬이 그렇게 덧붙이면서 알버트와 눈을 맞췄다.

“……네가 정말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일 리 없어.”

“오호라.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법학부로 진학한다고 했어. 의사가 되었을 리 없지. 만에 하나 의사가 되었다 해도 내 주치의를 자처했을 리도, 내 주치의로 고용됐을 리도 없어.”

“그래? 그런데 어쩌나. 보기 좋게 그 예상들이 죄다 빗나간 미래를 보고 계셔서.”

“다시 한 번 묻겠어. 넌 누구지?”

“말했잖아,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라고. 그만 순응하시지 그래? 부정할수록 시간만 손해 볼 뿐이야. 그리고 오히려 잘 됐어. 지금 네 심장을 진료해봐야겠군. 도움이 될지 모르니. ……자, 어서 벗어.”

“……뭐, 무슨……. 왜……?”

“청진기를 대봐야 할 거 아냐.”

“시, 싫어.”

“내가 억지로 벗기기 전에 네 손으로 벗는 게 좋을걸.”

알버트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결국 순순히 옷을 벗었다. 본인을 라이오넬이라 우기는 남자는 단숨에 진중한 표정으로 청진기를 댄 채 이것저것 진단하기 시작했다. 현실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버거운 상황이었으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달라질 게 없는 거라면 빠르게 순응하는 편이 좋다는 걸 알버트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정말 우스운 일이군……. 미래에 자신의 주치의가 된 라이오넬과 마주하고 있다니.

그야말로 꿈같은 현실이다. 어쩌면 현실 같은 꿈일지도. 시선을 느꼈는지 라이오넬이 고개를 들었다. 햇빛을 받아 적색으로 빛나는 눈이 고요하게 자신을 주시했다. 꿰뚫어보는 것만 같은 눈동자. 자신이 시선을 피하기도 전에, 그는 눈을 휘어 근사하게 웃으면서 대뜸 질문을 던졌다.

“넌, 내가 왜 의사가 됐을 거라 생각하냐?”

알버트는 잠시간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아파서 절절 매는 귀족나리들 머리꼭대기에 군림하고 싶어서?”

“이 자식이.”

“그럼, 아니야?”

“맞겠냐!”

물론 그게 기분 나쁜 일은 아니긴 한데.

“……그렇다면 왜?”

그 질문에 라이오넬은 잠시 침묵했다. 자신이 의사가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다 큰 알버트에게도 아직 말한 적 없으니까. 더구나 그의 행적들을 돌이켜보면, 그리고 그와 대화로써 이런저런 해묵은 감정을 풀어낼 때 했던 말들을 생각해보면 이 시절의 그는 자기가 그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에 곁에 머물렀던 것이 확실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반드시 도망가겠지. 라이오넬은 공기가 조금 어색해질 무렵까지 침묵하다가 말문을 텄다.

“사람은 남을 끊임없이 시샘하고 부러워하는 생물이야. 가지지 못한 걸 갈구하지.”

“……아주 잘 알아.”

“나도 그랬어.”

“……네가?”

알버트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남자가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라는 전제 하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 완벽한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

“누구한테?”

“어느 귀족나리한테.”

알버트는 그 대답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납득했다. 그렇지, 날 때부터 타고난 신분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귀족이 싫다고 노래를 부르기도 했고. 그런데 그가 시샘하고 부러워할 만한 귀족이 누구지? ……그건 역시 잘 모르겠다. 애초에 그가 누군가를 부러워한 시점이 언제인지도 잘 모른다. 자신이 살던 시간선의 라이오넬은 아직 누군가를 부러워하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자신은 아닐 터였다. 그는 자신이 싫다고 했지 부럽다고 한 적은 없으니까.

“네가 보기엔 어떠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알버트는 눈을 조금 둥글게 떴다.

“……응?”

조금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더 이상했다.

“내가 파멸한 것 같아 보여?”

“……?”

질문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으나, 라이오넬이 자신의 대답을 못 들으면 안 보내줄 것 같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는 머뭇거리며 라이오넬을 훑어봤다.

