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D (4,995 자)

스포츠 소재│1인칭 주인공 시점

CM by SRP

나는 때때로 떠올린다.

 

/

 

그는 농구를 제안했다. 농구공은 본인이 지참할 테니 나는 몸만 오면 된다고. 딱 한 판만 하고, 자신을 이기지 못하면 한 판만 더 어울려 주는 조건. 근처에 아주 괜찮은 농구장이 있다고 했다. 단 두 개 있는 농구대 사이가 제법 멀어 아이들은 자주 오지 않는 곳이라던가. 어쨌든 내가 귀찮아질 일은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

거절했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쭉. 그러니 R의 부탁에 왠지 모를 독기가 서려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부탁은 더 이상 부탁이 아니게 되었다. 내 어깨를 감싸 쥔 손길이 날 성급히 낯선 곳으로 이끌었다. 그게 눈에 선히 보일 정도로 정말 놀고 싶은 모양인데, 왜 이렇게까지 끈질긴 건지는 정녕 모를 일이다.

뜻대로 하면서도 R는 시종일관 내 눈치를 봤다. 너무 집에만 박혀 있으면 근육이 다 녹아 사라질걸. 하하, 표정 좀 봐. 내가 너무 억지로 데려가는 건가? 정 싫으면 아직 정류장 나오기 전이니까 보내 줄 수 있어. 어쩌면 안 보내 줄지도 모르고……. 아, 농담이야! 그렇게 노려보진 마. 원맨쇼에 도가 튼 사람에게 적당한 반응을 던져 주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인지라, 이제는 흐려졌어야 정상인 모든 문장이 생생하다. 나는 분명 그때 혀를 찼다. 그래, 알겠다고. 이제 더는 귀찮게 하지 마. 이미 버스 시간 놓쳤어. 짜증 나게도, 누구 덕분이지. 반 정도는 진심으로 짜증이 났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R는 기쁜 듯이 웃었다. 잘 선택했다느니 어쩌니, 두 판은 하고 돌아가게 만들어 줄 거라느니 뭐라니.

농구장은 넓고 한산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주 괜찮아 보였다. R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공을 가리켰다. 내가 공은 준비하겠다고 했지? 칭찬이라도 바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뭐? 그런 식으로 대답을 돌려줬다. 너무하다며 너스레웃음을 짓는 그를 밀어냈다. 그는 늘 거리감이 가까웠고, 그게 딱히 싫지는 않았으나 구태여 그런 대우를 누려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던 것 같다.

플라스틱 벤치 위에 두 사람분의 옷가지와 가방이 올라갔다. 우리는 덩치가 비슷해서 벌려 놓으니 누가 누구의 옷을 잘못 가져가도 모를 듯했다. 더러워지지 않게 내 옷이나마 정리해 둘까, 하는 생각이 들 즈음 벤치가 크게 흔들렸다. 퉁. 퉁. R가 옆에서 농구공을 튀긴 탓에 속 빈 벤치가 울어댔다.

“준비는 다 됐어?”

“기다려.”

“얼마든지. 천천히 해!”

기분 좋아 보였다. 그는 모은 입술 사이로 음표 몇 개를 흘렸다. 비정형화된 곡조가 귀에 퍽 거슬렸다. 하지만 하지 말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휘파람 하나까지 막으면 또 그것대로 날 도발할 게 분명했으므로. 대신 몸을 돌리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감아쥐었다.

 

다섯 골을 먼저 넣는 쪽이 이기는 것으로, 삼 판 이 선승제. 그가 능숙하게 공을 튀기며 내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올 테면 와 보라는 식이다. 공을 다루는 게 퍽 익숙해 보이는 것이, 그는 아무래도 곧잘 이런 내기를 하는 듯했다.

나는 자세를 낮추고 공에 초점을 둔 채 응시하다가 금방 달려들었다. 농구는 원래 속도와 시간 싸움이고, 그는 꽤 날렵한 편인 데다가, 여기서 시간을 많이 지체하고픈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었으나 허점을 만들지는 못했다. 그가 시원스레 웃었다. 아하하하. 묘하게 거슬리는 웃음소리였다.

