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편 / 단편 모음: 쿠키런

토막글 모음: 쿠키런

쿠키런 토막글 모음

단역 (1인)

감초맛 쿠키

악이라고만 믿었던 곳을 바라본다. 해골 지팡이를 한 손에 쥔 채로, 몇분 전과는 달리 나약해 보이기만 하는 몸을 떨며, 살려달라는 애원마저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쿠키가 온 몸을 약하게 떤다. 그에게는 악도, 동료도, 주군도, 부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이렇게 땅에 쓰러진 채로, 수치스러운 항복과 애원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입을 열려고 하지도 않는다. 삶의 무게와 자존심 사이를 저울질 해 볼 시간이었다. 

다크초코 쿠키

남은 것은 무엇 하나 없지만 그렇기에 마음이 더욱 가볍다. 오히려 무어라도 더 버릴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모두 던졌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쓴 그 위선에게, 자신을 조여오기만 하던 그 왕국에게. 별빛이 가득한 서천을 향해 고개를 든다. 분명히 매일을 지겹도록 보아 온 밤 하늘인데도, 처음 보는 별의 모습이 그의 눈을 가득 채운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늘의 모습마저 제대로 모르며 살아왔다는 것을 문득 깨닫는다.

다크카카오 쿠키

닫힌 성문 속에는 올곧지만 무뚝뚝한 쿠키가 하나가 자리를 지키는 채로, 마지막이라는 장면을 전혀 실감하지 않고 있었다. 이전과는 현상이 조금 달랐지만 그의 눈빛은 그런 건 전혀 상관 없다는 듯 날카로웠다. 텅 빈 경비대원들의 자리, 텅 빈 관리들의 자리, 그리고 언제부터 비어있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차기 군주의 자리. 지금 와서 비어 있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그는 마지막 하루를 텅 빈 왕국과 성을 관조하는 데 모두 쏟아 부었다. 

다크카카오 쿠키

이 왕국에 왕자라는 존재는, 어쩌면 그 직함이나 칭호 자체가 더는 필요 없었다. 차라리 언제까지고, 자신의 몸이 끔찍하리만치 망가질 때까지 이곳에 서 있는 것이, 저 천치에게 이 왕국을 물려주는 것보다는 수백 배는 나을 터였다. 그는 그러하기 위한 준비에 딱히 시간을 들이거나 요령을 피우지도 않았다. 왕국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어명에 그런 형식적인 절차가 어째서 필요한가? 어째까지 왕자라는 직함이 있었다는 과거는, 오늘 그것을 없애는 것에 있어서 그 어떤 장애물도 되지 않았다. 

단팥맛 쿠키

세상을 가득 채울 기세로 천천히 내리는 눈을 땅에서 한 뭉치 집어, 그의 앞에서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펭귄을 향해 장난스럽게 던져본다. 푹신한 눈덩이는 펭귄의 뒤통수에 그대로 명중한다. 펭귄은 뒤뚱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이내 찡그린 표정으로 꽥꽥거리며 그에게 불만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 모습에 웃음을 터트리더니 다시 눈을 한 뭉치 집어 펭귄을 향해 던진다. 펭귄은 덩치와는 다르게 그것을 날렵하게 피하더니, 날개를 휘두르며 그를 향해 눈을 잔뜩 날리기 시작한다. 아이, 미안해, 항복, 항복, 그는 웃으며 소리친다. 

단팥맛 쿠키

이런 날씨도, 아주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애써 밝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단팥맛 쿠키의 표정은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매일같이 빙하 위에서 눈을 맞으며 달리던 쿠키가, 갑자기 하루아침에 보통 쿠키들도 가벼운 복장을 하고 다니는 곳에 왔으니, 어쩌면 그러지 않는 것이 더욱 이상할 터였다. 펭귄들을 이곳에 데려오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부분 채 몇 초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겠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땀으로 온 몸을 젖힌 채 천근만근한 발걸음을 옮겼다. 

라일락맛 쿠키

마음이 변한 이유를 설명해보라고 해도, 그게 과연 정확하게 정의할 만한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내 마음은 변하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나에게는 처음부터 너를 해칠 자신이 없었을거야. 내 마음은 그랬지만, 내 몸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반항했던 것뿐이지. 그렇지만 이제는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애초부터 나에게는 너를 해칠 이유가 없었을 거야. 그냥 명령이니까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것뿐이지. 어쩌면 꼭두각시라도 불러도 될 거야. 어쩌면 그런 형편을 벗어난 것도 네 덕분이 아닐까. 

레몬맛 쿠키

꽤 오래 전부터 물 속에 들어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체질과 자연 법칙은 지독하리만치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강렬한 전기를 발산하고 있었고, 물은 그 전기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덕분에 그가 들어갈 수 있는 '물'이라고는 다른 쿠키들이 하나도 없는 곳뿐이었다. 처음에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애초 그는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인 위인이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런 그라도 여름의 소다 제도를 보며 요동치는 마음을 다잡기는 어려웠다. 

레몬맛 쿠키

요즘 날씨가 따듯해져서 좋은 걸, 헤드폰을 쓰고 있는 채였지만, 대화에 방해되지 않도록 음악을 꺼 둔 레몬맛 쿠키는 평소처럼 무뚝뚝했지만, 나름대로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갑자기 예고도 없이 더워졌다고 불만하는 쿠키들도 있고, 솔직히 나도 조금 갑작스럽다고 생각하고는 있어. 하지만 난 조금 더운 게 좋다고 할까, 이런 따듯한 날씨 아래에서 노래를 들으면서 돌아다니는게 즐겁거든. 햇빛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좋고 말이야. 레몬맛 쿠키가 이렇게 많은 말을 자발적으로 꺼낸 것은 상당히 희귀한 일이었다. 

마들렌맛 쿠키

그, 리더! 오늘은 맡길 일은 없나? 요즘 동쪽 숲의 기운이 조금 이상하다고? 걱정할 것 없지! 이 몸이 순식간에 해결해올테니까! 동료? 혼자서도 충분하지! 그, 잠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지금 바쁜가? 커피마법을 연구하느라 방에서 이틀 째 나오지 않고 있다고? 아쉽군. 정체 모를 곳을 탐사하는데 커피마밥만큼 도움 되는 것도 없는데 말이야. 탐험가맛 쿠키는 있는가? 또 혼자 다크카카오 왕국을 탐사하러 갔다고? 뭐, 나 혼자서도 충분하지! 금방 다녀오겠네!

마들렌맛 쿠키

마들렌맛 쿠키에게는 잠시 현실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아니, 온종일이 주어져도 부족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었다. 아무리 어느 때나 당당한 그라지만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채로 그를 둘러싼 거대한 건물들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들렌맛 쿠키는 자신의 팔과 손을 바라보았다. 이게 도대체 뭐야, 그는 깜짝 놀라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우습게도 복장은 성기사의 갑옷 그대로인 채였다. 바쁘게 길을 가던 사람들 한둘이 신기하다는 듯 그런 그에게 눈길을 돌렸다.

밀키웨이맛 쿠키

꿈이란 건, 생각할 수록 복잡하지만, 그럴 필요 없이 단순하게만 바라보아도 충분한 현상이야 - 그렇게 말하는 꿈 열차의 차장은, 평소와 같은 표정을 한 채였다. 아무튼 그녀는 진지한 이야기를 할 때도, 항상 크게 뜬 특유의 눈과 입가의 형체 때문인지, 언제나 장난스럽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물론 지금 밀키웨이맛 쿠키는 그녀답지 않게 아주 진지했지만. 꿈으로 너희를 인도해 주는 건 내 역할이라는 거지 - 너희들은 그 꿈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어, 그게 바로 꿈 열차의 차장인 내 역할이니까 말이야 - 정론을 설파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바람궁수 쿠키

바람궁수 쿠키에게 이 숲은 기묘한 인상을 주었다. 분명히 어딘가 익숙하였지만 동시에 어색한 기류를 풍기고 있었다. 으음, 이게 도대체 뭐지. 바람궁수 쿠키는 커다란 나무 위에 선 채로 중얼거렸다. 물론 그는  처음 이 숲에 발걸음을 들일 때는 완전히 모든 것이 어색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용감한 쿠기의 초대를 받아 킹덤이라는 곳을 찾아온 것은 어제의 일이었다. 너도 다른 쿠키들이랑 한번 왕국 생활을 해 보지 않을래? 용감한 쿠키는 숲 깊숙한 곳에서 조용히 나무 한 그루에 기대어 앉아있는 그를 찾아와 환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왕국이라, 거기도 주변에 숲이 무성하고, 여기와는 다른 많은 생명들과, 자연환경으로 가득하다고 들은 곳이군. 그는 흔쾌히 용감한 쿠기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를 따라 왕국에 발걸음을 들였다. 다만 그는 다른 쿠키들과 달리 왕국에 도착하자마자 울창한 숲으로 몸을 옮겼다. 앞으로 생활하기에는 이런 곳도 나쁘지 않겠군, 그는 생각했다.

박하사탕맛 쿠키

오늘 정말 큰 별을 봤어. 아마 지금까지 본 것중 가장 큰 별일거야.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거 있지. 그걸 보면서 네 눈이 생각났어. 항상 무엇을 보든 반짝거리던 너의 눈. 아마 내가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꼽으라면, 네 눈이 아닐까. 나 솔직히 조금 겁나. 더 이상 너를 만날 수 없을까봐.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킹덤이라는 그곳이 점점 멀어져가는 느낌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축 쳐져 있으면 너도 힘내기 어려울테니까, 너의 그 눈을 생각하면서 오늘도 바다로 나가볼게. 너도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좋겠어.

박하사탕맛 쿠키

박하사탕맛 쿠키는 흐린 날씨 아래에서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애매하게 빛을 보이는 파도를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따라 날씨가 심하게 흐리네, 바다도 기분이 한풀 꺾여있는 것 같고 말이야. 으음, 이런 날씨 아래에서 기분이 좋기에는 아무래도 어렵긴 하지. 박하사탕맛 쿠키는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나도 흐린 날씨를, 지금은 딱히 생각이 없지만서도, 한때는 정말 좋아했는데 말이야. 온종일 유지되는 그 묘한 밝기에서 오는, 본능적인 매력이 있었거든. 그리고 너는 그 아래에서도 신나게 움직였고 말이야.

박하사탕맛 쿠키

내가 지금 대체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박하사탕맛 쿠키는 종이로 만든 작은 보트에 앉은 채로 바다 한가운데에서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냥 이쪽이나 저쪽으로 가면 뭐라도 있을 것 같아서 와 봤는데, 왕국은커녕 네 지느러미조차 한치 안 보이네. 지금 너라도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정말 좋겠다. 아니, 어쩌면 듣고 있는데도 내가 모르는 것일지도 모르지. 박하사탕맛 쿠키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동쪽도 바닷물로 가득했고, 서쪽도 바닷물로 가득했다.

박하사탕맛 쿠키

조금은 아프고, 조금은 보고싶어. 박하사탕맛 쿠키가 소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거짓말이야. 많이 보고싶어. 죽을 정도로 보고싶어. 같이 해변에 앉고 싶고, 같이 바다를 헤엄치고 싶고, 같이 왕국이라는 곳을 산책해보고 싶어. 그렇게 말하는 박하사탕맛 쿠키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흥건했다. 지금 당장 샤벳상어맛 쿠키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수만 있다면 이 소라고둥도 내놓을 수 있단 말이야. 박하사탕맛 쿠키는 공허 속에서 중얼거렸다.

박하사탕맛 쿠키

보고 싶어, 라는 한마디밖에 지금은 할 수 없잖아. 당장 내가 종이배를 만들어서 이 광활한 바다를 건너간다고 생각해 봐. 물론 시작하기도 전에 캡틴 아이스 쿠키가 나를 말리겠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대양 한가운데에서 미아가 될 것이 뻔하지. 네가 상어의 모습을 한 채로 이곳에 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까? 으음, 킹덤이라는 곳에서 여기까지 돌아오는 건 매우 어렵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말이야. 결국에는 내가 갈 날을 고대하는 수밖에는 없겠네.

박하사탕맛 쿠키

이렇게 하면 샤벳상어맛 쿠키에게 이 편지를 전할 수 있다는 거지? 으음, 정말 이게 잘 될까? 나 솔직히 조금 외로워. 아니, 많이 외로워. 괴로울 정도로. 정말 이 유리병이 아무런 문제 없이 왕국이라는 곳까지 갈 수 있는 거야? 가다가 깨지지는 않을까? 가다가 파도를 만나서 이상한 곳으로 쓸려가버리진 않을까? 가다가 거대한 물고기한테 먹혀버리지는 않을까? 그러면 샤벳상어맛 쿠키를 향한 나의 마음도 문드러져 버릴거야. 나도 같이. 박하사탕맛 쿠키는 작은 유리병과 편지지를 눈앞에 둔 채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박하사탕맛 쿠키

샤벳상어맛 쿠키는 이 바다 건너편에서 웃고 있으면 좋겠는데. 괜히 나 걱정하지 말고 말이야. 나야, 나야... 잘 지내고 있으니까. 캡틴 아이스 쿠키가, 다른 쿠키들도 나를 잘 돌봐주고 있어. 그런데 자꾸 샤벳상어맛 쿠키가 보고 싶어. 아침에 일어날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바다를 바라볼 때도 난데없이 계속 그런 생각이 나를 찾아오는거야. 샤벳상어맛 쿠키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으음, 나처럼 바다를 보고 있을 수도 있겠고, 킹덤이라는 곳의 쿠키들이랑 어울려서 신나게 뛰어다니고 있을 수도 있겠지. 

박하사탕맛 쿠키

솔직히 말해서, 잘 안 보이잖아. 여기, 이게 몇 남지 않은 샤벳상어맛 쿠키의 사진인데 말이야. 솔직히 사진이라는 것이 이토록 그리워지리라고는 생각도 못해봤어. 그래서 애초에 몇 장 찍지도 않았는데, 그나마 이 서너게 말고는 다 잃어버렸지 뭐야. 이제 내가 의지할 곳은 이 사진 서너장밖에 없다는 거잖아. 이제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루종일 이 사진들을 끌어안고 있으면 될까? 고래들한테 이 사진을 보여주고 샤벳상어맛 쿠키를 찾아달라고 부탁하면 될까?

박하사탕맛 쿠키

솔직히 많이 아프네, 네 흔적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을, 아니 온몸을 바늘로 찔리는 것 같아. 저 작은 망원경도, 저 해적놀이 장난감도, 저 찢어진 옷가지도, 볼때마다 당장이라도 네가 찾아와서 집어든 채로, 내 손을 잡고 해변으로 뛰어갈 것만 같거든. 그런데 그 앞에서 한 시간을, 한나절을, 하루를 기다려도 넌 나타나지를 않아. 혹시 내가 무언가 잘못한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는 걸까? 박하사탕맛 쿠키는 그렇게 자문하며 모래사장에 몸을 누이고 있었다.

박하사탕맛 쿠키

어쩌면 구조를 위한 신호일지도, 어쩌면 위대한 제독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함정일지도 모른다. 물론 무엇이 올바른지는 제독에게 딱히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것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밖에 없으니까. 명령 한마디로 왕국의 모든 해군을 철수시킬 수 있는 그도, 마음대로 배의 방향 하나 틀지 못하고, 다시 그 추억의 표식으로는 더욱 향할 수 없었다. 그는 마음속으로 자신의 무력함을 뼈저리게, 며칠을, 몇 개월을, 몇 년을 새겨오고 있었다. 그것이 한땀 한땀 그의 심장을 옥죄어 올 때마다, 인근 해적들의 동태를 살피고, 처음 보는 배나 쿠키가 없는지 주의 깊게 먼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항상 바다는 침묵으로 답할 뿐이었다.

박하사탕맛 쿠키

구름 한점 없는 하늘 아래의 바닷물처럼 밝은 푸른빛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선함의 난간에 서 있는 제독은 몇십 분째 미동도 없는 채로 망망대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해군이 보고를 위해 그를 찾아갔다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보고 조용히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 제독이라는 자는 종종 그러고는 했다. 무서울 정도로 얼어붙은 듯 멈춘 채, 그저 하염없이 바다를 바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는 그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쿠키도, 설령 꽤 급한 일이라도 보고조차 할 수 없었다. 제독이라는 직함이 그만큼 강력하다는 것에는 굳이 설명도 필요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배에 오른 해군들은 그럴 때마다 상당히 답답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참견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박하사탕맛 쿠키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과묵한 제독에게 주어지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과거 그가 동경하던 캡틴 아이스 앞에 자랑스러운 쿠키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위기 속에서 바다와 쿠키들, 특히 해군들을 지키며 통솔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쿠키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업적들을 박하사탕맛 쿠키 앞에 나열하면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할 쿠키는 없었다. 그런데도 그 자신만은 언제나 공허했다. 그 공허가 공적인 자리에서 다른 쿠키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나름 용쓰고 있었고, 실제로도 지금까지 통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허라는 마음의 골은 내버려둔다고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마음 구석구석을 좀먹어만 가는 것이다. 

박하사탕맛 쿠키

너를 다시 만난다면 나는 정말 기쁠거야. 한마디라도 대화를 해보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네 얼굴이라도 볼 수 있을 테니까. 그것만 해도 나에게는 넘치는 축복일테니까. 하지만 너를 체포하지 않을 수도 없겠지. 누군가의 희생도 없지 않을테고, 너는 곧바로 내 손에서 벗어나 해경들에게 넘어갈테고 말이야. 그렇다면 오히려 너를 만나지 않는 게 나에게는 더욱 기쁜 일이 아닐까? 물론 감정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잘 모르겠어, 과연 내가 여기서 어떻게 너를 보러 가는 것이 옳을까. 제독인 내가 이런 한심한 고민이나 하고 있다는 걸 제군들이 알면 어떻게 될까, 어렸을 때는 이런 고민도 모두 너에게 털어놓았는데 말이야. 그나마 고래 친구들이 아직 있지만, 눈에 띄지 않게 만나기에는 너무 어려워서 말이야. 이렇게 하염없이 바다를 돌아다니다가, 너를 만나면 어떻게 될지 두렵기만 해.

박하사탕맛 쿠키

그는 이상하리만치 숨기는 것이 많았지만, 딱히 그것을 물을 수 있는 쿠키도 없었다. 누가 감히 모든 해군을 이끄는 쿠키의 과거를 묻겠는가. 의혹은 많았지만 행동은 전혀 없었다. 물론 어처구니 없는 과거로 불이익을 받는 쿠키들은 많았다. 하지만 누가 감히 이런 유능한 자에게 그런 흑심을 품겠는가. 오히려 그를 의심하는 자가 있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고발당할 정도였다. 물론 의심이 죄는 아니기에 딱히 어떤 조치가 취해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제독이라는 자는 그렇게 모두가 인정하는 평탄한 절벽 위에 선 채로 평화를 지휘했다.

박하사탕맛 쿠키

흐린 날씨 뒤에는 반드시 맑은 날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물론 그 맑은 날이 과연 언제 돌아올지, 예측할 수 있는 쿠키는 없었다. 그저 막연했지만 당연한 믿음이었다. 수일 동안 폭우가 쏟아지며 홍수가 왕국을 뒤덮더라도, 언젠간 거짓말처럼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이 고개를 내미는 것이다. 분명히 그러할 터인데, 지금은 어찌 된 일인가. 분명히 견디기 어려운 풍파가 어제부터 위태롭게 이 거대한 군함을 흔들고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뒤집어지지 않은 것이 기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군함이 아무리 커 보았자, 바다 앞에서는 한낱 작은 점에 불과했으니까. 제독도, 선원들도, 아직 배가 위태롭게나마 서 있다는 사실은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배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몹시 지쳐 쓰러질 판이었다. 어제부터 배가 내내 흔들리고만 있으니, 끊임없이 뛰어다니며 동태를 살피고, 식사는커녕 물을 마시거나 잠시 앉아 쉴 시간도 없었으니까. 제독은 이런 상황에 처한 자신이 한심하게만 느껴졌다. 풍파 때문에 배를 제대로 조타할 수도 없으니 육지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니, 애초 통신조차 불안정한 상태에서, 그들이 바다 어디쯤에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돌이킬 수 없는 망망대해로 떠밀려 이대로 마지막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위기를 방지하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문득 지금쯤이면 이 폭풍우를 신나게 호령하고 있을 작은 해적이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바다 어디에 있든 개의치 않을 터였고, 애초 배가 뒤집어지더라도 딱히 문제될 것도 없을 터였다. 그에 비하면 지금 그의 현실은 얼마나 비참하고 한심한가? 어째서 세간에서 정의라고 칭송하는 자리가 악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한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저 풍파 속으로 이 쓸모없는 몸뚱아리를 던져 버리는 것이 낫지 않은가? 

박하사탕맛 쿠키

하루만에 다들 몸이 얼어 붙을것만 같다고 말하는 추워진 날씨에도, 바다는 얼어붙지 않고 꿋꿋한 법이었다. 박하사탕맛 쿠키는 어렸을 적부터, 그렇게 강직한 겨울 바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지 귀를 기울이고는 했다. 물론 바다는 소금물이기에 잘 얼지 않는다, 라는 간단한 사실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우직하게 귀를 기울였다. 어쩌면 그것도 강직한 바다에서 비롯된 마음이었을까. 때로 박하사탕맛 쿠키는 차가운 바람이 칼날처럼 얼굴을 찌르는 겨울 바다 앞에서, 차라리 그때 훨씬 굳센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회상하고는 했다.

박하사탕맛 쿠키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에서 수정빛으로 빛나는 바다와, 달빛 아래에서 차갑지만 잔잔하게 파도치는 바다는 각자의 매력이 있었다. 하지만 박하사탕맛 쿠키는 서천 아래에서, 별빛이 수놓아진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특히 좋아했다. 그도 어째서인지 이유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어느 알 수 없는 시점부터, 텅 빈 조용한 해변에서, 물고기들마저 잠든 채 달빛으로 물든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면, 어쩐지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몇 달이고 그 장면을 바라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박하사탕맛 쿠키

때로는 잔혹하리만치 추운 날씨가 좋을 때가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제복을 입은 채 선상에 몇 시간이고 서 있는 탓에 몸이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할 때면, 어째서인지 머리조차 제대로 굴러가지 않아 생각을 비울 수 있었으니까. 그에게는 가끔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완전히 머리를 비운 채, 자신마저도 방해할 수 없는 무념의 흐름을. 불행하게도 그런 시간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어쨌든 제독이라는 자리는 좋은 싫은 항상 바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럴 때면 어째서 이런 자리까지 달려왔는지 무력한 회의감이 그를 덮치고는 했다. 회의감은 향수를 부르기 쉬웠다. 어렸을 적 종일 아무 생각도 없이 해변에 앉아, 잔잔히 그를 감싸는 바다를 바라보던 시간을 떠올렸다. 차라리 지금도 그러고 있다면 더욱 행복하지 않았을까.

블랙레이즌맛 쿠키

지금 그게 할 소리야? 얘네는 죽었어. 죽었다고. 다시는 얘네 목소리를 들을 수도, 같이 밥을 먹을 수도, 서로 마주 볼 수도 없어. 그런데 뭐? 명예? 뭐 그런 게 있으면 얘들이 살아서 일어나기라도 하나? 아니면 영혼이 되어서 우리 주변을 떠돌기라도 하나?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죽으면 남는게 뭐지? 이름? 몸? 재산? 모두 본인에게는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잖아. 그런데 도대체 죽어서 그까짓 돌판에 이름에 쓰여보았자 무슨 의미가 있는거지? 뭐 간절한 소망으로 부활하기라도 하나?

블랙레이즌맛 쿠키

뼛속까지 아릴 정도로 마지막 오기를 쥐어 짜낸다. 한참 전부터 제자리를 잃었을 터인 팔 한 쪽이 버티기 어려울 정도로 쑤신다. 환상통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경험해 본 적도 없었고, 딱히 믿어 본 적도 없었다. 어떻게 사라진 신체 부위로부터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현상은 그런 그녀를 당당하게 비웃으며 반증했다. 존재하지 않는 신체 부위로부터 오는 극심한 고통. 그녀는 그 모순과 공포 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조금이라도 다시 앞으로 향하려 노력했다. 

