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방

[명일방주] 악몽

집밥독타+아미야, 악몽 이야기

카즈델 지역, 바벨 로도스 아일랜드 본함

아미야는 어떤 예감과 함께 눈을 떴다.

방 안은 조명을 켠듯이 환했다. 구름 없는 달밤이다. 아미야는 이불에 반쯤 파묻혀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잠들기 전의 풍경과 같았다. 그렇다면 자신을 깨운 건 무얼까... 어린 카우투스는 한껏 긴장한 채 이변을 찾아 헤맸지만 방 안에는 도무지 그럴만한게 없었다. 다만...

탁, 하고 느린 발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부터다. 창 밖 풍경을 보아하니 늦은 밤인 듯 한데... 바벨 사람들은 언제나 바쁘니까 이 시간에 돌아다닌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기엔 그 발소리는 어딘가 묘한 구석이 있었다.

탁.
또 한 번의 발소리. 그건 이어지지 않고 툭툭 끊기듯이 들렸다. 제대로 된 사람의 발걸음은 아니다... 어쩐지 소름이 돋아, 아미야는 이불 속으로 좀 더 파고들었다.

탁.

........탁.

무겁지도 않고, 뭉툭하지도 않고, 날카롭지도 않다. ...구두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틈에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그리고, 아미야의 방 앞에서 멈춘다. 아미야는 당연히 발소리가 지나가리라 생각하며 숨을 죽였으나, 묘한 발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그 말은, 발소리의 주인이 아미야의 방 앞에 서 있다는 뜻이었다.

누구일까? 뭘까? 이 시간에 굳이 나를 찾아온건가? ...어떤 말도 없이, 이렇게 불분명한 걸음으로. 아미야는 자신의 통찰이 착각이길 바라며, 그가 느리게라도 자신의 방을 지나쳐주길 바라며 숨을 참았다. 1초가 흐른 듯도, 1시간이 흐른 듯도 했다... 허나 기대와 달리 발소리는 이어지지 않았고 대신에 다른 소리가 들렸다. 풀썩, 주저앉는 소리. 긴장하고 있기 때문인지 방 밖의 소리가 불필요할 정도로 섬세하게 귀로 꽂혔다. 방문자는 문 앞에 버티고 앉아버린 모양이다. 절대 지나쳐줄 마음은 없어 보인다.

잘못 찾아온걸지도 모르고, 몽유병을 가진 누군가가 복도를 배회하다가 주저앉았을 뿐인지도 모르지. 아미야는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켈시 선생님이나 테레시아 씨가 자신을 놀래켜주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던가... 혹은 귀신이라던가. 아니면 사람이 아니라 고장난 로봇일수도. 클로저 언니는 그런 걸 곧잘 만드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불청객의 정체는 수십 수백가지가 되어갔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문을 열기 전까진 그곳에 있는게 누군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미야에게는 문을 열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켈시 선생님의 당부에 따라 자기 전 문을 잠그는 일이 습관화된 그로서는, 저 두터운 문과 잠금장치가 밤새 자신을 지켜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대로 다시 잠들어 내일 아침에 일어난다면 불청객은 자리를 떠났을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게 발각되어 혼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아미야는 그 사람(추정)을 만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작은 카우투스는 둘둘 말고 있던 이불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인지... 정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타박, 타박... 성급한 맨발이 방을 가로질러 문으로 향한다. 차가운 문 손잡이를 쥐었다.

"...엇, 박사님?"

"..................아."

아미야의 방문 앞에 주저앉아 있던 건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바로 박사였다. 모습이 어딘가 이상하긴 했지만. 제 몸처럼 쓰고 다니던 헬맷도, 상징같이 걸치던 자켓도 없다. 새하얀 가운을 두른 박사가 한쪽 발에만 구두를 꿰어 신고 아미야의 방 문가에 주저앉아 있었다. 새카맣게 움푹 파인 두 눈, 불규칙한 호흡, 덜덜 떨리는 몸,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 박사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그저 공포에 질린 시선을 아미야에게 던지고 있다.

