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작품의2차

자불어

호러, 창작글(약간 3차창작)

놋쇠가지 by CB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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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1나라 정벌을 읽고 그를 기반으로 크툴루신화와 쓰까 쓴 3차창작같은 글입니다

노애공 22년 11월 정묘일, 구천이 오를 멸하고 부차가 고소산에서 자결했다.

심하게 비바람이 부는 날은 차향이 짙다. 비(肥)는 다기에 차를 내리고 앉았다. 공후를 켜는 소리가 바람 소리와 섞여 귀에 거슬렸기에 손을 내저어 하인들을 물렸다.

오(吳)가 망했다. 국군(國君) 부차가 패하여 고소산에서 자결했다. 부차가 소, 돼지를 100뢰(牢)를 요구한 지가 언제였던가. 오가 월을 정벌하여 회계산을 함락하고 수레 가득 두개골을 얻은 지 얼마나 되었던가.

월과 오의 전쟁은 하루 이틀이 아닌 앙숙지간이었고, 이번 전쟁도 매해 있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오가 완전히 망할 줄은 몰랐다. 내심 팽창하는 오가 망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월에 완전히 패망하는 것 또한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서쪽의 나라가 서로 싸우며 동쪽 나라에 신경 쓰지 않는 만큼, 남쪽 또한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어 자국에 간섭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니부(尼父) 어르신을 다시 뵙고 싶구나.”

골이 아플 때면 그가 항시 내뱉는 말이었기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책상에 놓인 책을 잡히는 대로 집어 올리자, 다 해진 책 끈이 덜렁거렸다. 공교롭게도 역(易)이다. 어르신이 항상 즐겨 읽던 책으로, 학식이 비범하지 않던 그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은 적이 없었다. 도통 알 수 없는 말이 적혀있기 때문이다. 수수께끼 같은 이 옛 서책을 그는 기이하게 여겨 곁에 두고 종종 읽었으나, 어르신이 아끼는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시경은 때로 운율에 맞춰 노래하고 경을 쳐보면 즐겁다, 남녀의 사랑을 읊는 구절은 아름답고 운치 있다. 옛 서사는 사뭇 마음을 웅장하게 한다. 그러나 역을 왜 중시했는가? 그 늙은 선생이 살아계실 적에 비는 물은 적이 있으나, 수염을 길게 기르고 이마가 툭 튀어나온 노인은 언제나 같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다정한 어투로, 그러나 단호하게 “대부께서는 아실 필요 없답니다.” 하고 답하곤 했다.

그의 아버지는 그 겸허한 노인을 항시 두려워했다.

그가 계손(季孫)씨의, 나아가 노국의 화근이 되리라 생각해 경원시하고 이내 수십 년간 여러 나라를 떠돌게 한 것이 그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죽기 직전까지 서자인 그를 대신하여 갓난쟁이인 유복자를 계손씨의 우두머리로 내세우고자 한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오히려 노인을 향한 호감을 키웠다. 합려의 군대를 대파하고 수레 가득 해골을 싣고 자랑하듯 가지고 와 “어째서 이리 두개골이 크겠느냐?”며 오의 사신의 무례한 태도에 어떤 대부도 대답하지 못했을 때, 오직 그 노인만이 유창하게 대답했다. 나직하고 웅장한 목소리와 담대한 체구, 넓은 등. 해골더미를 수레에 싣고 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력을 가진 그 노인이 제자들과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여전히 키가 크고 중후했으나, 목소리는 지쳐있었고 수염은 새하얗게 바랜 후였다.

노인이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그에게 관직을 주지는 못했으나 비는 종종 노인에게 가서 안부를 물으며 그에게 여러 정책과 계책을 논의하곤 했다.