블랙레이즌맛 쿠키

생존을 위한 식사와 미식을 위한 식사의 차이를, 그녀는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애초 미식이라는 활동 자체가 그녀에게는 심히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녀는 삶을 유지하려면, 제때 충분한 음식을 챙겨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귀찮았다. 그렇다고 귀찮다는 이유로 식사를 거르면, 활동에 문제가 생길 뿐만 아니라, 건포도 까마귀가 옆에서 끼니를 거르지 말라는 듯 시끄럽게 울었고, 퓨어바닐라 쿠키가 찾아와서 잔소리를 늘어놓고는 했다. 아무래도 그쪽이 더욱 귀찮은 일이었기에 제때 대충이라도 끼니를 챙기려 노력했지만, 아무래도 그 필요불가결이 그녀는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블랙레이즌맛 쿠키

그녀에게 죽음은 지나치게 가까운 일이었기에, 오히려 그것이 쿠키의 마음과 감정을 파먹는 법에 대해 더욱 무지했다. 하루는 동료가 갑작스러운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고, 또 하루는 식량이 부족해 동료 하나가 허기를 버티지 못해 세상을 떠나고, 하루는 식량을 구하러 나간 동료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에게 위험할 정도로 익숙했고, 어쩌면 그러한 사건에 대한 감정의 골과 반응할 시간조차 모두 앗아가버렸다. 그렇기에 불과 몇 분 전처럼 매우 가까이 지내던 쿠키 하나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녀는 그것에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멍청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서, 두 눈을 깜빡거리며 싸늘하게 식어가는 반죽을 바라 볼 뿐이었다. 그녀가 할 줄 아는 것은 그것뿐이었으니까. 

벨벳케이크맛 쿠키

어리석게도 그는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는 함정에 빠진, 덫임을 알고도 뛰어는 생쥐 꼴이었다. 왕국에서 케이크 들개라는 존재를 수용하다니, 사실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케이크 들개' 라는 말 하나만으로 판단력을 잃은 채 제발로 구멍 속에 뛰어든 것이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할 것도 없었다. 굳이 책임을 돌리자면 그 대상은 자신뿐일 터였다. 아무튼, 앞으로 맞이할 운명이 어찌될 지도 전혀 몰랐으니까. 

샤벳상어맛 쿠키

네 눈은 파랗게 빛나고 있는데, 난 뭐랄까, 그걸 전혀 보지 못해서 너무 어두워. 솔직히 여기선 볼 수 없는 게 너무 많아. 무작정 불안한 앞을 향해서 달리는 일도, 나름 나쁜 건 아니잖아? 오히려 그것만의 재미도 있다고 생각해. 힘내, 라고 응원해주는 쿠키들을 보면서 말이야. 그런데 여긴 그 어느 곳보다 힘든 일도, 무리하게 달릴 필요도 없어. 친근한 쿠키들도 훨씬 많아. 그런데 공허해. 무언가 텅 비어 있어. 난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그다지 똑똑한 편은 아니니까. 하지만 너라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도 같이 바다에서 지냈으니까.

샤벳상어맛 쿠키

으응, 박하야, 난 그 어느 때보다 잘 지내고 있어, 정말이야. 이 왕국의 쿠키들은 모두 친절해. 내 걸음이 느리고 답답하다고 화내거나 놀리는 쿠키도 없어. 재미있는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아. 네가 없다는 건, 네가, 네가 없다는 건... 샤벳상어맛 쿠키의 거품 소리는 점점 느려졌고, 점점 낮아졌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였던 것 같아. 모든 게 좋아.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매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정말, 정말로 내가 원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런 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샤벳상어맛 쿠키

네가 없으니까 정말 심심하다, 그치, 샤벳상어맛 쿠키는 해변에 반쯤 묻혀있는 파란 소라고둥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만 몇 시간을 바라보고 있던 날이 생각나. 그날 네가 나한테 몇 번을 물었는지 모르겠어. 혹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냐고, 아니라고, 그냥 보고 있고 싶었다고 내가 몇 번을 대답해도 넌 끈질기게 계속해서 되물었지. 솔직히 난 그런 일상이 사라지리라 생각해지 못했거든. 그런데 여기에는 이 소라고둥밖에는 네 흔적을 찾을 수 없네. 샤벳상어맛 쿠키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해가 저물어가는 지평선을 빤히 바라보았다.

샤벳상어맛 쿠키

나, 어제도 박하사탕맛 쿠키를 봤어. 그런데 나를 보더니 시선이 흔들리면서 급히 도망가버리지 뭐야. 난 반가운 마음에 인사하러 다가간건데, 내 짧은 다리로는 박하사탕맛 쿠키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어. 나, 뭐 잘못이라도 한 걸까? 난 박하사탕맛 쿠키가 좋은데, 박하사탕맛 쿠키는 이제 나를 싫어하는 걸까? 나, 나 그러면 지금까지 육지에서 한 생활이 전부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고. 내일 다시 박하사탕맛 쿠키를 찾아가봐야겠어.

샤벳상어맛 쿠키

내가 웃고 있으면, 다른 쿠키들이 걱정하지 않잖아. 박하사탕맛 쿠키가 많이 보고 싶지? 이 말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지겹단 말이야. 네가 보고 싶다고 말해봤자 뭐해?  그렇다고 네가 나타나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항상 웃고 다녀. 바보처럼. 그러면 아무도 걱정하지 않거든. 걱정이라는 것을 참으로 무의미한 거야. 걱정한다고 바뀌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없거든. 당장 네 고래 친구들만 봐도 아무런 걱정 없이 살고 있잖아. 너도 날 걱정할 필요는 없어. 꼭 내가 건강한 모습으로 널 찾아가서 왕국에 데려올테니까.

샤벳상어맛 쿠키

우와, 박하야! 저거 너지? 네 고래 친구들이야!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셀 수도 없을 것 같아! 저기 위에 네가 타고 있는 거지? 여기에 너만 기다리면서 준비해 둔 것도, 보여주고 싶은 것도, 만나게 해주고 싶은 쿠키도 너무 많아! 정말 좋은 것들 뿐이라고! 내가 환영하는 게 맞는 건지는 잘 모르겠네, 그건 용감한 쿠키가 와서 할 일인데 말이야. 아무튼 너도 이제 왕국에 있는 거지? 저기서 소라고둥을 줍고, 저기서 수영을 하고, 저기서 온종일 뛰어다녀도 보는거야!

샤벳상어맛 쿠키

몇 분동안 폭포마냥 비를 퍼붓더니 지금은 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맑네. 이러다가 또 언제 비가 올 지 모르겠지? 아무튼, 이곳의 날씨라는 건 영원히 적응할 수 없을 거야. 바닷속에서는 날씨 따위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단 말이야. 솔직히 그렇다고 바닷속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정말로 지겹다고, 그런 곳은. 어딜 가든 바닷물, 바닷물, 또 바닷물.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는 시스템이야. 네가 이런 내 마음을 아려나? 아무튼 육지에서 얌전히 있는 수밖에 없지!

샤벳상어맛 쿠키

딱 한 걸음만 앞으로 걸어가 보면,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아름다움으로 바다가 가득해. 정말이야. 이 세상이라는 곳은 정말로 그렇다니까. 한편으로는 아름답지만, 한편으로는 가없는 위험함을 품고 있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마치 육지를 한입에 잡아먹을 것 마냥 눈 깜짝할 사이에 우리를 덮쳐버리기도 하지. 하지만 그 모든 게 바다라는 것에 있어서는, 일종의 매력일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생각해. 위험이라는 게 꼭 부정적인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고. 물론 내가 좀 지나치게 낙관적인 면도 있지, 그건 인정해. 하지만 잠깐 고개를 돌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아.

샤벳상어맛 쿠키

끝없이 넓지만, 그만큼 지루한 바다를 바라본다. 많은 쿠키들이 바다로 여행을 가는 것은 즐겁다고 말한다. 그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차라리 육지에서, 조금 더 자자세히 장면을 묘사하자면, 풍요의 분수에 앉아, 다양한 쿠키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그곳을 지나가는 걸 지켜 보기 좋아했다. 몇 분이고, 몇 시간이고, 때로는 해가 질 때까지 하루를 통째로. 그는 끝없이 넓은 바다보다는, 작지만 옹기종기한 그 분수대가 좋았다. 

샤벳상어맛 쿠키

그날따라 헤엄이 치기 싫은 이상한 날이었다. 그렇다고 딱히 다른 쿠키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변에 혼자 머무르기는 더욱 싫었다. 정확히는, 그 어떤 열정도 솟아나지 않는 기이한 날이었다. 평소 귀찮을 만큼 다른 쿠키들에게 호기심을 품는 샤벳상어맛 쿠키가 그런다는 것은 더욱 어색한 일이었다. 그는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춘 의지를 찾아보는 대신, 쿠키들의 왕래가 없는 해변을 골라, 그곳에 앉은 채로 멍하게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았다. 평소 파도가 상당히 험한 해변이었건만, 어쩐 일인지 그날따라 재미없을 정도로 바다는 잠잠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어떻게 보면 참 재밌는 것 같아. 많은 쿠키들에게, 아니, 대부분 쿠키들에게 바다란 보통 특별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곳이다, 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잖아. 지겹다고 생각하는 쿠키는 나밖에 본 적이 없거든. 나처럼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내온 박하사탕맛 쿠키 오히려 바다를 좋아하지. 내가 바다를 지겹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어. 어쩌면 본능에 가까운 것일 수도 있고, 단순히 오랜 시간을 지내서 그렇다기보다는, 육지라는 곳에 대해 품고 있던 동경이 세월을 거듭하면서 끝없이 쌓인 탓도 있겠지. 그리고 실제로 그 동경은 내 생각보다도 훨씬 멋지니까 말이야. 광활하지만 텅 빈 바다에 비하면, 비록 좁지만 활기찬 육지가 훨씬 즐겁거든, 그렇게 말하는 샤벳상어맛 쿠키의 눈은, 해안가에 있으면서도 본능적으로 내륙의 왕국을 향하고 있었다. 

석류맛 쿠키

재밌는 일이죠, 당신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저희를 악으로 낙인찍는 그 오만함 말이에요. 당신들은 저희의 계획을 막는 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저희가 악이고, 당신들이 선이라고 정해 놓고, 그 신념에 따라 움직였겠죠. 그런데, 여기서 한번 정직하게 말해보죠. 그 선악이라는 것의 기준점이 어디인지는 당신들도 설명할 수 없지 않은가요? 어쩌면 어둠마녀 쿠키님의 계획이 선이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당신들이 악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으셨나요? 아니면 이런 말은 이해해보려고 하지도 않으시려나요? 

소르베맛 쿠키

팔다리가 얼고, 몸이 얼고, 마음이 얼어 더는 움직이지 못한다. 모든 것을 감싸는 그 눈보라 속에서 애써 현실을 외면하며 다시금 힘겹게 하늘을 바라본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싸라기눈이 그의 시선을 차단한다. 그는 그 속에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는 마지막까지 철저하게 그의 몸을 굳혀가는 그 눈보라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더 크게,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시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눈보라는 그 미소를 영원히 차지하겠다는 듯 더욱 세차게 그를 감싸 안았다. 

스모어맛 쿠키

난 정말 괜찮아, 수많은 이의 걱정을 등에 업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설산을 걷고 있었다. 상의는 나름 두껍고 푹신해 보였지만, 하의는 평소 캠핑 때 입는 반바지인 채였다. 그런데도 그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무릎까지 쌓인 눈 을 뚫고, 일정한 보폭으로 오로지 앞을 향할 뿐이었다. 

스모어맛 쿠키

종종 쿠키들은 묻고는 했다. 그렇게 캠핑을 다녀오면 남는 게 무엇이냐, 꽤나 정론이라고 스모어맛 쿠키는 생각했다. 그가 캠핑을 한번 다녀오고 나면, 도저히 다른 쿠키들에게 나누어주기 어려운 텐트같은 큼지막한 물건들을 제외하면, 빈손으로 돌아오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그런 질문에 스모어맛 쿠키는 미소와 함께 공감하면서도, 딱히 반박하려 하지는 않았다. 그가 느끼는 즐거움을 어찌 다른 쿠키들에게 이해시키랴. 캠핑장에서 함께 하는 쿠키들에게 분위기에 걸맞은 음식을, 기온과 환경에 알맞은 도구를 나누다 보면, 그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결국 그렇게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 그는 즐겁고 홀가분했다. 그런 그만의 삶의 방식을, 어찌 다른 쿠키들에게 이해시키랴. 

스모어맛 쿠키

베테랑이라는 칭호가 자연이라는 곳 앞에서 얼마나큰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산이 잠시라도 얼굴을 찡그리면, 그 모든 추억이 망가지는 것은 일순일 뿐이었다. 해일이 덮치듯, 눈치 챌 틈도 없이 쏟아져 내려오는 흙과 돌 무더기 아래에는, 단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따뜻한 모닥불 앞에서 마시멜로를 구우며 웃음꽃이 끊이지 않았던 캠핑장이 있었다. 이렇게 위험한 곳임을 사전에 확인하지도 못한 내가 베테랑은 무슨, 흙무더기에 파묻히는 그의 머릿속에 사무쳤다. 다른 쿠키들을 도와줘야 하는데, 그의 머릿속에 두 번째로 사무쳤다. 하지만 흙무더기 속에 파묻힌 그는 이내 호흡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쪽이 위쪽인지 물건을 떨어뜨려보거나,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어 볼 틈조차도 없었다. 오늘 여기를 오자고 한 건 나였지, 그의 머릿속에 세 번째로 사무쳤다. 

스파클링맛 쿠키

어쨌든 신기한 사실이죠, 초콜릿으로 만든 칵테일이 있다는건요. 솔직히 이게 맛이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뭐, 다크초코 씨가 항상 맛있게 드셔주시니 문제는 없겠죠. 워낙에 과묵하신 분이라 정말로 얼마나 맛있게 느끼시는지, 는 알기 어렵지만요. 아무튼 초콜릿을 참 좋아하시는 분이라니까요. 어쩌면 코코아 씨랑 잘 맞을지도 모르죠. 단것을 어릴적에 많이 못 드시기라도 한 걸까요? 그러면 그런 게 한이 되고는 하잖아요. 뭐 저야 제가 만든 칵테일을 항상 맛있게 드셔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만요.

스파클링맛 쿠키

칵테일이라는 걸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뭐 어떤 재료가 어떤 비율로 들어가냐, 도수는 어떠냐,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물론 제가 그걸 신경 쓰지 않고 칵테일을 대강 다룬다면 그건 문제가 되겠지만, 여러분이 굳이 머리 아프게 그런 걸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런 머리 아프고 귀찮은 과정을 모두 저에게 넘겨 주시면, 반드시 당신에게 완벽한 한잔을 선사할 수 있으리라고 자신해요. 

스파클링맛 쿠키

지독히 쓰고 독한 압생트 한 잔을 통째로 목에 넘긴다. 아무리 무딘 자라도 그 정도라면 특유의 타는 듯한 화한 느낌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듯 텅 빈 잔을 바에 내려놓고, 멍한 표정으로 텅 빈 가게를 둘러본다. 꺼질 듯 어두운 조명이 위태롭게 반짝거리고, 평소라면 향기로웠을 흰 곰팡이 핀 연성치즈의 냄새가 그의 코를 불쾌하게 자극한다. 그는 자신이 뭘 하는 지도 모르는 채, 이번에는 베르무트가 가득 찬 병 하나를 열어 같은 잔에 따라, 그것을 또 그대로 목에 넘겼다. 역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스파클링맛 쿠키

저, 저는 정말 괜찮아요, 당신만을 위해 만든 음료인데, 제가 감히 그걸 빼앗을 수는 없잖아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팔을 내저었지만, 그의 얼굴로부터는 본능적인 난감함이 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러지 마시고요, 매일 이렇게 멋진 음료를 준비해 주셔서 정말 감사한데, 건배 한 번만 해요. 저는 어디 어중간한 곳에서 월급벌이나 하는 신세다 보니까, 스파클링 씨께 아무것도 해 드리지 못해서 항상 죄송할 뿐이었거든요. 값을 많이 받으시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어서요, 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시고요, 매일같이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를 찾는 단골은 순수한 미소와 함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잔 하나를 건넸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어색한 미소를 유지하려 나름 노력했지만, 속으로는 잔뜩 땀을 흘리고 있는 채였다. 손목에 찬 시계를 바라보았다. 영업 종료까지는 세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다.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며 나름의 경력이 있는 스파클링맛 쿠키는, 지금 이 단골 손님이 순수하게 호의를 목적으로 그에게 칵테일을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오히려 그렇기에 그는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 불순한 의도로 그에게 높은 도수의 음료를 권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다. 그렇다면 스파클링맛 쿠키도 영업을 이유로, 그것을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순전한 호의로 그에게 칵테일을 권한다면, 아무리 영업 시간이 남아있더라도, 그것을 거절하여 단골 손님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물론 그 단골이 스파클링맛 쿠키의 이런 복잡한 마음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어제도, 그 전날도 얼굴에 머금고 있던 미소와 함께, 잔 하나를 그에게 권하고 있을 뿐이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가장 좋은 재료로 가장 좋은 음료를 만드는 것, 물론 중요하죠. 하지만 가장 좋은 재료가, 무조건 가장 비싸고 최상급의 재료를 말하는 건 아니거든요. 간단하게 생각해본다면, 쥬니퍼베리가 들어간 진과 그렇지 않은 진은 가격 차이가 하늘과 땅 수준이죠. 하지만 칵테일에 쓰는 진은, 역시 보통 쥬니퍼베리가 없는 쪽이 훨씬 어울리기 마련이죠. 다양한 재료로 맛을 내는 음료니까요. 좋다는 것에 있어서 희소성이나 가격은 생각보다 차지하는 부분이 적다고 생각해요. 

스파클링맛 쿠키

차라리 이렇게 처음부터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물론 자유가 그리울 때도 있겠지만, 그런 자기만족은 조금 더 작은 곳에서 찾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그냥 그대로 자리에 누워 몇 시간이고 움직이지 않고 싶을 때도 있어요. 제 나약함이기도 하고, 한심하게 보이기도 하겠지만, 결국 저의 한계라는 것을 그렇더라고요. 

시나몬맛 쿠키

이만큼 완벽한 합주는 또 없지 않을까요. 빗소리가 기분 좋게 울리는 허브 씨의 온실, 허브 씨가 정성스럽게 덖은 찻잎으로, 스파클링 씨가 만드는 칵테일, 그리고 그 모든 분위기와 흐린 날씨에 어울리는, 어느 때보다도 평화로운 민트초코 씨의 연주. 이런 분위기 속에 쭉 머물 수만 있다면, 솔직히 장마가 더 길어졌으면 하고 바랄 정도에요. 아무튼, 그만큼 이 왕국이라는 곳은 참 신기하죠. 각자의 개성으로 그 어떤 날이라도 웃을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는 하니까요. 제가 활약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대해도 좋을 거에요. 

아포카토맛 쿠키

충언을 보는 것에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한번 듣고 넘기기만 하면 되는, 어떻게 보면 음료 한잔보다 시시한 것입니다. 적어도 음료는 미뢰에 즐거움이라도 남겨주지만, 불쾌감과 모욕감, 그리고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지는 권위. 그저 그뿐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용감한 쿠키

난 잘 모르겠어. 다크카카오 왕국의 삶에, 우리가 과연 간섭할 자격이 있는 걸까? 어쨌든 지금까지 홀로 버텨온 곳이잖아. 그런데 우리가 갑자기 그곳을 쳐들어가서 사상론을 왈가왈부해도 되느냐, 그건 좀 다른 문제지. 우리가 보기에는 다크카카오 왕국이라는 곳이 잔혹하고 불합리해 보이지만, 결국 그건 우리의 기준에 있어서 그런 거잖아. 당장 다크카카오 왕국에서 우리의 삶이 틀렸다고 먼저 나오면, 우리도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란 말이야. 일종의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거잖아. 우리가 그곳의 쿠키들을 구하고  싶어도, 그게 과연 우리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거야. 물론 여기서 우리는 매일같이 맛있는 걸 먹고, 여유롭게 취미를 즐기고, 언제든지 편안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수도 있지. 그리고 여기서 하루 정도만 걸어가면 있는 다크카카오 왕국이라는 곳에서는, 먹을 것도 없고, 취미나 휴식이라는 것은 생각해 볼 틈도 없겠지. 그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야. 그런데 과연 그곳의 쿠키들이 우리를 보고 부럽다고 느낄까? 오히려 나태하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그러한 삶의 방식을 나름대로 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용감한 쿠키

지금까지는 네가 날 지켜주기만 했어. 너무 많이 달려 지쳐 쓰러질 것 같을 때도, 몬스터들에게 협공받아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을 느끼며 일어나지 못할 때도, 넌 항상 나를 손에서 놓아 주지 않았어. 이제 내가 너를 지켜줄 차례야. 난 지금까지 무력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잖아. 전투를 할 때도 내가 앞에서 지켜줄게. 모험을 할 때도 항상 너를 옆에서 엄호할게. 이제 나한테 그럴 힘이 생겨서 너무나도 기뻐. 정말이야, 이제 너랑 이렇게 대화도 할 수 있잖아. 용감한 쿠키의 캔디케인과 무늬와 색을 꼭 빼닮은 쿠키가 용감한 쿠키에게 설파했다.

용감한 쿠키

이것 봐, 친구들 셋이 희생한 덕분에 서른이 살았어. 당연히 그 친구들도 동의했을거고, 오히려 좋아했을거야. 그렇잖아. 우리는 모두 정의로운 쿠키야. 열을 살리려면 하나가 희생해야 했어. 앞으로 백을 살리려면 열이 희생해야 할 거야. 그러면 당연히 무슨 선택을 하겠어? 내가 희생하겠다고 나서면 펄쩍 뛰며 반대할거잖아. 차라리 그럴 수 있으면 좋잖아. 나라고 죄책감이 없는 건 아니니까. 모두의 친구인 만큼, 모두에게 책임을 지고 싶을 마음도 있다고. 그러니까 몇번만, 조금만 참아보자, 응?

용감한 쿠키

으음, 미안하지만 이만 내 집에서는 나가 줄래. 아니, 이왕이면 왕국에서도 나가 주면 고마울 것 같아. 이렇게 서로 무의미하게 논쟁만 계속할거면 공연히 시간만 낭비하는 짓이잖아? 당장 같이 대화를 나눌 친구들이 왕국에는 어딜 가든 있는데 말이야. 자유론을 부정한다는 걸 딱히 폄하하는 건 아니야. 다만 내 친구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하면 딱히 좋아할 쿠키는 없을 거라고. 내가 보기에는 다크카카오 쿠키도 딱히 그런 말은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아무튼 그만 나가 줘. 어차피 듣지 않을 말을 더 할 이유는 없으니까. 그렇지? 고마워.

용감한 쿠키

잘 안 들리는데, 으음, 뭐 그래도 네 말이 틀릴 이유도 없겠지. 난 여기, 이 캔디케인을 들고 네 앞에 서 있을 뿐이잖아. 고작 이걸로 증명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무것도 없지. 자, 이거 줄게. 한번 들어 봐. 지금 보면 너랑도 은근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해. 나도 조금은 쉴 때가 됐을 수도 있고 말이야. 결국 그걸 한번 휘두르고, 내 앞에 두번 서 있으면 끝날 일이야. 그만큼 쉬운 것도 없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고? 그렇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는걸. 네가 네 자격을 증명하는 수밖에 없다고.

용감한 쿠키

호밀맛 쿠키? 음, 좀 쎈 쿠키인 건 맞지. 그런데 쎄다는 게 어렵다거나,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잖아? 오늘 저녁에 바에 가서 호밀 맥주 두 잔만 가지고 녀석 옆에 가보라구. 두 시간 후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 있을걸?

