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여름가을겨울

열대야 上

사계 by 1564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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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교내가 시끄러웠다. 오늘은 성적 공고 날이었다. 해랑이 책상에 가만히 앉아 딱딱 손톱을 물어 뜯었다. 각자 성적표를 들고 옥신각신 했다. 니가 더 잘봤다느니 자기는 이번 시험 망쳤다느니. 의미 없는 가식적인 비행기가 천장을 배회했다. 그래봤자 다들 속으로는 자기가 더 잘봤을거라고 생각할거면서. 성씨가 해인 탓에 이번에도 역시 끝번호를 배정받은 해랑이 일어나 교탁으로 향했다. 교실이 일순 조용해졌다. 다들 또 이번 내 성적이 궁금한걸테지. 해랑이 입술을 물었다. 평균 98.8 학급석차 1등 이과석차 1등 전교석차 2등. 씨발. 해랑이 읊조렸다. 또 2등이다. 해랑이 성적표를 가방에 넣었다. 염병할, 또 그놈을 이기지 못했다. 해랑이 급히 표정을 갈무리했다. 또 남의 이야기에 미친 앵무새들이 이리저리 말을 옮기고 다닐 것이다. 안줏거리는 사절이다.


 다들 이래저래 관심들이 많다. 어쩔 수 없지 다들 각지역에서 내노라하는 공부벌레들이었는데. 그것들이 모여서 만든 집단에는 친구가 없다. 모두가 경쟁자들이다. 1학년때까지는 다들 분위기 파악한답시고 두루두루 어울리며 제법 청춘놀이를 해댔었는데 2학년 올라오니 그런 것도 없다. 다들 서로를 알만큼 알았다 이거지. 개중 특히 해랑은 친구가 없었다. 전교 2등이니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 하나 주워가려 안달할 법도 한데. 워낙 곁을 내어주지 않다보니 모두가 혀를 내두르며 멀어졌다. 존나 유세야 맨날 1반 걔한테 밀리는 주제에. 일일이 반응해주기도 귀찮았는지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독한년 저러면 뭐가 남나? 남는다. 니들은 평생 남들 뒷통수나 보면서 살아라. 나는 니들이 평생 바라보고 사는 뒷통수가 되는 삶을 살 것이다.



열대야 上


 오르막 위에 있는 학교에 도착하면 등줄기를 타고 흐른 땀이 번져 온 등판이 땀으로 범벅될 정도로 날이 더워졌다. 학생들이 힘들다고 징징대면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공부도 체력이 되어야 할 수 있는 것이라며 일갈했다. 해랑은 그 와중에도 땀 한방울 흘리지 않은채로 묵묵히 책상에 앉아있었다. 와 쟤는 이 와중에도 공부냐? 같은반 남자애가 빈정댔다. 해랑이 크게 반응하지 않을걸 알기에 대놓고 면전에 뱉었다. 해랑이 번뜩 일어나 걸었다. 뭐냐, 한대치게? 남자애가 주춤대며 말했다. 해랑의 시선이 몇초 머물지 않고 금방 떠났다. 이동수업이야 병신아. 해랑이 그 말을 끝으로 반을 떠나자 그제서야 반이 왁자지껄해졌다.


"뭐 이 새끼야? 병신? 다시 와 봐 니. 야! 해랑!"


 반이 시끄러워지자 금새 다른 반이 불난 집 구경이라도 하듯 몰려들었다. 남자애가 과시하듯 해랑 책상을 크게 차고서는 돌아섰다.


"미안한데, 좀 나가줄래? 다음 수업 우리라서. 책상도 바로... 아니 됐다. 그냥 비켜줘."
"뭐? 넌 또 뭐 이...!"


 미형의 남자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도파민에 절어 앞뒤 분간도 못하고 난리치던 남자애는 그를 보고 순식간에 늑대 앞 순한 양이라도 된 듯 입을 닫았다.


"어, 어어 미안. 지금 나갈게."


 남자애는 그를 스쳐지나가자마자 인상을 구기며 씨팔, 쪽팔리게. 읊조리며 지나쳤다. 하하, 조금 어수선하네. 그가 옅게 웃자 모여있던 모두가 뿔뿔히 흩어졌다. 방금 그 여자애 이름이 해랑이야? 그가 제 옆에 선 남자애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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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서오세요."


