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머피의 법칙

쥬시 플럼-껌 by 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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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의 찬 공기는 공연장의 열기도 얼어붙게 만든다. 평소보다 빈 공연장이 그걸 증명했다. 겨울이라는 건 사람을 정지하게 한다. 따뜻한 옷들 털장갑과 목도리 귀마개가 여름의 몫을 열심히 해내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을 멈추게 만드는 이유는 그들이 거추장스럽게 역할을 해내는 탓도 있다. 생명체가 어디에서도 버티지 못하게 하는 혹한은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마저도 망각하게 만든다. 더군다나 시노노메 아키토는 겨울을 지지리도 싫어했다. 겨울과 여름 하나만 고르라고 하는 건 극단적이지만, 그래도 그에겐 겨울보다는 여름이었으니까. 당연히 공연장의 관객과 소통하고 열기를 전하기엔 초여름만한 날씨가 없지. 겨울 공연장의 텅 빈 여운도 이제는 익숙해져 갔다. 첫 번째 공연을 한지도 햇수로 벌써 10년이 넘어간다. 솔로로 공연장을 채우는 것은 여간 실력으로는 생각하지도 못할 영역이지만, 시노노메는 그걸 해냈다.

사람이 떠난 공연장 바닥을 걸레로 닦는다. 팬들의 방명록 자국이 지워진다. 시노노메는 바닥을 청소할 때마다 그날 공연의 여운을 느끼며 약간의 섭섭함을 느낀다. 누군가 주워도 감히 쉽게 문을 열 수 없을 듯이 모여있는 열쇠 뭉치 중 하나를 골라 청소가 끝나면 공연장 문을 잠그고 계단을 천천히 밟는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다크서클이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찬 겨울 공기가 콧속으로 무단침입한다. 그는 불쾌한 감각에 코를 찡긋거리지만 콧등에 차가운 감각이 서린다. 눈이 내린다.

까만 밤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왜 이리 새하얀지. 참 모순적인 계절이다. 쌓이기 시작한 눈은 시노노메의 발을 묶어두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놀아달라고 보채는 눈을 뒤로하고 그는 붉은 목도리를 동여매며 집으로 향했다. 횡단보도에서 초록 불을 기다리는 그가 쇼윈도에 비친다. 목도리로는 부족했는지 그의 볼이 새빨개졌다. 그는 여전히 코를 킁킁대며 불청객을 내쫓고 있었다. 춥네. 겨울 싫어.

편의점에 들른 아키토는 맥주 두 캔과 안줏거리를 계산한다. 피곤한 이의 심기를 거스르는 삑삑거리는 바코드 스캐너 소리는 시노노메의 눈치를 보곤 곧 입을 닫았다. 구백팔십엔입니다… 어 시노노메 씨 아니세요? 저 아까 방금 공연 보고 나왔는데! 이제 끝나셨나 봐요! 아르바이트생의 눈동자에 갑자기 생기가 돌았다. 아… 네. 정리하느라요. 하하. 귀까지 얼음장이 되어 뻘게진 쇼윈도의 자신을 떠올린 시노노메는 답지 않게 부끄럼을 타기 시작했다. 저… 팬으로써 궁금한 게… 혹시 애인이라도 있으신가요? 시노노메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진 게 티가 났는지 아르바이트생이 빠르게 손을 저었다.

“아니, 아니, 흑심이 있는 건 아니고, 음악 가사에 누군가를 추억하는 어떤 감정이 실려있는 듯해서요… 이번에 나온 신보에 실린 곡 가사도 ‘항상 꿈에서 너의 노래를…….’”

“아,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캐셔의 말을 끊어내고 시노노메는 도망치듯 편의점을 나왔다. 이 편의점도 이젠 못 다니겠다고 생각하는 아키토였다.