용감한 쿠키

그 병을 가득 채워야 해. 누구의 것이지는 상관 없지만, 반드시 혈액으로만 가득 채워야 해. 네 팔을 잘라 피를 쏟든, 마법사맛 쿠키의 다리를 잘라 억지로 피를 짜내든, 그건 나에게는 아무래도 상관 없어. 단지 그 병이, 종류에는 상관 없이 피로 가득 차기만 하면 나는 너희를 풀어줄 거야. 왜 네가 그렇게 해야만 하느냐고? 그렇게 묻는다면 내가 할 말은 없는걸. 세상은 그런 일로 가득하잖아. 용감한 쿠키 네가, 나보다 그건 훨씬 잘 알거 아니야. 불공평한 일도, 이유를 모르겠는 일도, 잔혹한 일도 너무나도 많지. 단지 지금은 그것을 당하는 대상이 네가 되었을 뿐이야. 생각해 봐. 이미 죽을 위기를 겪은 쿠키도, 실제로 죽은 쿠키도 천지에 널렸다고. 너는 그것을 말로만 듣다가, 이제 몸으로 한층 다가왔을 뿐이야. 그게 세상의 일종의 이치인 거지.

용감한 쿠키

그 쿠키는 세상을 향해 호소하고 있었다. 살려달라고, 짓밟히고 싶지 않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세상을 향한 호소라는 것은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세상은 호소에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행동만을 보았다. 그렇기에 그 쿠키는 무모해지고, 잔인해질 필요가 있었다. 세상은 그를 용감하다고 불렀다. 그는 대의적으로는 그것을 인정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과거를 추억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자신도, 혹은 그 누구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항상 눈물을 뒤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용감한 쿠키

우선 첫째, 나는 네가 말하는 비효율의 역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례가 될 수 없어. 왜냐하면, 애초에 나는 효율을 추구하지 않았으니까. 비극이라는 것은 그런 거잖아? 실패담, 눈물, 그리고 비참한 최후. 그런데 애초 효율이라는 것을 추구하지 않은 존재에게, 비효율적인 행위를 초래했다고 해서 그것이 비극이라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 실패한 것도, 비참한 일도,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야. 오히려 희극에 가깝지. 그런데도 그것에 대해 빈틈없이 논하려고 하는 네 입장이 오히려 비극에 가깝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조금 들어.

용감한 쿠키

내가 여기서 살고 싶다고 외쳐 보았자 너는 나는 살려주지는 않을 거지? 아니 뭐, 딱히 기대를 하는 건 아니고, 그냥 형식적으로 물어본 것 뿐이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는다면 조금 억울하잖아. 적어도 마지막 발악은 해 봐야지. 그렇다고 네가 나를 살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뭐 그건 일단 다른 문제라고 보고 있어. 자! 그럼 이제 깔끔하게 정리해볼까? 넌 내가 싫지? 나를 혐오하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 칼로 내 온몸을 난도질하고 조각조각, 바다에 던져버리며 썩은내와 붉은색으로 물들이고 싶지? 자, 그러면 고민할 것도 없어. 바로 그 칼을 휘두르면 되는 거야. 그거, 생각만큼 어려운 일도 아니라고. 적어도 전에 다른 쿠키 하나가 네 눈을 뽑고 싶다면서 바늘로 마구 찌르던 것보다는 나을 거야. 눈알을 뽑는 거, 그거 쉬운 일이 아니거든. 은근히 쉽게 뽑힐 것처럼 생기기는 했지만 말이야.

용감한 쿠키

어쨌든 위선이라는 것도, 그 나름대로 재미있는 법이지. 생각해 봐, 난 그 녀석 앞에서 투명한 가면을 쓰고 있는 셈이라고. 재미있지 않나? 아니면 뭐, 그런 녀석 앞이라도 솔직해 질 필요가 있나? 뭐 그 당위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나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그 푸르고 영롱한 눈빛을 바라보라? 퍽이나 그러고 싶겠다. 난 아무것도 보고 싶지도, 동정하고 싶지도 않아. 특히나 그게 너와 관련된 일이라면 더욱 말이야.

용감한 쿠키

으음, 아니, 미안하지만 너는 이 자리에 더 없었으면 좋겠어. 자, 이건 칼이라는 거야. 이걸로 네 대퇴부를 뚫고, 위를 도려내고, 정맥을 끊어내고, 그다지 유쾌하지는 못한 짓을 많이 할 수 있어. 내가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사라지는 게 현명한 선택이 아닐까?

용감한 쿠키

그렇게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보지 말아줘. 그 쿠키는, 그러니까, 그거야, 교육이 조금 부족했을 뿐이야. 내일이면 행복한 얼굴로 너를 맞이해 줄 거라고. 솔직히 나쁠 것도 없지 않아? 그다지 힘든 일도 아니야. 약간의 대화면 끝난다고. 그것만으로 행복을 찾는다는 건 대단한 것이라고. 

용감한 쿠키

자, 한번 그 자리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 너는 일반론에 의거해서 이 세상을 올바르지 못하다고, 그리고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행복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어. 그런데 그 일반론은 어느 곳의 것이지? 이 왕국? 홀리베리 왕국? 그것도 아니면 다크카카오 왕국? 미안하지만 네가 주장하는 그것은 일반론이 될 수 없어. 일반론이란 결국 보편적인 상식이잖아. 하지만 이 왕국의 보편적인 상식을 정하는 것은 너도 아니고, 다른 왕국의 사상도 아니고, 리더인 나도 아니야. 제자리에서 묵묵히 사소한 행복을 지켜가는 쿠키들이지.

용감한 쿠키

이제 모두가 행복하잖아. 안 그래? 난 항상 노력해왔어. 모두가 행복한 왕국을 만들 수 있도록. 그리고 이건 그 결실이야. 그런데 정말 그렇게 비난할 수밖에 없는 거야?  만약 내가 널 싫어한다면, 이 자리에서 널 저기 지하 감옥에 넣어 버리면 끝날 일이야.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단 말이야. 난 네가 내 친구라고 생각했는데, 안 그래? 아니면 넌 이제 이런 내가 싫은거야?

용감한 쿠키

세상에는 유쾌한 일보다는 불쾌한 일이 더 많지. 아니,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해야 맞을거야. 그 정도로 이 세상은 잔혹하지. 날을 잡아 식당을 갔는데 휴업일이고, 표지판을 잘못 봐 버스랑 지하철을 반대 방향으로 타고, 마침 우산을 까먹은 날에는 비가 내리고, 내가 서 있는 줄에서는 꼭 진상 고객이 나와 끝없이 밀리고, 아무튼 이런 자잘한 일들 부터 말이야. 사소한 일이면서도 계속해서 반복된다면 이만큼 화나는 일도 없는 법이지. 그래도 이 속에서도, 나름 찾을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물론 일어나지 않았으면 훨씬 좋은 일들이었겠지만, 그래도 절망에만 갇혀있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용감한 쿠키

죽을 만큼 외롭다는 것이, 너는 뭔지 잘 모르지? 그건 정말 온몸이 부서질 만큼 고통스러운 거야. 정말 그래. 몸에 고통을 주는 것은 그 무엇도 없는데,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고통스러워. 단 한순간도 나를 놔줄 생각조차 없어. 단순한 심리적인 작용이 이토록 온몸을 철저하게 무너뜨릴 수 있는 건가, 의문까지 가지면서 말이야. 어떻게든 그것을 이겨내려 해도 눈앞에는 아무도 없어. 그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답은 간단해. 외로움 속에서 썩어가는거야. 결국 그 정도로 쉽게 목숨을 바쳐버리는거지.

용감한 쿠키

울지 말아줘, 정말로 네가 울어 줄 필요 없다니까. 난 이제 정말 괜찮아. 아무것도 두렵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프지도 않아. 아니, 아프더라도 오히려 내가 그 고통을 원하고 있다고 해야 맞을거야. 넘치도록 눈물을 흘려내면 금방 멈추는 법이야, 정말로. 부디 내가 다시 한번 넘어지면서 피부로 느낄 수 있게 해줘. 온몸이 까진 채 뼛속을 관통하며 아릴 정도로 울려대는 고통을. 그러면 정말로, 정말로 행복할 수 있을 텐데. 거짓말도, 비꼬는 것도 아니야.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그 정도의 행복이 없는 거야.

용감한 쿠키

난 아침 일찍, 아니, 어쩌면 새벽에 일어나는 게 좋아. 일출이 시작되기도 전에 말이야. 그러면 다를 쿠키들은 보지 못 하는 것들을, 마음껏 볼 수 있거든. 당장 해돋이를 생각해 봐. 매일 새벽에 볼 수 있는, 그만큼 흔한 풍경도 없잖아. 그런데 정작 그 모습을 누리는 쿠키는 거의 없다시피 하고 말이야. 다른 말로 하면, 그래, 조금 모순에 가까운 것이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모든 쿠키들이 그 아름다운 정경을 원없이 누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는데 말이야. 이른 아침의 기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하다고.

용감한 쿠키

무언가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이 있다는 건, 충분히 강력한 공통점이 아니겠어? 다크카카오 왕국을 지키고자 하는 흑당맛 쿠키, 원더크랩을 지키고자 하는 전기장어맛 쿠키, 홀리베리 왕국을 지키고자 하는 와일드베리맛 쿠키, 지금 여기에는 우리 넷 뿐이지만, 그 누구라고 하더라고 지키고 싶은 것 하나쯤은 마음속에 품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 꼭 어떤 실체가 아니라도 말이야. 크리스마스의 온정은 지키고자 하는 티라미수맛 쿠키, 커피마법의 정수를 지키고자 하는 에스프레소맛 쿠키, 이렇게 나아가자면, 사명이 없는 쿠키란 이곳에 없지 않을까? 

용사맛 쿠키

청초 속 마지막 숨을 내쉰다. 공주님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상관없다고 말해온 기사였다. 하지만 어리석다고 할 수 있을지, 그는 지금까지 그 순간을 대비할 틈이 주어질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은 지나친 자비였다. 인사도, 충성도, 웃음도 남기지 못한 마지막은 허무하기만 할 뿐이었다. 

앰버슈가맛 쿠키

어제도, 오늘도 입이 삐뚤어질 만큼 바쁘게 날아다니는 호박벌 한 마리. 벌은 보통, 아니 모두가 군집을 이루고 사는 생물임에도, 그 호박벌은 매일 이상할 정도로 혼자서 작은 꽃밭을 돌아다니며, 홀로 꿀을 채취하기를 고집했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는 쿠키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부분 잠시의 대화 후 금방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다시 그는 편안한 표정을 날아 올라 꿀을 채취하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카페에서 잡일을 하는 것도 생각만큼 최악의 일은 아닐거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오늘로 이 말을 자신에게 오백 번째 되뇌이며 얼빠진 표정으로 개수대 앞에서 머그잔을 씻었다. 도대체 이 잔에 무슨 음료를 담았더라, 그는 투덜거리며 생각했지만 당연하게도 오늘 만든 수백, 수천잔에 이르는 음료들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리기라는 불가능했다. 어쨌든 적어도 상당이 진득한 음료를 담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거의 일여 분에 이르는 시간동안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그 컵을 문지르며 씻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음료 자국 하나가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며 씻겨나가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이 이렇게 아등바등해보았자 뭐가 달라집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멍청한 기분으로 그 자국을 향해 불만하며 수세미를 더 세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최악이군요. 지금까지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제 추출을 보아놓고서는, 이제서야 아무것도 못 하겠다고요? 당신, 학생은 맞습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모르는 학생을 노려보며 공격했다. 아니, 이 쉬운 걸 도대체 어째서 못 하는거야, 한 번 보여줬으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에스프레소 머신을 휙 밀어버렸다. 관두죠, 이 길은 아닌 것 같네요. 이건 비효율이 아니라 헛짓거리입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방을 박차고 나갔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세상에, 저 극악무도한 꼴을 좀 보시죠. 에스프레소를 유리컵에 붓고 있지 않습니까. 곧 저 위에다 우유와 얼음을 붓겠죠. 세상에 저토록 잔혹하고 끔찍한 행위는 더 없을 겁니다. 당장 리더를 찾아가서 저 행위를 불법으로 지정해달라고 청해야겠습니다. 관두라니요? 저에게 지금 이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지금 커피마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장 이 잔혹한 행위의 굴레를 끊는 일이 먼저입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이 변덕을 어찌 해야 좋을까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불평했다. 어제는 온 몸이 눅눅해질 정도의 습기가 저를 방해하더니, 오늘은 아주 저를 태워버리고 싶은 건지, 햇빛이 너무 뜨거워서 도저히 버티기가 어렵네요. 실외에서 할 연구는 한참 남았는데, 도저히 날씨가 허락할 기미가 없으니 아주 미쳐버릴 지경이라고 밖에는 말하지 못하겠네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보더니, 이내 나무 그늘 하나를 찾아 급히 그 아래에 몸을 숨겼다. 좀 느려지겠지만,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머무르는 게 좋겠군요. 햇빛 아래에서 몸을 혹사하는 건 더욱 비효율적일 뿐입니다. 참, 도대체 이런 날씨에 밖에서 뛰어다니는 쿠키들은 팔자가 좋은 겁니다. 

전기장어맛 쿠키

또 빌어먹을 눈물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전기장어맛 쿠키는 자신의 눈물을 그렇게 표현하며 유야무야 넘기고는 했다. 눈물의 이유를 설명하려 하지도 않았고, 그의 심정은 더욱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웃어넘긴다면,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볼 쿠키도 많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날이 갈수록, 단순히 숨겨 넘기기만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을 어째서일까, 물론 딱히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지 못하니, 속에서 응어리가 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심해군주 쿠키가 낫겠다고 그는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행동으로라도 자신의 감정을 곧바로 표현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마저도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역시 알 수 없었다. 

전기장어맛 쿠키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해.

지킬 수 없는 것 사이에 서 있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그 무력감 가운데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큼 한심한 것은 없다. 

모두의 것이니까. 모두의 것이니까. 

이미 그는 역할을 다한 것이 아닐까. 

누구나 그를 칭송하지 않을까. 

지키지 못한 것은 품어야 해. 살아있는 자에게 의구심을 품지 말아야 해. 

그는 누구보다 크게 눈을 뜨고 있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 감긴 눈도 그 누구보다 영롱하지 않을까. 

전기장어맛 쿠키

근거 없는 일방적인 폭력, 그것이 전기장어맛 쿠키가 호의에 대해 받은 보답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진 도시의 수호자라지만, 작정하고 수명이서 몰려드는 쿠키들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가 상대해야 하는 것은 그 쿠키들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어째서 아픈 과거를 뒤로하고 이곳을 찾은 쿠키들이, 이곳에서마저도 행복하지 못한 걸까. 그럴 수 있는 이상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은 그의 책임이라고,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쿠키들이 전혀 나아지지 않는 불행을 견디지 못한 채, 그 책임과 원망을 그에게 쏟아내고 있는 것이라면 그는 반항할 자격이 없었다. 수 분동안 그를 괴롭히던 거친 목소리들이 희미해져갔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그는 어째서 쿠키들이 이토록 불행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자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애써 자신을 설득하려 노력했다. 아니,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 모두가 그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누구도 그에게 그런 막중한 책임을 안긴 적이 없다고.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런 위회의 말을 들을수록, 그는 어깨가 더욱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저런 말이 다른 쿠키들의 입에서 나오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전기장어맛 쿠키 한 명으로는, 원더크랩이라는 광활한 곳을 지키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상대가 어떤 의도로 말을 꺼냈든, 점점 무거워지는 짐이 그의 마음 한 구석을 짓눌렀다. 그를 쓰러지게 하고, 의식을 뺏는 것은 육체적인 고통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스스로 자신에게 던진 마음의 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책임감 속에서 홀로 허우적거리는 채로. 

크런치초코칩 쿠키

전하, 라고 마지막 한마디를 내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겨우 입을 열었건만, 그의 입에서는 얇은 신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은 환각이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다시 눈을 떠 보아도 그를 맞아주는 것은, 그 흔적마저 찾기 어려운 성이라는 곳의 모습, 정확히는 그 성에서 알현실이라고 불리던 곳이었다. 그나마 건물의 잔해는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지만, 그곳에 앉아 있던 쿠키의 모습은 잔해마저 모두 날아가버린 채였다. 

클로버맛 쿠키

아쉽지만, 제 이야기는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것 같아요. 이만 킹덤으로 돌아가 봐야만 해서요. 반짝이는 눈으로 저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여러분의 모습은 언제까지나 그리울 거에요. 그렇지만 그런 오늘을 위해, 마지막까지 꼭 간직해 온 소중하고 따뜻한 이야기가 있어요. 저조차도 아직 전할 때마다 마음 속으로 여운이 남는, 그런 따뜻한 이야기가요. 긴 이야기가 될 테니, 먼저 조금 준비를 해 보는 건 어떨까요? 마지막을 기념하는 느낌으로, 작은 모닥불과 젤리를 조금 준비해서, 다들 옹기종기 모여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봐요. 

클로티드 크림 쿠키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 왕국과 교류하는 것을 망설이는지, 저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이 왕국의 리더, 그러니까 용감한 쿠키를 -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는 친근한 명칭을 원하고 있으니까요 - 어리고 철없어 보인다는 추정만으로 거부감을 나타내시는 원로 분들이 많더군요. 그런 분들은 모두 하나같이 용감한 쿠키의 왕국을 방문하신 적이 없던데, 뭐 이건 그다지 중요한 우연은 아니겠죠? 원로 분들은 대부분 연세가 있으시니까, 말씀하시는 경험이라는 것으로부터 충분히 판단이 가능하다, 라고 믿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키위맛 쿠키

키위맛 쿠키는 공허를 바라볼 때 남들과는 다른 것을 얻었다. 보통 쿠키들은 공허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했고,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하지만 키위맛 쿠키는 그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좋았다. 공허 속의 완벽한 무와 고요는 항상 그의 라이딩을 방해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무의미하고 목적지가 없는 달리기라도 이의를 제기할 자가 없는 상태, 그것은 그 무엇보다 그에게 완벽한 현상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항상 의도적인 공허 속에서 헬멧을 쓰고, 바이크에 올라 타 시동을 걸었다. 

키위맛 쿠키

뙤약볕 아래에서의 라이딩, 폭우 아래에서의 라이딩, 그리고 폭설 아래에서의 라이딩. 그런 대표적인 악천후에 대해서, 키위맛 쿠키는 나름 모두가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날씨가 어디가 좋냐고 다른 쿠키가 불만한다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상식적으로 그런 날씨를 좋아하는 것이 보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대개 조용하고 고독하게 움직였다. 다른 쿠키와 부딪히는 일 없이, 혼자서 움직인다면 그가 방해 받을 일도, 다른 쿠키에게 폐를 끼칠 일도 없었으니까. 물론 가끔 그런 날씨에도 만나는 쿠키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샤벳상어맛 쿠키는 종종 떠내려갈 듯이 내리를 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밖을 뛰어다니기도 했고, 폭설 속에서는 종종 소르베맛 쿠키나 눈설탕맛 쿠키가 모습을 드러내고는 했다. 그러면 키위맛 쿠키는 잠시 바이크를 멈추고,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는 했다. 

티라미수맛 쿠키

자고로 선물이라는 것은 마음이 가장 중요한 법이에요. 아무리 비싸고, 아무리 귀한 선물이라도, 마음이 담겨있지 않으면 공허하게 느껴지거든요. 반면에 볼품없고 흔한 선물이라도 일종의 진정을 담으면, 그만큼 귀하게 느껴지는 것도 또 없을 거에요. 저도 제작년 크리스마스였나, 제가 조종하는 기차를 본뜬 모형을 어떤 어린 쿠키 하나가 선물해줬어요. 대단한 물건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죠. 아니, 오히려 어수룩했다고 말해야 맞을 거에요. 그런데 살면서 받아본 선물이라는 것 중, 지금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고, 마음 한구석에 평생 추억으로 남을 귀한 경험이었어요. 지금도 제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장식되어 있는데, 아마도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키지 않을까 싶어요.

티라미수맛 쿠키

전 그것에 싫다고밖에는 대답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니, 조금 발상을 고쳐 볼까요. 싫다기보다는, 그건 제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에요. 제가 능력이 뛰어나다던가, 특별히 대단한 녀석이라던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도덕적인 흠결이 없냐고 물으신다면 저 역시 모순투성이죠.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선물 배달이라는 것만은 제 지조가 담긴 일이에요. 그것에 있어서만큼은 제가 당신보다 훨씬 박식하다고 확신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 아니, 비효율적인 제안은 죄송하지만 정중하게 사양할게요. 정 불만이시라면, 저랑 같이 가셔서 선물 포장이라도 하시고요.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말이에요.

티라미수맛 쿠키

제 나이에 기관사라니요, 승객 분들이 저를 보시면 놀라거나, 믿음이 가지 않아서 도망가고, 철도공사를 찾아가서 항의할지도 몰라요. 솔직히 입이 몇 개라도 그 항의에 대헤서, 저는 할 말이 없어요. 만약 제가 버스를 탔는데, 저처럼 이상한 복장을 하고, 키는 작고, 한참 어려보이는 얼굴의 기사가 앉아 있다면 당장 내려서 운수업체에 항의할 것 같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더욱 열심히 숙련된 기관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믿음을 얻는 방법밖에는 없겠죠. 조금 씁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언제나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을 위해 노력할테니까요.

티라미수맛 쿠키

살면서 선물 배달이 무리라고 생각되는 곳이 보이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저에게 지형이나 환경 따위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였거든요. 그곳의 환경이 얼마나 접근하기 어려운지, 그런 걸 논해보았자 큰 의미는 없어요. 어차피 저는 그곳으로도 선물 배달을 가야 하고, 그것은 바뀌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여기는 배달이 어렵겠다라고 생각하면서 징징거린다면 의지만 깎일 뿐이죠. 그런데 세상에, 여기는 도저히 무리에요. 아니, 불가능해요. 뭐 험하고 추운 산맥만 가득하고, 종일 몸을 뼛속까지 괴롭히는 눈보라가 치고, 뭐 그건 그렇다 쳐요. 그런데 저 성에는 도저히 선물을 배달하러 들어갈 수가 없다니까요. 경비대장인지 군주인지 다들 어떤 분들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들어가기는커녕 가까이 다가가기만 해도 위협 사격이 날아와요. 평생 선물을 배달하면서 그렇게 폐쇄적인 곳은 처음이에요. 함부로 다가갔다가는 목숨이 위험하겠더라고요. 이렇게 제 편하자고 일을 마음대로 포기해도 되나, 조금 생각해봤는데, 도저히 저기에서 살아서 돌아오기에는 어려울 것만 같아요. 제가 없으면 앞으로 모든 쿠키들이 선물을 받는 그 기쁨을 빼앗기는 거잖아요. 그게 더욱 책임감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냥 저기로 선물 배달을 가는 것은 포기했어요. 하지만 선물은 준비해뒀는데, 이것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다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포장했는데 조금 아쉬워요.

티라미수맛 쿠키

저렇게 긴 기차가,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태우고 달리다니, 지하철을 바라보는 티라미수맛 쿠키의 눈은 반짝이다 못해, 평소의 졸린 듯한 눈을 푼 채로 완전히 열려 있어 어색해 보일 정도였다. 분명히 쿠키들의 세계에서 선물 배달 열차를 운전하는 기관사에게, 인간 세계의 지하철이란 상당히 흥미로울 터였다. 하지만 이 정도로 티라미수맛 쿠키가 흥분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히지 못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언제나 침착하고 무덤덤한 쿠키였으니까. 어쨌든, 평소 그의 성격과 전혀 상관없이, 티라미수맛 쿠키는 출근하는 사람들로 가득해 발 디딜 틈도 없는 지하철로부터 십수 분째 눈을 떼지 못 하고 있었다. 저 안의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눈빛을 보내지 못 할 텐데, 조금은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티라미수맛 쿠키

솔직히 티라미수를 먹는다니, 좀 묘하게 들려요. 아니, 티라미수라는 게 그저 인기 있는 달콤한 디저트의 한 종류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저를 이루고 있는 녀석이잖아요. 티라미수맛 쿠키카 티라미수를 먹는다, 라고 하니 뭔가 좀 웃겨서 말이에요. 아니, 음, 솔직히 저만의 헛소리일 수도 있고요. 당장 롤리팝맛 쿠키도 사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말이에요. 신경 쓰지 말아주세요. 