 해랑이 파란색 조끼를 입은 채 들어오는 손님을 향해 인사했다. 이 시간에도 손님이 오네. 해랑이 곁눈질로 들어오는 손님을 훑었다. 학생인가? 그는 금방 손에 물건을 쥐고 카운터로 향했다. 천원입니다. 해랑이 여상히 말했다. 원플러스원하는 배맛나는 쭈쭈바였다. 그가 한손에 쥔 쭈쭈바를 내밀었다.


"안녕, 너 우리 학교지?"


 해랑이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이 동네엔 없을 줄 알았는데. 구태여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동네를 온 보람이 없었다. 해랑이 상대를 바라보았다.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야 교복 차림도 아니고, 교복 차림이 아니니 명찰도 없고. 게다가 누군가에게 얻어터진 모양인지 볼 한쪽이 부어오른 상태였다. 그가 쭈쭈바를 부어오른 볼에 가져다 대었다.
 
"난 2학년 이지효. 문과라서 본 적 없겠다."


 알바 언제 끝나? 그가 웃는 낯으로 물었다. 이지효?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해랑이 고개를 기울였다. 기억을 되짚어볼 때 하는 습관이다. 아무리 되짚어보아도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 난 너 몰라. 알바는 새벽 세시에 끝나고. 그건 왜."
"어, 지금이 2시 40분이니까 곧 있으면 끝나겠다."


 그니까, 그건 왜,... 그가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 밖으로 나가버렸다. 이상한 새끼... 초면에도 개의치 않고 툭툭 욕설을 내뱉은 해랑이 아르바이트 마감을 하고 다음 타임 사람에게 넘겨주고는 밖으로 나오자 황당함을 숨길 수 없었다.


"너 여기서 뭐하냐?"
"어, 랑아 끝났어?"


 그가 먹지 않고 볼에 대고 있던 터라 다 녹아 물렁해진 쭈쭈바를 쓰레기통에 던지며 다가왔다.


"아니 너 뭐냐고. 안가고 뭐해?"
"어엉, 아니 그냥 너 데려다주려고 그랬지."
"니가? 나를?"
"응, 내가. 너를."


 왜? 해랑이 물었다. 진심으로 궁금해서 물어본 티가 역력했다. 그야, 오늘 처음 본 -물론 학교 안에서 오며가며 봤을테지만 공식적인 첫만남은 오늘이 처음이니까.- 사람이 대뜸 자신을 집에 데려다 준다고 하니 의심부터 생기는 것이 당연하다.


"그냥, 야밤에 위험하잖아. 여자애 혼자서."
"뭐래. 얼마나 봤다고 집에 데려다준다 만다야."
"왜, 같은 학교 친구 집에 데려다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잖아."
"그니까, 우리가 언제봤다고 친구인데."
"그럼 얼마나 봐야 친구 할 수 있는데?"
"아무리 봐도 너랑 나랑 친구 할 일은 없겠다. 간다."


 해랑이 뒤돌아 집으로 향했다. 동시에 해랑은 직감했다. 아, 재수없는 새끼. 얘랑은 상종도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



 해랑이 뻑뻑한 눈을 비볐다. 알바를 너무 돌렸나... 근데 여기서 뺄 알바는 없는데. 해랑이 자신의 한달 월급과 생활비, 월세, 공과금 등등을 비교하며 걸었다. 돈과 시간이 동시에 부족했다. 둘 중 하나는 여유로워야하는거 아니냐고. 해랑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한숨을 내뱉진 못했다. 해랑의 또 다른 오랜 습관이었다. 익숙한 오르막을 걸으며 뜨거운 여름 공기를 이겨내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랑을 반긴다.


"안녕 랑아."


 해랑이 고개를 돌려 음성의 발신처를 찾았다. 그 새끼다. 재수 없는 놈. 랑이 미간을 좁혔다.


"아침부터 미간을 찌푸리고 있네 우리 랑이는."
"어디다대고 우리 랑이야."
"살벌하네. 어제 집엔 잘 들어갔어?"
"알바냐? 여긴 왜 왔어."
"그냥, 랑이 안부 차?"


 지랄말고 반으로 꺼져. 해랑이 차갑게 답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에 굴하지 않고 그는 해랑의 어깨를 가볍게 짚고는 말했다.


"이따 또 봐."