자신만만한 태도하며, 검소하지만 결코 누추하지 않은 차림새. 건강한 혈색과 듬직한 체구. 여전히 좀 유치하긴 해도 그럭저럭 어른스럽게 자란 것 같고. 위풍당당한 기세는 여전한데다, 자길 이겨먹는 것도 한결같다. 행복해보이나……?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 당장은 즐거워 보이는 것 같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타인을 대할 때도 사교성 좋은 모습이지 않을까. 어떻게 보아도, 파멸이나 불행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냥, 뭐…….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 그가 정말로 자신의 주치의라면, 자신이 이 나이 대까지 어떻게든 버텨서 살아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알버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진료 끝났습니다, 환자분.”

그는 자신의 옷을 여며주는 라이오넬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됐어?”

“어떤 사람이 됐을 것 같은데?”

역으로 돌아온 질문에 알버트는 말문이 막혔다. 모르겠으니까 물어보는 거잖아! 성질이라도 내고 싶었지만, 참았다. 솔직히 쉽게 상상가지 않는다. ……아니, 사실 얼마간 상상 가는 건 있는데, 전부 불행한 미래뿐이다. 혹시 죽지 못해 사는 건 아닐까? 이 주치의라는 작자가 억지로 숨을 붙여놨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설마 그 탓에 즐거워 보이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다가, 금방 접었다. 그런 생각이 드러나는 얼굴로 있으면 또 꿀밤을 맞을 테니까. 어쩌면 이미 그런 생각을 한 걸 들켰을 지도 모른다…….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눈치를 봤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읽기 어려웠다. 하지만, 들려온 목소리는 자상했다.

“너, 저주에서 벗어난 용사님이 돼.”

“……그게 무슨 말이야?”

당황스럽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또 놀려먹으려 드는 건가? 아니, 애초에 용사에 어울리는 건 라이오넬이었다. 사실 그마저도 용사보다는 왕자라는 느낌에 더 가깝지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이 더 당황스러웠다.

“네가 사람 하나 구한다는 말이야.”

“……내가? 어떻게? 나는 그럴 자격이 없어…….”

“구원에는 자격이 필요하지 않지.”

“……나는 누굴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그것도 구해지는 사람이 판단하는 거고.”

그는 알버트가 혼란스러워 하거나 말거나, 청진기를 정돈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알버트. 세상은 생각보다 뜻대로 안 된다.”

“…….”

“구하고자 했어도 못 구하는 게 있고, 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는데 구하게 되는 것도 있어. 또는 구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에겐 그게 전혀 아닌 경우도 있지.”

상당히 어른스러운 말이었다. 그 유치한 라이오넬도 영원히 소년은 아니구나, 하는 감상을 뒤로, 그래서 지금의 그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파악이 안 되어 혼란스러운 감정이 몰려왔다. 나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라이오넬은 읽기 어려운 사람이지만-화날수록 웃는다는 건 알고 있어도-지금처럼이나 진솔하고 진중한 얼굴일 때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헷갈렸다. 그의 본심과 의도를 도저히 파악할 수 없었다.

“어쨌든, 네가 구한 그 사람은 파멸하지 않았어. 아주 멀쩡히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너랑 곧잘 우정을 다지기도 하고 말이야.”

마치 현혹시키려는 것만 같은 말.

“……그러니 안심해라. 저주 같은 건 널 해치지 못해. 지금 이 미래에는 그런 저주 따윈 없어진지 오래라는 거야. 오히려 네가 두려워해야 할 건 산 사람이지.”

전혀 믿기지 않았다. 믿기지 않는 걸 떠나, 머릿속에 말이 제대로 흡수되지도 않았다. 마치 그 말을 뇌가 거부하는 것처럼. 알버트는 뿔뿔이 흩어진 단어들을 주워 담아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형용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물밀 듯이 너울거렸다. 무서웠다.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어지러웠다.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커다랗고 따스한 손이,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기 때문에.

“너도 참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다.”

동정하는 목소리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말에 담긴 온도가 뜨거워서 데일 것만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싫지는 않았지만 두려웠다. 무엇이? 왜? 어째서. ……알버트가 혼란에 잠긴 한편, 라이오넬은 알버트의 표정을 살폈다. 뇌에 과부하가 온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럼 그렇지. 애초에 처음부터 그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리라 생각하고 말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 그가 미래를 향해 걸어오는 시간에서, 자신의 말을 한 번쯤 떠올려주기를. 그거라면 족했다.

