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틀은 없고 그냥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체전력을 함 (ft. 퇴고 안 함)

아가사 크리스티. 천재 작가, 추리소설의 여왕, 살인의 천재……. 살인에 대한 글을 쓴다는 이유로 불필요한 오해를 사고, 사람들의 시선에 지쳐────.

뭐해요, 아가사?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여자는 타자기에 꽂힌 종이를 빼어 들었다. 다급하게 새 종이를 끼워놓고, 많지 않은 활자가 찍힌 것을 그대로 구겨선 책상 아래로 던져넣었다. 모르는 척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붉은 오크색의 문에 여유롭게 기댄 채 그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아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뻔뻔한 척, 속으로 숨을 한 번 삼키며 여자는 몇 권의 책 표지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마치 그것을 확인하고 있었다는 듯.

잠깐, 타이핑 전에 손을 풀고 싶어서요. 조금 굳은 듯해서.

굳어요? 그거 큰일인데.

작가 지망생이잖아요. 진짜 작가가 들었으면 비명을 질렀겠어요. 농담처럼 받아치며 그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까는 몰랐는데, 그의 손엔 찻잔이 들려 있었다. 따뜻하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선명했다. 탁, 소리와 함께 책상 한쪽에 놓이는 찻잔이 놓였다. 아마 소량의 각성제가 들어있겠지, 싶다. 붉은색의 물은 그다지 새붉지 않았고, 언뜻 보면 가을 단풍을 생각나게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방의 창문으론 단풍나무가 보이지 않으니 퍽 반갑게 느껴진다. …… 아니, 아니지. 애초에 지금은 12월이니까. 계절이 맞지 않아……. 아직도 매달려 있을 정도로 꿋꿋한 나뭇잎은 없을 테니까. 진작, 모두 말라서 색을 잃었겠지. 그렇게 한참 생각에 빠져있으면,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 약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의 농담에 답변하지 않았구나. 사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은 이미 작가이며, 정말로 손이 굳은 것도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정체된 것은 다른 쪽이었다. 생각, 상념…… 혹은.

…… 음, 괜찮아요. 따뜻한 차도 왔고.

떠오를 것 같은 단어를 내버리고, 여자는 늘 고맙다며 옅은 미소를 보였다. 그의 호의에 익숙해진 지 얼마나 지났던가. 이게 좋은 신호인가? 질문하면 머릿속에선 글쎄, 하는 대답이 될 수 없는 대답만 돌아왔다.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이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진작 이해했더라도! …… 조금의 구실도 주고 싶지 않아. 어쩔 수 없어, 라는 말로 정당화하고 싶지 않아. 그들이 그러니까 나도, 라는 말로 포장하고 싶지도 않아.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만큼,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도 가졌으니까…….

그래요? 하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는 제 의자 뒤에 서, 방금 여자가 했던 것처럼 책 표지를 토독, 가볍게 두드렸다. 역시 독이네요. 당연하게, 예상했다는 듯 웃는 모습을 보며 여자도 평범하게 농담을 꺼낼 수 있었다. 우리가 무슨 책을 읽겠어요? 별거 아닌 이야기를 조금 나누고, 그는 방해가 되지 않게 테라스에 있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아가사, 너무 심각하게 쓸 필요는 없어요. 그런 격려를 남기고서. 로이, 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아요.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으나, 굳이 그의 뒤에 말을 덧붙이진 않았다. 어느 정도 종이와 씨름하다 보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테라스로 향하겠거니. 그때 말하면 되겠거니.

몸을 숙여, 아까 던져버린 종이를 다시 줍는다. 구겨진 것을 펼쳐, 글자가 번지지 않았는지 확인한다. 글자는 번지지 않았다. 당연하다. ‘A’라는 알파벳만 겨우 찍혀있는데 이게 번지면 얼마나 번진다고. ‘그 소설’을, 나의 괴물을 종이 위에 풀어놓을 것도 아닌데…….

그는 이 모습을 봤을까? 알파벳 하나가 얼마나 수상했을지, 이유를 생각하고 있진 않았을까? 소리 없이 들어와 문에 기대고 있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자신은 종이에 집중하고 있었으므로 작게 삐익거리는 문소리를 듣지 못했을 가능성? 음, 많지. 많지……. 그러나 그의 얼굴은 잠깐, 본 정도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치 소중한 무언가를 보듯 지그시…….

…… 내가 무슨 생각을.

고개를 젓고, 여자는 다른 생각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쨌거나, 그 모습을 다 보고 있었다면 그는 자신의 수상한 행동을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는 거겠지. 아마 높은 확률로, 거의 100% 확률로. 새삼스럽게 그의 화법은 상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눈은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읽는 것 같으면서도, 딱히 무언가를 더 묻는 법이 없었다. 그것이 참 고마웠다. 누구는 마음을 알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제 속을 갉아먹으려 애를 쓰는데, 그는 다가올 것 같으면서도 항상 적절한 거리에 서선 더욱 노력해 주는 게 느껴져서. 원래 그런 성정인 걸까? 아니, 아닐 테다. 몸에 밴 것보단 신경 쓰는 농도가 짙다는 느낌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굉장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는 거겠지. 그 대상이 어느 쪽을 향하는가─에 대해선 당장 답을 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그가 몸을 비튼 방향에 자신이 있다는 건 여자에게 굉장히 기분이 좋은 일이었다. 섬세하기도 하고.

좋은 신호냐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지 얼마나 지났다고. 아가사 크리스티, 너 이렇게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었니……. 그만큼 자신이 몰려있다는 것을 인지하기엔 편해……. 그래, 그 선에서 끝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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