역의 끈이 좀먹어 헤진 것을 보니, 헤진 책을 계속 읽고 읊던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인은 지팡이를 짚기는 했으나, 말년까지 허리가 굽지도 않았다. 그가 급격하게 노쇠한 것은 돌아가시기 2년 전의 일이었다. 어쨌거나 왕성하게 활동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노인이 갑작스럽게 칩거하여 나오지 않게 된 이유는 아마 그의 제자가 위나라에서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시체조차 온전하지 못해 해(醢)가 되어 단지에 담겨 돌아왔다. 노인이 그날로 쓰러졌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는 비 역시 노인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노인에게 의견을 구하기 위해 방문하면, 노인은 집안에서 목소리로만 답변했고 대체로는 제자들이 그를 완곡하게 돌려보냈다.

새삼스레, 노인을 추억하니 제대로 노인에게 흠향도 하지 않았음이 떠오른다.

“수레를 대기시켜라!”

결국 그가 소매를 떨치며 일어나자, 마부 번씨(繁氏)가 급히 달려와 물었다.

“대부 어르신, 어디로 가시렵니까?”

“사변으로 간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요?”

마부가 소름이 끼친다는 얼굴로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자, 비는 말 없이 그의 어깨를 한 대 쳤다. 계씨 집안 노복들은 하나같이 노인의 무덤을 두려워했다. 그는 이것이 그의 아버지인 계환자가 노인을 언제나 두려워했기 때문이라 여겼고, 그들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그림자를 발견해 항상 불쾌하게 여겼다. 이놈도 나를 탈적(奪嫡)으로 여기는 것일까? 한 대, 두 대, 몇 대를 때리고 나서 분을 삭인 비는 결국 다른 마부를 불러 수레에 올라, 천천히 북쪽으로 향했다. 폭우 탓에 대낮인데도 도성의 길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는 빗물에 두건이 푹 젖은 채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흙탕물에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시계(視界)는 장대비로 흐릿하고, 말의 숨소리가 훅훅 꺼진다. 멀리 커다란 버드나무 아래 갈대를 엮은 우의와 초립을 쓴 호리호리하고 키 큰 낚시꾼이 비를 피해 쉬고 있었다. 그를 지나쳐 가려는데, 별안간 벌떡 일어난 낚시꾼이 마구(馬具)를 잡아채 수레를 멈춰 세웠다. 그 대단한 힘에 말이 놀라고, 마부가 검을 뽑으려는데 사내가 초립을 들어 비를 부르며 빙긋 웃었다.

“대부(大夫), 어딜 가시오?”

말쑥한 미장부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있어도, 비에 쫄딱 젖어 있어도 그 기색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단목사(端木賜), 자는 자공(子貢)이라 한다. 노나라뿐 아니라 오, 월, 제를 통틀어 단목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날 수레도 수행원도 없이 홀로 삼베옷을 입고 떠돌 처지가 아니었으나 지금은 노인의 삼년상을 치르고 있어 이토록 초췌하다. 비는 마부를 제지하고 사내가 자신의 수레에 오르도록 했다. 자공은 받침도 없이 훌쩍 뛰어올라 앉았다. 그의 허리에 둘러찬 생선 바구니와 장검이 서로 부딪히며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물이 뚝뚝 떨어지는 초립과 우의를 앞자리에 내려놓기를 기다렸다 다시 마부를 재촉하려는데 자공이 고개를 저었다.

“제가 보기에, 조만간 비가 그칠 듯 합니다. 비가 잦아들 때까지 잠시 이 나무 아래서 쉬도록 하십시다. 나 역시 비를 피하고 있었으니.”

“어차피 노선생(老先生)의 사당에 가시는게 아닙니까. 제가 태워드리겠습니다. 저도 배향을 하려던 참입니다.”

“대부가 선생님께 배향을 가신다고?”

“오랜만에 선생님이 생각나서요.”

“대부답습니다.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군주 곁에 가지도 못하게 해놓고 매일 선생님을 찾아와서는 이 일은 어떻게 할까요, 저 일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고, 돌아가시고 나니 묘에 향을 올리고 싶다니 참 속도 좋으십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는 자유입니다만, 선생님이 고향에 돌아오십사 했던 것도 저고, 돌아가신 후 애도하며 향음하도록 추천한 것도 저이니 너무 매몰차게 말하지 마십시오. 선생님을 천거했으나, 공께서 쓰지 않으려 하시니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제 나름으로 선생님을 참으로 존경했습니다.

