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질

겔펠

펠의 최고의 폰삼촌 바르테의 특별출연에 감사드립니다.

바르테 사랑해 ……

펠과 게일이 항상 그랬듯이 염병을 합니다.


“표정 좀 펴, 게일.”

그림으로 그린 것 같은 아름다운 여름의 오후, 워터딥의 활기찬 상점가. 펠과 게일은 평소 좋아하던 식당에서 멋진 점심 식사를 하고 나오는 참이었다. 라즈베리 콩포트를 곁들인 아스파라거스로 시작한 코스요리는 감자와 문어 요리, 햇 완두콩을 갈아 넣은 크림 소스 파스타, 후추를 잔뜩 친 멋진 립아이 스테이크가 차례로 나왔고, 디저트로는 크림브륄레가 나왔다. 막 계산을 마친 펠이 품 안에 지갑을 갈무리해 넣으며 게일을 가볍게 타박했다.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건 덤이었다.

“내가 계산한게 그렇게 속상할 일이야? 엊그제 바르테가 너랑 같이 맛있는 거 먹으라고 용돈 주고 갔다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게일이 펠에게 찔린 왼쪽 옆구리를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니라는 말과 다르게 찌푸린 미간에는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채였다. 펠이 게일의 얼굴을 보더니 기가 막힌 듯이 말했다.

“설마, 아직도 바르테가 불편해서 그래? 저번에 한소리 들은게 아직도 맘에 걸려?”

“아니,아니. 전혀. 그럴리가. 크흠. 네가 요리를 마음에 들어하길래. 내가 사 주고 싶었는데.”

펠이 퍽이나 그렇겠다는 표정으로 게일을 흘겨보자, 게일이 헛기침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정말이야, 펠. 그가 나에게 그렇게 화를 냈던 건…… 당연한 일이지. 나라도 그랬을 거야. 신경 쓰지 마.”

펠이 게일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이 방정이지, 정말…….

작년 가을의 일이었다. 바르테를 워터딥에 초대한 펠은 아직 어색한 사이인 게일과 그가 친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집에서 묵기를 졸랐다. 식사 자리에서 게일과 함께했던 모험 이야기를 하는것 까지는 좋았는데, 엘더브레인에게 맞설 때 게일이 자신의 오브를 터트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는 말을 던진 것이 화근이었다. 바르테는 그 이야기를 듣고 경악했고, 게일과 펠은 밥을 먹다 말고 나란히 앉아 바르테에게 꽤 오랜 시간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펠은 바르테가 자신을 이렇게나 아낀다는 사실에 감격한 채로 그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지만, 게일은……. 충격이 꽤 컸던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저러는 것을 보면.

이제는 이럴 때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은 그녀의 반려에게는 환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다. 기왕이면 그의 효능감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것으로. 상점가에 같이 온 김에 뭘 사러 가자고 할까. 펠은 적당한 게 없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사 달라고 하고 싶은 거, 딱히 없고. 먹고 싶은 거? 방금 잔뜩 먹은 터라 그닥. 필요한 거, 게일이 항상 떨어지기 전에 꼼꼼히 채워 놔서 없고. 게일에게 부탁할 거, 항상 말하기도 전에 바로바로 처리해 줘서 없고…….

“펠?”

펠이 발을 멈추자, 게일이 그녀를 불렀다. 팔짱을 끼지 않은 손으로 펠의 이마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뿔 위로 단정히 올려 주면서. 뿔에 닿아오는 게일의 손길이 방금 먹은 크림 디저트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아. 이거다. 펠은 팔짱을 풀고는 게일의 손을 잡아끌었다.

“집에 가자, 게일. 나 같이 하고 싶은 거 생각났어.”

게일은 갑자기 신나 보이는 펠의 모습에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운 듯한 표정이 되었으나, 아무 말 없이 순순히 펠이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둘은 금방 인파에 섞여들었다.


게일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작은 솔과 철제 통을 들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펠은 그 앞에서 가운만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섰다. 게일은 미간을 찌푸리고 작은 통에 써 있는 글씨를 읽었다.

[뿔 광택제]

게일이 고개를 번쩍 들고는 펠을 향해 감격한 목소리로 외쳤다.

“펠리시아 데카리오스! 드디어 나에게 네 뿔을 손질할 수 있는 영광을 주는 거야?”