그런데 그런 라이오넬의 다짐을 완전히 깨부수는 생각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알버트가 비비안을 조우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현재 자신이 살아가는 미래는?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고심 끝에 라이오넬은,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언질을 주었다가 미래가 바뀌어버리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적어도 라이오넬은 현재에 만족하고 있을 뿐더러, 만일 최악의 경우, 자신이 비비안과 정말로 결혼해야할 수도 있다. 이건 정말 참아줄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 생각들의 꼬리를 끊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구하게 되는 사람이 누구야?”

제법 당돌한 질문.

“알아서 뭐하려고? 왜, 또 피하려고?”

“그……그런 거 아니야. 이름이라도 알고 있으면, 좀 더 주시해서, 잘…….”

“그렇게 안 해도 어떻게든 될 걸.”

라이오넬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지금 해야 할 일은 명백했다. 다 큰 알버트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이 꼬마 알버트를 훌륭하게 돌보는 일.

“차라도 끓여와야겠다.”

“자, 잠깐만. 나만 두고 가지 마.”

“금방 올 거야. 얼마 안 걸려. 남작님 저택에는 귀한 찻잎이 많고, 나는 조예가 더 깊어졌거든. 내가 끓인 차를 마시고 한숨 자도록.”

라이오넬은 시원하게 웃으며 커다란 손으로 다시 한 번 알버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버트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라이오넬은 아랑곳 않은 채 방 밖으로 나갔다. 오늘 하루는 길 것 같다.


이상한 꿈을 꾸었다.

내가 과거로 가는 꿈.

- 십 수 년 전 기숙학교에서, 알버트 A. 윌프레드.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는 눈을 떴다. 낯익지만 감회가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고약한 약 냄새, 약품이 놓인 선반, 낡아서 삐걱거리는 침대, 침대 옆에 놓인 단 하나의 의자, 땔감이 거의 타들어가 조금씩 냉랭하게 변해가는 중인 공기.

“의무실…….”

알버트는 무의식적으로 읊조렸다. 어린 시절 기숙학교에서 그가 꽤 자주 신세를 졌던 장소. 꿈을 꾸는 걸까. 자신의 몸을 살펴봤지만, 성인 모습 그대로였다. 무엇보다, 현실 같은 꿈을 여러 번 반복해서 꾸었던 그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이 아니다. 정확히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 문득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돌로 된 건물 사이로 우르르 지나다니는 학생들 중에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오귀스트, 크리스, 티모시, 그리고 새뮤얼마저…….

그는 순식간에 감상에 빠졌다. 하지만 그러기도 잠시, 의무실을 향해 다가오는 당찬 발걸음 소리에 알버트는 고개를 돌려 문을 바라보았다.

“자- 알버트 윌프레드. 약 먹을 시간이야. 사흘이나 누워있었으니 이제 슬슬 털고 일어나라고.”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밝은 갈색 머리, 적갈색 눈동자. 아직 앳된 티를 벗지 못한, 기숙학교 4학년생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 문 건너에 서있었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번지르르하기 그지없던 그 얼굴에 살짝 실금이 갔다. 알버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라이오넬 입장에서는 환장할 일이었다. 의무실에 얌전히 있어야 할 윌프레드는 어디로 가고, 웬 생판 초면의 성인 남자만 있다니. 그것도 윌프레드를 위아래로 주욱 길게 늘인 것처럼 생긴 남자가. 혹시 병문안이라도 온 친지인가? 그렇게 생각하기엔, 그는 이렇다 할 연고가 고모님 내외밖에 없다 했다. 그렇다면 이 남자는, 도대체 정체가 무어란 말인가? 라이오넬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누구십니까? 여기는 기숙학교입니다. 외부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습니다만.”

“라이오넬, 나 못 알아보겠어?”

전혀 생뚱맞은 대답이 돌아왔다. 대뜸 이름까지 부른 걸로 모자라, 이 남자……. 무척 친근하게 굴고 있다. 라이오넬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키며 이와 같이 생긴 남자를 본 적 있는지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이렇게 생긴 남자는 본 적 없었다. 아니, 비슷한 사례가 하나 있긴 하지.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남작.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 병약한 남작님이 장성하면 저런 모습일 것 같다는 거고.