 해랑은 그에 답하지도 않고 무심히 반대편 손으로 제 어깨에 올린 손을 털어내고는 수업을 준비했다. 아침부터 자연재해가 들이닥친 느낌이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지만 영 목구멍으로 밥을 넘길 상태가 아니라 1층으로 내려와 학교 뒷편으로 나왔다. 해랑이 가끔 갑갑하면 나와 숨을 돌리던 곳이다. 인적이 극히 드물어 1년간 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본 적 없는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벤치에 아무렇게나 누워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점심시간은 기니 대충 냄새만 빼고 들어가면 될 것이다. 대충 불을 붙이고 몇번 흡입하니 그마저도 의욕을 잃어 담배를 쥔 채로 이마를 덮었다.


"불량 청소년이네 우리 랑이."


 랑이 허리를 세우며 타들어가는 담배를 던졌다. 또 너냐? 해랑이 또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랑이는 나만보면 인상을 찌푸리네... 나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걍 니가 맘에 안드네."
"그래서 보자마자 장대를 그냥 버린거야? 아깝게..."
"남이사 장대를 버리던 돛대를 버리던."
"난 그냥 친구하고 싶어서 이러는거야."
"가서 선생님한테 찌르던가 앞에서 알랑거리지 말고."


 왜 이래 랑아. 나 그렇게 의리 없는 사람 아니야. 그가 억울하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해랑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더 이상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대충 옷가지를 탁탁 털어 정리하고는 그를 지나쳐 걸었다. 아 오늘 일진 사납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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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뒤로도 이상하게 그 녀석은 제 주위를 알짱거렸다. 급식실에서 혼자 밥을 먹고있음 슬그머니 옆에 앉아서 밥을 같이 먹는다던가, 도서관에서 책을 찾고 있으면 맞은편에서 동시에 책을 빼서 눈이 마주친다거나. 학교 뒷편에 가서 누워있으면 우연히 마주친 적 말을 걸어오는 등 별 기상천외한 일들을 벌였다. 원하는게 뭔지 말을 걸어보려해도 그 말간 얼굴을 마주하면 말이 나오려다가도 말게 된다.


"랑아 수업가?"
"그럼 이 시간에 수업 가지 어딜 가겠냐."
"아, 나도 이과 할 껄. 그럼 랑이랑 수업 같이 들을 수 있었을텐데."
"헛소리 하지 말고 수업이나 들으러 가라."


 대게 이런 식의 영양가 없는 대화의 일색이었다. 잠깐 만나 대화하고는 금방 사라지고는 또 다시 시간만 나면 나타나 정신을 어지럽히고 나서 떠난다.

그러다 돌연 이지효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 놈이 먼저 찾아 오지 않는 이상 마주치기가 더 어려운 상황이긴 했다. 그놈은 문과 1반 나는 이과 8반이었으니 그는 동관 끝 나는 서관 끝을 사용했다. 보이지 않으니 신경쓰일 일이 없어서 좋았다. 밥도 혼자 편히 먹을 수 있었고, 학교 뒷편을 갈 때 뭐에 찔리기라도 한 것 마냥 눈치보며 갈 필요도 없어졌다. 쉬는 시간마다 옆에 와서 조잘거릴 사람도 없고 하여튼 좋은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동관 앞을 서성여 보기도 했지만 이지효의 갈색머리칼 끝자락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내가 뭐하러 이짓거리를 하고 있나 싶다가도 쉬는 시간이 되면 절로 걸음이 동관으로 향했다. 기말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공부를 포기한건가? 아니지, 내 알반가? 생각이 이리저리로 튀었다. 수일을 그렇게 보내고 난 뒤 다시 만난건 다름 아닌 내가 알바하는 편의점에서 였다.


"어서오세, 이지효?"
"랑이 안녕~"
"너 뭐냐?"
"나 안보고 싶었어?"
"학교는 왜 안나오는데."
"우리 그런 것도 공유하는 사이야? 이젠 친구인가?"
"말을 말자 시발..."


 똑같이 말간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지효에 울컥 울화통이 터졌지만 이내 말 문이 막혔다. 그날과 똑같이 원플러스원하는 배맛 쭈쭈바를 사서 제게 하나 내밀고 하나는 자신의 볼에 가져다 대었다.


"가지가지한다."
"랑이 지금 나 걱정해?"
"어. 한다 걱정."


 다 큰놈이 어디서 싸맞고 와가지고 이러는건데. 학교도 안나오고. 랑이 카운터에서 벗어나 연고 하나와 밴드 하나를 결제해 지효를 간이 테이블에 앉혔다.