무명 아티스트 답게 작은 아파트 원룸에 사는 그는 열쇠 뭉치 중 열쇠 하나를 골라 문을 열었다. 다녀왔어. 아무도 없는 공간에 메아리가 친다. 접이식 상을 펴고 앉아 맥주캔을 까면 청량한 소리가 울린다. 아무 말 없이 정면을 보고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그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 같은 태를 보인다. 한 캔 반을 마시고 나서야 그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시원하다. 그리고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는 턱을 괴고 정면에 있는 사진을 한참 쳐다본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넋두리를 한다. 너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두 남자는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사진 속에 박제되어있었다.


야, 우리 전학생 온대. 봤어? 나고야가 봤다는데?

아, 시끄러워—. 안 그래도 잠 부족해 죽겠는데 아무도 도와주질 않네. 눈을 비비며 몽롱한 시야로 대화가 오가는 현장을 포착했다. 나고야 책상 주위를 애들이 둘러싸 있다. 전학생 오는 게 무슨 대수라고. 새로운 애들 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학교가 그렇게 재미 없긴 하지만… 그 정도로 사람이 몰릴 일은 아니잖아.

잘생겼어? 속 보이는 애들의 질문에 나고야가 답하는 순간 교실이 떠나가라 여자애들이 소리를 지른다. 어이 조용히 해—!! 교실 너희만 쓰냐? 앞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이시하라가 일침을 날렸다. 너도 쓸 데가 있구나. 그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던 애들은 쉬는 시간이 끝날 때까지 소음 생산을 멈추지 않았다. 종이 울려도 제자리로 안 돌아가던 녀석들이 타코 온다—! 하는 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각자 자리에 앉았다. 그 꼴이 우스워서 누가 보면 엉덩이에 자석 달린 줄 알겠다. 냉소적인 콧웃음을 냈다.

타코. 우리 반 담임. 민머리라서 타코라는 별명을 가졌다. 대머리인 것도 슬플 텐데 어쩌다 이런 반 애들을 맡게 되어 그런 별명을 얻었을까. 하여튼 그는 모르는 아이와 함께 교실에 들어왔다. 교탁을 바로잡은 그는 바로 본론을 말하기 시작했다.

“자— 오늘 전학생이 왔다.”

“…….”

쉬는 시간에 유난이란 유난은 다 떨던 애들이 쥐 죽은 듯 숨을 죽이고 있는 꼴을 보니 헛웃음이 다 나온다.

“자, 이쪽은 아오야기 토우야. 자기소개 부탁한다.”

“도쿄에서 온 아오야기 토우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푸른 머리색을 가진 소년이었다. 눈이 올라간 게 꽤 사나워 보인다. 박수가 끝나고 타코가 말을 이었다. 자, 저기 빈자리에 앉으면 된다. 빈자리는 내 옆자리 밖에 없었기에 그가 이리로 다가왔다. 얼마나 귀찮아질지 불 보듯 뻔했다. 쉬는 시간마다 온갖 반 애들이 다가와서 이 불쌍한 전학생을 외계인 취조하듯 별의별 걸 다 물어볼 거다.

“반가워. 난 아오야기 토우야야.”

아무것도 모르는 전학생은 해맑게 인사했다.

“응 들었어. 난 시노노메 아키토.”

“잘 부탁한다 시노노메군.”

“그래.”

끝까지 이름은 안 불렀다 왠지는 모르겠다. 첫인상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은 인정한다. 이것 또한 왜인지는 정말 모르겠다. 잘생겨서 질투하는 건가. 한심한 감정을 꺼낸다면 좋을 일도 없으니 깊이깊이 묻어두기로 했다.

타코는 어김없이 수업을 시작했다. 전학생은 가방에서 교과서를 한참 찾았다. 지금 수학 시간이야 이거 꺼내면 돼. 고마워 시노노메 군. 표정을 활짝 펴며 말했다. 사나운 인상인데 웃으니까 확 풀어지네. 생각 외로 살가운 타입이겠구나 싶었다.


