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 스웨인 안나오는 조각글
스웨인을 생각하는 다리우스
그날따라 유독 바람이 서글펐다. 평소에는 떼를 이뤄 이리저리 날았을 갈매기들 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진 해안의 절벽이다. 그 절벽의 끝에 서있는 사람마저 없었다면, 분명 어느 음울한 그림 속 풍경이라고 하여도 믿었을 것이다. 폭군의 재정 끝에 가족을 잃고, 연인을 잃고, 끝내는 제 목숨도 잃게 된 어느 불운한 화가의 그림처럼 말이다. 실제로 그런 이가 있을 지는 알 수 없으나 절벽에 선 남자는 제 모자란 상상력을 탓하는 대신 이마에 눌러붙은 소금기를 굵은 팔뚝으로 훔쳐내었다.
다 녹슬고 부서진 갑주를 입은 남자는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남자가 입은 갑주는 분명 녹서스 양식의 흑철이었으나, 그의 품에 안긴 투구는 녹서스 양식이라기엔 화려하고, 그렇다고 타국의 예식용 투구라기엔 정체모를 스산한 기운을 두르고 있었다. 남자는 한참을 고개 숙인 채 투구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흉터투성이 손가락으로 몇 번 투구의 눈가를 쓸어보았다.
습기를 머금은 금속에선 진한 쇠 비린내가 났다. 아니, 피 비린내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투구의 주인이 저지른 수많은 만행을 기억했다. 개중에 어느 것은 남자의 손을 빌린 것도 있었다. 이제 와서 자신이 저지른 짓을 후회하는 건 아니다. 그저 덤덤한 사실의 복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때도 있었지, 라는.
남자는 고개를 몇번 털고는 투구를 들어올렸다. 그의 손에 남아있는 유품이 그것 뿐이었다. 다만, 따로 추모를 하고 싶은 기분은 아니었기에 그것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투구의 주인도 남자에게 제 추모를 바랄 위인은 아니었다. 오히려 코웃음 쳤겠지. 문득 비웃음마저 그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 주군이 살아있을 적 얼굴이 그리운 것인지, 혹은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던 제국이 이상적으로 굴러가던 때의 평화 아닌 평화가 그리운 것인지. 남자에게 그것을 묻는다면 분명 대답을 망설일 것이다.
대답의 무게만큼이나 묵직한 투구의 무게가 그의 팔을 끌어내렸다. 마치 죽은 주군이 팔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섬칫한 기분까지 들었다. 남자는 핏발 선 눈으로 투구를 노려보았다. 눈구멍 속의 텅 빈 어둠과 눈이 마주쳤다. 성인 남자의 머리통만한 금속 안에 이다지도 깊은 심연이 담길 수 있는가? 두려운 것 없던 남자조차 긴장감에 헛숨을 들이삼켰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투구 속에는 녹색 벨벳 천으로 된 안감 뿐이었다. 악마의 안개라거나 기타 불온한 것들은 들어가 있을 틈새도 없었다. 남자는 안도 반, 아쉬움 반의 감정으로 투구에서 시선을 돌렸다. 악마에게 사로잡힌 이의 목숨을 끊어놓았더니 기적적으로 악마만이 격퇴되고 사로잡힌 이는 제정신으로 돌아왔다는- 그런 이야기가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제 손에 잡힌 머리의 묵직한 촉감을 기억했다. 손가락 사이로 썩은내 나는 피가 뚝 뚝 떨어졌다. 역겨운 냄새였다. 그 냄새가 남자에게 현실을 속삭였다. 저 껍데기 안에 든 것은 악마이며, 더이상 저 육체는 인간이 아님이라고.
여전히 머리카락은 길고 윤기가 없는 백발이었다. 언제나 깔끔하게 정리 된 과거와 달리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남자는 그 모습마저도 좋아했었다. '좋아했다'는 짧은 말로는 복잡한 감정이기야 했다. 침대에서 옆을 돌아보았을 때 보였던 창백한 등허리, 그보다 더 희게 빛을 받아 부시는 흐트러진 백발. 항상 그 머리카락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째서였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남자는 항상 제 감정에 서툰 사람이었으며, 제 주군도 그 사실을 지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보다도 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이가 하는 말이니 귓등으로 흘려들은 지적이었다.
남자는 투구 안에 무엇이라도 들어있는 듯 절벽 끝에 대고 탈탈 털어보았다. 깨진 금속조각 몇개가 후두둑 떨어져 비탈을 타고 굴러내렸다. 그것 뿐이었다. 남아있는 게 있다면 그 이름은 공허함일테다. 아무것도 없으니 이제는 버려야지. 이제는.
이제는.
입 속으로 거기까지 외워보고는, 남자는 팔을 크게 뒤로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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