"지금 이 밴드 밖에 없어. 쪽팔려도 참아."
"괜찮아 나 핑크색 잘어울려."
"덜 맞았나보네 입은 아직 살아있는걸 보면."


 랑이 연고를 짜서 길게 타박상 입은 볼과 입술에 차례차례 발랐다.


"작작 쳐다봐."
"아니 랑이가 바로 앞에 있는데 그럼 어딜봐."
"눈을 감던가."
"자 눈 감았어."
"얼씨구? 주디는 왜 내미냐?"
"뽀뽀하자고 눈 감으란거 아니었어?"


 이 새끼가 미쳤나. 해랑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보자보자하니까 막나가네. 해랑이 상처난 곳에 밴드를 붙이며 꾸욱 눌렀다. 그에 지효가 아! 단말마를 내뱉었지만 해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기다려. 10분만 있으면 끝나니까. 랑이 다시 편의점 카운터로 향하며 말했다. 마감을 치고 나선 봉투에 연고, 밴드, 딸기 우유를 넣어 지효에게 내밀었다.


"가 이제."
"이대로 나 보낼거야?"
"어, 가라. 학교나 좀 똑바로 나오고."
"노력해볼게."


 그렇게 헤어진 이지효와는 다음날 그 다음날에도 만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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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는 이름만 알고있었다. 전교 2등 해랑. 누구누구를 죽어도 못뛰어넘는 범재. 그럼 나는 천재인가? 소문이 들려오면 얼핏 생각했다. 서울특별시에 위치한 강진자율형사립고등학교 줄여서 일명 강진 자사고. 전국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애들이 죄다 모여 입시를 치룬다. 이곳에 입성하면 성적 최하위권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인서울이 가능하다나. 그만큼 교내 서열도 빡세고 격차도 심하다. 모그룹 아들내미 모기업 딸래미들이 모이다 보니 웬만한 빽과 머리가 아니고서야는 서류도 내밀기 힘들었다. 그 중 해랑은 특이한 경우로 빽은 없고 머리만 있는 입학생이었다. 해마다 한둘만 받는다는 지역 인재 선발에 된 케이스다. 이 바닥에 그런 사람 소문이 안날리도 만무하고 들어오자마자 전교 2등을 떡하니 해버리니 남들 입방아에 오르는건 예삿일이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부모들은 그 애에게 자기 네 집 자식과 잘 지내보라면서 소개시켜주거나 우연을 가장해 만나게 했다. 개중 가끔 적잖은 액수를 쥐어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해랑은 한사코 거절하고 지조있는 한마리의 학처럼 혼자 다녔다. 꼴에 자존심은 있나보더라고.
나의 관심은 그 정도였다. 그러다 그 애를 처음 만나게 된 건 5월, 중간고사가 끝이나고 성적이 공고된 날이었다. 내가 본 건 한 남자애가 시비를 걸어대자 반 밖으로 나간게 다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흥미가 일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 째삣하게 올라간 눈이 제 편 하나 없는 이곳을 경계하듯 바라보니 그 애 친구가 되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 날카로운 눈이 얼마나 누그러질지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시도때도 없이 가서 얼굴을 비추고 말을 건네고. 그 애의 일상이 되었다. 그럼 적어도 보이던 사람이 안보이면 생각이라도 나겠지 싶어서. 점점 욕심이 났다. 처음에는 그냥 그 눈이 얼마나 누그러질지를 기대하다가 점점 그 눈이 오롯이 자신만을 향했으면 했다. 퍽 웃기는 독점욕이었다. 그 애 일상이 내가 되었으면 했는데 내 일상이 해랑이 되어버렸다. 아침에 머리 손질 하다가도 그 애 생각이 났고 등교해서 수업을 들으면 그 애 생각이 났고 하교 후 차를 타서 집으로 가 누울때까지 그 애 생각이 났다. 심지어 아비라는 놈한테 처맞을 때까지 생각이 났다. 이 얼굴을 하고 너에게 가면 너는 과연 나를 걱정할까. 분했다. 너는 나만큼 내 생각을 할까. 시도때도 없이 네 생각만 하는 나를 알아줄까.