언제나 그렇듯 쏟아지는 졸음을 못 이기고 쓰러졌었나보다. 정신 차리니 수업이 끝나있었고 아오야기는 여자애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에게 질문 폭격이 이어졌다. 아오야기 군 어디서 왔어? 내 친척도 도쿄 사는데—하며 접근하는 애부터 여자친구 있어? 라며 직설적으로 쐐기를 박아버리는 무서운 애까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인간의 호기심과 탐욕이 타인에게 행하는 공감을 이겨내고 있었다. 아오야기는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이— 그만 해 아오야기가 불편해하잖아. 끼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나도 참 고달프게 산다. 이놈의 오지랖.

아오야기 군— 같이 도시락 먹자— 소녀군단에 아오야기는 또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를 째려보며 ‘정신 차려… 네가 유야무야 넘어가면 나도 불편해지잖냐….’ 하고 텔레파시를 보내봐도 반응이 없다. 그저 눈만 접은 채 웃고 있다. 에휴.

아오야기는 나랑 먹기로 했어, 가자. 그의 팔목을 잡아챘다. 그리고 교실을 나와 복도를 달렸다. 계단을 서너번 오르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너 왜 싫으면 싫다고 말을 못하는 거야.

“오해다. 원래 잘 하는 편인데 아직 적응을 못해서 어려운 것 뿐이야.”

“그래? 그럼 다행이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점심이나 같이 먹자.”

“좋아. 시노노메 군.“

”아키토라고 불러.“

”응 나도 토우야라고 불러.“

옥상 철창에 등을 기대고 도시락을 먹었다. 내 옆에 앉은 그는 배고팠는지 도시락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이상한 전학생과의 어색한 점심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어색한 공기를 참을 수 없는 나는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너, 그럼 겨울 좋아해? 에? 이름에 겨울이 들어가잖아. 말을 듣고 그는 입을 막으며 웃어댔다. 왜 웃어. 이름에 겨울이 들어간다고 좋아한다고 생각하다니 웃긴걸.

"그럼 너는 가을 좋아해?" 빠르게 대답했다. 아니.

"나는 여름이 좋아. 축제의 계절." 잔잔해 보이는 면과 다르게 그는 활기찬 여름을 좋아하는 의외의 면이 있었다.

"으… 여름 싫어. 너무 뜨겁잖아."

"아, 그렇긴 해. 그런데 그게 또 매력이지."

"매력이라 할 것도 없다."

떠가는 구름을 보며 대화를 나누니 점심시간은 그렇게 끝이 났다. 다음날도 소녀군단은 찾아왔기에 토우야에게 나만의 공간을 빌려줄 수 밖에 없었다. 한여름이면 다들 땡볕을 피하느라 옥상은 온전히 내 차지가 되어서 좋았는데…. 뭔가 내 공간이 사라진 느낌이지만 어차피 크게 신경은 안 쓰이는 터라 괜찮았다.

그나저나 이 자식 특징인가, 잔잔하게 존재감을 내뿜는 거. 얼마나 조용하냐면 귀가 예민한 나도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였다. 새하얀 밀랍 인형은 숨소리도 안내는 듯했다. 수업 시간에도 허리를 꼿꼿이 펴고 눈과 손만 바쁘게 움직이는 그는 숨을 내뱉지 않는 밀랍 인형이 분명했다. 내가 수업 시간에 정신없이 잠을 자는 까닭도 있겠지만, 하교 시간이 되면 소리 없이 손길로만 잠을 깨운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놀라 소스라치게 깨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검지와 중지로 머리 위를 기어 다니는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차가운 손을 뒷목에 갖다 대는 경우도 있어서 화들짝 놀라서 깬 적도 있었다. 내 반응을 보며 웃는 모습에 배가 아파졌다. 재밌냐고 정색 하면 금세 사과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지만… 살가운 면이 없어 보이는 놈도 이런 짓을 하는구나 싶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어련히 잘 깨워주겠거니 믿으며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어쩐지 개운하더라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이 자식이 날 안 깨우고 가버린 건가 싶어 알 수 없는 배신감에 가방을 턱 하니 집어 들었는데, 그 옆에 토우야가 쓰러져있었다.