“실례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그래? 그래도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는 알겠지.”

그렇군. 역시 그와 무관하지는 않다는 거군. 어쩐지 혼란이 조금은 가라앉아서, 라이오넬은 평정심을 찾으며 대답했다.

“……같은 학년입니다. 원래라면 이 의무실에 잠들어 있어야 했죠. 그를 알고 계신 듯하니, 마침 잘 됐습니다. 혹, 그의 행방에 대해 아십니까?”

“음, 글쎄. 아마 미래로 가지 않았을까.”

“……예?”

“내가 여기에 있으니, 그렇게 된 게 맞지 않을까 싶어.”

광증 환자인가? 라이오넬은 반사적으로 살짝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이성적인 대화가 안 통하는 사람만큼 상대하기 곤란한 것도 없다. 그런 류는 주먹으로 다스리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이 남자는 툭 치면 쓰러질 것처럼 생겼다.

“……그러니까, 어쨌든. 윌프레드는 이곳에 없다는 말씀이시죠?”

“일단 네가 찾는 윌프레드는.”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난 미래에서 온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야, 라이오넬.”

라이오넬은 말문이 막혔다. 곱상하게 멀쩡히 생겨서는, 이렇게 차분한 어조로 미친 소리를 하는 작자라니. 보통 광기가 아니다. 털이 쭈뼛 서는 게 느껴졌다. 그래도 침착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됐다. 가능한 상대를 자극하지 않을 만한 어휘를 골랐다.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생각하는데요.”

“그렇지. 하지만 지금 그 일이 일어나버렸는걸.”

이 상황이 즐겁다는 듯이 웃고 있는 저 번들번들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속이 뒤집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인내해야 했다.

“……농담은 그만 하시죠. 당신, 정체가 뭡니까. 제 아무리 기숙학교에 잠입한 외부인이라 할지라도, 이곳 의무실은 쉽게 드나들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말했잖아. 미래에서 왔다니까.”

“…….”

소녀 유령을 잡기도 전에 웬 수상한 외부인을 잡아다 교장에게 떠넘겨야 할 판이다. 라이오넬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아무래도 윌프레드를 찾아야 될 것 같다. 그를 찾아 데려와서, 이 작자가 도대체 누구냐고 물어보는 게 최선이다. 하지만 그 사이 이 남자가 멋대로 교정을 돌아다니기라도 한다면? 그렇다고 윌프레드를 찾으러 가는 여정에 함께 하자는 제안을 할 수도 없었다. 거절할 게 뻔할뿐 더러 낯선 외부인을 데리고 교정을 누비고 다니는 라이오넬 이스터브룩이라니. 미쳤어? 그런 일은 절대 벌어져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정말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도 모른다. 그 야비한 군함새가 좋아할 일만 만들어주는 꼴이다. 역시 이 남자를 교장에게 데려가야 하나 싶다가도, 의무실에 얌전히 있어야 할 윌프레드의 행방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경우 할 말이 없어지기 때문에, 뭐가 됐든 윌프레드를 찾는 것이 우선이었다. 결국 원점이다.

“헛수고야.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다면 다녀와.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게.”

마치 자신의 속을 다 읽은 듯이 말하는 모양새에, 라이오넬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청회색의 눈동자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저토록 윌프레드와 닮은 눈으로 자신을 낱낱이 분해하듯 바라보는 시선이라니. 상당히 불쾌했지만, 번듯하게 표정을 간수하며 입을 열었다.

“……신뢰할 수 없습니다. 제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감 선생님이라도 방문하시면 큰일이고요.”

“에이, 지금은 브래넌 부인이 식당에 있을 시간인걸.”

라이오넬은 뜨끔했다. 정말 만에 하나-믿고 싶지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지만!-그가 미래에서 온 윌프레드라면 이걸 모를 리가 없으니 은근히 떠봤는데, 걸려들지 않았다. ……설마? 정말로?

“이해해. 별로 믿고 싶지 않겠지.”

“…….”

