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비가오고 있었고,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최종수 × 서문휘 [가비지타임 드림] 퇴고는 나중에~!
그냥 그날은 유독 날씨가 쌀쌀했던 것 같다. 유난히 그런 날 있지 않은가. 괜히 더 무기력해지는 기분이 들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창문에 딱붙어 비가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으니 건과 곤이 심심한지 내게로 달려들어 놀아달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둘을 각각 옆구리에 낀 채 비내리는 창밖을 가만히 쳐다봤다. 저 아래 우산을 쓴 채로 걸어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고있으니 마치 고양이라도 된 기분이였다. 건과 곤은 내가 반응없이 창밖만 보자 재미가 없어진 참인지 버둥거리다 내 팔을 풀고 탈출했다. 우다다 달려가는 소리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으니 이제 둘이서 잘 놀겠지. 나는 차가운 냉기를 내뿜는 창문에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이마가 시원하게 식어갔다. 눈을 두어번 껌뻑이며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있으니 언제나온건지 감이 물을 마시며 그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 뭐해?”
“창밖구경.”
감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아까 건과 곤이 들어간 방으로 들어갔다. 비가오는 탓인지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이 보이지는 않았다. 아파트 단지 내이니 더욱 그런걸지도 모른다. 방금 종량제봉투를 들고 달려가던 남자가 11번째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비를 맞으며 우산으로 칼싸움을 하는 아이들 둘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13명이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야내의 모든 사람들이 떠나가고서야 나는 거실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너무 많이 잔건지 더이상 잠이 오지도 않는다. 내가 어제 몇시간 잤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서늘한 방바당의 냉기를 느끼며 뒤척거리다 창문틀에 머리를 박았다.
“아!”
왼손으로 이마를 박박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앉았다. 아픈 이마를 부여잡은채 괜히 창문을 노려보다 새로운 인영을 발견했다. 우산이 없는건지 정자밑에 서서 가만히 앞을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비가 약하게 내렸다, 강하게 내렸다를 반복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를 맞으면서 달려가다 이건 좀 심한데 싶어 멈춰선 것 같았다.
그때, 충전기에 꽃혀있던 휴대폰에서 지잉-하고 알람이 울렸다. 반사적으로 폰을 잡아들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건 최종수로부터 온 문자였다.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휴대폰을 미동없이 쳐다봤다.
[야] 13:02
13:02[ㅇ]
[너 어디야]13:03
13:03[집]
[너희집에 우산남는거 있냐?]13:04
13:04[왜?]
[지금 집에 엄마아빠없어]13:04
13:04[어딘데]
[편의점]13:04
13:04[데리러 오라고?]
[ㅇㅇ]13:04
휴대폰을 손에 쥔채 거실바닥에 도로 드러누웠다.
비가오고, 우산없이 나간 탓에 옆집사는 친구에게 연락을 하는 것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근데 종수야, 나 얼마전에 네 고백 찼는데.
최종수가 무슨생각을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꾸리꾸리 냄새가 나는 오른팔을 들어올려 천장에 재어보다 반동을 줘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머니에 폰을 대충 쑤셔넣고 신발장 한켠에 우산꽃이를 열었다. 분명 남은 우산이 여러개 있었는데….
“야 건곤감!”
“왜?”
방에서 게임을 하던걸로 추정되는 건곤감이 쫄래쫄래 걸어 나왔다.
“남은 우산 이것밖에 없어?”
“응.”
“왜?”
“어제 형들이 우산가지고 칼싸움 하다가 부러뜨렸어.”
“야 서문감! 그걸 꼰지르냐! 너도 했잖아!”
“난 안했어!”
어느새 싸움이 붙은건지 점점 커지는 데시벨을 무시하며 하나 남은 투명우산을 꺼내들었다. 이걸로 두명이 비안맞고 돌아올 수 있을까.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 나갔다올게.”
“어디가는데?”
자기들끼리 왁왁거리던 건곤감이 나를 보며 물었다.
“편의점.”
“난 메로나.”
“나는 돼지바.”
“나는 죠스바.”
“하나로 좀 통일 못하냐?”
내가 한숨을 내쉬며 현관문을 열었다.
“내 지갑갔다줘.”
“아싸!”
“야 건곤감 너네 리 안깨게 잘 보고있어야한다.”
“응!”
“나 갔다올게.”
건에게 지갑을 건내받은 내가 현관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복도는 더욱 서늘했다. 반바지를 입고나온걸 아주잠깐 후회했다. 엘레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 공동현관문에서 우산을 열고 편의점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아까 타이밍을 놓친 듯 정자에 고립되었던 그 사람은 여전히 그자리에 서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빗물이 도도도도 우산을 경쾌하게 두들겼다. 대충 신고나온 슬리퍼를 직직 끌며 편의점에 도착했다. 간식이 든 봉지를 든 채 편의점 밖 그늘에 서있는 최종수와 눈이 마주쳤다.