"어이, 토우야 괜찮아?"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눈도 못 뜨고 쓰러진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교 시간이 한참 지난 모양이다. 복도를 지나가는 선생님이나 학생들은 전혀 없었다. 평소 같았으면 수위 아저씨라도 있었을 텐데. 오늘따라 왜 안 보이는지. 구급차를 부르기 위해 서둘러 휴대폰을 켰지만 방전되어 꺼지고 있었다. 이게 무슨 머피의 법칙이냐. 눈앞이 새하얘졌다. 정신을 못 차리는 그를 당연히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기에 보건실로 업고 달렸다. 나보다 키가 큰 남자애를 업었는 데도 무거운 줄도 모르고 달렸다. 제발, 보건 선생님 만은 계시길. 제발… 제발.


"어머, 무슨 일이니?"

다행이다. 이 친구가 쓰러져 있었어요 일단 침대에 뉠게요. 곧장 침대로 달려가 토우야를 뉘었다. 선생님은 서둘러 구급차를 부르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전화번호를 입력하는 순간 토우야의 손이 선생님의 팔을 잡았다.

"전화 안 하셔도 돼요. 약 있어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가방에서 꺼낸 생수와 함께 삼켰다. 조금만, 조금만 쉬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자주 이래요. 토우야를 둘러싼 우리 둘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십 분 정도 지나니 토우야의 숨이 잦아들었다. 평소엔 숨소리도 안 들리는 녀석인데. 걱정이 안될 리가 없잖아.

"늦었으니 넌 집에 가렴. 선생님이 상태 보고 있을게."

아니에요. 괜찮아요. 토우야랑 같이 집에 갈게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그렇게 하렴… 선생님도 남아있을게. 무슨 일 있으면 부르렴. 보건실은 이 학교 입학한 이후로 처음 와보는데 이런 일로 오게 되다니. 그래도 약이 있어서 다행이다. 약… 무슨 약일까. 물어봐도 되는 걸까. 궁금증은 커져갔다. 어느새 협탁에 놓인 약통만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태어났을 때부터 있던 병이야. 중학교 때 쓰러져서 입원했다가 드디어 상태 나아져서 퇴원한 건데, 약 먹는 걸 잊어버렸네."

내 눈빛을 읽은 토우야가 말했다. 약 먹는 걸 잊어버리면 어떡해 너무 위험하잖아. 미안해.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를 탓하려는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이번엔 내가 미안해져서 조심스레 말을 던졌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약 먹는 거지?"

"…응?"

"네가 잊지 않게 이제 내가 챙겨줄 테니까."

"아, 번거롭게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야. 어차피 먹었나 안 먹었나만 체크할 거고,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부담은 가지지 마. 미안함을 담아 무거워진 그의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갔다. 대신 너는 날 집에 데려다주는 걸로 대신하면 되잖아. 토우야의 눈이 다시 동그래졌다. 어쩜 이리 알기 쉽냐. 세상살이 고달프겠네. 아니 워낙 고달프겠지만… 어차피 우리 집 가는 길은 토우야네 집 가는 길이니까. 내가 걔를 데려다주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토우야는 바보 그 자체였다. 잔잔한 얘기를 나무다 보니 열도 다 떨어진 것 같아 보건 선생님께 감사 인사를 하고 토우야와 학교를 나왔다. 나 때문에 고된 하루 였네… 어이,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 알았어 미안해. 바로 입을 다무는 토우야였다. 운동장을 저벅저벅 가로지르며 밤하늘을 쳐다봤다. 달이 크게 떠서 그런지 별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달 잡아먹는 별.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가 옆을 바라봤다. 고개를 쳐든 나와 다르게 고개를 푹 숙이고 걷는 토우야에게서 어색함이 감돌았다. 몇 주가 지났는데 아직도 어색한지. 바보 같은 녀석. 정적을 깨기 위해 말을 던졌다. 나 사실 너 질투 났었어.