“그래도 지금은 좀 믿어줘. 애초에 졸업한지 벌써 십 년은 더 돼서, 교정을 누비고 싶어도 가물가물해. 괜히 곤란한 상황과 맞닥뜨리고 싶지도 않고.”

“그렇지만…….”

“그래, 정 곤란하다면……. 구예배당에 나를 가둬두는 건 어떨까?”

“……예?”

아까부터 자꾸 멍청한 대답만 자신의 입에서 새어 나왔지만, 라이오넬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 남자……. ……입만 열면 폭탄이었다.

“……그곳은 출입 금지 구역인데요.”

“알아, 그렇지만 뒷문은 열려 있잖아? 아마 며칠 전에 내가 그곳에 갇혔을 거야. 뒷문이 열려 있기에 대뜸 들어갔는데, 뒤에서 누가 빗장을 걸었어. 꼼짝없이 죽겠거니 하고 체념하고 있던 걸 네가 나타나 구해줬지. 그렇지?”

……도대체 그걸 어떻게? 그 일은, 분명 윌프레드와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혹여 더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빗장을 건 사람일 터. 하지만 이 남자가 그런 짓을 했을 것 같진 않다는 묘한 직감이 맴돌았다. 남자는 은은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이네. 말했잖아, 난 미래에서 온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라니까. 그리고 미래에서 우린 꽤 친해.”

“……말도 안 돼.”

“말 된다는 거 알고 있으면서……. 그냥 순순히 비현실을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고집 센 반장나리.”

“…….”

“하나 더 말해볼까? 그래, 내가 감기에 걸려서 3주 늦게 입학한 날. 너는 4학년 반장으로서 나를 마중 나왔어. 그리고 일부러 차 마시는 시간에 맞춰서 나를 교장실로 데려갔지. 그러지 않으면 교장 선생님의 설교에 두 시간 넘게 붙잡혀 있었을 거라면서 말이야. 자신에게 감사하라는 거들먹거림만 없었다면 나도 순순히 너에게 감사했을 거야.”

“그만, 그만.”

라이오넬은 넌더리를 냈다. 이제는 싫어도 인정해야 하는 단계였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틀림없이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였다. 하지만 미래에서 왔다는 건 역시 쉽게 인정하기 어렵다. 차라리 갑자기 몸만 커졌다는 쪽이 훨씬 인정하기 쉽다. 그 생각조차 읽은 모양인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건 그야말로 경악스러움, 그 자체였다. 라이오넬의 잠버릇, 말버릇, 몸에 밴 사소한 생활 습관, 차 중에서도 어떤 차를 선호하는지, 가장 좋아하는 바이올린 연주곡이 무엇인지, 바이올린을 켤 때의 버릇이라거나. 라이오넬 본인마저 미처 깨닫지 못한 온갖 세밀한 정보들이 줄줄 새어나왔다. 라이오넬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그러니까, 이제 미래에서 온 윌프레드라고 칭하는 게 맞겠지-는 싱글거리고 있었다.

“어때? 이제 내 말 믿을 수 있겠어?”

라이오넬은 간신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으나, 상대가 윌프레드라는 걸 인정하게 된 이상 그의 장단에 더 이상 놀아날 순 없었다. 라이오넬은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고 대답했다.

“그래, 인정하지. 네가 미래에서 온 윌프레드라는 걸 말이야.”

“어라? 말 편하게 하는 거야? 이래봬도 너랑 열 살 정도 차이 날 텐데…….”

“그래서? 내가 깍듯하게 대해주길 원하는 거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 텐데, 남작님.”

“그냥 해본 농담인데 예민하게 반응하는구나. 네가 나한테 예의바르게 구는 건 나도 사양이야.”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했던가. 명백하게 놀아나는 느낌에 분노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뿐인가? 자존심마저 상하는 기분이다. 라이오넬은 신경질적으로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거 잘 됐네. 아무튼, 네가 정말 윌프레드라 할지라도 이곳에 있던 녀석과 괴리감이 너무 커. 아무도 널 윌프레드라고 안 믿어줄걸. 넌 이방인이나 다름없어. 이제 뭘 어쩔 셈이지?”

“오귀스트의 별장이 이 근처에 있는 걸로 알아. 그리고 아마 지금은 비어있을 테지.”