선생님의 제자는 아니었지만요.”

자공의 눈매는 몇 년간 묘를 지키며 고생을 한 탓인지 혹은 경애하던 스승이 죽어 마음이 상한 탓인지 더욱 날카로워진 듯했고 말씨도 평소보다 음울했다.

“대부의 마음은 알겠습니다만, 오늘은 좋은 날씨가 아닌 듯 합니다. 오늘은 돌아가시고, 다음에 방문하시면 제가 좋은 차를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작은 초막이지만요.”

“하지만...”

“대부를 걱정해서 하는 말입니다.”

비는 말대꾸를 하려던 중에, 옷이 축축하다고 느꼈다. 자공이 비를 한참이나 맞고 있었으니 곁에 올라탄 후 빗물이 옷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려니 했다. 그러나 비릿한 냄새와 끈적함은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 폭우의 비린내와 진흙냄새와는 다른. 비는 천천히 자공의 삼배 상복 아래 걸친 비단에 스며든 검은 얼룩을 관찰했다. 옷자락 끝에 묻은 새까만 얼룩은 항상 단정하고 세련되게 차려입는 자공답지 않았다. 장검에는 진흙이 묻어있고, 방금 사용한 듯 생생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갈대를 엮은 작은 바구니. 낚시한 생선이 들었는지 안에서 펄떡이거나 갉작이는 소리가 나고 있어 아까부터 신경이 쓰였다.

들썩거리는 바구니 안에서 문득 ‘다섯해. 다섯해’라는 소리가 났다.

“오늘은 낚시를 하고 계셨습니까?”

“스승님 영전에 바치기 위해서지요.”

“낚시대도 없이요?”

“여상은 반계에서 미끼없이 낚시를 드리웠으니, 저는 미끼만 가지고 낚시대 없이 낚시를 하려 한답니다.”

자공은 생선바구니 뚜껑을 지긋이 눌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을지 비가 문득 확인하고 싶어져 열어볼까봐 하는 행동같이 느껴졌다.

곧 비가 그치리라는 자공의 말과 다르게, 빗줄기는 점점 굵직해졌고 하늘에서는 우르릉대는 천둥소리에 벼락도 번쩍였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강가에 우거진 갈대 속에서 어린아이가 우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게 애앵, 하는 울음소리는 빗소리에 스며들 듯 들렸다가 조금 더 크게 으애애앵 하고 길게 소리를 높인다. 어미의 젖을 찾는 듯한 아이의 울음소리는 가까워지니 비명소리와 더 흡사해보였다. 그 끔찍한 소리는 천둥소리, 빗소리에 섞이며 높아졌다 낮아졌다 하고 또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하여 가까이인지 멀리인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자공은 비에게 묻지도 않고 마부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말머리를 돌리게 지시했으나, 비는 그에게 반발하지 못했다. 사사삭 하는 갈대가 흔들리는 소리에 솜털이 곤두선다.

“중유(仲由)가 그립군.”

자공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듯 했다. 그는 상반신만 돌려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고는 검을 뽑았다. 빗물을 머금은 검날에는 이미 검붉은 피가 머금어 있어 수레가 속도를 올리자 비의 뺨에 핏물이 튀었다. 날카로운 휘파람소리에 아기 울음소리는 기죽은 듯 잠시 멈춘 듯 했으나 이내 다시금 소리가 가까워졌다.

“대부, 뒤돌아보지 마시오.”

자공이 말하지 않아도 뒤돌아볼 생각은 없었다. 마부는 젖은 마구를 꽉 쥐고 수레를 거칠게 몰았다. 아기 울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자공은 그 후로 서너번 휘파람을 불었다. 비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서 달리는 말의 갈기와, 마부의 목등만을 보았다.

“엄성까지 얼마나 남았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마부의 대꾸에 비가 화가 나 그의 옷깃을 잡아채려는데, 자공이 그를 불렀다.

“대부! 먼저 가시오. 다음에 차 한잔 합시다!”