“에? 왜?”

“잘생겨서.” 토우야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문득 눈을 접으며 푸흐흐 웃어댔다.

“하—? 그래 웃기겠지. 한참 웃어라.”

“아니… 아키토도 그런 생각 했다는 게 신기해서. 나도 너 잘생겼다고 생각했거든.”

“허튼소리 하지 마. 그런 말 들은 적 한 번도 없거든.”

“진짜야.”

“…….”

“너 은근히 인기 많아. 짝사랑하는 사람도 많을 걸.”

“하—? 비행기 태우지 마.”

“진짜야.”

“어떻게 확신하는데?”

토우야의 얼굴이 붉어졌다.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사실 이미 눈치를 챘었는지도 모른다. 나도 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으니까.

”음… 노래 불러주면 알려줘도 되나.“

”하—? 갑자기 노래?“

”응. 내가 요즘 좋아하는 노래야. 이거 불러줬음 해.“

”이거 유명한 노래라 나도 알긴 하는데, 나 학교에서 노래 안 부른단 말이야….“

표정에 급격히 먹구름이 끼었다. 원하는 건 얻어내야 하면서도 표정에 심리를 드러내는 알기 쉬운 녀석.

”하— 해볼게. 진짜 알려주기다.”

앱을 켜고 음악을 틀었다. 야 가라오케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노래 부르는 걸 시키는 게 어딨어—하는 원망이 가득 채워졌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안 그래도 한산한 거리에서… 하기는 좀 그렇고, 공터로 토우야의 손을 잡고 끌고 갔다.


“아키토 노래 정말 잘 부른다. 너 음악 해?”

아니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진담이었다. 꿈도 없었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기에 잘하는 것도 없다고 생각 했었으니까.

“에, 너 정도면 벌써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 그 정도는 아니야.”

“아냐. 내 꿈이 라이브하우스에서 공연하는 거라 종종 그런 곳을 다니는데, 너보다 잘하는 사람 드물더라.”

그렇게 안 생겨서 음악을 좋아하는구나. 사람은 인상으로 판단하면 안되는 걸 이 아이를 보며 많이 깨닫는 일상이었다. 하여튼…

"그럼 나보고 가수를 하란 말이야?"

“아… 응, 나랑 무대서자. 보컬리스트. 싱어송라이터.”

토우야가 내 두손을 잡아 왔다. 줄곧 너 같은 파트너와 무대를 서고 싶다고 생각해왔어. 너라면, 무대 위의 모습도 정말 멋있을 거야. 인형은 무대 위를 꿈 꿔왔던 걸까? 그렇지만 난 아니었기에 빠르게 거절했다.

하? 참나 됐어. 빨리 나아서 약 먹는 거나 끊고 말해. 그럼 다 나으면 나랑 무대에 서는 거야? 그러든가.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이 녀석 다시 표정이 누그러진다. 괘씸함이 들끓어 오른다.

“나한테만 노래 시키는 건 아니지. 너도 노래 불러봐. 미래 파트너로서 평가해주지.”

그래 기꺼이 해주지. 녀석은 똑같은 노래를 틀었다. 가사를 읊었다. 간주도 없는데 어떻게 박자를 맞춘 거지. 이 정도면 아마 이 노래만 천 번은 들었을 거다. 게다가… 이 녀석 수준급이잖아. 이건 기만이다.

"너, 이건 반칙이지! 당장 데뷔해도 손색없잖아!"

그는 눈물이 날 정도로 크게 웃었다. 그런 칭찬은 처음 들어봐. 그럴 리가. 사실 누구 앞에서 노래 불러보는 거 처음이거든. 그렇구나, 노래를 부를 기회가 없었을 지도.

