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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세계

조각글

머루나무 by 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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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결국 죽은 건가.

멍한 정신 속에서 와이트 히스만이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그러했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총의 방아쇠를 제대로 당겼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데,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고 나니 잿빛 안개로 둘러싸인 이상한 공간에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상황 자체가 기묘하다. 애초에 사후 세계를 믿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서 이런 공허한 모습을 상상해본 적은 없었다. 머리를 쏜 탓에 괜히 이상한 곳에 떨어진 건가? 그렇다면…… 자신이 그리워하던 사람 또한 여기에 있어야 할 터인데.

그런 의문을 품자마자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와이트?

아아, 설마. 정말로 뻔한 전개. 놀랍지도 않다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면, 그래, 멀쩡한 모습의 작가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들어보이고 있었다. 이상하지. 그가 어떻게 생겼는지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만큼 기억이 희미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 친숙한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보이니 말이다. 꿈에서조차 저 정도로 명확히 보인 적이 없었는데 역시 환상도 환상 나름인가보다. 아니면 정말로 죽은 작가의 영혼이라도 된다든지.

어느 쪽이 진실이든 그저 넋 놓고 서 있을 때는 아니었다. 와이트는 망설임 없이 그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참을성 없는, 오히려 조바심이 나는 듯한 모습에 그레이는 본능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의 코앞에서 우뚝 걸음을 멈춘 와이트는 예상 외로 아무 말 없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에 도리어 의아해진 그레이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와이트와 눈을 마주치면 그때와는 다른, 차갑지만은 않은 눈동자가 보인다. 하지만 잔뜩 굳어 있는 표정, 그리고…… 보이지 않는 상처.

“……여긴 왜 왔어.”

의도치 않게 핀잔을 주는 듯 힘이 없는 목소리에 와이트의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당연히 당신을 따라 가려고 그랬겠죠. 그리 쏘아붙이려던 와이트는 겨우 모난 말을 삼켜내곤 제 입술만 잠시 물었다. 하고픈 말은 많았지만, 할 수 있는 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왜.”

“응?”

“왜, 저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셨습니까.”

당신은 모르는 게 너무 많았어요. 당신의 그 따뜻한 배려가 내게 더 잔인했다는 것도 몰랐죠? 뒷말은 혼잣말처럼 중얼이며 그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꿈에서처럼 닿으면 사라질까 두려운 탓에 미묘하게 떨리던 손은 작가의 머리에 닿고 나서야 진정된 듯 얌전해졌다. 아, 멀쩡한 모습이다. 피가 묻지도 않았고, 총알이 박히지도 않은…… 언제나와 같은 온기를 가진 머리카락마저. 순간 눈물이 울컥 새어나올 것만 같아 와이트는 뒤로 황급히 한 발자국 물러섰다.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이 우스웠는지 작가의 낮은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울리듯이 들려왔다.

“널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감수할 수 있었으니까…….”

“하하.”

자신이 했던 말을 이렇게 돌려받는다니. 어이없음에 그저 헛웃음만 터트리며 와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참지 못한 눈물은 방울방울 떨어져도, 그의 표정만큼은 절대 일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실패했어요, 당신은. 봐요, 난 결국 죽어서 이렇게 작가님을 보고 있잖아요.”

“거, 참……. 누가 죽었다고.”

함부로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타이르듯 대답한 그레이는 손을 뻗어 와이트의 손을 잡아주었다.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자신의 손에 총이 들려있었음을 와이트는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까지는 없었는데?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니, 그 총은 어느새 그레이의 손으로 옮겨갔다. 머리에 피가 차갑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안 돼. 또.

“또 내 앞에서 죽을 거지!”

“진정해, 와이트. 그게 아니야.”

순간적으로 덤벼들 뻔한 와이트가 멈칫하고서 그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한 번 나에게서 그렇게 떠나갔으면서. 그 뒤로 꿈속에서도 몇 번이고 날 떠나갔으면서. 굳건히 참아오던 표정은 결국 무너지고, 어린 소년과도 같이 애원하는 눈빛을 띄는 눈동자를 마주 보며 그레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답답하게도.

“이제 일어나야지. 이건 압수다.”

뭐라고요?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어라, 안개가 점점 짙어지고 당신은 멀어져만 간다. 작가님, 그레이, 그레이 헌트. 제발 떠나지 마세요. 아직 할 말이 더 남아 있는데. 미안하다고, 잘못 했다고, 아직 사과조차 하지 못했는데. 빈손을 뻗어도 잡히는 건 하나 없었다.

잿빛은 어둠이 되어가고, 시야는 흐려지고, 몸은 점점 아래로…….

탕!

총이 발사되는 소리에 와이트는 소스라치게 깨어났다. ……깨어나? 차가운 바닥에서 전해지는 냉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그는 신음을 흘리고 바닥을 짚으며 일어났다. 총, 총을 분명 들고 있었는데……. 그리 의문하며 바닥을 바라보면 난잡하게 떨어진 종이들만 있을 뿐, 총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 방금 들은 총소리는 뭐지? 창백해진 채로 고개를 들면 벽에 박혀있는 총알 하나가 보였고. 와이트는 믿기지 않다는 듯 그저 제 손만 내려다보았다.

압수다, 라고 말하던 그레이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정말로, 설마.

……끝까지, 잔인한 사람같으니라고.


이것도 옛날 글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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