아미야는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지나간 것 처럼 느꼈다. 함선 내부에는 환기 시스템이 돌아가고 있을 뿐, 우연한 바람 같은 건 불지도 않는데 말이다. 그가 박사와 알고 지낸 몇 년 남짓한 시간동안 두 사람이 이리 오랫동안 말 없이 서로를 쳐다본 건 아마도 처음이었다. 아미야는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가 조금 빗나가더라도 자신을, 오로지 자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런 감상을 눈치챈건지, 박사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툭 바닥으로 떨구었다. 장송곡같은 한숨이 터졌다. 푹 잠긴 목소리가 이름을 부른다.

"…아미야."

"...네, 네에."

"…미안해, 깨우려는 생각은 없었는데."

"바, 박사님 때문에 깬 건 아니에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박사는 휘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바닥을 딛고 서니 그제야 제 신발 한짝을 연구실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높이 차 때문인지 조금 기우뚱하게 섰다가, 박사는, 신발을 벗어들었다. 하얗게 질린 두 발이 로도스 아일랜드의 복도를 딛고 섰다. 초라하고 바보같은 모습이었다. 황야에서 파울비스트를 타고 달렸던 그 때 처럼... 하지만 그 때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비극적으로. 부스스 헝클어진 머리를 긁적이며, 박사는 웃어보였다. 조금 더 바보같이 보이려는 듯.

"난… 저기, 그럼… 갈게. 얼른 들어가서 자."

"…아, …박사님."

"좋은 꿈 꿔, 아미야."

아미야는 그 순간 차오른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하는지 몰랐다. 동정이었는지, 걱정이었는지, 불안이었는지. 다만 박사를 그렇게 보내면 안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또 정처없이 홀로 떠돌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저, 저… 악몽을 꿨어요!"

"…악몽을?"

무작정 던진 말은 누가 들어도 거짓말인걸 눈치챌만큼 어색했다. 하지만 한껏 피곤해 보이는 박사에게는 먹혀들었는지, 그가 느리게 몸을 돌렸다.

"…그래서 깨어 있었던 거예요. 무서워서, 잠이 안 와서요."

"…응. 하지만 잠은 자야지, 내일은 또 정기 검진이 있잖니? 피곤할거야."

"네에…… 박사님, 괜찮으시다면... 옛날처럼 동화 얘기를 해주실 순 없을까요?"

"…지금 말이니?"

맨발의 박사님은 소리없이 걷는구나. 아미야는 혹여 그가 거짓말을 지적할까봐 긴장해선 옷깃을 꾹 말아쥐었다. 박사는 별 말 없이 비뚤어진 걸음으로 아미야에게 걸어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이마에 묻어난 식은땀을 닦아주었다.

"음… 재미있는 얘기가 떠오르질 않네. 할만한 얘기는 다 해버렸나봐."

"옛날에 해 주신 얘기라도 괜찮아요…."

그럼 들어갈까, 박사는 제가 언제 그리 떨었냐는 듯이 느긋하게 말하고는 아미야의 방문을 열었다. 방은 여전히, 달빛이 가득차 조명을 켠 것처럼 환했다. 제가 대충 뭉개두고 나온 이불 틈으로 뛰어들어간 아미야는 이불을 코끝까지 올려 덮었다. 거짓말이 들통날까 심장이 쿵쾅거려 조금이라도 숨고 싶었다.

박사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맡에 자리를 잡고,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는 옛날 이야기를 시작했다. 까끌한 목소리가 자아내는 상냥한 동화가 아미야의 귀를 간질인다. 정말로 잘 셈은 없었는데도 긴장이 풀어진 탓인지 몸이 하릴없이 가라앉는다. 눈이 자꾸만 감겼다…. 박사는 잠들지 않으려는 아미야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작은 아이의 몸은 수마를 견디기엔 역부족이라, 이야기는 막을 내리지도 못하고 끝을 맺고 말았다. 억지로 깨어 있으려는 아미야의 머리를 쓸어주던 박사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말로 돌아가야 한다. 한쪽짜리 구두를 집어들던 그의 뒤로, 아미야의 속삭임이 들렸다.

"박사님…."

"응…?"