“그걸 네가 어떻게……. ……아.”

라이오넬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빠르게 입을 다물었다. 그렇군, 미래의 내가 가르쳐준 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꽤 근래에 친해진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건 말도 안 된다. 아마 오귀스트에게 직접 들은 거겠지. 윌프레드를 따돌리자는 선동에도 따르지 않은 게 오귀스트였으니까. 그럼. 분명 그런 걸 거야.

“네가 오귀스트한테 잘 좀 부탁해봐. 병약한 나를 이 추운 날씨에 기숙학교 밖으로 내쫓을 게 아니라면.”

“웃기지 마, 윌프레드. 난 그런 거 하나하나 챙겨줄 여력이 없어. 난 네 집사도 하인도 아니야. 나한테는 지금 점호 시간에 침대 위에 얌전히 반듯하게 누워있어야 할 윌프레드가 없다는 사실이 더 급하다고. 난 기숙사 방장이자 4학년 반장이니까.”

“그것도 그러네. 내가 몰래 숨어들어가서 이불 덮어쓰고 누워있는 건 역시 별로겠지?”

“되겠냐!”

“농담이야.”

또 농담에 욱해버렸다.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이정도로 여유를 빼앗겨본 적 없었다. 대화 주도권 역시 마찬가지. 자신이 혼란스럽거나 말거나, 눈앞의 남자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로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음…….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는데…….”

“어떡하긴 뭘 어떡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지.”

“내 의지로 온 게 아니라 나도 몰라.”

“적어도 짚이는 거라거나. 없어?”

“……음. 짚이는 건 있지만,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럼 뭘 어쩌자는 건데? 정말 방법이 하나도 없다는 거야?”

“그저 기다리는 게 최선이야. ‘그’가 잠들 때까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급격히 몰려오는 피로감과 두통에 라이오넬은 미간을 찌푸렸다.

“라이오넬.”

“왜!”

“우리, 호숫가로 산책 가자.”

드물게도 얼빠진 표정이 되어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라이오넬은 과장된 몸짓으로 알버트의 잠옷을 가리켰다.

“산책? 지금 이 날씨에, 그 차림으로? 제정신이냐?”

“너랑 호숫가에서 산책을 못 한지 너무 오래 됐거든.”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그런 게 있어. 가자.”

“야, 잠깐……! 좀 주의하면서 가!”

막무가내였다. 조심성 없이 앞장서서 걷는 남자의 뒤를 빠르게 쫓으며, 라이오넬은 주변을 부지런히 경계했다. 다행히 누군가에게 들키는 불상사 없이 건물을 빠져나와 숲으로 향할 수 있었다. 서늘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라이오넬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재킷을 벗어 남자에게 둘러주었다.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에 잠시 생기가 돌았다. 그 얼굴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으로 크는구나, 하는 감상이 들었다. 언제나 우울하고 무감한 얼굴이었던 주제에……. 제법 번듯하게 자라는군. 어쩐지 조금 멋쩍은 기분에, 보폭을 좁혀 거리를 벌렸다. 그런데 이 남자, 보폭과 걸음을 조절해 어떻게든 자신의 곁에 나란히 걸었다. 이렇게까지 맞춰오는데 피하는 것도 이상해서, 라이오넬은 어색한 침묵을 깨고 대화를 시도했다.

“……그래서, 미래의 나와는 어떤 관계인데?”

“앙숙.”

그럼 그렇지.

……아니, 뭐가 그렇다는 거냐! 앙숙이라는 작자가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고 있을 리 없잖아!

“……농담 그만 하고.”

“눈치챘어?”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다. 라이오넬은 인내심의 한계에 도달한 기분이었지만, 간신히 꾸역꾸역 참았다. 남자는 잠시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했다가, 이내 어깨에 걸친 재킷을 여미며 말을 이었다.

“음……. 그냥 뭐, 친구지.”

“친구…….”

“계약 관계로 얽힌?”

……이게 무슨 소리지?

윌프레드에게 돈이라도 빌리나?

“……설마 내가 손해 보는 계약?”

“글쎄. 아마도?”

“……약점 잡아서 협박했냐?”