티라미수맛 쿠키

티라미수맛 쿠키는 승강장에 앉아, 기차가 지나가는 정경을 지켜보기를 좋아했다. 딱히 정해진 역이나 승강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날은 지독히 사람이 많은 도심의 중심적인 역에 머무르기도 했고, 어느 날은 거의 통과 열차밖에 없는 간이역에서 쌩하니 지나가는 열차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역에는 각자 고유한 매력이 있었다. 물론 다른 이들은 그런 티라미수맛 쿠키를 보고 그런 게 어디가 재밌냐며 놀리고는 했지만, 티라미수맛 쿠키는 아무래도 남의 평가를 신경 쓰는 위인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오늘도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직 목적지가 정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바쁘게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사이로 꽤 낡은 열차 하나에 올라섰다. 순환선이기도 한 만큼 생각할 시간은 많았다. 

티라미수맛 쿠키

달콤한 티라미수 한 조각에 씁쓸한 드립 커피 한잔을 곁들인다. 티라미수는 이미 커피가 들어가는 케이크라는 사실을 상기하니 옅은 웃음이 새어나온다. 제 나이에 카페인이 좋지 않다는 건 알지만요, 카페인만큼 일의 능률을 늘려주는 건 없단 말이에요. 이거, 먹는 거 에그노그맛 쿠키한테 들키면 또 한소리 들을테니까 부디 비밀로 해주세요. 기관사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비밀을 전달하듯 속삭이고, 이내 티라미수를 자신의 작은 입에 맞추어 작게 잘라 한 입을 가져간다. 그것을 천천히 음미하며, 완전히 삼키기 전 커피 한 모금을 입속에 머금어 그 오묘한 조화를 즐기기도 한다. 

티라미수맛 쿠키

선물을 배달하다 보면 간혹 깨어 있는 분들은 보고는 해요. 모두가 잠든 조용한 새벽에 말이에요. 크리스마스 새벽인데도 일을 하고 있거나, 우울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듯한 멍한 눈으로 아무것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분들도 있죠. 눈을 뜨고 있는 데도 말이에요. 그런 분들을 볼 때면, 정말로 선물을 배달하면서 위로 한 마디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요. 하지만 하나같이, 저에게 과연 그런 자격이 있을지 고민하게 되고, 결국 몰래 선물만 놓고 도망가듯 떠나버리죠. 한심한 일이라는 건 알지만, 아무리 크리스마스라도 세상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은 거죠. 선물을 고르기 위해 항상 열심히 조사하고는 있지만요. 

티라미수맛 쿠키

저에게는 많은 것이 결핍되어 있어요. 그 중에는 제가 아는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제가 모르는 것이 훨씬 많겠죠. 그 결핍은 제가 선물을 고를 때 나타나기도 하고, 배달할 때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 잠시 쉬려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나타나기도 해요. 항상 아무런 예고 없이 나타나 저의 마음 한구석을 찌르죠. 그러면 제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시사하게 되는 거에요.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 결핍이 더욱 두드러질 뿐이죠. 비록 한심할 수도 있겠지만, 전심을 다해 조금씩 나아가는 거죠. 

티라미수맛 쿠키

도심 곳곳을 끝없이 도는 순환열차를 몇 시간이고, 몇 바퀴고 하염없이 타며 즐거울 수 있다는 발상은, 아무래도 그 가이드에게는 조금 터무니없게 느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티라미수맛 쿠키는 애초 긍정적인 답변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는 듯 열린 스크린도어를 훌쩍 넘어, 닫힌 반대쪽 문 앞에 자리를 잡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드문드문 빈 좌석이 있었지만, 그는 종일 어떤 열차에서건 도통 앉을 생각이 없었다. 오늘만 해도 이미 수 시간을 서 있던 참이었다. 하지만 창문 밖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변함없이 반짝였고, 그렇기에 가이드도 딱히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려웠다. 

티라미수맛 쿠키

제 선물 배달 열차는 항상 정해진 노선 없이 내키는 대로만 달려왔어요. 이곳이랑은 정반대죠. 정해진 선로 위에서, 정해진 경로와 기점, 종점을 따르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들이 불편을 겪게 될 뿐 아니라, 같은 선로를 수많은 열차가 공유하고 있으니 큰일이 날 테고요. 하지만 이게 꼭 부자유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아요. 저도 매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모두에게 선물을 배달하기 위한 최적의 경로를 구상할 수밖에 없는데, 정해진 건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것도 없으니, 효율을 따지다 보면 정말 그만큼 머리 아픈 일도 없다니까요. 차라리 이렇게 처음부터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물론 자유가 그리울 때도 있겠지만, 그런 자기만족은 조금 더 작은 곳에서 찾아도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티라미수맛 쿠키

이가 시리고 목이 따가울 정도로 달콤한 코코아를 좋아해요, 티라미수맛 쿠키는 까치발을 들어야 겨우 그 너머가 보이는 카운터 앞에 서서, 최대한 몸을 숙여 그의 주문을 경청하는 바리스타에게 말했다. 음, 저희 메뉴 중 핫 초콜릿이 있긴 한데요, 바리스타는 난감한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정도로 달콤하게 만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손님이 원하신다면 최대한 높은 당도로 만들어 드릴게요, 티라미수맛 쿠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는지, 보기 드물게 활짝 웃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부탁드려요, 티라미수맛 쿠키는 그렇게 대답하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지폐를 꺼냈다. 지갑도 없이 주머니에 보관되어 있던 지폐였지만, 그의 성격과 꼭 닮아 구겨진 곳 하나 없이 깔끔하고 빳빳했다. 

티라미수맛 쿠키

이런 복장은 우습다고요? 조금 우스운 꼴이기는 하죠, 불편하기도 하고 말이에요. 여간 무거운 게 아니거든요, 두꺼워거 거추장스럽기도 하고요. 음, 그래도 크리스마스 하루라면 이런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그러면 연습 정도는 해보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물론 이게 완벽한 크리스마스를 만들 것이다, 뭐 이런 오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 오해는 말아주시고요. 그래도 나름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해요. 어쨌든 가장 추운 계절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날이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어요. 

티라미수맛 쿠키

새벽의 하늘은 언제나 아름답기만 했다. 매일 그 아래에서 선물 배달 열차를 몰고 싶을 정도로, 물론 그렇게 하면 지겹겠지만, 라고 씁쓸한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가끔은 그런 것도 즐겁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크리스마스가 아닌 날에도, 새벽 하늘 아래에서 열차를 몰 기회는 꽤 많았다. 당일에 실수가 없도록 미리 계획해둔 경로를 시운전해보기도 하고, 어디 문제는 없는지 점검해 보기에도 가장 좋은 수단이었으니까. 티라미수맛 쿠키도 그런 날은 미리 점찍어둔 후, 일부러 꽤 치밀하게 준비하는 편이었다. 최대한 다양한 곳에서 열차를 운전해보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과, 효율적인 점검이라는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 위해서였다. 

티라미수맛 쿠키

피곤해요. 이런 어린애같은 투정을 부려서는 안 된다는 건 알지만, 정말 피곤해요. 이런 상태에서 기차를 운전하다가는 사고를 내고 말 거에요. 완전히 회복할 수 있도록, 편히 쉬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요? 솔직히 잘 일하는 방법은 많이 생각해봤지만, 잘 쉬어보겠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죠. 처음 기관사가 될 때만 해도 몰랐지만, 일만큼 쉼도 중요한데 말이에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선물을 배달해야 하는 쿠키들이 늘어날 때마다, 정말 절실히 체감되는 것 같아요.

티라미수맛 쿠키

물론 이런 나이부터 낮과 밤이 바뀐 게 좋은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걸요. 조금이라도 크리스마스 날 선물을 배달할 때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미리 몸을 적응시켜 둘 필요가 있거든요. 사실 오히려 기차를 운전하는 것 같은 것보다, 그게 훨씬 힘든 일이죠. 매일 대낮에, 다른 쿠키들이 모두 밖에서 가장 열심히 활동하고 있을 시간에 잠을 청해야 한다는 것이, 어쩐지 조금 외롭게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하지만 역시 선물 배달은 그 이상의 보람을 안겨주기 마련이니, 후회는 없지만요.

티라미수맛 쿠키

어쩐지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오히려 할일도 줄어들고 마음도 편해지는 느낌이에요. 보통 크리스마스가 끝나면 얼마 남지 않은 12월은 쉬었다가, 1월부터 다시 다음 크리스마스 준비를 시작하는데, 물론 할 일은 넘쳐나지만 11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준비하다 보면, 준비가 생각보다 빨리 마무리되고는 하거든요. 그러면 보통 그 시간은 자유롭게 사용하는 편이에요. 특히 선물 배달 열차를 타고, 선물을 배달할 때라면 상상도 못할 경로와 장소를 떠도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거든요. 기관사인데 열차를 모는 게 지겹지도 않냐고 물으신다면, 확실하게 아니라고 대답해 드릴 수 있어요. 기관사가 열차 운전을 지겨워한다니요, 그게 있을 수 있는 말인가요?

티라미수맛 쿠키

수많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겨운 일상에 불과할 뿐인, 특별할 것도 없는 한 역의 허름한 벤치에 앉은 채, 티라미수맛 쿠키는 몇 시간이고 열차가 정차했다가 출발하기를 반복하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타기를 반복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이 모든 장면은 신비로울 뿐이었다. 물론 이곳의 사람들이 티라미수맛 쿠키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정해진 경로 없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열차를 몰 수 있으면서, 정해진 선로를 따라 정해진 시간을 달리는 이런 기차 따위 뭐가 흥미롭냐며 의문을 던질 터였다. 하지만 평소 덤덤한 그도 기관사로서의 본능을 어찌하랴. 처음 보는 열차, 처음 보는 역, 그리고 그 열차가 이끄는 수많은 사람들. 막차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는 날이 지나는 것도 잊은 채 역에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티라미수맛 쿠키

어쩐지 낮보다는 밤이 편하고는 해요. 감정적인 부분보다는, 효율적인 면에서 말이에요. 아무래도 크리스마스에는 밤부터 새벽동안 선물 배달을 다녀야 하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럴려면 평소부터 생활을 밤에 활동하기에 적합하도록, 적응시켜 둘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밝을 때 쪽잠을 자고, 쉬거나 밖에 놀러가더라도 아무도 없는 밤이 더욱 편해져 버린거죠. 물론 굳이 밤이라는 시간에 밖을 찾는 쿠키들은 나름 재미있어요. 대부분 사연이 있고, 각자의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밤이라는 시간에 밖을 찾지는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저 역시 평범하지만은 않은 사연을 품고 있는 쿠키가 되는 걸까요. 음, 그렇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말이죠.

티라미수맛 쿠키

물론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나름 재미있고 보람찬 일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하지만 아무래도 너무 어색해요. 학생이라고 하더라도 저랑 나이도 비슷하고, 심지어 저보다 나이가 많은 쿠키들도 꽤 있는걸요? 배움이나 가르침에 나이가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어색한 것은 사실이거든요. 그리고 전 이곳이 제 자리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선물 배달 열차를 손보고 운전하면서, 선물을 배달하는 것 말이에요. 어쨌든 저는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기관사가 되었으니까요. 지금도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쿠키들을 볼 때 가장 마음이 따뜻하거든요. 날씨가 가장 추울 때라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이에요.

허브맛 쿠키

민트 티가 한잔, 히비스커스 티가 두잔, 동백차가 세잔. 민트초코 씨는 민트 티로 드리면 될까요? 아니면 오늘은 다른 걸로 드릴까요? 요즘은 민트 티에 유자청을 탄 게 잘 나가요. 유자의 달콤함이 민트의 쌉싸름한 화함과 잘 어울리더라고요. 시원한 유자차도 나름 매력이 있지만, 역시 유자차는 따뜻하게 마서야 한다고 생각해요. 보통 음료는 따뜻하면 맛이 더 강해지는 편인데, 유자는 신기하게도 따뜻할 때 오히려 특유의 텁텁한 맛이 중화되는 느낌이에요. 물론 순전히 취향 문제이기는 하겠지만요.

허브맛 쿠키

리더, 리더는 제 은인이에요. 리더가 없었다면 이 온실도, 온실을 가득 채운 풀꽃들도, 온실을 향미롭게 채워주는 차의 향도 없었겠죠. 그런데 제가 리더에게 해준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솔직히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솔직히 그것이 제 항상 고민이고요. 

허브맛 쿠키

첫수확한 녹차 잎을 온전한 모양이 남은 것들만, 하나하나 뜯어서 습하지 않은 곳에 뉘여 햇빛에서 말렸어요. 나름 세심하게 신경 썼다고 생각했는데, 절반 이상이 조금 심하게 건조됐더라고요. 그래도 뭐 못 먹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 전할 선물로는 어울리지 않죠. 제 능력 안에서의 최고를 발휘하고 싶었어요. 평소 드시던 녹차랑은 조금 다를 거에요. 고소한 풍미도 있을 거고, 은은한 꽃향기로 느끼실 수 있을 거에요. 보통 녹차에서 나는 향은 아니죠.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실 수 있겠지만, 분명히 좋아하실 수 있을 거에요. 이렇게 된 김에 스트레이너랑 온도계도 같이 드릴게요, 조금 더 완벽한 한잔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테니까요. 혹시 차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부디 망설이지 말고 찾아와주세요. 

허브맛 쿠키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인 방향일까요? 찻집이라고 한다면, 온전히 차를 즐기기 위해서 찾는 곳, 아니면 차도 좋지만 다른 쿠키들과 함께 대화와 교류는 나누는 곳, 솔직히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저에게는 그럴 능력이 부족해서 말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허브맛 쿠키의 표정은 평소처럼 온화했지만, 목소리는 어딘가 조금 풀이 죽어 있어 약간의 위화감이 들었다. 그래도 제 온실은 어떤 분이 찾아오셔도 만족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는 있지만요, 이렇게 다양한 차를 직접 키우고 수확하면서, 편안한 공간을 만들 수 있는 왕국에 제가 있다는 건, 그야말로 과분한 행운이 아닐까 싶어요. 허브맛 쿠키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며, 세심하게 여러 종류의 찻잎을 솎아내기 시작했다. 

허브맛 쿠키

장마란 정말로 중요한 시기에요. 꽃과 풀을 관리하는 데 평소보다 더욱 신경을 써야 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자라는 시기이기도 하죠. 아무래도 종일 비가 내리니, 밖의 정원보다는 실내인 제 온실을 찾아주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리고 비가 올 때는, 날씨에 어울리는 차가 평소랑은 다르기도 해요. 비록 여름이지만 이상하게도 시원한 것보다는 따듯한 걸 찾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조용히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강렬하거나 경쾌하기보다는 은은한 향미의 차를 찾기도 하고요. 우리에게 비를 내려주는, 푹신푹신한 구름을 떠올리면서, 비가 오는 순간까지도 모두 놓치지 않고 즐길 수 있도록 말이에요. 

호밀맛 쿠키

생일? 하! 네까짓 놈의 생일이 뭐가 중요하다고. 밤에 바에나 가자고 말이야. 이번에는 호밀 맥주 말고 다른 것 좀 먹자고? 시끄러워! 더 지껄여대다가는 이걸로 네 주둥아리를 쏴버릴 줄 알아. 오늘 저녁은 호밀 맥주에 호밀빵이다. 네가 사는 걸로 하지. 이의는 받지 않겠어. 이 비싸보이는 칵테일은 뭐냐고? 그래, 비싼 거다. 네 말대로 아주 비싼 거야. 이미 계산해놓았으니까 주는 대로 먹어. 나보고 사라고 하지 않았냐고? 멍청하게도 그 말을 믿는군. 얌전히 주는 대로 먹도록. 

흑당맛 쿠키

고백하자면, 소인의 전하를 향한 맹종은 일종의 원죄였소. 그리고 솔직히 탈피할 자신도, 회개할 자신도 없소. 지금도 눈앞에 전하께서 계시지 않으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따름일 뿐이오. 갑자기 눈앞에 전하께서 나타나 자, 흑당아, 나와 함께 다크카카오 왕국으로 돌아가자꾸나, 라고 명하신다면, 소인은 이의 없이 그것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오. 소인은 평생을 그런 죄인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오.

흑당맛 쿠키

여러모로 유의미한 행위라고 칭하기에는 어렵소. 이 왕국은 참말로 지나치게 평화롭다는 말이오. 소인이 이렇게 온종실 숲속에서 활을 노리고 있어 보았자, 보이는 것을 새들과 케이크 들개 몇몇뿐이오. 그나마 그 들개들도 위협적이기는 커녕 쿠키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니겠소? 솔직히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소. 경비할 것이, 지킬 것이, 막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니. 이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무작정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익숙치 못한 것도 사실이오.

흑당맛 쿠키

흑당맛 쿠키는 조용히 눈을 떴다. 리더, 리더는 어디 갔지. 흑당맛 쿠키는 급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확인했다. 나도 이제 완전히 킹덤의 쿠키가 되었구나, 리더라니. 그녀는 잠시 허공을 향해 미소를 보이다가 다시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분명히 마지막으로 보았던 건, 정체 모를 거대한 괴물과 리더였는데. 흑당맛 쿠키는 흐릿한 기억을 되뇌이려 애썼다. 여긴 어디지? 아무리 앞을 보아도, 뒤를 보아도, 옆을 보아도 그녀를 반겨주는 것은 침묵하는 암흑뿐이었다. 분명히 여기는 설산인데, 하나도 춥지도 않고. 심히 이상한 일이었다.

흑당맛 쿠키

우거진 숲속에 고립된 생명이 하나 있다. 어찌 보면 그것은 참으로 모순적인 일이다. 숲은 생명으로 가득한 곳이다. 수많은 식물들의 보고이며, 언제 어디서 야생동물이 튀어나올지도 모르고, 가만히 숨을 들이마시기만 해도 신선한 풀내음이 느껴지는 곳이다. 통나무로 만든 작은 거처 하나에는 온종일 활을 쏘는 쿠키 하나가 있다. 그녀에게는 목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그저 활을 쏠 뿐이다. 때로는 밖을, 때로는 강을, 때로는 먼 나무를 향하여 쏜다. 가히 그 실력은 백발백중이라 할 수 있다. 화살은 언제나 그녀가 정해둔 목표물에 정확히 착지한다.

흑당맛 쿠키

전하, 소신은 나약하옵나이다. 전하께서 일순이라도 왕좌를 떠나신다면 이 쌍검궁따위는 그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나뭇가지일 뿐이옵니다. 부디 다시금 왕국을 되돌아봐 주시옵소서. 부디 다시금 소신의 나약함에 대해 자비를 배풀어 주시옵소서. 이 자리에서, 이 성벽에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소신의 무력함을 되돌아봐 주시옵소서. 그 어떤 말과 재물로도 갚을 수 없는 전하의 정의로움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소서.

흑당맛 쿠키

흑당맛 쿠키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로 정면을 응시하려 노력했다. 지금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어, 모두가 살아있어, 다크카카오 왕국은, 전하께서는, 우리 경비대원들은 살아있어. 그러나 눈을 뜬 그녀에게 다가오는 현실은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성벽은 모두 처참하게 무너졌다. 다크카카오 쿠키의 모습은 시야에 들지조차 못했다. 무너진 잔해 사이사이에는 싸늘하게 식어가는 경비대원들의 사체로 가득했다. 왜 나만 지금, 이렇게 서 있는 거지? 흑당맛 쿠키는 공허한 표정으로 자문했다.

흑당맛 쿠키

흑당맛 쿠키는 새벽을 좋아했다. 현대에 대해 마음에 드는 것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말할 수 있는 것은 새벽하늘 아래에서의 산책, 하나뿐일 것이다. 현대에 온 지도 거의 일곱 달이 지났건만 아직 적응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모든 것이 과하게 요란했고, 지하철이라는 것은 매일 타보아도 꼭 길을 잃기 일쑤였으며, 돈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관리해야만 좋은 것인지도 전혀 알 수 없었다. 새벽에는 그 모든 것을 잊고, 빛도 소리도 없는 거리에서 홀로 걸을 수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유일한 추억거리였다.

흑당맛 쿠키

외로운 것은 아니오. 단지 걱정될 뿐이오. 소인도 전하 없이 계속 이렇게 삶을 영위하기에는 어려울 것이오. 그것은 자명한 사실이오. 하오나 전하 역시 소인을 찾고 있지 않겠소? 소인은 전하의 진심을 충분히 깨닫고 있소. 소인은 다크카카오 왕국에서 잠시 떨어질 필요가 있었소. 하지만 금새 돌아갔어야만 하오. 소인이 다크카카오 왕국에서 지내온 바, 얼마나 그곳으로부터 나와있을 수 있겠소?

흑당맛 쿠키

흑당맛 쿠키는 거대한 벚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는 오로지 그 벚나무와 흑당맛 쿠키만이 현존하고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 이 세계는 그녀가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충분했다. 흩날리는 벚꽃잎을 맞으며 궁술을 연마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어찌 보면 지나치게 현실감이 결여된 일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그녀에게 상관 없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녀는 그 벚나무에게 친근감과 일종의 생명력을 느꼈다. 만약 식물도 말을 할 수 있다면 이것에 대해 이 나무는 무어라고 말할까, 그녀는 생각해보았다.

흑당맛 쿠키

저, 실례하오만, 대관절 이곳이 어디오? 네? 그, 을지로인데요. 흑당맛 쿠키가 지나가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고 묻자 그 사람도 상당히 당황한 듯했다.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것을 지나치게 광범위한 질문이었다. 지금 흑당맛 쿠키가 서 있는 곳은 서울이기도 했고, 중구이기도 했으며, 을지로동이기도 했고, 을지로4가역 앞이기도 했다. 애초 그런 것을 떠나 이곳이 어디냐고 묻는 것 자체가 상당히 괴상한 질문이었다. 특정한 곳을 어떻게 가느냐, 도 아니고 이곳이 어디냐, 자신이 이곳까지 발걸음한 주제에 어디인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무래도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 사람은 흑당맛 쿠키의 어색하고 허름한 복장을 한번 살펴보더니, 드라마라도 찍으시나봐요, 라고 하며 멀찍이 떨어져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찌 되었든 멈춰 있는 것보다는 어디로든 가는게 낫겠지, 흑당맛 쿠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지만 열 걸음도 채 걷지 못하고 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주변의 모습이 평소와 지나치게 다른다는 것을 눈치챘다. 거대하고 눈부신 건물이 그녀 옆에 우뚝 선 채로 그녀의 시선을 압도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위협적일 정도로 빠른 속도의 자동차들이 끝없이 지나갔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그녀의 복장과 쌍검궁을 보고 그녀를 힐끔힐끔 처다보았다. 그녀를 피해가는 이도 있었고, 멈춰 서 잠깐 살펴보는 이도 있었고, 어린 아이 한 명이 그녀 앞을 지나가며 말하기도 했다. 엄마, 저 사람 좀 봐, 여기서 뭐 하나봐. 흑당맛 쿠키는 그러한 압도감에 지배당한 채 멈추어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건물이 그녀를 덮칠 것만 같기도 했고, 자동차들이 그녀에게 질주해 와 부딪힐 것만 같기도 했다. 그, 저, 다크카카오 왕국으로 가는 길은 어디오? 흑당맛 쿠키는 자신을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가 물었다. 막상 그녀가 다가오니 그도 당황한 듯 살짝 뒷걸음질치며 대답했다. 네? 어, 어디요? 다크카카오 왕국 말이오, 소인은 그 왕국의 쿠키인데 갑자기 정체 모를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소. 도와주시면 은혜는 꼭 갚겠소. 상대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흑당맛 쿠키를 바라보았다. 그, 죄송한데, 혹시 이거 무슨 프로그램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쿠키런에서 이런 이벤트를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벤트? 대관절 그게 무엇이오?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인은 지금 빨리 다크카카오 왕국으로 돌아가야 하오. 경비대장 없는 성벽이라니,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소. 남자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흑당맛 쿠키를 바라보더니, 잠시만요, 라고 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리 봐도 그런 소식은 없는데, 남자는 혼잣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현실에서 쿠키 코스프레를 한 채 연기를 하는 이벤트라니, 그것도 정해진 장소도 아니라 이런 을지로 길거리에서. 이런 이벤트가 있었다면 분명히 게임이든, SNS든, 어딘가에는 공지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니 말이다. 혹시 개인이 하는 컨텐츠인가? 그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아무튼 요즘은 특정 게임에 푹 빠진 이들은 별것을 다 즐기니까 말이다. 딱히 할 일도 없었던 남자는 재미있을 것 같아 나름대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그, 다크카카오 왕국이라면, 저기 광화문역 앞이 비슷하려나? 아차, 이런 말은 몰입이 깨지려나. 그,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따라오세요. 참, 참말이오? 고맙소. 이 은혜는 꼭 갚으리다. 흑당맛 쿠키와 남자는 서로의 의도에 대해 하나도 알지 못한 채 발걸음을 떼었다.

