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도 두 사람

1시35분 by 하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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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 해가 저물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간.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시간, 그러나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후회의 씁쓸함이 스미는 시간. '

"둘이 있으면서도 다른 생각을 하다니 제법 배짱이 좋다는 것."

"아-."

레이는 나긋한 말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순간 커다란 손에 얼굴이 잡히고 밤거리처럼 차가운 뺨에 손바닥의 체온이 스몄다. 오늘은 기다리던 데이트날. 연말이면 언제나 둘 다 바쁘고 언제 비상 상황이 생길지 모르기에 기대로 부풀어오른 마음을 꾹꾹 누르며 오늘만을 기다렸다. 바쁜 와중에도 무리해서 만든 시간이었다. 둘이 함께 맛있는 걸 먹고 손을 잡고 길거리를 걷고 마지막에는 핫토리씨의 집에서 같이 영화를 보기로 한, 한참 전부터 연말에 보기 좋은 영화목록을 뒤지며 영화까지 골라놓은 날.

레이는 얼굴이 잡힌 채 핫토리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런 오늘, 서로만 생각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에 레이는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꾸욱- 눌린 채로 당황한 듯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려보지만 눈 앞의 연인은 상당히 불쾌한 표정. 그럼에도 뺨을 누르는 손바닥은 따듯하기만 하고 장난감을 주무르듯이 마음대로 얼굴을 주무르고 있었다.

"졔호하히다.......나즈세혀....."

"역시 가끔은 곤란하네-, 일에 너무 열심인 강아지는."

눌린 얼굴을 열심히 움직여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그러자 약간은 느슨해진 표정으로 뺨을 놓은 핫토리씨는 아쉽다는 듯 엄지로 뺨을 살짝 쓰다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손을 잡았다. 일 생각 중이었다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연말에도 순조롭게 생각이 읽히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오늘은 그게 억울하지 않아서 잡은 손을 움직여 깍지를 끼우곤 다시 길을 걸었다. 눈을 깊게 감았다 뜨고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일렁일렁, 찬바람이 들이닥치는 듯한 마음도 이렇게 손을 잡고 걸으면 가라앉을 것 같았고 모처럼 둘이서 있을때에는 즐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씩씩하게 걷자, 씩씩하게. 그렇게 마음 먹고 다시 걸음을 옮기자마자 머리 위로 작은 한숨이 내려앉았다.

"그냥 말하지 그래? 심란한 표정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야기를 해도 같이 있는 건 변하지 않으니까."

연상의 연인이 덩달아 가라앉은 듯한 눈으로 말을 건다. 건조한 것 같으면서도 따스함이 서린 목소리로.

역시 읽히고 있다. 앞의 것도, 그 뒤의 것도. 역시구나. 레이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최대한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한 일도 아니고 언제나 있는 일이라며.

마토리에서 일한지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레이는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제대로 해내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드는 계기는 뒤에서 들려오는 말들도 서류에 적힌 동료들의 화려한 이력도 아니었다. 일을 하면서 마약사건으로 상처받은 피해자를 볼 때 마다, 가해자가 사실은 또 다른 피해자임을 깨달을 때 마다, 구할 수 있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드는 사람들을 마주할 때 마다. 비오는 날 신발의 앞 코가 서서히 젖어 들듯이 머리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나는 내가 이 자리에서 해야 할 것들을 잘 하고 있는 걸까? 내 부족함이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잡는 게 아닐까? 차라리 이 자리에 있는 게 내가 아닌 더 능력이 뛰어난 누군가 였다면... 불필요한 생각이란 건 알고 있었다. 이런 생각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 지도 알고 있었고 동료들의 반응마저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 몸과 마음이 힘들 때면 스멀스멀 그런 생각들이 떠오르곤 했고 연말의 차가운 공기와 들뜬 분위기가 심란한 마음에 불을 붙여 결국 지난 날의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래서 답이 없는 질문을 계속 생각하고 있었던 거에요. 죄송해요... 오랜만에 겨우 하는 데이트인데... 정말 힘들게 낸 시간인데도 이런 생각만 하고 있고.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눈동자는 그 마음을 대변하듯 일렁였다. 핫토리는 그런 레이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인지 안타까움인지 모를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이런 점도 포함해서 이즈미 레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지만 때때로 마음이 술렁였다. 다른 사람에게 다정한 만큼 스스로에게도 조금 더 관대해도 좋으련만. 자기가 구한 사람보다 구하지 못한 사람을 생각한다. 일단락된 상황 속에서도 더 나은 방법이 있었는지 고민한다. 절대 현재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즈미 레이는 고여있는 법을 모르는 끊임없이 흐르는 물결이었다. 고민하고 나아가려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게 과하면 스스로에게 독이 된다. 후회와 미련을 끌어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 레이만은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고 내심 바래왔다. 어떻게 보면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얼마 전에 자기 입으로 했던 말 기억나? 사건 정리 후 옥상에서. "

"네? 아, 정확히는 아니지만... 그 사람이 했던 말에 대해서 였나요..."

레이는 핫토리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열심히 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자기가 했던 말보다 선명한 건 그 날 취조실에서 들었던 한마디. 입입건된 용의자는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있는 청소년들에게 접근하여 범죄를 부추기고 마약을 공급한 사람이었다. 인터넷 채팅으로 접근해 같은 마음인 척 연기를 했다. 우리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문제라며, 세상에 너희가 우리를 보여줘야 한다고 증오심을 부추기고, 그래도 망설이는 사람들에겐 용기가 나는 약이라며 마약을 권했다. 검거된 그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히죽거리며 그런 말을 했다. 인간은 누구나 악하고 자기는 그런 본성을 꺼낼 수 있게 약간 도움을 준 것 뿐이라고 약간의 도움을 준 것 뿐, 선택한 건 그 녀석들이라며 끝까지 즐거워했다.