노래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이걸 빌미로 날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내야지.

“그래서 어떻게 확신한 건데?”

나는 직설적으로 쏘아붙였다. 요구하는 건 다 들어줬잖아.

“내가 널 좋아하니까.”

“…….”

“…널 좋아한다. 아키토”

부담 갖지 마, 그냥 알려주는 거다. 대답은 안 해도 돼. 머릿속이 혼란에 빠졌다. 기류는 눈치챘지만 쏘아붙인 물음에 이렇게 갑작스레 답해줄지는 몰랐다. 어떻게 말해야 하지. 미안해. 아니지… 고백해줘서 고마워. 그치만 미안해. 이건 좀 쓰레기 같은가……. 아니야….

내 마음은 뭐지?

고민의 수렁에 빠져 아무 말도 못하고 결국 토우야의 집 앞에 도착했다.

다음주에 보자.

…응….


뜬 눈으로 밤을 샜다. 새벽에 일어나 동네를 마구 달렸는데도 불구하고 그 장면이 지워지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멍하니 아침밥을 먹었다. 엄마… 쟤 왜 저래? 모르지… 가족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밥도 다 못 먹고 방으로 들어갔다. 가족들이 입을 쩍 벌리고 있던 걸 언뜻 본 것 같기도… 몰라. 침대에 털썩 몸을 던져 베개로 머리를 감쌌다. 아 진짜 모르겠다. 머리를 얼기설기 흩트리곤 대자로 뻗어 천장을 바라봤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지. 내 마음도 잘 몰라.

"아."

뭔가 깨달아서 책상·의자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커뮤니티에 글을 썼다. '친구가 저를 좋아하는데 저는 잘 모르겠어요.' 한참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 게시글 발행 버튼 위에서 마우스 포인터가 멈춘 채 10분이 지나갔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 검지로 마우스 왼쪽 버튼을 클릭하고 책상을 벗어나 침대에 다시 엎드렸다. 게시글을 그냥 삭제해 버릴까 생각도 했다. 그러다 이내 생각을 그만두었다. 하 몰라. 될 대로 돼라.

띵-동.

알림소리가 들렸다. 언제 잠들었지. 작은 석양이 커다란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다가갔다. 아까 올린 게시글의 댓글 알림이었다. 익명의 댓글을 확인했다.

[ 서로 좋아하네. 너 그 애가 싫었으면 진작 거절했을거잖아. 안 그래? ]

가슴에 화살이 꽂히는 기분이었다. 좋아하네. 좋아하네. 좋아하네… 머릿속에서 네글자가 메아리 쳤다. 생각해보면 그랬다. 종일 붙어 다니는데도 질리지 않는 그와의 일상. 그리고 무슨 말을 해도 웃음이 나는 그와의 이야기. 어떤 친구가 약 잊어 버렸다고 확인까지 해주겠는가. 그리고, 그가 슬쩍하는 스킨십 마저 나쁘지 않았다. 지금까지 내가 부정하고 있던 감정을 꼭 전하자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막상 얼굴을 보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 것 같고. 지금이랑 고백을 전한 후랑 다를 것도 없을 거 같아서… 전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핑계나 마찬가지지 뭐.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일 년이 지나고, 반이 멀어지고, 사이가 멀어진 뒤 고교 생활이 끝났다.


뭐라고?

"나도 너 좋아한다고."

졸업식이었다. 마지막 날이라도 전하고 싶었다. 추위에 코와 볼이 새빨개진 토우야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또 저 토끼 눈.

"아, 아키토… 고맙지만, 미안."

"……뭐?"

"나, 일이 있어서 가볼게. 다음에 봐."