난 가끔보면 말이야. 종수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모르겠어.
태평하게 서서 손을 까딱거리는 종수를 보다 우산을 접고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최종수가 나를 따라 편의점으로 들어왔다.
“살거있어?”
“아이스크림. 건곤감이 사오래.”
“내가 사줄게.”
“왠일로.”
“우산 값이라 생각하던가.”
최종수가 그렇게 말하며 본인의 지갑을 열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냉동고를 열어 메로나, 돼지바, 죠스바, 캔디바를 꺼냈다. 계산대에 올려두자 알바생이 아이스크림 바코드를 찍으며 물었다.
“비닐봉지 필요하세요?”
“아뇨.”
“4천원입니다.”
“잘먹을게~.”
내가 최종수의 어깨를 툭 치자 최종수가 현금 5천원권을 건냈다. 알바생에게서 천원을 도로 건내받은 종수가 지갑을 주머니에 넣으며 나를 바라봤다. 뭐.
나는 아이스크림 봉지들의 끝을 모아쥐며 어깨로 편의점 문을 밀고 나갔다.
“안녕히가세요~.”
알바생의 말에 고개를 꾸벅여 인사하고선 최종수가 나올 수 있게 다리로 문을 열고 기다렸다. 최종수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더니 천천히 걸어나왔다. 내가 우산을 탈탈털어 부러진 팔로 힘들게 펼치자 최종수가 내게 딱 달라붙었다.
“종수야.”
“왜.”
“생각해보니까 편의점에 우산 팔지않냐?”
“…안팔아.”
“뭔소리야.”
“품절이래.”
“뭐?”
내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편의점 우산매대를 보려고 하자 최종수가 내 어깨를 잡아 당기더니 앞으로 이끌었다. 어느새 우산은 최종수에게 뺏기고 없었다. 나는 우산과 아이스크림을 동시에 들고있던 손을, 아니 이제는 아이스크림만 들고있게 된 손을 내리며 어깨를 당기는 최종수의 보폭에 맞췄다.
우산을 쓰고있기는 하지만 최종수도 한덩치하고 나도 한덩치 하는 편이라 작은 투명우산 하나에 어깨가 전부 들어가지 못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어가고 깁스에마저 물이 들어가려하자 과연 우산이 쓸모를 하고있는 중인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강렬한 빗소리를 뚫고 최종수에게 말을 걸기위해 귓가에 얼굴을 붙였다.
“종수야 이거 우산을 안쓰는거랑 똑같은것 같—”
그렇다고 우산이 날아가길 바란건 아니였는데.
최종수가 우산을 놓치고 비어버린 제 손을 허망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본인도 어이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깨만 젖어가던 것이 이제는 전신이 젖어가고 있었다. 야속하게도 비는 그칠 줄 모르고 거세져만 갔다. 최종수의 곱슬머리가 방금 지지고볶은것마냥 구불구불해지고 있었다. 나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최종수가 봉지를 쥐고있지 않던 손으로 제 곱슬머리를 탈탈 털었다. 하지만 무방비 상태로 있는한 비는 무한리필이고 손으로 머리를 터는건 소용없는 짓이였다. 최종수도 몇번 손으로 머리를 털다 포기한건지 팔을 내린채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비가 주룩주룩 흘러 최종수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미남은 미남이다 이건가. 비에 젖어서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도 잘생겼다니. 이건 불공평하다. 내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최종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종수야.”
“왜.”
“우산을 놓치면 어떡하니. 손에 힘이 그렇게 없어서 농구는 어떻게 한다디.”
“…평소엔 안놓쳐.”
“그러시겠죠.”
왜 하필 지금. 나는 어이가없어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깁스 사이에 빗물이 들어가 어째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어차피 오늘 깁스풀러 갈거긴 했지만… 의사선생님이 보시면 기겁하시겠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집을 향해 걸었다. 최종수가 그런 나를 쳐다보다 한박자 늦게 나를 따라 걸었다.
말없이 걷다보니 상념들이 머릿속에 하나둘 자취를 드러냈다. 최종수 그렇게 안봤는데 얼굴에 철판을 깔았나. 분명 고백한게 저번 주 아니였어? 내 기억이 잘못된거야? 고백따윈 사실 한적도 없었던 거였나?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최종수가 내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저번주에 차인 사람한테 우산들고 와달라는 부탁을 하는 걸 보면 그렇게 진지하게 좋아한게 아니였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다. 이건 너무 무례한 생각인가.
사실 고백에 대한 답은 하지 못했다. 찼다기보단 고백 보류가 더 정확한 말일 것이다. 무슨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었기 때문이다. 최종수가 고백했던 그날은 여름방학식 날이라 그 뒤로 한주간 최종수를 만날일은 없었다. 나는 팔을 다쳐 집으로 돌아온 참이였고 최종수는 농구부 훈련때문에 학교에 남아야 했으 더더욱. 오늘 최종수가 여기에 왜 있는지는 모르겠다. 오늘 농구부 연습이 오프인가보지.