흑당맛 쿠키

비바람이 몰아친다. 매서운 바람소리가 어두운 숲속을 울리며 썩은 나뭇잎을 날린다.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진다. 불쾌한 이취가 흑당의 코를 찌른다. 어디선가 야생동물이 급히 뛰어가는 듯한 조급한 발소리가 들린다. 불길할 정도의 습기가 그녀의 쌍검궁을 둘러싼다. 솔방울 하나가 그녀의 어깨에 떨어진다. 흑당은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둘러본다. 서로 비슷하게만 생긴 커다란 나무들, 흩날리는 나뭇잎, 그리고 무성한 나뭇가지에 가려진 빛이 눈에 들어온다. 초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새벽같기만 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아 몸을 앉힌다.

흑당맛 쿠키

허름한 집 여러 채가 보인다. 커다란 옥수수밭이 있고, 이내 계단식 감귤밭이 보인다. 수많은 스프링클러가 사람의 손길 없이 자동으로 물을 주고 있다. 열차가 급한 굴곡에 들어서며 갑작스럽게 속력을 줄인다. 흑당은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한다. 굴곡을 지나가자 기차는 좁디 좁은 터널에 들이선다. 등 하나 없이 깜깜한 터널이다. 작은 산을 지나가는 터널인지 십초도 채 되지 않아 기차는 반대편 출구로 나온다. 흑당의 날카로운 시야 멀리로 자그마한 역 건물과 승강장이 보인다. 매화나무 몇 그루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흑당맛 쿠키

날이 심히 어둡소, 흑당맛 쿠키가 눈을 찡그리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에는 회백색 먹구름만 잔뜩 끼어있을 뿐, 태양빛이 그 사이로 비칠 기미는 전혀 없었다. 이거야, 괴물들이 몰래 쳐들어오기에는 최고의 날씨로군. 흑당맛 쿠키는 오른손에 들고 있던 쌍검궁을 어루만지며 점검했다. 탄력도 문제 없고, 연마도 문제 없고, 약간 더 건조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이런 날씨 아래에서는 사치겠지. 흑당맛 쿠키는 시험 삼아 쌍검궁을 가볍게 몇번 휘둘러보았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그녀의 귓속을 관통했다.

흑당맛 쿠키

솔직히 말하자면 보고 싶지 않은 것이 사실이오. 그런데 그것이 소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소? 보기 싫으니 저리 사라지거라, 라고 명한다고 흉물스러운 것이 눈앞에서 사라진다면 얼마나 좋겠소. 하오나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그런 것이 더 이상 없소. 보기 싫은 것을 보고, 하기 싫은 것을 하고,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그 앞에서는 무력해지는 것도 사실이오. 터놓고 이야기하자면, 소인도 온종일 활만 잡고 있을 수 있다면 그 얼마나 큰 축복이겠소? 하오나 활을 잡고 있는 이상 결국 그걸로 무언가를 쏘고, 생명을 빼앗고, 절명을 목격해야 하오. 다들 소인이 그런 것에 무척이나 익숙하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소.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절로 쳐지는 일이오. 그것에 억지로 몸을 끼워 맞출 수밖에 없는 것이오.

흑당맛 쿠키

겨우 눈물을 뒤로 숨기며 밟았던 숲길을 되돌아본다. 물론 보이는 것은 없다.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숲에 사는 쿠키는, 눈을 씻고 며칠을 뒤져보아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이 숲은 험하고 잔인한 곳이었다. 물론 지금 흑당맛 쿠키가 그 숲에서 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상당히 유감스러운 일이었지만. 어딜 통해서 들어왔는지,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과연 이곳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을 수 있는지,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래, 적어도 다크카카오 왕국보다는 낫겠지. 춥지도 않고, 먹을 것도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잖아? 흑당만 쿠키는 애써 자신을 위로해보았지만 딱히 큰 효과를 보기에는 어려웠다. 

흑당맛 쿠키

종종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소. 내가 이 성에 없었다면, 전하의 품에 속하지 않았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지 말이오. 물론 잡념이라는 것은 알고 있소. 요즘 매일이 평화롭다 보니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도 생겼다오. 뭐, 조금은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오? 마침 말동무도 있고 말이오. 부디 전하께는 말하지 말아 주시오. 뭐,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고 할 수 있겠소. 전하께서 나를 거두어 주지 않으셨더라면, 어리고 나약한 몸으로 얼어버렸으리라는 것 말이오. 하지만 거기서부터 어처구니 없는 망상 하나가 시작되는 것이오. 만약 전하의 손길 없이도 설산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면, 나는 어떤 모습일지 말이오. 

흑당맛 쿠키

눈을 감으면 낙원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반죽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추위 속에서, 사고라고는 이만 쓰러지고 싶다고밖에 하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이만 주저앉고 싶다고 자신을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머리로는 그 설득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다리는 그녀를 따를 생각이 없는 듯, 꺾일 기미조차 없이 여전히 정처 없는 숲 속을 끝없이 맴돌았다. 이제 우박처럼 단단하게 느껴지는 눈송이가 그녀의 온몸을 휘감았다. 상념은 주저앉은 지 오래였지만, 이상하게도 다리는 멈추기를 거부할 뿐이었다. 

흑당맛 쿠키

이래서야, 더는 이 위령비를 찾아올 면목조차 없는 것 같소. 이곳에 새겨진 분들에게 먹칠을 할 뿐이오. 다들 다크카카오 왕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이시지 않소. 대관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경비대장이라는 허울뿐인 직책에 앉아 있는 주제에, 며칠 전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이름조차 모르는 경비대원보다도 이곳에 기여한 바가 없소. 앞에 나설 자신이 없으니 뒤에서 만용뿐인 지휘를 맡고 있을 뿐이오. 심지어 그 지휘마저 성공한 적이 없소. 차라리 나 없이 대원들이 각자의 의지대로 움직였더면 나았을 것이오. 

조합 (2인)

감초맛 쿠키 / 석류맛 쿠키

진짜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네, 감초맛 쿠키는 투덜거리며 종종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는 또 석류맛 쿠키에게 수십분동안 한소리를 듣고 온 뒤였다. 아니, 솔직히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였잖아, 감초맛 쿠키는 이의를 제기했지만 석류맛 쿠키는 들을 생각도 없는 듯 말을 잘라 잔소리를 이어갔다. 도대체 상대하겠다는 마음은 있는 거에요? 아니, 약해 빠진 당신에게 기대를 한 제 잘못인지도 모르겠네요. 감초맛 쿠키는 그런 그녀의 속사포를 멍청하게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감초맛 쿠키 / 석류맛 쿠키

솔직히 나도 생각보다는 꽤나 괜찮은 놈 아니냐, 감초맛 쿠키는 거만한 손짓으로 석류맛 쿠기의 방문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나름 오늘도 혼자서 토벌까지 성공했고 말이야. 저 지형도 복잡하고, 적도 많은 곳을 말이야. 이내 석류맛 쿠키가 얼굴을 찡그린 채로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당신, 토벌을 간 것이 아니었던가요? 감초맛 쿠키는 뻔뻔하리만치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완벽하게 끝내고 왔다고. 석류맛 쿠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감초맛 쿠키를 째려보았다. 정말이에요? 그럼 당연하지! 감초맛 쿠키는 당당하게 선언했다.

감초맛 쿠키 / 석류맛 쿠키

어어, 그만들 좀 싸우지 그래, 감초맛 쿠키가 소심한 목소리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석류맛 쿠키와 다크초코 쿠키 사이 과열되던 기류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신이 싸움을 말리기도 하는 쿠키였나요? 의외네요, 석류맛 쿠키는 그렇게 쏘아붙이며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감초맛 쿠키도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한 것인지 인지하지 못했다. 다크초코 쿠키와 석류맛 쿠키의 과열되던 싸움을 멈춘 것이다. 딱히 의도적으로 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내분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 물론 그 역시 석류맛 쿠키와 자주 다투기는 했지만, 그것은 다툰다기보다는 감초맛 쿠키가 석류맛 쿠키에게 일방적으로 잔소리를 듣는 것에 가까웠다.

괴도맛 쿠키 / 호두맛 쿠키

괴도란 단순한 범죄이기도, 누군가에게는 재미있는 놀이이기도, 누군가에게는 의로운 일이기도 했다. 그 뜨거운 감자와도 같은 의견이 두 쿠키 사이에서 상충될 때 갈등은 최고조에 오르고는 했다. 그 두 의견 사이에서, 한 명의 괴도와 한 명은 탐정은 항상 다른 의도를 좇았으니까. 당신은 한심한 도둑일 뿐이에요, 하지만 그런 것도 재미있지 않나요? 진중함 사이에 서 있는 두 의견이었다. 

다크초코 쿠키 / 스파클링맛 쿠키

굳이 그렇게 단 것만 찾으시는 이유라도, 혹시 여쭤봐도 될까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모든 용기를 쥐어짜내, 항상 바 구석에 앉는 검은 쿠키에게 물었다. 오늘로 그의 방문은 200번을 넘겼다. 그가 처음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를 방문했을 때, 인사도 없이 바의 구석진 자리에 앉더니 초콜릿이 들어간 칵테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그 요청에 스파클링맛 쿠키는 조금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 본 칵테일과는 매우 동떨어진 개념이었으니까. 하지만 형태는 얼추 머릿속으로 잡혀가는 듯했다. 초콜릿 칵테일, 생각해보면 되지 않을 것도 없었던 것이다. 보드카와 크림, 커피와 아이리시 리큐르를 섞어 강판에 간 초콜릿으로 칵테일을 장식해보았다. 썩 괜찮은 조합이라고 생각했건만, 비율이 문제였는지 그다지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 뒤로 다크초코 쿠키는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은 자리에서 같은 칵테일을 주문했고, 레시피는 조금씩 형태를 취했다. 

다크초코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아무런 대가 없이 주어지는 선물이란 결코 다크초코 쿠키의 인생에 어울리는 문단은 아니었다. 아니, 애초 선물이라는 단어는 그의 삶으로부터 배제된지 오래였다. 어쩌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해야 더욱 정확할 터였다. 그는 무언가를 해내면 그것에 대한 보상을 받기보다는, 무언가를 실패하면 그것에 대한 벌을 받는 것에 익숙했다. 이른바, 그에게 주어진 모든 수행은 태생적으로 당연한 짐에 불과했으며, 그것을 해낸다고 딱히 무언가를 받을 권리는 전혀 없었다. 적어도 어린 시절이란 그에게 그런 여정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그는 처음 보는 사슴뿔 모자를 쓴 쿠키가, 자신에게 예쁘게 포장된 선물 상자를 내미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면서 말이다. 그가 이것을 받기 위해 해낸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애초 그는 이 선물 배달부라는 쿠키를 만나본 적도 없었으니 딱히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다크초코 쿠키 / 흑당맛 쿠키

아버지? 글쎄, 나한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구나. 다크초코 쿠키는 조용히 화분에 물을 주며 말했다. 네? 하, 하지만,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전하께서, 흑당맛 쿠키는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쿠키가 정말 자신이 알던 다크초코 쿠키가 맞는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다크카카오 쿠키 아래에서 자신과 함께 수련하며 다크카카오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던 그 쿠키가 맞는가? 흑당맛 쿠키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며, 멍한 표정으로 다시 물뿌리개에 물을 채우는 다크초코 쿠키를 바라보았다.

다크초코 쿠키 / 흑당맛 쿠키

흑당맛 쿠기는 조용히, 그러나 분명한 시선으로 다크초코 쿠키를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분명히 그 시선은 어떠한 존경심, 그리고 이율배반적인 증오를 내포했다. 왕자님, 왕자님, 그녀는 끝없이 속으로 자신에게 되뇌이며, 발이 땅에 붙은 듯 천천히 다크초코 쿠키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왕자님,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감히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감히 변명할 자격도 없습니다. 그렇게 공허 속에 속삭이며 흑당맛 쿠키는 쌍검궁을 다크초코 쿠키의 목에 가져갔다. 그녀의 손은 심히 떨려 그것이 얼굴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목을 향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위협을 하는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제 둘만 남은 것 같은데, 무얼 망설이느냐? 어저 검을 휘둘러라. 다크초코 쿠키의 무거운 목소리가 침묵을 깨뜨리며 흑당맛 쿠키의 귓속을 지나 온몸을 구석구석 공명했다. 아, 이것이 끝나기 위해서는, 내가 왕자님을 베어야만 하는구나. 아니면 내가 베이는 수밖에 없겠구나. 현실은 어찌 이렇게 비참하고 가혹한가. 흑당맛 쿠키는 쌍검궁을 그대로 떨어뜨리고 땅에 주저앉았다. 피와 뒤섞인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설산의 냉기 속에서 서 있는 다크초코 쿠키와, 주저앉은 흑당맛 쿠키 둘만이 오직 그 세계에서 상호했다.

다크카카오 쿠키 / 다크초코 쿠키

미안하구나, 아들아. 너는 내 손으로 책임을 지는 수밖에 없었다. 다크카카오 쿠키는 공허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에 들린 검을 바라보았다. 방금 다크초코 쿠키를 반으로 가른 그 검은 온통 검붉은 혈흔으로 가득했다. 이게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큰 책임이다. 다크카카오 쿠키는 더욱 낮으면서도 생명력이 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의 말소리는 갈 수록 작아졌다. 그는 다크초코 쿠키의 시체를 향해 계속 무어라 속삭였지만 더 이상 그것이 무슨 말인지는 식별할 수 없었다.

다크카카오 쿠키 / 다크초코 쿠키

일그러진 표정으로 무너진 성벽과 자신의 아들을 번갈아 가며 바라본다. 양쪽에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생명력이 없다는 것과 보기 흉하다는 것이었다. 차이점이라면 한 쪽은 부서진 채 더는 움직이지 않고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다른 한 쪽은 커다란 검을 치켜든 채로, 무표정하게 자신의 목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외에는 모든 것이 같았다. 속까지 샅샅이 무너졌다는 점도 전부. 이런 꼴에 처해진 자신의 모습이 우스워, 소리 없는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크카카오 쿠키 / 다크초코 쿠키

너는 이 왕국에 대한 수치다. 너는 이 왕실에 대한 수치다. 너는 나에 대한 수치다. 다크카카오 쿠키와 그다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는, 다크초코 쿠키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이었다. 다크카카오가 자신을 '과인'이 아닌 '나'라고 칭하는 것은 다크초코 쿠키가 유일했다. 다른 쿠키들은 그런 호칭에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다크초코 쿠키는 그 뜻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다크카카오 쿠키가 자신을 '과인'이라고 칭하는 이유는 분명했다. 그는 다크카카오 왕국이라는, 한 왕국의 군주였으니까. 설령 다른 왕국의 쿠키들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영웅 쿠키들이나, 영웅은 아니었지만 한 왕국을 이끄는 용감한 쿠키를 제외한다면 어김없이 자신을 '과인'이라고 칭했다. 어쨌든 같은 세계에 존재하는 왕국의 군주임은 분명했으니까. 그가 다크초코 쿠키에게 사용하는 이질적인 호명은, 그에 대한 전적인 부정을 의미했다.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는 부정, 이 왕실에 속하여 있지 않다는 부정, 다크카카오 왕국의 일원이 아니라는 부정, 그리고 같은 하늘 아래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부정이었다.

다크카카오 쿠키 / 다크초코 쿠키

네가 지금 큰 착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만, 다크카카오 쿠키는 지극히 의례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나에게 전혀 실망감을 안겨 준 적이 없다. 나는 애초 네게 실망할 일이 없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 저기 멀리 있는 공화국에서, 그 입만 잘나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그 집정관이라는 녀석이, 그렇게 시끄럽게 놀려대는 법을 집행하는 것을 실패한다고 해도, 나는 전혀 실망할 것이 없이. 나랑 전혀 관련 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 정도면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았으리라고 믿는다. 나는 다크카카오 왕국과 관련 없는 어떤 한심한 녀석이 실패하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실망하지도 않는다. 그렇게 의례적으로 말하는 다크카카오 쿠키는, 여전히 '과인'이 아닌 '나'라고 자신을 명명했다. 

다크카카오 쿠키 / 다크초코 쿠키

그럼, 어떻게 하면 너에게 아버지라 불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겠나? 부디 알려다오, 그 말에 다크초코 쿠키는 대답할 말을 찾기 어려웠다. 다크초코 쿠키가 다크카카오 쿠키를 아버지라 칭하지 않고 싶어하는 이유는 뻔했다. 딱히 설명하지 않더라도 모든 쿠키들이, 심지어 다크카카오 쿠키까지 충분히 그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다. 아무튼, 둘 사이에 돋아나 겹겹이 쌓인 상처는, 다시 메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다크카카오 쿠키가 직접 그를 다시 찾아와 용서를 구하고, 비록 늦었지만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물어본다, 라는 상황은 다크초코 쿠키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오래 전의 위엄 따위는 모두 사라진 다크카카오 쿠키의 표정과 복장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간청하는 그 어색함에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다크카카오 쿠키 / 흑당맛 쿠키

아니, 흑당아, 그럴 필요까지는, 다크카카오 쿠키는 숨을 헐떡이며 설산의 정상을 향하는 그녀를 뒤쫓았다. 흑당맛 쿠키는 그런 그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끝없이 위를 향했다. 그녀는 눈 위를 거의 날아다니듯 익숙한 몸짓으로 순식간에 정상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경비대를 욕보인 죄, 죽음으로 사죄하겠습니다. 순식간에 정상 끝 절벽에 도달한 흑당맛 쿠키는 망설임 없이 나락을 향해 몸을 던졌다. 다크카카오 쿠키는 바로 그녀를 따라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며 검을 휘둘렀다. 설산을 가득 매운 흰 눈이 일종의 파도를 이루며 그의 검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크카카오 쿠키 / 흑당맛 쿠키

소신이 여기서 전하의 자질에 대해 왈가왈부하여봤자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결국 소신은 전하의 손에서 이슬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왕국 역시 이레 후면 완벽하게 같은 얼굴을 한 채로 무력한 소신을 반길 것입니다. 소신이 이 모든 것을 알고도 지금 전하께 이런 천노할 짓을 저지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전하께서 이 모든 것이 시사하는 바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소신과 다를 바를 인정하지 않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다크카카오 쿠키 / 흑당맛 쿠키

살아계십니까, 전하. 흑당맛 쿠키는 어색할 정도로 차갑고 형식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다크카카오 쿠키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떠는 채 누워 움직이지 못했다. 전하께, 이걸로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 더 이상 불필요한 사심을 담지는 않겠습니다. 흑당맛 쿠키는 나지막히 속삭이며 쌍검궁으로 쓰러진 다크카카오 쿠키의 심장을 찔렀다. 그것은 다크카카오 왕국이 개벽되는 순간이었다. 다크카카오 왕국이 새로운 주상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다크카카오 쿠키는 고통과 주아로부터 해방되었다. 흑당맛 쿠키는 다크카카오 쿠키의 몸을 내버려둔 채 방에서 나갔다.

다크카카오 쿠키 / 흑당맛 쿠키

포기하십시오, 전하. 다크카카오 성은 무너졌습니다. 다크카카오 왕국은 멸망했습니다. 전하께서는 내려앉으셨고, 저도 전하와 함께 무너졌습니다. 아마도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겁니다. 저 산 너머 중턱에 작은 마을 하나에 아직 생존자 몇몇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곳에서 조용히 남은 여생을 함께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이 싫다면 이 무너지는 성 속에서 운명을 함께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명한 판단을 내리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전하의 선택을 따르겠습니다.

락스타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추웠다. 그들은 그런 곳에서 연주할 수밖에 없었다. 팬들의 열기로 한겨울에도 땀이 날 만큼 뜨거운 무대, 모두가 숨죽여 집중하는, 한여름의 더위마저 잊을 만큼 고상하고 우아한 무대, 그것들은 모두 극히 일부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일 뿐이었다. 아무튼, 그들의 손가락이 온통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연주하는 그 길거리는 결코 그들에게 친절한 곳이 되지 못했다. 때로는 처음 보는 이들에게 협박을 당하기도 했고, 시끄럽다는 불만이 제기되면 얌전히 자리를 떠나야만 했다. 그러면 다시 그들은 무겁고 지친 몸을 옮기며, 오늘은 무엇을 먹어야 할지, 어디서 밤을 보내야 할지, 가지고 있지도 않은 지갑을 상상하며 고심해야만 했다. 

레몬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음, 그래도 조용히 혼자 머물 만한 곳들이 이곳저곳 있다는 것은 마음에 드네. 용감한 쿠키의 안내를 받으며 킹덤을 둘러본 레몬맛 쿠키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다른 쿠키들이랑도 어울리면 좋을텐데, 여긴 훨씬 재미있는 것도 많은데. 그리고 네가 좋아하는 음료들도 훨씬 쉽게 만들 수 있고, 저기선 네가 좋아하는 음악도, 음악이라는 말이 나온 순간 레몬맛 쿠키는 용감한 쿠키의 말을 자르며, 음악? 어디? 라며 그답지 않은 높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쪽으로 쭉 가면, 음반을 잔뜩 파는 곳이 있어. 그건 마음에 드네. 그곳의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 레몬맛 쿠키가 짐짓 꽤나 들뜬 목소리로 묻자 용감한 쿠키 역시 한껏 활기찬 목소리로, 당연하지, 하며 크게 대답했다. 용감한 쿠키는 레몬만 쿠키의 손을 잡고 음반 가게를 빠른 걸음으로 향했다.

마들렌맛 쿠키 / 에스프레소맛 쿠키

이번에는 또 뭔가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한숨을 푹 내쉬며 당당하게 모습을 내민 마들렌맛 쿠키에게 물었다. 마들렌맛 쿠키는 어색할 정도로 반짝거리는 머그컵을 에스프레소맛 쿠키에게 내밀었다. 이 몸이 직접 내려본 커피라네. 지금까지 네가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모습을 보고 그대로 따라했지. 한 번 평가를 내려주지 않겠나? 물론 완벽하겠지만 말이야!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현기증을 느끼며 얼굴을 크게 찡그렸다. 지금 당신의 그런 소꿉놀이에 어울려 줄 시간은 없습니다. 당장 내일이 큰 전투인데 말이에요.

마들렌맛 쿠키 / 에스프레소맛 쿠키

당신은 비효율적이고, 경솔하고, 성숙하지 못하고, 진중하지 못하고, 어리광만 부리고, 또 뭐야,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할 말은 더 찾지 못하자 마들렌맛 쿠키가 거들었다. 잘생겼지! 그래요, 잘생겼고,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아무 생각 없이 마들렌맛 쿠키의 의견을 받아들인 에스프레소만 쿠키는 순간적으로 얼굴이 창백해졌다. 됐어요, 그만하죠. 에스프레소만 쿠키는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마법사맛 쿠키 / 닌자맛 쿠키

어제부터인가, 용감한 쿠키가 너무 이상하지 않아? 성에서 나오지도 않고, 찾아가도 말 한마디 없고, 그렇다고 아파 보이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마법사맛 쿠키가 뙤약볕 아래 나무 그늘에 앉은 채 닌자맛 쿠키에게 말했다. 닌자맛 쿠키는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린 채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글쎄, 뭐 확실히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지 않은가. 리더도 조금 휴식이 필요할 때는 있는 법이지. 그렇게나 매일 열심히 돌아다니는게 말이야. 저러다 몸 상하는 건 아닌가, 많이 걱정도 했고 말이다. 닌자맛 쿠키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 마법사맛 쿠키는 여전히 잔뜩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말도 안 하지 않은 건 너무 이상하잖아. 몇 시간 전에도 용감한 쿠키의 방에 가 봤는데, 나 그렇게 어둡고 영혼 없는 용감한 쿠키의 표정은 정말로 처음 본단 말이야.