그렇게 눈 오는 졸업식에 그는 사진만 찍고 검은색 차를 타고 떠나버렸다. 그 후로 몇 년간 만날 수 없었다. 집 주변에 사는데도 그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다고 마음이 싹 바뀌는 게 어딨냐. 싸가지 없는 눈, 싸가지 없는 새끼. 그렇게 나는 겨울을 싫어하게 되었다.


"아키토, 전화 받아! 아까부터 계속 울리잖아!"

에나가 방문을 두들기며 소리를 지른다. 누가 야밤에 전화를 거는 걸까. 아키토는 비몽사몽한 상태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키토, 나야."

목소리를 듣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하?

"너무 늦었나. 사실 나도 여전히 좋아해. 그런데 말이야…."

이제 와서? 아키토는 바닥에 발길질을 해대며 분풀이를 했다. 그리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미친 놈.

"그럼 된 거 아냐? 근데 왜 거절했어? 왜 날 버리고 갔냐고."

"어… 아키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뭐? 너 어디 가? 너 지금 어디야!"

"학교 옥상에 우리 앉아있던 곳. 거기… 뭔가 숨겨뒀어. 비밀번호는 네 생일. 나중에 꼭 가 봐. 아, 나 지금 가봐야겠다. 그럼 끊어."

"어이, 야!!! 야!!!"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 아키토는 검은 우비를 쓰고 검은 도로를 달려갔다. 시야가 보이지 않았다. 빗물이 눈앞을 적셔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머피의 법칙은 아직도 아키토에게 유효한 듯 보였다. 온갖 신호등의 빨간 불이란 빨간 불은 다 걸렸고, 물웅덩이에 발이 빠져 옷이 다 젖었다. 그럼에도 아키토는 달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어두컴컴한 밤에 으스스해서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학교 안에서 아키토는 라이트도 없이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옥상. 그리고 함께 있던 자리. 은색 철제 상자가 놓여있었다. 아키토는 달려가 철제 상자를 들고 계단에 다시 돌아와 앉았다. 그리고 상자의 자물쇠를 열어보았다. 1112. 상자 안에는 쪽지가 수백 개 접혀있었다. 두 장을 꺼내 펴냈다.

[2학년이 되는 날]

너와 같은 반이 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구나. 멀리 떨어진 반이라 많이 만나지도 못하겠지. 그래도 난 널 좋아해. 아마 영원히 좋아하지 않을까? '영원히'라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길겠지만, 내게는 얼마 안 남은 기간이라 허황된 말은 아닐 거야. 사실 치료가 잘은 안되었거든. 그래서 너는 내 삶의 처음이자 '영원히'야. 믿어 주길 바라.

[옥상에서 혼자 점심을 먹었어]

너와 함께 먹는 도시락 맛이 나지 않아. 네가 불러준 그 노래를 들으면서 먹어도 아무 맛이 안 나는 거 같아. 이제라도 가서 다시 친구가 되자고 해도 넌 받아줄까? 아니… 만날 일이 없잖아. 바보.

아키토는 심각한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빠르게 다음 쪽지를 꺼내 폈다.

[넌 아직도 되고 싶은 게 없어?]

난 여전히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어. 너와 함께 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싶어. 그… 함께 불렀던 그 노래 있잖아. 그 노래 꼭 다시 부르고 싶어 너와. 나는 무대에 서지 못하겠지만 너는 기회가 된다면 꼭 서 보길 바라! 정말 행복할 거야. 아마도.

[1학년 마지막 시험이 끝나고]

시험기간에 네 공부 봐주는 거 그래도 꽤 재미있었는데, 나도 공부를 정말 잘하는 편은 아니지만, 선생님께서 널 배정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 너와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하고 더 오래 있고 싶었는데 말이야. 내 소원을 들어주신 걸까. 너는 내 설명을 들으면서 꾸벅꾸벅 졸거나 낙서를 하는 것이 태반이었지만, 그래도 즐거웠어. 이번 치료가 잘 되면 고백할 거야.