“서문휘.”
최종수에 대한 생각을 하다 이름을 불리니 마치 무언가 잘못한 사람이 된 것 처럼 움찔할 수 밖에 없었다. 사방을 두들기는 거센 빗줄기가 배경음이 된 것 마냥 내 대답을 독촉했다.
“…왜.”
뒤를 돌아보지않고 대답했다. 최종수가 가까이 다가오는지 걸음소리가 들렸다. …튈까?
“그때의 대답은?”
아니나 다를까 생각하던 주제가 들어맞았다. 나는 여전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종수는 좋은 친구이고 나는 최종수에게 호감을 가지고는 있으나 그건 분명 우정의 일종이다. 연애적으로 종수를 본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설렘을 느낀적도 없었다. 나에게 있어 종수는 그저 친한 옆집 사는 친구, 그뿐.
이대로 말한다면 최종수의 반응은 어떠할까. 그럴 것 같았다며 넘어갈까. 그럼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말자며 친구로써도 남지 못할까. 아직은 모를 일이다. 말하지 않았으니까.
입이 떨어지지 않아 침묵을 유지했다. 최종수도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냥 이자리에서 도망쳐 버리는게 가장 편한 길이겠지만 그건 종수에게 예의가 아닐 뿐더러 상황을 악화시킬 가장 성공적인 방법이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
고개를 들어 최종수를 보니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약간 찡그러진 표정과 조금 거친 숨소리. 나는 당황한 모습을 숨기지 못한채 최종수에게 다가갔다.
“너 우냐?”
“울면, 고백 받아줄거야?”
“…뭐?”
최종수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무언의 대답, 부정인거 아니였어?”
“…”
“차인거 맞네.”
울고있는 최종수를 보고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초등학생때 남자애들 우는 걸 보고도 마음이 안좋았던 적 있었나? 아닌데. 그때는 아무생각 안들었는데. 사춘기의 힘인건지, 물리적으로 울린것과 고백거절로 울린건 별개의 문제라 그런건지 가슴한켠이 쿡쿡 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종수야.”
“…”
“울지마.”
꺼이꺼이 운다거나 숨을 헐떡이면서 우는게 아니라 눈물만 줄줄흘리면서 울고있는 최종수의 모습이 낯설었다. 사실 꺼이꺼이 울거나 악쓰면서 우는 종수의 모습을 본적있는건 아니지만. 종수는 울때 이런표정이 되는구나. 이런식으로 우는구나.
빗물때문에 울고있다는게 티나지 않았다. 한손에는 비닐봉지를 든 채, 비를 맞으며 물에 젖은 생쥐꼴로 울고있는 최종수라니. 단어하나하나 어울리지 않아 순간 웃음을 터트릴뻔 했다.
울지말라는 말을 들은 종수는 미간을 한번 찌푸리더니 아무말이 없었다. 가늠하건데 눈에서 흐르는 물줄기가 조금 거세진 것도 같았다.
“…난 널 그런식으로 생각해본적이 없어.”
“그럼, 지금부터 생각해봐.”
최종수가 성큼 걸어와 내게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울고있는 탓에 눈이 조금 부어올랐고,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는데도 잘생겼다. 나는 갑작스런 얼국공격에 아무말도 하지못하고 얼굴만 바라봤다.
“내 얼굴이 마음에 들어?”
이번에도 아무말 하지 못했다.
“그럼 내 얼굴보고 만나.”
“그게 무슨.”
“나만큼 잘생긴 사람 별로없어.”
근거있는 자신감. 나는 종수와 친해지고 나서 무심코 잘생겼다고 칭찬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종수야.”
“거절할거면 그냥 말하지마.”
종수는 내 생각보다 나를 더 진지하게 좋아하고 있는 것같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빗방울 소리를 헤치고 들리는 쿵, 쾅, 쿵, 쾅— 하는 누군가의 심장소리. 달리 주인을 찾을 필요도 없다. 내건데 내가 모르면 누가 알겠나.
내가 아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최종수를 바라봤다. 최종수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린 내가 어이가 없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난 내가 지금껏 종수를 그저 친구로만 여기고 있었다 생각했다. 막상 돌이커보니 그런것만도 아니였나보다. 나도 몰랐던 내 심정을 내 심장이 알려주고 있었다. 사실 나는 심각한 얼빠였던 건가. 어이가없어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을수록 최종수의 표정은 굳어갔다. 아마도 거절할거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종수야.”
“….”
“역시 자기 객관화는 어려운 일인가봐.”
“…뭐?”
“난 널 친구로만 여겨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였던 건지 지금 가슴이 두근거려.”
“…”
“이게 설렘이라면 난 너를 좋아하는 건가봐.”
그날은 비가오고 있었고,
“그래, 나도 너 좋아해.”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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