빈정거리는 말에서 유독 마음에 박힌 것은 인간은 원래 악하다는 부분이었다. 인간은 정말 악하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도 쉽게 다른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마주친 핫토리씨와 옥상에 올라갔다. 자판기에서 달달한 커피 두 캔을 들고서.


평소엔 머리가 맑이질 만큼 달콤하던 커피를 한입 가득 쏟아부어도 입이 썼다. 분명 씁쓸한 것은 입이 아니고 마음일테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내가 캔을 비우는 모습을 보던 핫토리씨는 내 캔이 텅 빈 것을 보고 나서야 자기 몫의 캔을 땄다. 분명 같은 크기의 커피일 텐데 핫토리씨의 손에 들린 커피는 내 캔보다 훨씬 작아보였다. 그 캔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도 혼란도 핫토리씨에게 흘러들어가면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작고 문제없는 것으로 보였다.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핫토리씨에겐 작을 것이다.

"아직도 생각하고 있는 거야-. 취조실의 일."

멍하니 이어가던 생각은 그 말 한마디에 멈췄다. 속일 수 없구나-. 결국 사실대로 말하게 된다. 이 사람에게.

"...핫토리씨는 인간이 악하다고 생각하시나요."

"호-오. 그 부분? 제법 심오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하하... 심오하다고 할까요... 일에 최선을 다하려면 언젠가 마주봐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서..."

"마토리는 어떻게 생각해?"

네?하고 되물으려던 말이 핫토리씨의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다시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순간, 지금 이 질문에 대답하고 나면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홀린 듯한 감각,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만나온 사람들 중에는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으니까. 같은 상황에서도 누군가는 남을 해치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기를 희생해가면서 다른 사람을 구해요. 그래서 계속 고민해봐도 인간이 원래 어떤 본성을 지니고 있는 지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었어요."

"...."

"그런데 계속 고민해보면서 느낀 한 가지는... 인간의 본성이 어떻든 제가 본 많은 사람들은... 선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는 거에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잠시 길을 잃었을 때도, 스스로가 위험에 처했을 때에도. 악해지려고 하는 사람들보다는 선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어요..."

머리에서 떠다니던 생각들이 입을 통해 나올 때마다 머리가 맑게 개는 기분이 들었다. 분명 내가 느끼고 생각한, 내가 알고 있는 대답.

"그래서... 결국 인간의 본성이 어떤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사람은 선해지려고 노력 한다는 게 중요한 거고, 사람들이 조금 더 쉽게 선해지기 위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이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

.

.

.

"-, 라고 말했었지 레이."

분명 그랬던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했었지... 기억은 떠올랐지만 여전히 그때의 그 말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 채로, 레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만.... 갑자기 왜....?"

"본인한테도 해당 되는 거 아니야? 사람은 선해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게 중요한 거라면 지금보다 더 후회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게 중요하다는 것."

"아-."

"노력하는 게 중요하다고 스스로 말했으면 본인에게도 그렇게 말해도 될 것을"

"핫토리씨..."

" 그도 그럴게 언제나 노력하고 있잖아. 매 순간. 심지어 데이트 중에도. "

"그건..!! 다른 생각 한 거 아직도 신경 쓰고 있는 거죠!?"

하하-. 진지하게 흔들리는 표정이 귀여워서 놀리자마자 퍼뜩 표정을 바꾸고 당황한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과 높아진 목소리, 만화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듯한 움직임. 정말 매일 봐도 질리지 않는, 앞으로도 질리지 않을 반응이다.

이즈미 레이, 내 어린 연인. 진지하면서도 순진하고 때 묻지 않은 듯 하면서도 끈질기게 세상을 마주 본다. 작은 손으로 끈질기게 지킬 것들을 놓치지 않는다. 그렇기에 눈을 뗄 수가 없다.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럼에도 포기하는 모습을 보고싶지 않다는 모순적인 마음으로.

"....스스로에게 말하는 게 쑥스럽다면 대신 내가 포상을 주도록 할까-."

"아...!!"

목적 없이 걷다 멈춘 건널목. 빨간색 보행신호와 초록색 주행신호 앞에서 레이를 끌어당겨 품에 넣는다. 당황하여 바르작거리는 레이를 조금 더 힘주어 껴안자 이내 살며시 허리에 손을 두른다. 코트 안에서 오가는 체온과 눈 앞에서 반짝이는 붉은 색과 초록색. 네가 계속 노력하는 동안 너는 얼마나 많은 빨간 불과 초록 불을 겪게 될까. 세상에 미련 같은 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레이와 있으면, 레이의 체온을 느끼면 다치고 쓰러지면서도 네가 일어나 향할 종착역까지 함께 걸으며 지켜보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정말 미련하게도 그러고 싶어진다.

.

.

.

"핫토리씨-. 혹시... 나츠키나 다른 사람들을 마주치면....!'

"코트 안에 숨은 게 레이라는 건 비밀로 해줄게."

"비밀이 될 리가 없잖아요...!'

매년 반복되는 봄에서 겨울까지 모든 일상을 너와 함께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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