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찰나
분명 현실이 아니었으나, 꿈 또는 허상이라 할 수도 없었다. 바람이 스치되 새가 울지 않고 햇살이 비추되 향기가 없었다. 그러나 생멸이 본디 하나이며, 이승조차 실존하지 아니한다는 일설을 떠올리면 이상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그저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면 그만이었다. 백날 삼청동과 종로만 오가던 터에 진고개로는 걸음 할 일이 없었다. 토질이 질고 경사가
말릴 틈도 없이 걸어간 이의 발치에서 피와 독이 뒤섞였다. 그의 품에 안긴 여자는 살인을 다짐하는 말을 주문처럼 내뱉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짓이긴 여린 피부는 심장이 살아있는 만큼 피를 흘렸다. 그의 몸을 덮은 하얀 천이 검붉게 젖어 들어갔다. 검-붉게 젖어 들어갔다. 바로 직전에 저택 대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빗길에 우산 하나 없이 맨몸으로 숲길을
유독 달만이 밝은 밤이었다. 보름도 아니거니와 한밤중은 더더욱 아닌, 그저 모호한 때였다. 별빛도 등불도 늦겨울 바람 앞에 파리하게 떨고 있던 차라, 수면에는 오직 둥그런 빛무리가 삼베 얽힌 모양으로 차분히 일렁이고 있었다. 그 광경은 머잖아 다가올 그믐과 무관해 보였다. 임금이 아관俄館으로 거처를 옮긴 지 달포가 지났다. 내 나라를 두고 어디를 가냐던
임금은 댓돌 위에 걸터앉아 기가 찬 광경을 응망하였다. 직전까지 소리 지르며 몸부림치던 내관 유재현이 차가운 돌바닥에 축 늘어진 채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뿐인가.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김이 뒤섞였다. 궁인들은 입과 코를 틀어막은 채 사방으로 달음박질쳤다. 고인 웅덩이에서 피어오르는 비린내가 지독하다. 그보다 더 지독한 것은 한 식경 째 미동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없겠지. 묵묵히 설원을 걷던 괴물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더니 핏덩이가 끈적하게 엉겨 고약한 냄새가 나는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나아가기를 멈추자 바람이 선명하다. 코트 깃을 세워 뺨을 가렸다. “…….” 내 얘기 듣고 있어? “어차피 나는 며칠 뒤에 죽을 거야.” 질문에 알맞은 대답은 아니었으나, 그들은 서로 몰이해의 영역으로
온몸이 내리쬐는 일광日光에 절절이 빛바랬다. 썩지 못한 피부가 늦여름 열기 아래에서 펄펄 끓는다. 의식에 오감이 빌붙었다. 뒤범벅된 통증이 눈꺼풀에 추를 얹어 인내의 무게를 어림잡았다. 몸 누인 돗자리에 말라붙은 피가 뒤척임마다 쩍쩍 울부짖으며 갈라졌다. 제깟 것도 몸에서 나온 거라고 여태 생인 줄 아나 보다. 근원에서 유리되어 떠도는 흔적이 꼭 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