마법사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최악이야, 이런 왕국 따위. 사라져버렸으면 좋겠어. 너도 나도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인위적인 행복이라는 범위, 너무 무가치하지 않아? 글쎄, 난 솔직히 그것을 정하는 기준을 모르겠는데. 어쨌거나 행복하면 된 거 아니야? 정작 그러는 너도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잖아.

밀키웨이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열차를 운전하는 게 조금 더 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 꿈 열차의 차장은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하며, 하품을 하고 다시 운전에 집중하고는 했다. 처음 그 혼잣말을 들은 용감한 쿠키는 그 말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처음 밀키웨이맛 쿠키를 만난 쿠키들의 감상은 거의 대부분 일치했다. 영 믿음직스러워 않아 보인다, 게을러 보인다, 아무튼 부정적인 평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그녀의 꿈 열차에서 여행을 한 번 다녀오면, 그 평은 모두 뒤집어지기 마련이었다. 특히 용감한 쿠키는 그녀의 열차에 매일 같이 몸을 맡기며, 그 꿈으로 왕국을 이끌며 쌓인 피로를 해소하고는 했다. 그리고 그런 그를 항상 흔쾌히 도와주는 밀키웨이맛 쿠키에게 딱히 불만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바람궁수 쿠키 / 바다요정 쿠키

참 묘한 관계지. 만약 네 바다가 없었다면 내 숲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만약 네 바다가 내 숲을 덮친다면, 그대로 내 숲은 쓸려나가는 수밖에 없지. 만약 비 대신 바닷물이 쏟아진다면, 그 짜디짠 소금기를 견디지 못한 식물들이 모두 죽어 나갔을 것이고. 하지만 우리라는 정령마저 관조할 수 없는 부분까지, 그런 세심한 생명의 힘은 세상의 이치를 순환하기 마련이지. 바다에서 하늘로 올라가 비구름이 만들어지면 그곳에는, 소금기 따위는 없으니까 말이야. 순수히 물로만 이루어진 비가 내 숲에 내려서, 언제나 숲을 건강하게 지켜주지. 저는 충분히 저희 둘도, 그런 관계가 될 수 있다고 믿어요, 바다요정 쿠키가 그녀답지 않게 그의 말에 끼어들었다. 의도치 않은 자연의 순리로 인한 공생, 어떻게 보면 저희도 그것으로부터 탄생하고, 그것으로부터 만났잖아요? 바람궁수 쿠키는 말 대신, 극히 미세한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바람궁수 쿠키 / 샤벳상어맛 쿠키

바다라고는 한참 떨어져 있는 이런 숲에 상어라니, 기이한 일이군. 숲의 수호자라는 쿠키는 그렇게 생각하며, 울창한 나무의 가지에 앉은 채, 짧은 다리로 웃으며 숲 속을 뛰어다니는 어린 쿠키를 바라보았다. 물론 아직 이 쿠키가 손님인지 침입자인지는 불확실했지만, 누군가가 이곳에 찾아온 것 자체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보통의 그라면 숲에 찾아온 쿠키가 손님인지 침입자인지 구분하기도 전에 일단 활을 쏘고 보았겠지만, 그렇기에는 저 쿠키로부터 느껴지는 기운이 지나치게 순박했다. 아무튼, 최소한 이 숲에 해를 끼칠 쿠키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바다밖에 보아오지 못한 쿠키가 처음 숲이라는 곳을 보며, 그 신비로운 모습을 온전히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동행자도 없이, 어떻게 바다에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바람궁수 쿠키 / 샤벳상어맛 쿠키

비슷한 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둘의 공통점은 무엇이었나? 아무튼, 둘은 바보 같아 보일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다. 물론 두 사랑의 본질을 크게 달랐다. 바람궁수 쿠키는 그것을 자신의 부모처럼 여기며 보호했다면, 샤벳상어맛 쿠키는 아무래도 단순히 그 정취를 본능적으로 받아들일 뿐이었다. 바다에서는 즐겁게 헤엄치고, 숲에서는 짧은 두 다리로,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면서 즐겁게 뛰어다니고, 전혀 어떤 규칙성이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이하게도, 바람궁수 쿠키는 오히려 그런 점에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물론 함께 숲을 지키는 동료 따위는 무리겠지만, 그와 함께 웃을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쿠키라는 점은 확실했다. 

블랙레이즌맛 쿠키 / 흑당맛 쿠키

네가 먼저 여길 찾아오고, 웬일이야? 블랙레이즌맛 쿠키는 사뿐하게 나무 아래로 뛰어내려오며 물었다. 흑당맛 쿠키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여기까지 와 놓고, 말 못할게 뭐가 있어. 얘기해 봐. 그, 소인이 감히 간곡하게 청하고 싶은게 있어 찾아왔소. 블랙레이즌맛 쿠키는 그 말을 듣고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직접 찾아온 데다가 부탁까지? 무슨 바람이 들었길래. 무슨 일인데? 블랙레이즌맛 쿠키는 의욕이 만만해 보였지만 정작 흑당맛 쿠키는 다시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블랙레이즌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자, 이걸 잘 봐. 다크카카오 왕국에 있는 위령비인가 뭔가, 그거랑 똑같이 생겼지? 블랙레이즌맛 쿠키는 어디서 주워왔는지 투박한 돌판 하나를 흑당맛 쿠키의 눈에 들이대며 말했다. 흑당맛 쿠키는 그것이 다크카카오 왕국의 위령비와 전혀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걸 봐, 네 이름을 그 다크카카오 왕국의 위령비 말고, 여기에 써 놓는거야. 그리고 이 왕국의 꽂아 두는거지. 킹덤에는 그럴 곳이 수도 없이 많다고. 흑당맛 쿠키는 그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찡그렸다. 위령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아는 것이오?

블랙레이즌맛 쿠키 / 흑당맛 쿠키

비켜, 내가 할게. 보는 내가 답답하네. 그렇지, 까마귀? 그렇게 장작을 패고 있던 흑당맛 쿠기 뒤로 나타난 것은, 그녀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의 쿠키였다. 킹덤이라는 곳에 정착한 이후로 많은 쿠키들은 만나왔지만 이토록 독특하고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쿠키는 처음이었다. 그, 아니오, 소인이 금방 끝낼 수 있소. 흑당만 쿠키는 당황한 마음을 애써 감추려 노력하며 다시 도끼를 들었지만, 어느새 그 기묘한 쿠키는 흑당맛 쿠키의 옆으로 다가와 새 도끼 한 자루를 들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천천히 해서야, 오늘 밤에 쓸 장작의 절반도 채우지 못할 거야. 흑당맛 쿠키는 불쾌한 표정으로 방금 나타난 쿠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항상 예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특히 쿠키를 대할 때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반드시 일종의 품위를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쿠키는 무례하리만치 다짜고짜 반말로 말을 걸어오더니, 그 말의 첫마디라는 것은 일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다는 질책이었고, 그 말투마저 달갑지 않게 느껴졌다. 그, 누구신지는 모르겠소만, 초면에 그렇게, 흑당맛 쿠키는 불만을 제기하려 했지만 그 쿠키는 이미 흑당맛 쿠키가 패고 있던 장작을 냉큼 차지한 채로 도끼질을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 밤은 모든 쿠키들이 모이는 축제잖아? 제대로 장작을 준비해 놓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그 쿠키는 그렇게 말하며 장작을 신묘하리만치 적확하게 패고 있었다. 이의를 제기하려던 흑당맛 쿠키를 순간적으로 매료시킬 만큼 그 도끼질은 강렬하면서도 알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 쿠키는 흑당맛 쿠키가 패는 데 십수분은 걸렸던 장작 한 더미를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정리해버린 채 새로운 장작 더미를 패기 시작했다. 흑당맛 쿠키는 여전히 그 장면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쿠키가 도끼질을 하는 장면에는 감히 끼어들 수 없을 정도의 울림이 있었다.

블랙레이즌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정신 좀 차려, 언제까지 다크카카오 쿠키라는 놈만 생각하고 있을거야. 여기는 다크카카오 왕국이 아니야. 돌아갈 방법도 없어. 그렇게 온종일 멍하게 앉아서 굶고 있는다고 그 다크카카오 쿠키라는 놈이 여기로 오는 게 아니라고. 블랙레이즌맛 쿠키는 초점이 없는 흑당맛 쿠키의 양 어깨를 잡아 흔들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질책했다. 하지만 흑당맛 쿠키가 그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보통 때라면 다크카카오 쿠키를 '놈'이라고 부르는 것 만으로도 당장 흑당맛 쿠키가 격노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 말이 애초에 귀에 들어오기는 한 건지, 헬쓱할 얼굴로 창밖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투명한걸, 무엇 때문에 그런 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토록 투명한 바다는 처음 봐. 저걸 봐. 저 깊숙한 곳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보여. 박하사탕맛 쿠키는 활짝 미소를 지으며 바다를 가리켰다. 샤벳상어맛 쿠키는 그런 그를 보며 신나게 뽀글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박하사탕맛 쿠키가 왕국에 있지 못했다는 것을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언뜻 보면 수년은 왕국에서 함께 지내온 듯한 모습이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도대체 언제까지 이 답답한 기차에 갇혀 있어야 하는 거야, 샤벳상어가 볼멘소리로 불만했지만 박하사탕은 반짝거리는 눈으로 창문에서 얼굴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도착하냐고! 샤벳상어가 큰 소리로 부르짖자 그제야 박하사탕은 화들짝 놀라며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으음, 앞으로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해. 한 시간? 지금 네 시간째 이 갑갑한 의자에 앉아 있는데, 아직도 그만큼이나? 당장 일어나서 뛰고 싶단 말이야! 조금만 참아, 박하사탕은 샤벳상어의 등을 토닥여 겨우 말리며 무한히 반복되는 창밖의 풍경을 다시 바라보았다.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날이 많이 어둡네, 아무래도 비가 오겠어. 박하사탕맛 쿠키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등불에 불을 붙이려 하자 샤벳상어맛 쿠키는 다급한 거품 소리를 내며 그를 멈춰세웠다. 으응? 왜 그래, 박하사탕맛 쿠키가 묻자 샤벳상어맛 쿠키는 설명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그대로 집 밖을 향했다. 잠, 잠깐만, 샤벳아, 곧 비가 올 거라고. 하지만 샤벳상어맛 쿠키는 그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박하사탕맛 쿠키의 손을 잡은 채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요즘 다들 더위가 풀린다고들 좋아하는데, 너는 특별히 느껴본 적 있어? 박하사탕맛 쿠키의 질문에 사벳상어맛 쿠키는 자연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물론 그라고 더위라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에게 더위란 - 이런 사실을 말했다가는 여름 내내 더위를 버티느라 고생한 쿠키들이 한껏 짜증낼지도 모르지만 - 육지에서 느낄 수 있는 다른 생명력이자 삶이나 다름없었다. 뙤약볕 아래에서 잔뜩 땀을 흘리며 뛰어다니며, 그는 생명력을 느끼고는 했다. 그의 얼굴을, 몸을, 다리를 타고 흐르는 땀은, 그가 바다뿐만 아니라 육지에서도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다. 그것이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이 녹아내릴 듯 덥든, 손가락 끝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춥든, 그건 아무래도 그에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모든 것이 그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었으니까.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이렇게 더운 날씨라면, 너도 가끔은 다시 바다에 들어가보고 싶지 않아? 박하사탕맛 쿠키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샤벳상어맛 쿠키는 - 물론 표정은 여전히 밝은 채였지만 -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바보같은 질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샤벳상어맛 쿠키는 지친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듯, 두 시간 째 뙤약볕 아래를 짧은 다리로 뛰어다니는 중이었으니까. 그에게는 오랜 장마 후 맞이하는 밝은 햇빛이 그저 반가울 뿐이었다. 박하사탕맛 쿠키는 애써 땀을 훔치며, 그늘 아래에서 그런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확실히 더운 날씨였지만, 샤벳상어맛 쿠키의 해맑은 모습을 지켜보며 시간을 보낸다면 크게 힘들 것은 없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날이 다르게 차가워지는 날씨 아래에서는, 바다 역시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지기 마련이었다. 어제는 쿠키들로 시끌벅적했던 바닷가가, 다음 날은 아무도 없이 무서울 정도로 휑하기도 했다. 그런 변덕스러운 바닷가를 언제나 지키는 둘은, 사실 현상이 어떻든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쿠키들이 많으면 그건 그것대로 즐겁기 마련이었다. 다른 쿠키들과 어울릴 수 있었으니까. 만약 쿠키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고요하고 서늘한 바다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매 순간이 소중한 묘미였으니까. 어째서인지 상어의 모습을 한 그 작은 쿠키는, 아무리 차가운 겨울의 바다라도 끄떡없다는 듯 쾌활한 목소리로 떠들며, 얼음장 같은 그 속을 헤치고는 했다. 때로 박하사탕맛 쿠키는 그것을 걱정했지만 딱히 의미는 없는 걱정이었다. 어쨌든 그는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그에게 돌아왔으니까.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항상 조용히 혼자 시간을 보내는 듯한 아이는 외로움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항상 다른 쿠키들을 찾아 뛰어다니는 아이는 크게 외로움을 타니 참 기이한 일이었다. 그런 두 쿠키가 만나, 매일같이 바다라는 곳에서 서로의 감정을 흡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더욱 기이한 일이었다. 둘은 그다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혼자 시간을 보내던 아이는 더욱 말이 없었다. 다만 어딜 바라보든 청천한 시야 속에서, 온전히 서로의 감정을 맡긴 채 세상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물론 때로는 바다 위를 고래를 타고 놀기도 했고, 바다를 찾는 쿠키들과 모래성을 쌓기도 했다. 그러면 바다를 찾은 쿠키들은 하나같이, 둘이 어떻게 만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참으로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는 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박하사탕맛 쿠키는 그다지 잠이 많지 않았다. 특히 그의 옆에 항상 함께하는 샤벳상어맛 쿠키에 비하면 더욱 그랬다. 물론 그건 평소 샤벳상어맛 쿠키는 종일 뛰어다니기 바쁜 것에 비해, 박하사탕맛 쿠키는 그런 그를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거나, 해변에 앉은 채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흔했으니까,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종종 둘이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에서 잠들 때면, 박하사탕맛 쿠키는 오직 소라고둥의 소리와 함께 잠든 샤벳상어맛 쿠키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자니 어째서 그렇게 시간을 보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기묘하게도 결코 시간 낭비 따위는 아니었다, 라고 지금도 확언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전혀 설명할 수 없었지만.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제독은 새벽 하늘을 올려다 보는 것을 좋아했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그대로였던 버릇이었지, 라고 선원들은 말하고는 했다. 좋든 싫든 제독이라는 자리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직급이었고, 그의 이야기 역시 자연스럽게 알려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가 어렸을 적, 지금처럼 홀로 갑판에 선 채, 서천을 올려다 본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어째서인지 이상할 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 그의 옆을 항상 지키던 호기심 가득한 작은 쿠키가 있었다는 것을 누군들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함께하던 쿠키가, 악역이라는 이름을 뒤집어 쓴 엉망진창인 배를 탄 채, 같은 하늘을 새벽 내내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상상해 볼 쿠키가 있을까. 그 머나먼 거리 사이로 아직까지 남아있는 교감을, 조금이라도 느낄 쿠키가 있었을까. 

샤벳상어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첫눈이란 어찌 보면 매년 있는 연례적인 행사일 뿐이었다. 제독이라는 자리에 앉아 있는 지금도, 수십 년 전과 같이 바다에 내리는 눈을 보면 설레오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다는 것이 한심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어찌 이리도 어린아이의 티를 전혀 벗지 못한 것일까. 첫눈이라는 반복적인 행사가 설레고 특별했던 것은, 분명히 그의 옆에 있던 친구라는 녀석 덕분이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지금 그를 설레게 하는 것은 첫눈이라는 현상 자체가 아니지 않을까. 그것이 되짚어주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그의 마음에 사무치는 것이 아니었을까. 제독은 최고의 악명을 가진 해적이 된 그 친구를 더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도, 과거에 사로잡힌 채 군함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자신의 모습도 모두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급히 부하들이 없는 방으로 모습을 옮겨 공허를 바라보려 노력했다. 그럴수록 잊고 싶은 향수가 더욱 사무칠 뿐이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스모어맛 쿠키

바다에서의 캠핑이라, 스모어맛 쿠키는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내 기대하는 듯 환하게 웃는 샤벳상어맛 쿠키의 표정을 보니 따라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그가 전에 샤벳상어맛 쿠키를 데리고 갔던 캠핑은 즐거웠으니까. 바다란 그에게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었다. 어디에 텐트를 칠지, 애초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지, 기본적인 것부터 모두 샤벳상어맛 쿠키에게 배워야 할 터였다. 오히려 가슴이 뛰는 모험이 아닌가. 스모어맛 쿠키는 흔쾌히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신이 나서 앞장서 뛰어가는 샤벳상어맛 쿠키를 뒤따라가며, 바닷가에서도 모닥불에 마시멜로를 구울 수 있을 지 고민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 스파클링맛 쿠키

샤벳상어 씨, 죄송하지만 아직 바의 문을 열려면 한 시간이나 남았어요, 준비할 게 말 그대로 산더미라고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문도 열기 전 마음대로 바에 들어와, 당당하리만치 순박한 표정으로 바 한쪽에 자리를 잡은 샤벳상어맛 쿠키에게 볼멘소리를 해보았다. 샤벳상어맛 쿠키는 딱히 그를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변함없는 태평한 표정으로 활기찬 거품 소리를 내며 알아들을 수 없는 대답을 내놓을 뿐이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이내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바 안쪽으로 돌아가 재료 점검을 재개했다. 샤벳상어맛 쿠키가 영업 전 바를 찾아온 적은 여러 번 있었다. 어린 쿠키들은 호기심이 강하다지만, 샤벳상어맛 쿠키는 특히 더욱 그런 편이었다. 물론 항상 스파클링맛 쿠키를 방해하는 일 없이 - 계속해서 무슨 뜻인지 모를 거품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 영업 준비를 구경할 뿐이라 그도 항상 잠시 타이르는 것으로 그치고는 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아니, 당장 찾으러 가자고, 지금 쿠키가, 쿠키가 떠내려갔잖아. 이렇게 멍청하게 서 있을 시간이 도대체 어디 있어. 한시라도 빨리 발걸음을 떼야 하는 것 아니야? 샤벳상어맛 쿠키는 흥분한 목소리로 온몸을 바닷속에서 휘저었다. 그, 샤벳아, 미안하긴 하지만 지금 우리가 그럴 수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잘못하다간 너도, 우리도 박하를 찾지 못하고 전부 바다에 떠내려가는 수가 있다고. 저 파도 좀 봐. 빗줄기도 굵어서 앞도 잘 안 보이는 마당인데, 조금만 기다려 주면 안 될까?

샤벳상어맛 쿠키 / 에스프레소맛 쿠키

어제는 온 몸이 눅눅해질 정도로 습하게 비를 쏟더니, 오늘은 아주 온 몸을 태울 정도로 뜨거운 햇빛으로 저를 괴롭히는군요. 하필 이런 날에 실외 공간이 필요한 연구를 하게 되다니, 아무래도 제가 크게 실수한 것 같네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불만이 잔뜩 담긴 목소리와 표정으로 말했다. 과연 그의 말대로, 어제의 습기는 마치 비에 씻긴 듯 사라졌지만, 대신 가만히 있어도 뜨거워 버티기 어려울 정도의 열기가 그 자리르 차지하고 있었다. 평소 날씨 따위에 구애받지 않고 밖에서 뛰어다니는 어린 쿠키들도 오늘은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로지 샤벳상어맛 쿠키만이 더위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는 듯, 궁시렁대며 커피마법 연구를 이어가는 에스프레소맛 쿠키를 가까운 거리에서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해수면 위로 작은 1량의 열차를 몰던 기관사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이상하리만치 푸르고 동그란 점을 목격한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자니 그 점은 슬며시 고개를 들더니 기관사를 향해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한다. 기관사는 까무처리게 놀라며 그만 열차 째로 바닷속에 빠질 뻔 하지만,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했던 녀석이 그의 몸을 받혀 넘어지지 않도록 한다. 어안이 벙벙해진 기관사는 멍한 표정으로 그 쿠키, 혹은 적어도 쿠키 같은 녀석을 바라본다. 그 '쿠키 같은 녀석'은 다시금 함박웃음과 함께 반갑다고 인사한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박하사탕맛 쿠키라는 자는 뭘 하고 있소? 샤벳상어맛 쿠키는 바닷속에서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알고 싶어. 도통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언제 올 수 있을지라도 미리 알 수 있으면, 준비라도 해놓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다크카카오 쿠키를 기다리는 너는, 더 불쌍하게 됐어, 솔직히. 그 녀석은 보아하니 절대로 다크카카오 왕국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이던데. 흑당맛 쿠키는 그 말에 표정이 한층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소. 아마도 전하께서는 절대로 이곳에 오시지 아니할 것이오. 언제든지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으심에도 말이오. 샤벳상어맛 쿠키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모두, 기약 없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네. 둘을 감싼 바다는 서서히 노을빛으로 물들며 침묵을 장려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흑당맛 쿠키는 샤벳상어맛 쿠키 옆에 앉은 채로 조용히 함께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지는 해변은 바닷물을 아련하게 물들이며 둘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두 쿠키 사이에는 본능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운 쿠키가 있다는 것은 이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크카카오 쿠키가 보고 싶은 이유, 박하사탕맛 쿠키가 보고 싶은 이유를 묻는 것은 둘에게 심히 답답한 행위였다.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에는 이유 따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그리움이 있는 자들만 느낄 수 있는, 일종의 치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유 없이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 그것은 통용적으로 이해되기에는 어려운 것이었고, 그 둘은 그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둘은 본능 속으로부터 각인된 감정을, 말 없이도 이해할 수 있는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이 비는 언제 그칠 것 같소? 글쎄, 이 정도로 쏟아지는 폭우는 나도 처음이라서 말이야. 흑당맛 쿠키는 사벳상어맛 쿠키의 등에 앉은 채 온갖 방향으로 물방울이 터져 나가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래서야 킹덤으로 돌아 갈 수도 없겠는걸. 여기서 길을 잃으면 큰일이라고. 샤벳상어맛 쿠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이게 뭐람. 그러게 말이오, 리더도 걱정할텐데, 흑당맛 쿠키는 온몸을 젖히는 비를 맞으며 맞장구쳤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습해, 습하다고! 움직이기도 귀찮아. 사벳상어맛 쿠키는 날카로운 목소리로 불평하며 수영을 멈추더니 해수면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아니. 바다에 사는 쿠키가 습하다고 멈추는 법이 어디 있소? 그 장면을 본 흑당맛 쿠키는 황당하다는 듯 샤벳상어맛 쿠키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고, 그냥 본능같은 거야. 너도 활 쏘기가 귀찮을 때가 있잖아? 그러면서 뭘 그래. 아니, 바다 출신 쿠키가 습한 것을 불평하는 것이랑 양궁이 도대체 어디가 같소? 흑당맛 쿠키가 이의를 제기했지만 사벳상어맛 쿠키는 그것을 가볍게 무시한 채 여유를 즐기기 시작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아무튼 타고 싶지 않아, 사람이 많은 건 싫어. 샤벳상어는 투정을 부리며 흑당의 손아귀를 벗어나려 끙끙거렸다. 물론 그가 흑당의 다부진 손을 떼어버릴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흑당은 그의 말을 듣지 못했다는 듯 옷가지를 더욱 꽉 쥐어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니, 좀 봐줘. 나 이런거에 익숙하지 못한 거 알잖아. 지금 그런 배부른 소리 할 때가 못 되오. 당장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이란 말이오. 흑당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지적했지만 샤벳상어는 더욱 막무가내로 흑당의 손을 뿌리치고 있었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아니, 진짜 너무 맑은 거 아니야? 어젯밤만 해도 하늘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고 있었잖아. 샤벳상어맛 쿠키는 뜨거운 태양빛을 받으며 천천히 헤엄치고 있었다. 마치 아무 동작도 없이 해수면에 둥둥 뜬 채로, 파도에 온전히 자신의 몸을 맡긴 듯한 움직임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소. 오늘까지 폭우가 계속되었다면 쿠키성까지 무사하지 못했을지 모르오. 흑당맛 쿠키는 쌍검궁을 유심히 살펴보며 어루만지고 있었다. 재질이 나무인 탓에 큰 비가 내릴 동안 잔뜩 습기를 머금어 세심한 관리가 필요했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헤엄치는 상어 등 위에 앉아서 목표물을 정확히 조준한다는 것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그 상어라는 쿠키가 지나치게 활달해 온종일 육지와 바다를 휩쓸고 다니는 위인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물론 그것에 이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쨌든 온갖 상황 속에서도 정확하게 활을 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나쁜 일은 아니었다. 다만 현란한 샤벳상어맛 쿠키의 움직임과 여과없이 파도치는 바다, 그리고 어지럽게 수면을 떠도는 목표물이 겹치면 흑당맛 쿠키로서도 딱히 좋은 실력을 발휘하기에도 어려웠다.