[3학년이 되는 날]

이번년도 치료도 들지 않으면 입원해야 한대. 연명치료를 해야 한다나. 난 병원에서 지낸 날이 학교생활을 한 날보다 많으니까 당연히 싫다고 했지. 하지만 부모님들은 내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입원 하라 하시더라고. 그래서 졸업하자마자 입원을 하겠다 약속 했어. 이제 다시 못 보겠지? 내가 네게 알려주지 않는 이상. 앞으로 없을 거야 아마.

[졸업식]

아키토 미안해. 네게 걱정을 짊어주기 싫어. 너랑 오래 지내고 싶은 것도 내 욕심일 뿐이니까. 이제 얼마 안 남았다고 하더라고. 아마 오늘이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지 않을까? 학교에서는 당연하고. 병원은 내가… 알려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마지막이니까 여기는 적어둘게 혹시 몰라. 아키토가 백마 탄 기사처럼 날 보러와 줄지. 너는 내 영웅이니까.

아키토는 마지막 쪽지를 주머니에 욱여넣고 계단을 밟아내려 갔다. 쏟아지는 비와 함께 눈물이 씻겨 내려갔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헤드라이트와 신호등의 빛만이 눈에 고였다. 쏟아지는 인파들을 뚫고 지나가며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가까운 병원 위치가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왜 토우야는 멍청하게 내게 알려주지 않은 거냐, 내가 대신 죽기라도 하겠냐며 아키토는 그를 원망했다. 빗물로 엉망이 된 그는 병원 앞에서 차에 치일 뻔했다. 야! 잘 보고 다녀! 신호등을 안보고 달려간 탓이다. 이런 날은 왜 머피의 법칙이 끊이질 않는 걸까. 로비로 들어간 그는 9층 11병동을 찾았다. 엘리베이터는 사람이 꽉 차 있어 계단으로 올라갔다. 숨 막히는 감각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제발. 제발. 토우야가 무사하길.

"아… 아키토… 왔구나."

눈이 반쯤 감긴 토우야가 더듬더듬 말했다. 이 바보야. 빨리 말해주지 그랬냐고. 제발 살아만 달라고 토우야를 원망하고 소망했다.

"있잖아. 난… 사실, 겨울도 좋다. 밤이 길어지면, 낮이 소중해지거든… 사람은 죽어서 별이 된다는 말도 있잖아. 그니까, 볕마저 저무는 달에도 나는 언제나 곁에 있을게… 아, 아키토 그 노래 불러줘."

아키토는 울음을 삼키며 그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불렀다. 박자가 느려졌다. 그리고 토우야는 미소를 지으며 잔잔히 눈을 감았다.

창밖에 함박눈이 내렸다.


너도 겨울보다는 여름이 좋다 했잖아. 눈 내리는 날이면 네가 생각나. 눈이 널 빼앗아 간 거 같아 원망스러워.

하지만 넌 그를 탓하지 말라고 하겠지. 네가 노래해달라는 이유를 이제 알겠어.

가사의 뜻이 이제야 와닿는 거 같아. 네가 노래를 부르며 웃음을 짓는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

나, 네가 원하는 대로 가수가 됐으니까. 이제 너도 돌아올 때가 되지 않았을까?

너와 함께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잊히지 않아.

하지만 넌 돌아오지 않아.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남은 맥주 반캔을 마시던 아키토는 스피커를 틀었다. 스피커에는 그 음악이 흘렀다. 학창 시절에 매일 그들이 부르던 노래.

기억나는 건 너의 노래. 대화보다도 선명해. 어디에 가버린 거야. 언제나 찾고 있다고.

기억나는 것은 너의 노래. 노래하며 웃는 얼굴이 선명해. 너랑 어울린다고. 계속 보고 싶다고.

그치만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것은, 분명 이젠 네 꿈속. 다시 한번 또 들려줘. 듣고 싶어.

Vaundy - 怪獣の花唄(괴수의 꽃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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