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뮤지컬

폭우

뮤지컬 더 데빌 × 아가사

골방 by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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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릴 틈도 없이 걸어간 이의 발치에서 피와 독이 뒤섞였다. 의 품에 안긴 여자는 살인을 다짐하는 말을 주문처럼 내뱉었다. 깨진 유리 조각이 짓이긴 여린 피부는 심장이 살아있는 만큼 피를 흘렸다. 의 몸을 덮은 하얀 천이 검붉게 젖어 들어갔다. 검-붉게 젖어 들어갔다.

 

바로 직전에 저택 대문을 열고 들어온 여자는 빗길에 우산 하나 없이 맨몸으로 숲길을 내달린 모습이었다. 검은 벨벳으로 지은 치마 밑단은 진흙에 뒤덮여 회색빛을 띠었고 세게 올려묶어 기름으로 고정한 머리는 절반쯤 풀려 겨울비에 젖은 말꼬리 같았다. 고동색 떡갈나무 문을 세차게 닫고 돌아선 그는 끝까지 잠근 단추 하나 풀지도 못하고 주먹으로 가슴을 내려쳤다.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릴 때까지 깨물며 너울대는 울음을 삼켰다. 차라리 숨을 틀어막는 것이 낫다. 제 손아귀로 목을 조르던 여자는 주머니에서 약병을 하나 꺼내어 병마개를 열었다. 이어질 차례는 반드시 ‘굿바이 키스’일 것이고 그래야 했으나 이제껏 망설임 없던 손놀림과 달리 입맞춤은 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숨이 차갑게 식었다. 고개를 퍼뜩 들어 올린 여자는 회색의 눈동자로 천장을 쏘아보다가 손에 쥔 약병을 뒤집어 액체를 전부 바닥에 쏟아버렸다. 이윽고 유리 깨지는 소리가 천둥과 어우러져 귀를 찢었다. 그는 대리석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 파편을 멍멍하게 응시하였다.

살인사건 현장을 목격한 사람처럼 손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몸으로 꾸역꾸역 비명을 짓눌렀다. 펄떡거리는 감정에 어깨를 저절로 들썩였다. 그가 바닥에 널브러진 커다란 파편을 움켜쥔 순간,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걸음이 다가와 깨진 조각 위를 막힘없이 걸어갔다. 여자는 온 힘을 다해 제 목을 찌르려 했지만, 서슬은 얇은 피부 하나를 꿰뚫지 못했다. 죽여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야……. 중얼거림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는 자신을 끌어안은 의 등을 피투성이로 끌어안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로이…….”

왕의 이름을 가진 살의라. 그런 이름을 붙인 이유를 모를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에게 왕은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힘을 행사하는 경외의 대상이다. 얼핏 존재함은 나의 일이다.

가 머리칼을 쓸어내리자, 가쁜 숨이 가라앉고 가 무릎을 꿇자, 육신에 안식이 찾아왔다. 아가사는 안온한 저택 안, 침대 위에서 고요히 잠들었다.

 

“괜찮으십니까?”

발밑의 흔적에 머무르던 시선이 차분한 금빛 눈동자로 향했다. 고통은 몰라도 상처가 오래가는 일은 없었는데, 아물지 않은 틈에서 여태 붉은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푸른 독과 섞인 피는 진한 보랏빛으로 반짝거렸다. 는 입꼬리를 올려 슬며시 웃었다.

“괜찮다.”

이번에도 제가 졌군요. 문이 느리게 여닫히자, 창밖의 비가 차츰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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