샤벳상어맛 쿠키 / 흑당맛 쿠키

이렇게 억센 비는 오랜만이오. 으음, 너 그렇게 비 맞고 있어도 괜찮아? 나야 전혀 문제 없지만 말이야. 샤벳상어맛 쿠키가 우산이나 우비도 없이 비를 맞는 채로 해변에 앉아 있는 흑당맛 쿠키에게 물었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이토록 거센 비는 샤벳상어맛 쿠키에게도 매우 오랜만이었다. 굵은 빗줄기가 시야에 들어오고, 머리와 몸에 떨어져 톡톡 튀는 것이 느껴졌다. 소인도 괜찮소. 다크카카오 왕국에서 매일같이 눈보라를 맞던 몸이오. 하긴, 그렇긴 하네. 오히려 내가 눈보라를 못 버티겠지. 샤벳상어맛 쿠키는 멋쩍게 웃어보이며 어지러울 정도로 빗줄기가 튀어다니는 해수면을 천천히 맴돌고 있었다.

소르베맛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이 인기척 없이 얼어붙은 마을에도, 매년 꼭 그 사슴뿔 모자를 쓴 쿠키는 항상 같은 때 찾아와. 아주 멋진 기차를 타고, 어깨 한쪽에는 선물로 가득한 보따리를 메고 말이야. 이 마을에 남은 쿠키는, 이제 열명 남짓일까, 항상 눈으로 가득한 산 꼭대기에서 문명과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꼭 찾아와 주더라고. 그것도 항상 따뜻한 선물과 함께. 꼭 한 번쯤 보답을 하고 싶은데, 어쩐지 꼭 내가 자고 있을 때만 찾아오더라고. 딱 한번 그 멋진 기차를 직접 본 적이 있는데, 하필이면 떠나고 있을 때라 말도 걸어보지 못 했고 말이야. 아무튼, 두고 봐. 올해 겨울에는 꼭 직접 만나서, 식사도 대접하고, 내 마법도 보여줄테니까. 

스모어맛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맛있네요, 티라미수맛 쿠키가 조용한 목소리로 솔직하게 감상을 말하자 스모어맛 쿠키는 활짝 미소지었다. 그렇지? 역시 쌀쌀한 날에 캠핑을 갈 때는, 이런 달콤하고 따뜻한 음료가 어울리는 법이거든. 아무래도 거기에 코코아만큼 완벽한 건 없지. 티라미수맛 쿠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코코아를 좋아해 자주 마시는 그의 입에도, 스모어맛 쿠키가 만들어 준 코코아는 각별했다. 매일 일만 하며 살다가, 난생 처음 캠핑이라는 것을 경험해보는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 기회도 스모어맛 쿠키가 만들어 준 것이니 딱히 토를 달 필요는 없을 터였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정말 멋진 연주였어요, 허름한 복장을 한 작은 칵테일바의 주인은 힘없는 팔로 박수를 보냈다. 꼬질꼬질한 얼굴과 바이올린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는 꾸벅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저, 좀 갑작스럽겠지만, 혹시 제 바에 연주하러 오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민트초코 쿠키는 그 말에 당황한 듯 흠칫하며 눈을 찡그렸다. 제 바에 연주하러 오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작은 목소리의 소심한 제의였지만 민트초코 쿠키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난생처음으로 받아 본, 길거리가 아닌 곳에서의 연주 제의였으니까. 물론 스파클링맛 쿠키도 자신의 바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일 정도로 허름한 곳이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것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자신의 연주를 들어준 후, 특정한 장소와 쿠키를 위해 연주를 부탁한 것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연주가 인정받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대가 따위를 받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당장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에서 자신의 연주를 보여 줄 수만 있다면 그런 건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파클링맛 쿠키 역시 칵테일바의 주인이라기에는 복장도 허름했고, 몸에도 힘이 없어 보였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쿠키인 듯 했는데, 아무래도 그런 쿠키에게 대가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최고였어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지친 모습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았다. 민트초코 쿠키는 여전히 한 손에 낡은 바이올린을 잡은 채 현실감을 되찾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로부터 초대를 받아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다른 연주자들이 보면 그런 허름한 바에서 채 대여섯 명도 되지 않는 쿠키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 줄 아느냐고 깔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허름하고 좁은 자신의 바에서, 민트초코 쿠키가 최대한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따금씩 힘내라며 칵테일을 몇 잔 건네주었다. 바의 손님은 몇 되지 않았고, 기품이 있다기보다는 요란한 쿠키들이었다. 처음에는 민트초코 쿠키의 모습을 보고, 뭐 하는 녀석이냐고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묻기도 했다. 왁자지껄하기는 했지만, 민트초코 쿠키가 연주를 시작하자 모두 나름의 방법대로 칵테일을 마시며 그의 연주를 감상했다. 연주가 끝나자 요란하게 박수를 치며 그를 칭찬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바이올리니스트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민트초코 쿠키는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희열감을 느꼈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진짜 쥬니퍼베리가 들어간 진이라니, 2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이죠. 그 말을 들은 스파클링맛 쿠키는, 칵테일 셰이커에 진을 붓던 손을 잠시 멈칫했다. 그러게요, 칵테일 베이스로는 오히려 런던 드라이, 그것도 저렴한 쪽이 잘 어울리는 데 말이에요. 굳이 이렇게 구하기도 어렵고 값비싼 올드 톰을 시험 삼아 사용한다는 건, 어떻게 보면 쓸모 없는 사치에 가까워 보이기도 하고요. 음, 그래도 역시 민트초코 씨가 좋아해 주시니 기쁘지만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미소와 함께 말하며 나머지 진을 칵테일 셰이커 부어 넣었다. 달콤한 쥬니퍼베리 향이 가득한 올드 톰 진과 상쾌한 민트의 조화. 쉬이 맛이 상상되는 조합은 아니었지만, 몇년 전과 달리, 그것이 궁금하다면 이제는 바로 실험으로 옮길 수 있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재료가 얼마 없어서 본격적인 걸 드리기는 어렵네요, 정말 죄송해요. 오늘도 정말 멋진 연주를 보여주셨는데 말이에요. 저도 멋진 한잔으로 보답하고 싶은데, 어떻게 보면 제가 더 무능한 처지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민트초코 쿠키는 씁쓸한 표정을 한 채, 진과 설탕 시럽, 그리고 얼음을 칵테일 쉐이커에 넣는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스파클링 씨가 손수 만들어 주시는 칵테일은 언제나 최고인걸요, 물론 스파클링 씨는 언제나 완벽한 한잔을 만들고 싶을 테니, 그렇게 어려워 하시는 것도 이해해요. 저 역시 스파클링 씨가 제 연주가 좋았다고 항상 말씀해주시지만, 제 성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거든요. 민트초코 쿠키는 그렇게 말하며, 스파클링맛 쿠키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저희는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서로에게는 대단한 점도 많아요. 그런 점을 보면서 나아가야 지치는 순간도 이겨낼 수 있는 법이죠.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매일 똑같은 곡을 연주하는 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아요. 물론 저희 형편에 배부른 소리겠지만, 그래도 어제 이 악보를 구했거든요. 나름 음악에 대해서는 공부를 꽤 했는데, 제목도 작곡가도 쓰여 있지 않고, 들어 본 적도 없는 곡이라 정체는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나름 꽤 연습해 보니까, 마음을 울리는 게 있더라고요. 저희 처지 때문에 그런 걸 수도 있겠지만요. 당장 내일 먹을 새 음식도 없는데, 새 곡이라니. 사치도 그런 사치가 없으니까요. 민트초코 쿠키는 몇 안 되는 싸구려 술과 재료가 혼합된 칵테일을 홀짝이며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푸념하듯 무거운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고생 많으셨어요, 힘들긴 하지만, 이렇게 바빴던 것도 오랜만이라 후련하네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새벽 동안 몇십 번을 흔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칵테일 셰이커를 씻으며 말했다. 민트초코 쿠키는 잔뜩 지쳐 반쯤 감긴 눈으로 텅 빈 바에 앉았다. 표정은 크게 지쳐있었지만, 입가에는 어딘가 모를 기쁨이 은근하게 배어 있었다. 아무튼, 무슨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많은 분들 앞에서 연주하는 건 처음이었어요. 민트초코 쿠키는 스파클링맛 쿠키가 자신을 위해 미리 준비한 칵테일을 들어 한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민트초코 쿠키는 심히 멍한 표정으로, 스파클링맛 쿠키가 그에게 내민 바이올린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고급스럽지만 쓸데없이 사치스럽지도 않은 깔끔한 케이스였다. 당연히 바이올린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민트초코 쿠키는, 이 케이스가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항상 속으로만 한 번쯤 내 손으로 잡아보고 싶다, 라고 고대하던 바이올린이었다. 물론 지금 그가 연주하고 있는 바이올린에 나름 애착이 있기는 했다. 비록 새 바이올린을 살 여유가 없어 그랬다지만, 그래도 십수년을 그와 함께 해온 친구였으니까.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처음 수 초 동안 그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이해하지 않고 싶다고 자신을 설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위대하기만 했던 거장의 악기는 바 너머로 날아가 수십개의 술병과 부딪혔다. 한명의 꿈이, 두 명의 꿈이 온통 산산조각난 채 바닥에 흥건히 흐르고 있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저희, 내일도 문을 열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는 스파클링맛 쿠키의 표정에는, 평소 손님을 맞이할 때의 쾌활함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 고칠 것도 너무 많아요. 일단 이 바가 손님을 맞이하기 적합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확실하죠. 그리고 첩첩산중이라고 했나요, 저희 둘 다 손목 상태가 참 좋지 않죠. 칵테일 셰이커를 흔드는 제 손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민트초코 씨의 손이 말이에요. 참, 이럴 때마다 제 무능함이 너무 싫어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눈시울을 붉히며 아련한 목소리로 말했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이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눈물을 훔쳐본다. 단 몇 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앞에 앉은 이 손님에게 얼마나 많은 푸념을 늘어놓았는지, 자신마저 감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 처한 채 방치된 것은 그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이 손님 역시 자세한 일대기를 늘어놓은 적은 없지만, 후줄근한 옷, 항상 부드러운 말투로 웃으려 하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 갇힌 듯한 특유의 분위기는, 이 허름한 바의 주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당장 내일 바이올린을 조율할 돈이 없는 무명의 연주자, 그리고 당장 내일 팔 술이 없는 무명의 바텐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에게 있는 것는, 그 누구도 몰라주는 바이올린과 바텐딩에 대한 열정뿐이었다. 그 열정을 보여주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는 것은, 그들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이율배반이었던가.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는 당장에라도 내일 무너질 것처럼 허름했고, 어제 내렸던 비가 여전히 새고 있었다. 둘은 새벽 늦게까지 단둘이 불도 켜지 않은 채 그곳에 앉아, 무음으로 서로를 향해 소통했다. 오늘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내일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 이는 어찌 그토록 잔혹한 비극이었던가. 

스파클링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너무 추워요, 민트초코 쿠키는 평소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에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멘 바이올린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어쩐지 걸음걸이도 위태로웠고,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놀라 씻던 지거를 바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고 급히 그에게로 향했다. 이마와 몸은 뜨거웠는데도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매일을 이런 날씨에 길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으니 이렇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다만 하루만에 이토록 심각해진 상태로 보게 될 줄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급히 가게의 난방을 틀었다. 그의 바는 밖과 다를 것 없이 추웠다. 당장 다음 달 월세도 지불하지 못할 판에, 손님이 없는 마감 시간에 난방을 키는 것은 사치였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는가. 이런 몸살은 단순히 따뜻한 곳에 있다고 낫지는 않는 것이다.

스파클링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참, 한 병을 다 비우실 생각이에요? 아무래 그래도 그런 건 좋지 않다고요, 스파클링맛 쿠키가 웃으며 타일렀지만, 심해군주 쿠키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겨우 한잔 정도 남은 위스키를 모두 잔에 부었다. 특별히 취했다거나 그런 기색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보통 때도 주량이 많은 그였지만, 아무래도 이토록 많이 마신 적은 거의 없었기에 걱정되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평소 같으면 전기장어맛 쿠키가 그만 좀 마시라며 그의 잔을 빼앗았겠지만, 오늘은 어째서인지 혼자 이곳을 찾아, 늦은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파클링맛 쿠키의 입장에서 그는 손님이었으니, 아무리 걱정되더라도 직접 잔을 뺏거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그가 건넨 한잔에 담긴 이야기는, 쫓겨나듯 고향을 떠난 옛 신관이 새벽이라는 시간마저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특별히 이 한잔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음미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것이 그의 입에 닿는 순간, 그는 자연스럽게 바텐더가 준비한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으니까. 어떻게 보면 그것이 스파클링맛 쿠키가 가진 참 특별한 능력이었다. 손님과의 대화를 통해 바로 그 순간, 그 쿠키에게 가장 어울리는 한잔이 무엇일지 떠올려 준비하는 것이다. 때로 그 대화는 단 몇 마디로도 충분했고, 때로는 몇십 분이고 이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심해군주 쿠키는 단 한 마디로도 충분했다. 바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의 표정, 복장, 그리고 보기만 해도 힘이 빠질 것만 같은 느린 발걸음. 심히 위압적인 말투로 명령하듯 부탁한 한잔. 그 속에서 심해군주 쿠키를 위한 한잔의 이야기는 이미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준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파클링맛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코코아에는 마시멜로가 많이 올라가 있을 수록 좋아요. 두 개, 세 개, 아니, 열 개도 지나치지 않죠. 그럴수록 더욱 부드럽고 달콤한 법이거든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초콜릿 파우더를 뜨거운 우유에 녹이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건 좋지 않다고요, 티라미수 씨. 아무튼 이 티라미수맛 쿠키라는 선물 배달부는, 하는 일이나 직업 정신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았지만, 입맛만큼은 영락없는 어린아이였다. 매일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를 찾아 코코아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진하고 달게, 마시멜로를 잔뜩 올려서. 칵테일과는 크게 다른 물건이었지만, 가끔 민트초코 쿠키와 함께 바를 드나드는 코코아맛 쿠키를 위해 코코아를 몇 번 만들어 본 스파클링맛 쿠키는 기꺼이 그를 위해 코코아를 내주었고, 그 때마다 티라미수맛 쿠키는, 그로부터 평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한없이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스파클링맛 쿠키 / 허브맛 쿠키

녹차 칵테일이라면 어떤 게 괜찮을까요? 아니, 이런 재료로 칵테일을 만들어 보리라고는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 접근하는 게 좋을까, 조금 고민해 봤는데,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우선 스프리츠 하나를 아무렇게나 만들어봤는데, 예상 외로 나쁘지 않더라고요. 재료도 간단한 녀석이에요. 가장 중요한 재료인 녹차에 진저에일, 보드카, 얼음을 섞고 라임 조각을 슬쩍 하나 올려주면 끝이죠. 간단한데도 스프리츠 치고는 맛이 상당히 풍부한 편이에요. 아무튼, 허브 씨도 이건 꼭 드셔 보셔야 해요. 설마 저에게 저 많은 찻잎을 주고, 드시지 않을 생각은 아니시죠? 

스파클링맛 쿠키 / 허브맛 쿠키

제가 첫 손님이라고요? 허름한 옷차림이었지만 말끔한 외모를 가진 쿠키가, 주문한 바질 모히또를 한 모금 마시더니 놀란 듯 물었다. 하지만, 꽤 늦은 밤이고, 가게 분위기도 아늑하고 좋은걸요. 이 칵테일도 맛있고, 저기 계신 신사분의 연주 실력도 훌륭하고요. 그는 이 바에 대한 감상을 정직하게 늘어놓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오늘의 유일한 손님이라는 점이 변하지는 않았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그 칭찬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칭찬은 매우 기뻤지만, 그것만으로 현실적인 문제를 뛰어넘을 수는 없는 법이었으니까. 

시간지기 쿠키 / 크루아상맛 쿠키

시간지기 쿠키는 항상 달리는 쿠키들을 보면 의문스러웠다. 뭘 저렇게 힘들게 달리지, 시간대를 한 번 돌리기만 하면 끝인데 말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크루아상맛 쿠키에게 그 질문을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지극히 일반론에 불과했다. 달리는게 어때서? 나도 항상 달리는데 말이야. 그것은 시간지기 쿠키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들어. 그녀는 크루아상맛 쿠키에게 그것 역시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들어 주지 않았다 .그런 허름한 바에서 채 대여섯 명도 되지 않는 쿠키들 앞에서, 연주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해 보이는 줄 아느냐고 깔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허름하고 좁은 자신의 바에서, 민트초코 쿠키가 최대한 편안하게 연주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따금씩 힘내라며 칵테일을 몇 잔 건네주었다. 바의 손님은 몇 되지 않았고, 기품이 있다기보다는 요란한 쿠키들이었다. 처음에는 민트초코 쿠키의 모습을 보고, 뭐 하는 녀석이냐고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묻기도 했다. 왁자지껄하기는 했지만, 민트초코 쿠키가 연주를 

용감한 쿠키 / 마법사맛 쿠키

일어나, 아니야, 마법사야, 내가 잘못했어, 용감한 쿠키는 쓰러진 채 의식을 잃은 마법사맛 쿠키의 몸은 안아 든 채로 왕국을 향해 달렸다. 빽빽한 산맥으로부터 왕국까지의 거리는 상당했을 뿐 아니라 땅도 고르지 못했고 그 경사마저 불안정했다. 마법사맛 쿠키의 몸으로부터는 생명력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용감한 쿠키는 눈물을 머금고, 그를 안아 든 채 미친 듯이 달렸다. 제발, 제발 살아 줘. 잘못했어, 잘못했어, 지금 이 세계에는 용감한 쿠키와, 그가 안아 든 마법사만 쿠키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둘은 부활을 향해 공허로부터 도주하고 있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 허브맛 쿠키

덥고 습한 날씨에, 더 덥고 습한 온실이라니. 이래서야 살 수나 있겠습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비꼬는 듯 말했지만, 허브맛 쿠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 듯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물을 끓이며 더욱 습기를 더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아무래도 덥고 습한 곳에서 지내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까, 손님을 초대하기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네요. 그래도 이런 날씨에 좋은 차를 준비해 드릴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허브맛 쿠키의 지나치게 온화한 목소리에,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짜증을 낸 것이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차를 내리는 그를 바라보았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 허브맛 쿠키

날씨가 풀리기 무섭게 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도, 저 쿠키는 참 마음 편하군요.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 어찌 보면 그답지 않게 - 커피 대신 카페인이 없는 허브차를 세 잔쨰 비우며 말했다. 평소라면 허브차에 입도 대지 않았을 그였지만, 마침 그가 허브맛 쿠키의 온실 앞을 지나가기 무섭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우산도 우비도 준비하지 않았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급히 안으로 몸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허브맛 쿠키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하더니, 마치 기다렸다는 듯 허브차를 내왔다. 예정에도 없던 신세까지 지는 마당에 이런 호의를 거절할 수는 없었으니, 그는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차를 받았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어느새 잔을 비우자, 허브맛 쿠키는 자연스럽게 그 잔을 다시 따듯한 차로 채워주었고, 에스프레소맛 쿠키의 찻잔에는 이내 네 번째로 다시 차가 채워졌다. 

용안 드래곤 쿠키 / 용감한 쿠키

용감한 쿠키는 용안 드래곤 쿠키에게 있어 일종의 장애물이었고, 용안 드래곤 쿠키는 용감한 쿠키에게 있어 일종의 절대악이었다. 서로는 서로가 철저히 파괴되기를 원했으며 끝없는 나락으로 서로를 이끌었다.  용은 공격적이고 파괴적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영리했다. 도대체 쿠키들을 왜 없애려 하는거야, 용감한 쿠키는 질문을 시도했지만 용안 드래콘 쿠키는 그것을 듣지 않았다. 애초 식별의 의미가 없는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둘 사이의 전쟁은 그칠 줄을 몰랐다.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우리에게는 오히려 이런, 우중충하고 떠내려갈듯 많은 비가 쏟아지는 날씨가 어울리지 않나. 심해군주 쿠키는 빗소리에 묻힐 정도로 조용하지만 굵은 목소리로, 전기장어맛 쿠키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물론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런 날씨 속에서는 나름의 향수가 몸을 자극하니까 말이다. 어쩐지 별로 좋지 않던 경험들도 추억처럼 느껴지는군. 그렇게 말하는 심해군주 쿠키는 작달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전히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마치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다는 듯.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그는 종종 잊을 만하면 지적받고는 했다. 괜히 공동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하는 것이 아닌가. 옆의 이인을 지키느라 오히려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그런 지적에 반박하는 대신 투박하게 웃어넘기고는 했다. 그는 딱히 자신을 희생하고 있다고도, 정작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이 도시를 지키는 일이, 그의 옆을 지키는 일이 곧 자신을 지키는 일이 아니던가, 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를 만나 가볍게 대화를 나누는 다른 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그의 옆을 항상 함께하는 이도, 꽤 오랫동안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호흡만으로, 활기 뒤에 소외된 그의 마음을 유일하게 보듬어주고 있지 않은가.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과거의 신관은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어느 때보다도 공허한 눈빛으로, 어느 때보다도 차갑에 얼어붙은 몸으로. 여전히 미세하게 짜릿한 감각이 남아있는 축 처진 몸을 다시금 두 팔로 감싸 안아보았다. 그에게는 잠시 다시금 허공에서 반응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더는 허공조차도 응시하고 있지 않는 텅 빈 눈빛은, 조금 전까지 전기장어맛 쿠키를 재미 삼아 고략하던 쿠키 무리에게 향했다. 딱히 직감이 좋지 않다라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살기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물론 미동도 없는 몸으로부터 순식간에 튀어나와 쿠키 무리를 묶어버린 촉수는, 그런 직감이 있든 없든 피하기 어려웠지만. 촉수는 사정없이 무리의 온몸을 감싸 조였다. 순식간에 숨을 헐떡이게 될 정도로, 이내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을 정도로, 뼈마디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를 정도로. 그가 전기장어맛 쿠키의 몸을 더욱 공허하게 감싸 안을수록, 마치 그에 곱으로 정비례하듯, 무리를 조여가는 힘은 잔혹해져만 갔다. 잠시 새어 나온 참을 수 없는 비명이 수 초만에 시들어버릴 정도로, 내장이 압력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릴 정도로, 조금 전 단 몇 분의 재미를 영겁의 세월동안 후회하게 할 정도로. 

키위맛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크리스마스의 밤을 뚫고 달린다는 거, 어쩐지 조금 멋있지 않아? 눈이 가득 쌓인 우거진 숲 속을, 티라미수맛 쿠키의 선물 배달 열차가 환하게 비치고 있었다. 그 빛이 워낙 밝은 탓에 키위맛 쿠키의 바이크는 헤드라이트의 존재감을 거의 잃은 채였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티라미수맛 쿠키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그에게 선물 배달을 가면서도, 그를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밤마다, 특히 크리스마스의 밤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면서 라이딩을 즐기러 집을 비워버렸으니까. 이렇게 마주친 것은 그저 하늘이 내려준 우연일 뿐이었다. 