그러고는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진흙탕물에 사람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자공이 수레에서 뛰어내린 듯 하다. 한사람분 무게가 가벼워지자 수레는 더 속력을 높였고 이윽고 엄성(奄城)의 성벽이 보였다. 문밖을 나서던 비의 수레를 알아본 병사가 재빨리 문을 비켜줘 그는 막힘없이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폭우가 쏟아지는 날 귀가 후 비는 며칠간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군주 장은 조례에 그가 며칠을 궐석하자 병을 핑계로 위세를 부리는 줄 알고 안절부절 못하며 선물을 보내왔으나, 두통이 가시지 않아 기분이 좋지 않았던 비는 그 선물을 모두 돌려보냈다. 코끝에서 그날의 비릿한 냄새가 가시지 않아 밥을 씹을 때도 문득 역겨워져 먹은 것을 토해내곤 했지만 또 어느 날은 미칠듯한 식욕이 돌아 돼지를 잡아 굽고는 토할때까지 먹고, 토하고 또 먹었다. 고기의 누린맛이 혀 위를 맴돌지만, 허기는 도통 가시지를 않는다.

갈대 속을 거니는 어떤 짐승의 발소리와 아기우는 소리와 바구니 속 무언가가 ‘오년, 오년’하고 속삭였던 일이 하루종일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공이 찾아왔을 때, 비는 오랜만에 가솔이 아닌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상복을 벗고 비단옷을 입었으며 가지런하게 옥대를 하고 옷에 장신구를 달아 그가 앉을 때 옥끼리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올때는 수레를 타고 왔으며 사병도 마부를 제하고 다섯이나 데려왔다고 한다. 관모는 가지런하게 맸으며 얼굴빛도 태연했고 변함이 없어, 그날의 기색은 조금도 없었을뿐더러 옷소매에도 그날의 핏자국은 온데간데 없이 깨끗했다. 이 말쑥한 선비는 그날 본 사람과 다른 사람 같았으나 이것이 자공의 본래 모습이라는 것을 비는 잘 알고 있었다.

“자공, 그날 이후 내 몸에서 비린내가 가시질 않는 듯 합니다.”

“그날 본 짐승은 비휴(豼貅)입니다.”

자공은 딱잘라 말했다. 그는 반듯한 자세로 앉았고, 목소리는 고요했다.

“저는 그렇게 종종 비휴를 사냥하곤 하는데 고놈들이 제게 재물을 가져다 준답니다.”

“비휴가 어린아이처럼 운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니면 마복(馬腹)이라는 짐승일 수도 있지요. 만거(慢渠)에 사는 짐승인데 어쩌다 여기까지 내려왔는지 모르겠군요.”

“그렇다면 이 두통과 비릿한 냄새는 그 짐승에게서 오는 것입니까?”

자공은 또렷한 갈색 눈동자로 잠시 그를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이 어쩐지 무서워, 비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비는 구토와 두통으로 비쩍 말라갔으며 기이한 환청을 들었다. 그는 초췌한 얼굴로 괴로움에 눈과 뺨이 움푹 들어갔다. 병색이 완연하니 대부가 조만간 죽으리라 여겨도 이상하지 않았다.

“제가 보기엔 대부께서 스승님과 같은 병을 앓는 것 같으니 기이하군요. 스승님은 은나라사람의 후예입니다만, 계씨는 노 장공의 후예이며, 어머니는 강성 여씨가 아닙니까?”

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하려 했으나 문득 또다시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어올랐기 때문이다.

“자공, 자네 스승인 니부께서 살아계실 적에는 내게 많은 조언을 해줬으니 내게 몇가지 조언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내가 이렇게 아픈데, 이 병으로 내가 죽겠습니까?”

“제가 스승님께 육예를 배웠으나 의술은 배우지 못했으니 확답은 못하겠습니다. 다만 제가 듣기로 단장산에 꿩을 닮은 새로 날개는 희고 머리는 무늬가 있는 백야(白鵺)라는 새가 삽니다. 이 새를 먹으면 차도가 있으리라 봅니다.”