“내가 그럴 수 있다면 진즉 그랬을 거야……. 너의 그 번들번들한 얼굴에 금이 가는 걸 보고 싶어서라도.”

이 자식이…….

“그렇지만 넌 완벽하잖아. 흠잡을 데 하나 없지.”

보는 눈은 그래도 멀쩡히 달려있군.

“약점이라곤 재수 없는 것뿐인데 뭘 어쩌겠어.”

……방금 생각 취소.

라이오넬은 제대로 놀아나고 있었다. 그 점을 본인이 가장 잘 인지하고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한계점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남자가 멈춰 섰다. 그에 따라 라이오넬도 걸음을 멈췄다. 물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나부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호숫가로 시선을 주었다. 라이오넬은 그런 남자를 바라보았다.

고독하고 슬픈 눈동자. 아주 머나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이곳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어느 순간 홀연히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모습. 그 모든 건, 누가 뭐라 할지라도,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 본인이었다. 라이오넬은 어쩐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남자는 조금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라이오넬을 돌아봤다.

“……왜?”

그러게.

왜 잡았을까.

“……빠, 빠질 것 같아서?”

“…음, 하긴. 이 호수는 수심이 갑자기 깊어지는 곳이 있지.”

보트 선수도 아닌 게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걸 보니 기가 막히다. 이런 정보만큼은 필히 자신한테 말고는 들을 수 없을 텐데. 자신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깊은 상념에 잠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나는 빠지지 않아, 라이오넬. 만일 가능하다면, 이곳에 빠질 사람을 구하고 싶은 마음뿐이야. 지금의 내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수영은 할 줄 알고?”

“아니, 못해.”

“……미래의 내가 네 친구인데, 그 나이가 되도록 너에게 헤엄치는 법조차 안 가르쳐 줬다고?”

“가르쳐 줬는데 내가 못하는 거야.”

“……하, 알버트 윌프레드. 넌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냐?”

“라틴어?”

“그거 말고.”

“그 외에도 제법 이것저것 할 수 있게 됐어.”

“네가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 앞으로도 죽 발전이라는 걸 꾀하라고.”

“…그런데 라이오넬, 너 제법 나한테 관심이 깊구나?”

그 말에 또 다시 말문이 막혔다. 나는 반장이니까, 같은 변명이 통할 상황도 아니고…….

“알아. 신경 쓰이겠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자신이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걸 알아채고 그가 대화를 갈무리해줬다는 걸, 기민한 라이오넬은 눈치챘다. 그런 탓인지 더욱 기분이 이상했다. 자신이 아는 윌프레드와 너무 다르다. 여유만만에, 하나같이 자길 이겨드는 꼴에……. 그런데도 그 눈은 정말 윌프레드, 그 자신이라서. 이윽고, 곧 점호 시간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자는 다시금 호숫가에 시선을 돌렸다가, 이내 라이오넬에게로 돌아섰다. 남자가 손을 뻗어 라이오넬의 머리를 사락사락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너도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부러워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내가 이때는 몰랐어.”

라이오넬은 형용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을 참지 못하고 손을 뿌리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날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

“그래, 그래. 반장나리는 완벽하시지.”

“너 진짜……!”

남자가 라이오넬의 손을 잡았다. 서늘하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손을 매만지듯 감싸드는 감각에, 반사적으로 굳어버렸다. 반응이 어찌됐든, 남자는 더욱 보드라운 손길로 손을 잡아왔다.

“……이제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된 것 같아.”

“이봐, 이 손 좀 놓고…….”

“고마워.”

난데없는 감사 인사에, 라이오넬은 손을 뿌리치는 것도 잊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그러니까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는. 곱게 눈을 휘어 웃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오랜 그늘에 빛바랜 탓에 끝내 봄과 닮지는 못하였더라도,

눈 녹은 땅에 서린 이슬 같은 미소.

라이오넬은 그 얼굴을 오래도록 보았다. 썩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그는 누구라도 그 얼굴이 이런 미소를 담는 걸 본다면, 자신과 똑같이 생각하리라 여기며 납득해 넘겼다.

“…감사 인사를 할 상대를 착각한 거 아냐? 그런 건 미래의 나한테나 하라고.”

“아니야,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이 맞아. 나는 꼴에 자존심만 세서, 이런 말을 잘 안 하니까. 내가 대신 하는 거야.”