협주, 그런 식으로 노리고 오는데 못 피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가 스텝을 밟고 옆으로 돌아 뛰며 말했다. 돌진하지 말고 리듬을 타야지. 운동에도 리듬이 있다는 건 몰랐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치지 않는지, 그는 곧장 골대로 달려갔다. 운동에 리듬은 무슨 리듬……. 그 말도 그 상황도 내게는 별로 웃기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껏 따라갔음에도 그 좁은 코트를 채 장악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체격이 비슷했기 때문에 더욱.

첫 번째 골을 아주 손쉽게 빼앗겼고, R는 흔들리는 골대를 미소 지으며 가리켰다. 자, 드리블은 이렇게 하는 거야. 이제 네가 해 볼래? 공이 날아와 가슴팍을 쳤다.

한 박자 쉬고 대답했다. 이렇게 대놓고 기회를 줘도 되나. 그러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 것 같았다. 그냥 줘도 골 하나 정돈 막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나 보지. 수중에 잡힌 농구공이 부담스러웠다. 그가 했던 것만큼 잘할 자신은 없었고 막상 자리는 마련되었다. 억지로 공을 바닥에 튀겼다. 퉁, 퉁, 퉁, 퉁, 퉁. 다섯 번 튀기고 나서는 오기로 뛰기 시작했다. 무작정 빈 곳으로. 초심자의 제자리 드리블이 숙련자에게는 우습게 보일 만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정면에서 들려오는 웃음을 얌전히 듣고 있기엔 배가 아팠다.

그는 여유롭게 팔을 휘적였다. 간간이 친절하게도 트래블링에 대해 설명해 주기까지 했다. 세 걸음 뛸 동안 공을 한 번이라도 튀기지 않으면 반칙이라고. 그 정도는 알고 있다고 타박했을 때 R의 표정은 볼만했다. 이건 반어법이다.

무작정 공을 던졌다. 첫 시도는 R의 팔에 막혔고, 두 번째 시도는 골대의 가장자리에 부딪혀 떨어졌다. 공이 굴러떨어져도 그는 공을 줍지 않고 내게 다시 해 보라며 내밀었다. 이런 식으로 받는 배려는 꼭 속을 조금씩 긁는 것 같은데, 그의 모든 언행이 대체로 ‘이런 식’이었으므로 그나마 낯이 익었다. 그렇게 던진 세 번째 공은 골대 근처까지 가지 못하고 약간 아래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녹색 폴리우레탄 바닥 바깥으로 데굴데굴 굴러가는 공이 아주 인상 깊었다.

“힘이 빠져서 그런 거야. 공 던질 때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 내가 설마 못 던진다고 놀리진 않을걸? 알잖아.”

그가 유쾌한 농담을 건넸다. 하지만 받아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긁혀 떨어진 속내가 쌓여 오기로 변하는 기분이었다.

그는 골대를 등진 채 방금 주워 온 농구공을 내밀었고, 나는 그것을 빼앗듯 가져갔다. 그가 골을 어떻게 넣었는지를 생각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R는 너무도 쉽게 골을 넣었으니까. 그의 행동을 관찰할 만한 충분한 시간이 나지 않았다. 개중에 가장 짜증 나는 점은, 그가 그런 나의 시도를 간파할 정도로 눈치가 빠르단 사실이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기업 비밀이라도 전하려는 듯 속삭였다. 자세를 낮추고, 어깨에 힘을 빼고, 목을 너무 빼지 말고, 기타 등등.

“시끄러워.”

듣다못해 일갈한 후 농구공을 던져 넣었다. 완벽한 경로를 그리며 날아간 공은 일순 시야에 나타난 R의 손끝에 맞고 경로에서 이탈했다. 반사적으로 이를 악물자 그가 손바닥을 보여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워, 진정해. 이거 내기 아니었어? 난 무척이나 정당한 방식으로 방해한 건데. 짜증 나기 그지없는 목소리.