 전과를 결심한건 그 이유에서였다. 너랑 모든 시간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학교에서 만큼은 나를 봐줬으면 해서. 그게 화근이었다. 말도 없이 선생한테 전과한다고 질렀더니 바로 부모한테 찔렀다. 어쩌자고 전과냐면서 기말고사 전까지 외금을 당했다. 학교도 못나갔다. 겨우 한번 개겼다가 열심히 처맞고 겨우 탈출해서 나온 곳이 해랑네 편의점이었다. 웃겼다. 그 애의 유일한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 난리를 피웠는데 나도 결국 내 유일한 친구는 해랑이 다였던 모양이지. 보기 좋게 얻어터진 몰골을 하고서는 해랑을 만나니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했다. 내 기분 좋을 말은 죽어도 안해주지.


"어. 한다 걱정."


 그 뒤로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지금 나한테 고백한건가?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의 태반은 아무말이었다. 썅...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해랑에게 감긴 모양이다. 아주 제대로.



&


"랑아 네가 요즘 지효랑 가까이 지낸다던데. 이거 좀 지효에게 가져다줄래?"
"네? 저 지효네 집 주소 모르는데요..."
"그럼 선생님이 알려줄게. 여기 강진구..."


 소문이 대체 어떤식으로 난건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내가 이지효랑 친하다고? 대체 어느 부분에서 그런 착각을 불러 일으켰는지 웃기지도 않는다. 그냥 밥 가끔 같이 먹고 쉬는 시간에 대화 잠깐하는거면 이 학교 학생 전부가 서로 친구일 것이다. 가당치도 않지 내가 이지효 친구라니. 그러자 며칠 전에 부어오른 볼을 한 채로 편의점에서 만난 이지효가 생각이 났다. 오라는 학교는 안오고. 사람 오라가라 심부름이나 시키고... 괜히 사람 신경 쓰이게나 하고. 그러자 불현듯 이지효가 편의점 앞에서 주욱 내민 입술이 생각났다.


"미친거지. 미친거야."


 머리를 흔들어 삿된 생각을 날렸다. 얼른 가져다 주고 알바나 가야지. 해랑이 가방을 챙겨 지효네로 향했다. 진득한 더위가 몸을 감싼다. 버스도 다니지 않는 동네여서 오롯이 두다리로만 이동해야했다. 어지간히 부자 동네인가봐. 자차없는 서민들은 살지도 못하겠네. 하복 와이셔츠를 팔락이며 걸었다. 여긴가? 해랑이 스마트폰으로 연 지도를 봤다. 맞겠지 싶어 벨을 누르니 인터폰이 울린다.


"누구세요?"
"아 저는 지효 학교 친구 해랑이라고 합니다. 선생님께서 전해달라고 하신게 있어서요."
"들어오세요."


 덜컹 아주 큰 대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을 밀자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문이 열렸다. 대문에서 집 현관까지의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현관에서 대문까지 걷기만 해도 산책 될 정도의 넓이였다. 현관에 다 달았을 즈음에 현관을 열고 한 여자가 나왔다.


"들어오세요.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도련님? 이지효 말인가? 정장을 빼입은 이지효를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여자분을 따라 들어가니 이지효가 현관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랑아! 오는 길 덥진 않았어? 많이 힘들었지 여긴 대중교통도 안다니는데."


 랑이 들어오자 지효가 랑에게 손부채질을 하며 랑을 인도했다. 랑이 그 손길을 가만 받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들어 건넸다.


"이거. 선생님이 가져다 드리래."
"응응, 이건 저기다 두고 뭐라도 좀 마실래?"


 하등 관심 없어 보이는 모습에 해랑이 허탈했다.


"아니 나 바로 알바 가봐야 해서. 난 전달했다?"
"조금만 더 있다가면 안돼?"
"어~ 안돼. 나 지금도 간당간당해."
"기사님께 태워다 달라고 할게 조금만 더 있다가 가."


 답지 않게 보채는 모습에 해랑이 고개를 기울였다. 애가 왜 이러지. 차 타고 가면 얼추 시간은 맞으려나... 계산을 끝낸 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럼 20분만, 하며 지효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집이 엄청나게 커다랬다. 부엌은 무슨 식당만했고 거실은 아파트 한 채만했다. 이지효 방에 가려면 계단을 올라가야했다. 지나치게 비효율적인 집이었다. 방에 들어가자 이지효가 이리저리 안절부절하며 방을 돌아다녔다.


"어어 편하게 앉아 랑아. 침대에 앉아도 돼. 뭐 마실건 필요없어?"
"정신 없으니까 그냥 앉아있어."


