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픽션, 완결.
미완성
그림자 없는 사내의 이야기는 끝내 종장을 맺었다.
처음 시작할 때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흥행했다. 예전과는 다른 눈빛을 지닌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작가는 스포트라이트의 뒤편으로 물러났다. 소설이 끝에 다다르면 작가의 이야기 또한 끝난다. 시작된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작업실은 여느 때와 같다. 소설은 끝나도 작가와 편집자의 시간은 남아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일거리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와중, 그레이의 책상 위에 딱딱한 표지를 가진 책 한 권이 툭 놓아졌다. 의아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면 하나뿐인 용의자는 모르는 척 타자기만 열심히 두드리는 중이다. 어쩐지 익숙한 상황인데. 그레이는 혀를 차며 헛웃음을 흘리곤 책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붉은 빛의 표지를 가진 책은, 그리 두껍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충분히 알 수 있는 묵직함을 지니고 있었다.
“이건 누구의 책이지?”
내 책은 이미 완결까지 엮어낸 지 오래일 텐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 중얼거리며 그레이가 구멍이라도 낼 것 같이 기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와이트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기 어려운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다가 무어라 웅얼거렸다. 너무 작은 목소리인 탓에 그레이는 그에게 한 번 더 질문해야 했다.
“누구 책이라고?”
“제……거요.”
쑥스러운 듯,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큰 목소리로 흘러나온 와이트의 대답에 그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뜰 수밖에 없었다. 아니, 네가 글을 썼다고? 신기한 듯 물어보았지만 그 이상 말할 자신은 없었는지 와이트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작가는 흥미로움과 동시에 의아함에 고개를 기울이곤 책을 펼쳐 종이를 팔랑거렸다. 수려한 문장이 흰 종이 위에 깔끔한 모양으로 찍혀 있었다.
“―현실의 삶이란 때때로 한 편의 소설보다 소설 같으며, 한 사람은 하나의 이야기로 남는다.”
문장의 서두를 여는 목소리가 담담하게 들려왔다. 그레이는 멍하니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보았다. 와이트 히스만, 첫 독자이자 다른 누구도 대신 할 수 없는 유일한 편집자. 그의 눈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희망으로 가득 차 반짝거리고 있었다.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게도.
“그리고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하나의 이야기로 남길 원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간직하게 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 픽션, 완결. 조금은 장난스럽게 끝을 맺는 그를 바라보다가, 그레이는 책의 제목을 뒤늦게 확인했다. 붉은색 벨벳 표지 위로 휘날리듯 새겨진 고풍스러운 모양의 글씨는 ‘The Fiction’이라는 단어를 뚜렷하게 내보이고 있었다. 완결이라는 단어를 곱씹다가 본능적으로 책의 뒷부분을 펼쳐 읽어보면 방금 전 와이트가 발표하듯 내뱉었던 그 문장이 작가의 후기 맨 마지막 줄에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자네, 꽤 글을 잘 쓰는데?”
“아하하, 작가님 곁에 몇 년이나 있었는데. 이 정도는 늘어야 하지 않겠어요.”
괜히 멋쩍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와이트의 모습이 기특해, 그레이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책을 덮고서 그 표지를 손바닥으로 한 번 쓸어보면 아직 때 묻지 않은 부드러운 감촉이 살갗을 타고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도 작가님과 비교하면 여전히 무리예요.”
“어허, 괜한 겸손이야.”
“작가님을 생각하면서 쓴 책입니다.”
“그레이 작가님께서는 제게 빛을 두 번이나 보여주셨으니까…….”
“그런 작가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주고 싶었어요.”
“비록 작가님만큼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문장을 쓰기에는 아직 무리지만, 그렇지만……. 알아줄까요? 사람들이, 제 진심을.”
“당연하지.” 작가가 말했다.
“이미 여기 있잖아, 네 진심을 아는 내가.”
“……작가님.”
“저는 작가님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까요.” 고저가 없는 물음이었다.
“진작 말했어야 했어요, 모든 걸. 작가님을 존경하게 된 계기도, 제가 저지른 잘못도, 작가님께 내뱉었던 말들……. 다, 진심이 아니었다고.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와이트.”
“용서받을 자격조차 없다는 걸 알지만, 그렇지만…….”
“와이트 히스만.”
“넌 내게 잘못한 게 없는데, 뭘 굳이 용서까지.”
그는 군더더기 없는 웃음을 지으며 책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선물 고마워, 와이트. 잘 읽을게.”
19년도에 더 픽션을 처음으로 본 뒤 처박아두었던 글으로 펜슬에 처음 발행해봅니다.
완전 미완성이고 살을 덧붙이지는 못했지만 이전에 올렸던 것보다 좀 더 다듬고 수정을 해보았습니다.
여기 글쓰기 좋다…….
글에 관해서는 이해되는 대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갈등을 극복한 if로, 무사히 그없남의 마지막 장을 연재한 뒤의 이야기. 혹은 그저, 책을 낸 뒤에 작가님을 만나는 와이트의 환상.
어느 쪽이든 둘은 이제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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