펠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기가 무섭게 게일은 펠의 손을 잡아 소파에 앉히더니 옆에 앉아 흥분한 어조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펠. 정말 고마워. 이 날을 정말 오래 기다려 왔어. 아, 네가 마음의 준비를 하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탓하는건 절대 아니야. 자신의 신체 부위의 손질을 남에게 맡기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긴 하지. 나도 아직 너에게 내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맡기는 건 조금 무섭거든. 너도 알다시피 손으로 하는 섬세한 일들은 너보다 내가 더 잘 하는 일이잖아? 그런 의미에서 항상 네 뿔 손질을 해 주고 싶었는데. 잘 할 자신 있어. 준비도 완벽하고. 내 서재 두 번째 책장, 위에서 여섯 번째 칸에 워터딥에서 구할 수 있는 ‘티플링의 뿔 손질’에 관한 모든 책을 모아 뒀어. 물론 다 읽었고 말고. 예습은 완벽해. 그런데 펠, 너만 괜찮다면…….”

게일은 쏟아내던 말을 잠시 멈추더니 펠을 바라보았다.

“왜? 듣고 있어.”

“내가……. 보여줄 게 있거든. 가져와도 될까?”

펠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자. 서재 문이 열리더니 마법사의 손이 상자 하나를 든 채로 나타났다. 펠의 무릎 위에 얌전히 상자를 올려 둔 마법사의 손이 이내 팟 하는 소리를 내며 사라졌다. 반질반질한 검은 나무로 만들어진 상자는 제법 묵직했고, 가장자리에 화염 무늬가 멋지가 조각되어 있었다. 펠이 어리둥절한 채로 게일을 바라보자, 게일이 얼른 열어 보라는 듯 눈짓으로 상자를 가리켰다. 펠은 조심스럽게 잠금쇠에 손을 올려 상자를 열었다.

“맙소사, 게일!”

상자의 내용물을 본 펠이 소리를 빽 지르며 게일을 휙 돌아보자 게일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걸 너에게 보여주는 날이 드디어 왔군! 어때. 내 진심이 느껴져?”

상자에는 뿔 손질용 브러쉬, 세정제, 광택제를 비롯한 여러 도구들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포장을 뜯은 것도 있었고, 뜯지 않은 것도 있었다. 브랜드도, 종류도, 패키지도 제각각이었다. 펠은 포장이 벗겨져 있는 브러쉬를 하나 들어 손끝으로 모 끝을 살짝 쓸어 보았다. 모의 탄력만 봐도 자신이 평소에 쓰는 것보다 훨씬 좋은 제품인게 분명했다.

“기가 막혀! 이거 언제부터 모은거야?”

“내 사랑, 당연히 결혼을 준비하던 그때부터지. 이날만을 기다렸어. 그러니까 기왕 맡기는 김에 내가 모은 도구들을 쓰는 건 어때? 네가 쓰는 것도 길이 잘 들어서 좋은 도구지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해 주고 싶어서 그래. 안될까?”

분명 시작은 게일의 기분 전환을 위한 거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펠은 상자 안에 있는 도구들을 손으로 쓸어 보였다. 게일의 마음 하나하나가 모여서 이 작은 상자 안에 담겨 있는 것 같아서 어쩐지 심장께가 간질거렸다. 이렇게 기대하고 있을 줄 알았으면 진작에 부탁할걸. 펠이 상자를 게일의 손에 쥐여 주고는 그의 무릎에 머리를 올리고 벌렁 누워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마음의 준비가 조금 필요했다. 아주 조금.

“…빨리 해 줘.”

낮게 웃는 소리, 감은 눈꺼풀 안으로 드리우는 안온한 그림자, 볼을 스치는 머리카락, 이마에 살짝 내려앉았다 떨어지는 부드러운 입술. 펠은 슬쩍 눈을 떴다. 게일이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눈을 감자 이내 브러쉬가 조심스럽게 뿔을 문지르는 소리가 들린다. 펠은 다시 눈꺼풀을 살짝 밀어올렸다. 게일은 펠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뿔을 손질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집중한 표정은 굳어 있다고 볼 만큼 진지했다.

저 표정을 이렇게나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건 이 세상에 오직 나 뿐이겠지. 저 굳은 표정을 말 한마디로 사르르 녹게 할 수 있는 것도 이 세상에 오직 나 하나 뿐일거고. 만족감이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가는 것 같아 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더 저대로 두기로 했다. 자신에게 집중하는 연인의 모습은 언제나 사랑스러우니까. 펠은 다시 눈을 감고 그의 손길을 느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사각이는 소리만이 둘 사이를 채웠다.


오늘도 펠 1패 게일 1승 적립

지금까지 카운트

펠 : 34승 3무 23425패 / 게일 : 23425승 3무 34패

Q 펠이 이기는 날이 오긴 하나요?

A 펠이 이기는 날은 본편에서 이미 다 지나간 편이긴 하죠 …….하지만 살다보면 언젠가는 ……?

카테고리
#2차창작
페어
#HL

해당 포스트는 댓글이 허용되어 있지 않아요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