서늘한 체온이 조금씩 미지근해졌다.

“……고마워, 라이오넬.”

다시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무어라 형용해야 하는 지 알 수 없는 기분. 조금 간질간질한 것 같기도 했다.

“……알면 됐어.”

라이오넬은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그의 손을 완전히 뿌리쳤다. 손등을, 손목을 부드럽게 매만지던 손길이 여전히 간지럽히는 것 같았다. 눈앞의 그는 뜻 모를 얼굴로 은은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의무실로 돌아가면 윌프레드가 와있을 거야. 그런 느낌이 드네.”

“……확실해?”

“응, 확실해.”

“……알았어. 그럼 난 간다.”

이상한 기분에 더는 휘둘릴 수 없다. 라이오넬은 망설임 없이 그를 뒤로 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문득 생각이 나 뒤를 돌아봤다. 두 사람이 헤어진 그 자리에서,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가 못 박힌 듯 서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오넬이 돌아봤다는 걸 눈치채자, 그는 손을 흔들었다. 계속해서.

“……젠장, 뭐야.”

또 다시 이상한 기분에, 라이오넬은 손 인사조차 돌려주지 않고 뛰어갔다.


그렇게 돌아와 보니, 정말로 의무실의 침대 위에 윌프레드가 있었다. 방금까지의 사건은 꿈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태평한……. 아니, 넋을 어디에 두고 온 듯한 얼굴이었다.

“윌프레드. 너 여태껏 어디 있었어?”

“……그냥, 좀…….”

“내가 얼마나 찾아다녔는지 알아?”

“네가 나를 찾아다녀? 왜?”

“기숙사 방장이자 4학년 반장이니까!”

“……응, 그렇구나. 그렇지…….”

……어쩐지 시무룩한 표정이다.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라이오넬.”

“왜.”

“차 좀 끓여줘.”

그럼 그렇지.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입 다물고 얌전히 잠이나 자라…….”

역시 이 자식은 사람이 되려면 멀었다. 누굴 하인처럼 부려먹으려는 건지. 라이오넬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유독 오늘 하루가 긴 것 같았다. 창문 사이로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었다.

“맞다, 재킷!”

그렇게 뛰쳐나가는 라이오넬의 뒷모습을, 알버트는 그저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 다시, 1865.

알버트 A. 윌프레드.


똑똑.

알버트 알로이스 윌프레드는 눈을 떴다. 익숙한 풍경과 익숙한 노크 소리.

“이봐-. 꼬마 알버트. 설마 그새 잠든 건 아니겠지?”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차 향. 그리고, 익숙한 나의ㅡ.

“라이오넬.”

라이오넬은 들고 있던 쟁반을 바로 협탁 위에 올려놓고 알버트에게 달려갔다.

“알버트! 무사히 돌아왔군. 어디 봐, 몸은 좀 어때? ……몸이 차잖아. 찬바람이라도 쐰 거냐?”

부지런히 그의 안색과 안위를 살피던 라이오넬은, 문득 그가 어쩐지 시무룩한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너 갑자기 왜 그러는데? 왜, 무슨 기분 상한 일 생겼어?”

알버트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입을 열었다.

“……볼 살 덜 빠진 거 귀여웠는데.”

“…….”

“나보다 키가 작은 것도……. 그래서 내가 내려다봐야 하는 것도…….”

“야, 너…….”

“좀 더 귀여워해주고 올 걸…….”

라이오넬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모습을 본 알버트는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이야.”

언젠가의 그에게 했던 말을 또 다시 들려주며, 알버트는 라이오넬의 손을 감싸 잡았다. 라이오넬은 그 손을 잠시간 응시하며 내려다보다가, 이내 감싸 쥔 손을 부드럽게 풀어냈다. 그리고 그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신의 손으로 꼼꼼하게 뒤덮어, 풀어지지 않도록 더욱 단단하게 그러쥐었다. 맞잡은 손이 따뜻하고, 서늘했다. 서로의 시선이 서로에게 향했다. 시선이 맞닿은 순간,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 어떤 시간의 틈새에서도,

우린 만났을 거야.

분명 그랬을 거야.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B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