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낙서

[동런] 패착(2)

이력서 진짜 쓰기 싫다

어렸을 때, 나는 내가 초능력자인 줄 알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꼬맹이가 고백하면 모두 흐뭇한 미소를 지을 만한 깜찍한 상상이겠지만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이런 생각을 했다는 건 망상병에 걸린 건 아닌지 걱정을 일으킬 만한 일이 된다. 다행히 나는 이런 생각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부모님과 선생님들은 내가 현실적이고 똑부러진 어린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

아무튼 나도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망상을 했던 건 아니다. 누구라도 자신이 생각한 일이 몇 번이나 실현되어 눈앞에 나타난다면 자신이 초능력자는 아닌지 의심해 볼 것이다.

“못 해. 더는, 헥. 학. 나 죽어. 아이고! 나 죽어!”

이동혁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이 뛰다가 맨바닥에 철푸덕 드러누웠다. 엄살기가 다분했지만 나 역시도 죽을 것 같은 건 마찬가지였기에 평소처럼 엄살 부리지 말라고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었다.

“야. 일어나. 너. 헉. 허억. 아직, 후우우. 하. 한 바퀴 남았거든?”

“네가 잘못 안 거겠지! 난 분명, 하아. 됐어. 나 더는 못 뛰어. 날 죽여, 그냥!”

이동혁은 절규하듯 외치고는 불쌍한 꼬락서니로 죽은 듯 누워버렸다. 어느새 땀으로 젖은 이동혁의 이마에 흙먼지가 붙었다. 저 흙먼지만 아니었어도 억지로 일으켜 세웠을 텐데 억지로 일으켜 세울 의지를 상실해서 그냥 나 혼자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어제 점심으로 먹은 사과주스의 기운까지 짜내어 뛰었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할 기운도 없어서 이동혁의 옆에 대 자로 뻗어버렸다.

한여름 오후 5시의 운동장은 낮 동안 햇볕에게 시달릴 대로 시달린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열기를 품고 있었다. 이번 여름은 정말 끔찍하게 더운 것 같다. 뭐라고 했더라? 76년 만에 기록적인 폭염이라고 했던 것 같다. 작년에도 똑같은 뉴스를 본 것 같은데 말이다.

“와. 무슨 찜질방 같아. 이렇게 더워도 되는 거야? 진짜 에바야.”

“죽겠다…….”

“런쥔아, 정신 차려. 아직 죽으면 안 돼. 우리가 할 게 얼마나 많은데!”

힘없이 중얼거리자 이동혁이 내 쪽으로 돌아누워서 손부채질을 해주었다. 솔직히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지만 노력이 가상해서 봐줬다.

“응. 너 혼자 해.”

“야아아. 얘 매정한 거 봐라? 혼자 하기 싫어. 나 너 아니면 친구도 없는 거 알면서. 런쥔아아아아.”

“아오, 쫌!”

내가 성질을 내든 말든 이동혁은 또 나한테 엉겨붙어서 갖은 아양을 떨어댔다. 할 수만 있다면 국어의 주먹을 빌려오고 싶었다. 그 주먹으로 이동혁의 정수리에 꿀밤을 때리면서 나 말고 다른 친구 많은 거 아니까 그런 말은 입에 담지도 말라고 하고 싶었다. 이동혁은 내 조용한 삶에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다. 난 초대한 적도 없고 바란 적도 없는데 이동혁은 왜 내 삶에 찾아왔을까?

합리적인 심술이 솟아서 이동혁을 피해 왼쪽으로 데굴데굴 굴렀다. 이동혁은 나를 어이없다는 듯 보다가 폐가 터질 정도로 웃다가 울다가 나를 따라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럼 나는 반대쪽으로 데굴데굴 굴러서 이동혁을 피하고, 이동혁은 또 데굴데굴 굴러서 나를 따라왔다. 그렇게 30분을 굴러다니다가 우리는 국어가 우리에게 운동장 10바퀴 형을 줬다는 걸 잊어버린 것 같다는 결론을 내고 국어를 욕하며 매점으로 가서 쭈쭈바를 사먹었다. 하여튼, 생각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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