"…박사님도 악몽을 꾸셨나요…?"

"…."

고개를 든 박사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을 때, 아미야는 단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박사는 달빛을 가린 구름이 다 걷힐 때까지 어둠 속에서 아미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오늘 밤의 일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언제까지라도….














[박사가 나흘째 자지 않고 있어.]

[그 허약한 녀석이 더 이상 밤을 샜다간 의료부로 실려올게 분명하겠지.]

[아미야, 바쁘겠지만... 그 녀석의 사무실에 들러서 잠들지 않으면 내가 수면제를 들고 찾아가겠다고 이야기 좀 전해줘.]

아미야는 짧은 회의를 마치자마자 뛰듯이 걸어 박사의 사무실로 향했다. 체르노보그에서 돌아온 후로 박사는 제대로 잠도 자지 않고 휴식도 취하지 않고 있다고 했다.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밀린 업무로 뛰어다닌 아미야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는 적어도 젊고 건강하지 않은가….

짧은 노크와 함께 사무실의 문을 열어젖히자, 아니나 다를까 퀭한 얼굴로 서류와 자료에 파묻히듯 앉아있는 박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노크소리를 듣기는 했는지 아니면 아미야가 방에 들어온걸 알긴 아는지도 의심스러웠다.

"박사님."

"…."

"…박사님!"

"어, …어? 아미야?"

"박사님, 괜찮으신거예요? 벌써 나흘째 철야하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괜찮아, 이런건 어쩐지 익숙한 것 같고… 그리고… 음, 생각보다 배워야하는 일이 많더라…."

아미야는 그가 자신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서류에 코를 쳐박는 것과, 말하지 않는 미묘한 간극이 있음을 눈치챘다. 잠시간 침묵이 지난다. 함선의 엔진음이 멀리에서 들리고, 사각거리는 펜 소리와 종이가 사락대며 넘어가는 소리가 방을 채웠다. 형광등 불빛이 흰 종이에 반사되어 눈이 시릴 정도였다.

아미야는 문득 몇 년 전의 일을 회상한다.

"…악몽을 꾸시나요? 박사님."

"…어?"

그제서야 박사가 고개를 든다. 새카맣게 움푹 파인 두 눈… 역시 제가 맞았지요, 박사님? 씁쓸한 승리감이 심장을 찌른다.

"…어쩐지 옛날 생각이 나네요."

"…옛날의 나도, 악몽을 자주 꿨어?"

"제 추측일 뿐이지만요… 아마, 가끔은."

"아…."

입술을 달싹이던 박사는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가끔 그가 이렇게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 아미야는 그가 초라해보이는 순간들에 어떤 공통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어떠한, 거대한 무언가에 패배했음을 느끼는 순간일지도, 아니면 무언가를 포기해버린 순간일지도….

"…아미야, 나는…."

"네가 죽는 꿈을 꿔…."

박사가 떨리는 호흡을 들이켰다.

아미야는 그가 옛날에 꾸던 악몽도 같은 꿈이었을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아미야의 악몽도, 대개 비슷했으니까.

"…괜찮아요 박사님. 저는 죽지 않을거예요."

"박사님이 곁에 계시잖아요."

그 말이 기만같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미야는 웃어보였다. 아아, 그래. 아마도… 그 날 밤의 박사는 자신이 거짓으로 악몽을 꿨다고 고했음을 알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어울려준 것이다. 누구나 악몽을 잊고 싶고 피하고 싶으니까.

"이제 쉬러 가요. 제가 잠드실때까지 곁에 있을게요."

"…절대 가면 안 돼, 아미야. 알겠지…?"

"걱정 마세요. 어디 안 갈게요."

"미안해, 아미야."

"괜찮대도요."

"미안해…."

박사는 몇 번이고 사과하며 아미야의 손에 이끌려 방으로 향했다. 아미야는 그가 자신에게 해줬던 것 처럼 이불을 덮어주고, 의자를 끌고 와 침대맡에 앉았다. 박사의 눈은 금세 감겼지만 아미야는 그 자리를 쉬이 떠날 수가 없었다. 정오의 햇빛이 작은 창문을 통해 방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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