 그 말에 이지효의 모든 행동이 일시정지 되었다. 이내 살금살금 다가와 제 옆에 가만 앉았다. 그 와중에도 이리저리 눈치보며 손을 들었다가 놓았다가 머리를 쓸어넘겼다가 정리했다가를 반복했다. 해랑이 지효의 왼손을 낚아채 잡았다. 정신없다고 가만히 있어 좀. 해랑이 말하며 지효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부딪혔다. 둘은 길게 시선을 마주했다.

 해랑이 지효를 가만히 바라보다 짧게 입맞추었다. 예상치 못한 행동이었다. 지효도, 해랑도. 해랑이 번뜩 입술을 가렸다.


"누가 보면 내가 한 줄 알겠어 랑아."
"닥쳐봐. 나도 왜 했는지 모르겠으니까."


 그 말에 지효가 남은 손으로 해랑의 뺨을 감쌌다. 지효가 고개를 꺾으며 다가왔다. 하기 싫음 피해. 해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훅 다가와 입 맞추었다. 촉,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시 다가와 입맞추었다. 혀를 내어 가볍게 입술을 핥자 살짝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혀가 들어찼다. 해랑이 뒤로 넘어가자 지효가 금새 따라붙어 입을 맞추었다. 해랑이 이지효 사이에 갇힌 모양새를 띄었다. 잡힌 손이 어느새 풀어져 랑의 허리께를 쓸었다.


"도련님, 친구분과 과일 좀 드셔요."


 노크 소리와 함께 가사 도우미 말이 들리자 파드득 떨어져 자리에 앉았다.


"괜찮아요 이모."


 지효가 축객령을 내렸다. 붉어진 목덜미를 한껏 만지작 대더니 크흠, 헛기침을 하고선 입을 떼었다.


"나 이만 갈게."


 랑이 분주히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지효가 잡으려 손을 뻗자 몸을 돌려 방을 벗어났다.


"배웅은 괜찮아. 차는 잠시 빌려 탈게."


 그 말을 끝으로 해랑은 빠르게 집을 벗어났다. 지효는 떠나가는 해랑을 잡을 새도 없이 황망히 뒷모습을 눈으로 쫒았다. 다분히 충동적이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


 기말고사가 일주일이 남은 시점 드디어 이지효가 학교에 얼굴을 드러냈다. 바로 이과 8반에.


 "오늘부터 우리 반으로 전과해서 오게된 문과 1반 이지효. 다들 알지? 지효는 저기에 가서 앉고 오늘 수업도 잘 들어라 이상 조회 끝."


 지효가 교탁 앞에서 등장함과 동시에 정신을 놓고 있던 해랑이 끝내 제 옆에 지효가 앉을때까지 넋을 놓고 있다 이동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서야 정신을 되찾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나한테 설명을 좀 해봐."
"너랑 수업 같이 듣고 싶어서."
"그게 지금 말이 되는 변명이라고 생각하니."
"나 진심이야 랑아."


 이런 개미친 또라이 새끼가. 해랑이 이마를 짚었다. 없던 편두통이 생기는 기분이었다. 기말고사를 일주일 앞두고 문과에서 이과로 전과를 하다니. 그냥 성적을 날리겠다는 뜻 아닌가? 이과에서 문과도 아니고 하, 해랑이 한참 실소를 내뱉었다. 니가 진짜 미쳤구나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믿을 수 없는 사실에 내내 부정하다 뺨을 내리쳤다. 지금 이럴때가 아니지 너야말로 정신차려 기말이 얼마 남았다고. 이번엔 진짜 그 놈 이겨야 해. 해랑이 전교 1등을 향한 다짐을 다잡았다. 헛소리만 지껄이는 이지효를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이번 기말고사에서는 그 놈을 이겨야만 한다.

 해랑은 수업이 끝나자 화장실에 잠시 들어섰다. 칸 안에 들어가자마자 두런두런 여자 두엇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전교 1등은 어떻게 되는거지?"
"몰라 이과로 전과했으니까 이과 1등은 걔가하고 문과 1등을 김유빈이 하겠지."
"이지효 걔는 왜 잘하다가 갑자기 전과했대? 그것도 시험 일주일 앞두고."
"천재의 생각을 우리가 알겠냐. 난 모르겠다 걔가 왜 그러는지."


 이지효의 이름이 들리자 저절로 귀가 그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전교 1등 미친 이지효가 시험을 1주일 앞두고 전과를 했다는 소식이다. 후자는 알고있던 사실이었으나 전자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왜 이지효가 재수없어 보였는지 깨달았다. 그 새끼는 시발 그냥 도움이 안되는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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