티라미수맛 쿠키 / 박하사탕맛 쿠키

메리 크리스마스, 티라미수맛 쿠키가 작은 선물 상자를 미소와 함께 박하사탕맛 쿠키에게 건네주었다. 이거, 나한테 주는 거야? 정말로? 왜? 박하사탕맛 쿠키가 티라미수맛 쿠키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야, 크리스마스니까요. 크리스마스는 선물을 받는 날이잖아. 음, 그래? 하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가 아니잖아, 박하사탕맛 쿠키는 소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크리스마스는 어제 아니였어? 내가 아무리 이 섬에서 고래들이랑만 살고 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는걸. 으음, 맞아요, 크리스마스는 분명히 어제였죠. 티라미수맛 쿠키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 어제 선물을 드렸어야 하는데, 배달 중에 그만 실수를 저질러버려서 말이에요, 티라미수맛 쿠키는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사과도 할 겸 제가 직접 전해주러 왔어요.

티라미수맛 쿠키 / 에그노그맛 쿠키

저, 다녀올게요. 티라미수맛 쿠키는 작지만 결의로 가득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아니, 가긴 어딜 간다는 거냐. 에그노그맛 쿠키가 당황한 목소리로 묻자 티라미수맛 쿠키는 더욱 당당하게 대답했다. 마지막 선물이요. 실수로 배달하지 못했잖아요, 이 선물. 이 쿠키만 선물을 받지 못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얼마나 외롭고 공허하겠어요. 아니, 뭐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렇게 말하는 에그노그맛 쿠키 앞에서 티라미수맛 쿠키는 이미 썰매를 끌고 나갈 채비를 시작한 채였다. 티라미수, 이번 크리스마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공적이었다네. 무모하게 다시 나가는 건 너무 위험하다고.

파인 드래곤 쿠키 / 용과 드래곤 쿠키

특별히 의식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는 상당히 쿠키들과의 공존을 즐기고 있던 셈이었다. 물론 쿠키라는 존재를 나약하다고 깔보는 시선을 변하지 않았지만, 애초 그런 점이 재미있다고 생각했으니 어쩌면 그것은 더욱 근본적인, 일종의 친밀감을 싹틔우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안 그래도 이전부터 붉은 용이 쿠키들에게 자주 접근하는 모습이 혐오스러웠던 노란 용은, 직접 그를 질책하기보다는, 붉은 용과 그 주변의 쿠키들을 멸할 방법을 홀로 궁리하기 시작했다. 지속적으로 쿠키들에게 접근하는 존재에게 자신이 직접 다가간다면, 자신마저 그 기류로 타락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애초 붉은 용에게 필요한 것은, 질책보다는 심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허브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솔직한 말로, 리더가 미워요. 남의 역할와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는 것은 잘못된 짓이에요. 설령 그것이 리더라도 말이에요. 제가 뒤에 있잖아요. 언제든지 치유할 준비를 한 채로요. 그런데 지금 리더의 꼴을 보란 말이에요. 단추는 잃어버렸지, 팔은 부러졌지, 다리도 다시 멀쩡히 걸으시려면 족히 닷새는 재활이 필요할거에요. 이토록 이기적이고 무모한 리더를 지금까지 받아준 제 잘못도 있겠죠.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으로도 이렇게 이기적인 리더를 내칠 자신은 없어요. 그러니까, 조금만 조심해주세요. 부탁이에요.

허브맛 쿠키 / 웨어울프맛 쿠키

솔직히 난 네 호의를 전혀 원하지 않아. 나를 너무 한심하게 보는 것 같단 말이야. 웨어울프맛 쿠키는 허브맛 쿠키에게 쏘아붙였다. 호의라니요? 허브맛 쿠키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눈을 찡그렸다. 제가 웨어울프님에게 호의를 베푼 적이 있었나요? 방금 준 이 옷은 그러면, 호의가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설명하려고. 웨어울프맛 쿠키는 메마른 동시에 떨리는 목소리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으음, 그건 호의가 아닌걸요? 제가 할 당연한 일일 뿐이라고요. 쿠키들을 돕는 것이요.

허브맛 쿠키 / 웨어울프맛 쿠키

나 피곤해, 웨어울프맛 쿠키는 불평하며 허브맛 쿠키의 온실에 등장했다. 네 말대로 어린 애들이랑 놀아보니까, 얼마나 피곤하고 힘들었는지 알아? 도대체 지칠 줄을 모르는 아이들이랑 하루 종일 뛰어다녀야 했다고. 애들은 또 귀신같단 말이야, 내 동물적 본능보다도 훨씬. 글쎄 내가 열심히 놀고 있는 것 같지 않으면 핀잔을 주더라니까?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어, 웨어울프맛 쿠키는 주절주절 늘어놓았지만 허브맛 쿠키는 미소를 띤 채로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즐거우셨죠? 체력 회복에 좋은 차를 준비해놨어요. 내 말 듣긴 한거야? 나 피곤해, 피곤해 죽겠단 말이야. 즐겁기는 무슨. 웨어울프맛 쿠키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자신의 상태를 설파했다. 으음, 즐거우셨던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다면 오자마자 먼저 저한테 이렇게 경험을 늘어놓으시지는 않으실 것 같아요. 웨어울프맛 쿠키는 입을 크게 벌린 채 그대로 말을 멈췄다. 확실히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만약 그가 불만이 있었다면 그것을 주제로 떠들기보다는 침묵을 고수하였을 것이다. 그가 먼저 떠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가 들떠있다는 것을 방증했다.

호밀맛 쿠키 / 샤벳상어맛 쿠키

저 상어인가? 물고기인가? 아무투 뭐 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참 웃기는 녀석이었다고. 나를 보더니 갑자기 달려들어서, 다짜고짜 알아들을 수도 없게 뻐끔뻐끔거리지 뭐야. 솔직히 귀찮아서 반 장난으로 총을 들이댔더니,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더 신나하더라고. 나도 솔직히 그때는 조금 당황했지. 분명히 어려보이는 애였는데 말이야.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거 그냥 자리를 피했더니 나를 졸졸 따라오지 뭐야. 꺼지라고 했더니 말은 잘 듣더군. 환하게 웃으면서 가버리기는 했지만 말이야. 호밀맛 쿠키는 호밀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아무튼 그 귀찮은 물고기좀 아무나 잡아놓고 있으란 말이야, 호밀맛 쿠키는 볼멘소리를 늘어놓았다.

호밀맛 쿠키 / 스파클링맛 쿠키

호밀맛 쿠키는 그녀답지 않은 조용한 몸짓으로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에 들어섰다. 문이 열리는 종소리에 스파클링맛 쿠키는 환하게 웃으며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곧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띠었다. 그도 그럴 것이 호밀맛 쿠키는 항상 바의 문을 부실 듯 박차며 호기롭게 등장하는 탓에 항상 스파클링맛 쿠키의 주의를 받았었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오늘은 얌전하게 손으로 문을 열며 나타난 것이다. 무슨 굉장한 염려라도 있나, 스파클링맛 쿠키는 본능적으로 걱정했다. 그 정도로 그녀는 평소와 지나치게 달라져있었다.

호밀맛 쿠키 / 키위맛 쿠키

대놓고 바이크를 타고 왔는데도 권하는 건 술이라니, 키위맛 쿠키는 넘칠 만큼 호밀 맥주로 가득한 잔을 자신에게 들이미는 호밀맛 쿠키를 피하며 애쓰며 얼굴을 찡그렸다. 물론 주 목적이 다양한 술을 마시며, 적당한 취기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목적인 바에 온 주제에 술을 거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딱히 그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맥주라니, 키위맛 쿠키는 스파클링맛 쿠키가 그를 위해 특별히 만든 키위 칵테일 몇 종류를 제외하면 술 자체를 꺼리는 편에 속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맥주는 오로지 거부의 대상일 뿐이었다. 물론 쿠키마다 입맛은 천차만별이라지만, 그렇기에 맥주라는 것은 더욱 십수년은 묵어 쉬어버린 듯한 곡물의 신맛과 텁텁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물론 직접 호밀맛 쿠키에게 그렇게 말한 적은 없었지만. 

호밀맛 쿠키 / 키위맛 쿠키

이렇게 덥고 습한 날씨에도 라이딩을 가는 거냐? 여느 날과 같이 키위맛 쿠키가 집을 나서 바이크의 시동을 걸려 하자,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호밀맛 쿠키가 느끄름한 하늘 아래 선 채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평소 아무리 호쾌한 그녀라도 이런 날씨는 좋아하지 않는 듯했다. 물론 키위맛 쿠키도 덥고 습한 날씨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그것이 그의 라이딩을 막을 이유가 전혀 되지 못할 뿐이었다. 잘못하면 바이크가 고장날 정도의 비바람이나 태풍, 폭설 따위가 아니라면 그의 라이딩은 언제라도 날씨에 구애받지 않았고, 딱히 그것이 별나다거나 불편하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흑당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이게 무슨 말이오, 사흘? 나흘? 닷새? 아니, 내가 시간을 왜 되뇌이고 있는 거야. 당장 전하를 만나뵐 수 있게 해주시오. 흑당맛 쿠키는 다급한 목소리로 간청했지만 용감한 쿠키는 그녀를 붙잡은 채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조금만 참아. 나흘이면 충분해. 다크카카오 쿠키에게 너무 의지하는 것도, 흑당맛 쿠키는 용감한 쿠키의 말을 툭 잘라버리며 거친 목소리로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의지라니, 의지? 이건 의지가 아니오. 전하께서 살피지 않는 소인이란 존재할 수 없소. 흑당맛 쿠키는 용감한 쿠키의 손길을 뿌리치려 애썼지만 용감한 쿠키 역시 그녀를 놓아줄 생각은 없었다.

흑당맛 쿠키 / 용감한 쿠키

비를 맞는 것도 정도가 있지, 이건 폭우 중에 폭우라고. 감기에 걸리거나 그런게 문제가 아니라 진짜 떠내려가는 수가 있단 말이야. 오늘은 그냥 참자, 응? 용감한 쿠키가 권유했지만 흑당맛 쿠키는 듣지 못한 척 하며 머릿결을 정리했다. 이 정도 비는 아무것도 아니오. 이것보다 수배는 심한 눈보라도 맞아봤소. 아니, 굳이 나갈 필요가 없는데 왜 나가겠다는 거야. 말하지 않았소, 이런 비도 맞아보고 싶었다고 말이오. 그렇게 말하는 흑당맛 쿠키의 말투는 지나치게 안정되어 있었다. 마치 폭우를 맞으러 나가는 것이 카페에 다녀오는 것처럼 당연한 일과 중 하나인 듯 망설임도, 위화감도 없는 말투였다.

흑당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어찌되었든 오늘 그 축제라는 것이 진행되는 것 아니오? 응, 그렇지, 용감한 쿠키는 바쁘게 상자 하나를 뒤적거리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축제 때 끼는 해골 단추가 어디 있더라, 분명 이 상자에 넣어 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저, 용감한 쿠키, 그 축제라는 것의 목적은 대관절 무엇이오? 흑당맛 쿠키가 그렇게 묻자 용감한 쿠키는 픽 웃을 수밖에 없었다. 축제에 목적이 어디 있어, 쿠키들이 다 같이 어울려서 즐겁게 놀기 위한 거지. 축제를 진행함으로서 특별히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오? 흑당맛 쿠키가 따지듯 물었다. 아무런 목적도, 얻는 것도 없이 이런 큰 일을 대대적으로 벌이다니. 그녀의 상식선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행위였다. 다 같이 즐겁게 어울리는 것도 왕국에는 충분히 필요한 일이야, 용감한 쿠키가 웃으며 설명했지만 흑당맛 쿠키의 표정은 여전히 의문으로 가득했다.

조합 (3인 이상)

샤벳상어맛 쿠키 / 스파클링맛 쿠키 / 호밀맛 쿠키

이 녀석 좀 어떻게 좀 해보라니까, 호밀맛 쿠키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얼굴을 찡그리며 불평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샤벳상어맛 쿠키는 해맑은 거품 소리를 내며 호밀맛 쿠키의 권총에, 밀 한 줄기가 달린 모자에, 그녀가 다섯 번째 비우고 있는 호밀 맥주잔에 관심을 보였다. 주인장! 이 녀석 좀 어떻게 해보라고, 호밀맛 쿠키는 다시금 불평했지만, 스파클링맛 쿠키는 웃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원래 저런 녀석이니, 조금만 받아줘요. 그래도 재밌고 착한 녀석이거든요. 재미건 나발이건 난 모르겠고, 오늘은 피곤하단 말이야. 이런 애송이랑 어울려 줄 기력이 없다고. 그것 치고는 벌써 여섯 잔째 드시고 계시는, 힘이 없으니까 호밀 맥주를 마시는 거야, 알아? 호밀맛 쿠키는 스파클링맛 쿠키의 말을 퉁명스럽게 툭 끊었다. 그나마 기력을 유지하게 해주는 녀석이라고, 너같은 애송이는 마시면 안 되는 거고 말이야, 호밀맛 쿠키는 여전히 옆에서 떠날 줄 모르는 샤벳상어맛 쿠키에게 쏘아붙였다. 

스파클링맛 쿠키 /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참 신기하지, 우리, 원더크랩에서 이곳으로 온지 겨우 열흘도 지났지 않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이 바에 올 때마다, 어쩐지 하루가 다르게 원더크랩이라는 곳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기분이야. 물론 마냥 그곳을 잊고 살 수는 없는 법이지. 언젠간 돌아가보기도 해야 할테고 말이야.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것과 상관 없이 말이야, 이곳의 한없이 많은 칵테일을 매일 구경하다 보면 어쩐지 그 모든 고생이 옛날 일처럼만 느껴진다니까 - 전기장어맛 쿠키의 팔자 좋은 소리에, 심해군주 쿠키는 대답 없이 위스키를 넉 잔째 스트레이트로 홀짝이고 있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그런 둘을 재미있다는 듯, 조금 거리가 있는 곳에서 칵테일 쉐이커를 흔들며 바라보았다. 며칠 전 처음 이 바에 발걸음을 들였을 때부터 참 재미있는 쿠키 둘이라고 생각했는데, 날이 지날수록 둘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갈 따름이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이런 녀석은 재미없지 않은가? 술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매일 나한테 자네의 바를 오자고 조르더니, 와서 마신다는 것 하고는 기껏 주스같은 칵테일뿐이니 말이야. 그게 뭐 어때서! 심해군주 쿠키의 말에 전기장어맛 쿠키가 불평했다. 스파클링맛 쿠키는 그런 둘의 만담을 들으며, 심해군주 쿠키가 예전에 미리 마련해달라고 부탁한 위스키 한 병을 조심스럽게 열고 있었다. 처음 둘이 그의 바를 찾았을 때랑은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물론 말수가 적은 것과 특유의 매우 낮은 목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심해군주 쿠키가 이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을 이런 농담을 날리고는 했으니까. 아무래도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지금까지 그처럼 술에 대해 이야기가 잘 통하는 쿠키가 없었으니, 자연스럽게 계속해서 말을 걸게 된 것도 있었지만.

스파클링맛 쿠키 /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바다 내음의 위스키라, 심해군주 쿠키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기장어맛 쿠키는 옆에서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런 게 있어? 아무리 위스키라는게 다양햔 향미를 - 물론 너희 말대로라면 말이지 - 품고 있다고는 하지만 말이야. 그럼요, 스파클링맛 쿠키는 변함없은 미소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어느새 시간은 새벽 두 시에 가까워지고 있었고, 바에 남은 쿠키는 그 셋 뿐이었다. 내내 손님들을 응대한 것이 피곤하지도 않은 듯 스파클링맛 쿠키는 새 위스키 한 병을 꺼내 들더니, 바에 앉은 심해군주 쿠키와 전기장어맛 쿠키에게 보여주었다. 습지로 가득한 섬에서 증류한 위스키에요. 덕분에 특유의 바다의 짠내음과 해초 향미가 나죠. 덕분에 호불호는 정말 크게 갈리지만, 원더크랩을 떠올리시기에는 정말 좋으실 거라고 확신해요.

스파클링맛 쿠키 /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새벽까지 둘의 음주가 이어지면 평소의 관계가 정반대로 뒤집히고는 했다. 물론 전기장어맛 쿠키는 취하더라도 폐를 끼치는 법은 없었지만, 종종 심해군주 쿠키와, 새벽까지 둘과 함께 바를 지키는 스파클링맛 쿠키에게, 때로는 울기도 하면서 이야기보따리를 끝없이 늘어놓고는 했다. 원더크랩이 과거에는 어땠냐느니, 때로는 심해군주 쿠키에게 이것도 저것도 서운하다며 호소하여, 심해군주 쿠키가 그의 입을 막기 바쁘기도 했다.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면 스파클링맛 쿠키는 그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스파클링맛 쿠키 / 전기장어맛 쿠키 / 심해군주 쿠키 / 티라미수맛 쿠키

짧은 다리로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를 아장아장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에요, 스파클링 씨. 이번 배달이 끝나면 코코아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새벽 네 시가 가까운 시간이었지만, 스파클링맛 쿠키는 전혀 피곤한 기색 없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당황한 채 입을 열지 못하는 이들은,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로 그때까지 바에서 각종 술이란 술은 잔뜩 마시던 심해군주 쿠키였다. 그의 주량을 조절해주는 전기장어맛 쿠키는 이미 피곤에 지친 듯 옆에 엎드려 잠에 빠진 채였다. 티라미수맛 쿠키는 그런 그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선물 보따리를 내려놓더니 안을 뒤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스파클링 씨 선물, 이건 전기장어 씨 선물... 어쨌든 원더크랩의 크리스마스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절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 / 흑당맛 쿠키 / 용감한 쿠키

저, 그 정도의 엄호는 비효율적인 행위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용감한 쿠키 옆에 바짝 붙어 그를 지키는 흑당맛 쿠키를 향해 마치 조롱하듯 얇은 어투로 말했다. 흑당맛 쿠키는 그런 어투 따위는 전혀 신경쓰이지 않는 듯 쾌활하게 대답했다. 이제 나는 이 왕국의 경비원이 아니오, 이곳의 리더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흑당맛 쿠키는 부담스러우리만치 용감한 쿠키에게 더 바짝 달라붙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그런 그녀를 보며 다시금 한숨을 쉬었지만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허브맛 쿠키 / 웨어울프맛 쿠키 / 팬케이크맛 쿠키

지금, 웨어울프 씨는, 여기 없는걸요, 허브맛 쿠키가 심히 어색한 목소리로 더듬거렸다. 팬케이크맛 쿠키는 크게 웃으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웨어울프, 여기 있지? 어서 나와! 네가 졌다고! 웨어울프맛 쿠키는 찝찝한 표정으로 숨어있던 화분들 뒤로부터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허브, 왜 그렇게 연기를 못 하는거야. 웨어울프맛 쿠키가 불평했다. 이놈의 숨바꼭질이라는 것, 이래서 이겨 본 적이 없다고. 죄송해요, 허브맛 쿠키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허브맛 쿠키 / 뱀파이어맛 쿠키 / 민트초코 쿠키

정말로 안 가는거에요? 허브맛 쿠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뱀파이어맛 쿠키에게 물었다. 가끔은 이런 장난도 재미있잖아, 뱀파이어맛 쿠키는 별 것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어차피 스파클링 녀석, 오늘 사람도 많은 날이라 정신없을 거라고. 동감입니다, 민트초코 쿠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맞장구쳤다. 하지만 여전히 허브맛 쿠키는 불안했다. 으음, 아무리 그래도 스파클링 씨께서 섭섭해 하실 것만 같은데, 어떡하지, 허브맛 쿠키는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도 두 분이 괜찮다고 하시니까, 정말 괜찮은 걸까나. 

흑당맛 쿠키 / 크런치초코칩 쿠키 / 다크카카오 쿠키

아니, 누나, 왜 그래, 전하께서는, 흑당맛 쿠키는 더듬거리며 제다로 입을 열지 못하는 크런치초코칩 쿠키의 말허리를 잘랐다. 한번만 더 누나라고 불러 봐. 네 주둥이를 찢어버릴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흑당맛 쿠키의 목소리에는 위화감을 넘어선 살기가 있었다. 크런치초코집 쿠키는 흑당맛 쿠키의 손에 무참하게 피를 터뜨리는 다크카카오 쿠키의 모습을 묘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분명히 셋은 어제까지만 해도 별 특별할 일 없이 평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은 흑당맛 쿠키가 다크카카오 쿠키를 향해 그로부터 하사받은 쌍검궁을 휘두르고 있었다. 크런치초코칩 쿠키는 어느 곳에 서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만두십시오, 전하. 더 이상의 희생을 만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수많은 백성들이 이슬이 되었습니다. 기동대장까지 왕국의 역사로 남겨버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간곡히 호소드립니다.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하지 마시옵소서. 성이라는 우물을 뚫고 나오시옵소서.

주제

일출 / 일몰

해가 뜬다. 하루가 시작된다. 섀벽 일찍부터 일어나는 쿠키는 많이 없지만, 용감한 쿠키는 쿠키성에서 나와 마을 순찰을 시작한다. 허브맛 쿠키는 온실의 차양을 올리고 열심히 물을 뿌린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퀭한 얼굴을 한 채 커피를 또 한잔 마시고 있다. 해가 진다. 하루가 끝난다. 용감한 쿠키는 스파클링맛 쿠키의 바에서 다른 쿠키들과 왁자지껄 어울린다. 에스프레소맛 쿠키는 커피를 다시 한잔 마시며 서류를 점검한다. 블랙레이즌맛 쿠키는 어두운 숲속에서 나무 위를 지킨다. 흑당맛 쿠키는 킹덤 외곽에서 쌍검궁을 맨 채로 눈을 부릅뜬다.

홍수

설탕노움들은 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지금 당장 내일 식량도 부족한데 말입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물론 쿠키성 꼭대기에 모인 모든 쿠키들의 얼굴은 너나 할 것 없이 창백했다. 큰 비가 내린 탓에 며칠을 복구 작업에 힘썼건만, 잠잠해졌던 비가 며칠 뒤 전례없는 재해가 된 채로 돌아온 것이다. 빗줄기가 지나치게 굵고 거친 탓에 앞을 보거나 밖을 돌아다니는 건 자체가 어려울 정도였다. 해변과 강은 순식간에 범람하기 시작했고 용감한 쿠키는 급히 모든 쿠키를 쿠키성으로 불러모았다. 설탕노움들이 어디 갔는지, 전허 모르겠어. 지금 한 명도 보이지 않고 있는데, 무사하기를 바래야겠지, 용감한 쿠키는 그답지 않은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당장 지금 할 수 있는 건 무엇이 있을까? 이 성에는 모든 쿠키가 먹을 수 있는 식량이라고는 하루치가 끝이야. 성 밖으로는 나갈 수가 없어. 모두 물로 차버렸으니까. 아마도 쿠키 하우스랑 여러 가게들도 전부 침수되어 버렸을거야. 조금 기다리면 자연적으로 물이 빠지긴 하겠지만, 지금 우리는 그걸 기다릴 시간이 없어. 어찌어찌 열기구에 닿더라도 당연히 망가졌을거야. 내가 갈게! 나, 이런 건 자신 있다구. 우선 급한 대로 밀폐된 음식들부터 가져오고, 배를 띄우면 어떻게든 될 테니까! 샤벳상어맛 쿠키는 홀로 밝은 표정과 목소리로 당당하게 선언했다. 괜찮겠어? 도와줄 수 있는 쿠키가 아무도 없는데, 용감한 쿠키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샤벳상어맛 쿠키는 모습을 바꾸어 순식간에 대회의실 밖으로 사라졌다. 효율적이군요, 마냥 천진난만한 쿠키로만 알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에스프레소맛 쿠키가 평가했다.

카테고리
#기타
추가태그
#쿠키런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