이 수치를 타개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당장 게임을 끝내면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공을 주워 R에게 집어던진 후 다시 코트로 들어갔다. 아직 해가 중천에 있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고, 방금까지는 몸풀기였다고. 엄포 놓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선택의 결과는 처참했다. 2:0. 패배에 분노할 겨를은 없었다. 나는 완전히 지쳐 코트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짭짤한 물방울이 눈썹을 타고 안구에 들어가려는 걸 막을 힘만 가까스로 남아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혀와 목이 따가웠다. 마지막으로 이렇게나 격하게 움직인 적이 까마득했다. 문득 왼쪽 옆이 어두워질 때까지,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나는 알지 못했다.

하하하, 하하하하. 즐거운 듯한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흘겨봤다.

“뭐가 그렇게 재미있어?”

먼지투성이가 된 농구공을 괜히 그쪽으로 굴려 보내며 물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지만, 웃음소리에 가려 명확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넌 음악만 취급하는 사람인 줄 알았거든. 이해해 줘. 다른 걸 하면서도 땀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인지는 처음 알았단 말이야. 어쩌면 내 숨소리가 그의 음성을 일부 지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의 등 뒤에서 석양이 타올랐다. 땀과 현기증으로 흐려진 시야가 유독 햇빛을 번져 보이게 했다. 지나치게 붉은 노을이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생소해서 판단이 흐렸던 건지, 하루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기에 유독 노을이 그렇게도 짙게 깔리는 건지. 보고만 있어도 연기 없는 화재가 내 속으로 전염되는 듯한 그 감각. 특출나게 밝지 않음에도 되레 눈이 멀 것 같았던 그 광경.

 

/

 

화재는 여전히 내 가슴 속에 남아 있다. 그저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러다 가끔 이런 날이면 최초의 노을이 다시 살아난다. 높다란 건물의 색을 모두 먹고 피어나는 선명함. 강렬함. 모든 격정을 녹여 함께 지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새빨간 노을을 볼 때면.

그때 이후로 유리창 너머 세상은 여전히 삭막하다. 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아 보이는 자동차가 빼곡히 거리에 즐비하고, 그 옆 인도를 걷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작은 티끌과 같다. 이미 미색을 잃은 도시는 더 이상 특별할 것이 없다. 이 도시는 소란스럽고, 진정되지 않으며, 불안정하다.

그러던 어느 찰나에 도시는 붉은 적막에 잠겨 조용해진다. 오래된 애상을 떠올리게 하는 고요함이 생경한 동시에 낯익다. 귓가에 언제 적일지 모를 웃음소리가 맴도는 듯하다. 속이 타들어 가면서도 내 모든 감각을 풍요롭게 하는, 아주 단조로운 하늘. 노을 진 구름 새로 샛노란 빛이 네온사인처럼 발광한다. 불현듯 그날의 현기증을 연상케 하는 신호탄이다. 이 두 눈에 각인된 노을은 두 번 다시 은은해지지 않을 것이다.

팔짱을 낀다, 무엇이 불편하기라도 하듯. 나는 아직 이 침묵을 받아들여야 할지 밀어내야 할지, 미처 정하지 못했다. 일상적인 현상을 그저 일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까닭은 아마도 어떤 상실 때문이다. 결핍, 그것은 예술가가 얻을 수 있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결정. 남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깨진 기억의 파편을 곱씹고, 곱씹고, 곱씹는 것밖에는 없다.

나는 때때로 그를 떠올린다. 극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으려 노력한다. 지금까지는 퍽 잘해 오고 있다. 단지 인후통을 갈무리하기 위해 목을 가다듬고, 주저앉지 않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고 서 있는 것.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바라만 보고 있는 것. 회상의 첫 단계는 언제나 그렇게 시작한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