비는 그 말을 듣고 새의 이름을 다시 한번 물었다. 자공은 친절하게 소매를 들어 붓으로 비가 내민 비단에 백야(白鵺)는 새의 이름을 다시 적어주었다. 비는 비단을 감싸 소매에 넣고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자공이 비에게 작별을 고하며 몸을 일으키자, 그런 자공을 비가 멈춰세웠다. 그러나 할 말이 없어 우물쭈물한다.

“대부, 사실은 제게 진정으로 묻고 싶은 말이 따로 있으신가 봅니다.”

“자공, 니부께서 돌아가신 지 6년이 되었는데 상을 아직도 치르는 이유는 군주께서 조정에 부르리라 생각해서입니까?”

자공은 맑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의 스승이 죽기 전까지 그는 웃음이 많고 다정다감한 사내였으니, 초립을 쓴 음울한 검수의 모습보다 이 모습이 좀 더 익숙해야만 했는데 기이하게도 비는 그가 어쩐지 낯설다고 생각했다. 그의 웃음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숨겨져있는 듯 해서 섣불리 말을 걸었다가 손끝이 베일 것만 같았다.

“어찌 그런 것을 걱정하십니까? 저는 이제 스승님이 남긴 유지를 완수했으니 노국에 미련이 없어 임치로 떠나려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계씨 저택에 들른 셈이지요.”

자공은 여전히 웃음기 있는 얼굴로, 허리를 숙여 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단단한 손은 따듯했으며, 힘세고 꾸밈이 없어보였다. 그는 조금 더 허리를 숙였다. 입영(笠纓)이 비의 뺨에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자공이 속삭였다.

“스승님은 만년에 역(易)에서 손을 떼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산명(算命)을 한번 해보았는데, 이렇게 나오더군요. 임금이 노국에서 죽지 못한다. 그러니 제가 이 땅에서 입신하리라 근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임금, 즉 노국의 국군, 장이 이 땅에서 죽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이겠는가? 어쩌면 전씨가 제나라를 이었듯 계씨가 노나라를 이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부탁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제가 태사씨에게 부탁해 역상(易象)과 노춘추(魯春秋) 책 몇권을 베껴가도 되겠습니까? 임치에서 소일거리로 읽으며 여생을 보내려 합니다.”

당연히,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공은 찾아왔을 때처럼 계씨 저택을 미련없이 훌쩍 떠났고 그가 제나라로 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날의 일이 소름끼쳐, 이후로 비는 감히 사변의 사당으로 가려는 생각을 완전히 떨쳤다. 오한과 구토는 계속해서 멈추지 않아 백야라는 새를 잡으려 단장산까지 사람을 보냈으나 백야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수소문한 끝에 예전 젊은 시절 제나라 군주 환공이 비슷한 병을 앓아 백야를 찾았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제 환공 또한 결국 백야를 잡을 수는 없어 옹무(雍巫)라는 자가 대신할 것을 바쳐 환공의 병이 나았다고 하는데 그 이상의 기록은 노국에서 찾을 길이 없었다. 제나라의 자공은 알까 싶어 몇 번 서신을 보냈으나 예의상의 답신만이 돌아왔을 뿐이다.

비는 음식을 먹기가 곤욕스러웠다. 고기는 씹어 넘길만 했으나, 계속해서 비릿함이 입안에 맴돌아 결국 삼키고 토하기를 반복했다. 비는 그래도 종종 정무에 참여했다. 여위어가는 그를 군주가 걱정했으나, 그의 통통한 뺨 위로 씰룩거리는 편협한 눈매가 은근하게 자신의 죽음을 기대하고 있음을 비는 알 수 있었다. 가식적인 어투로, 그가 죽어 계씨가, 나아가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의 삼환(三桓)이 약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틀림없었다. 군주의 음모를 넘기려면, 계손씨의 우두머리인 그가 이처럼 병에 시달려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비는 사람을 계속 보내 백야, 또는 백야를 대신한 것을 찾았다. 그러나 백야를 대신해 옹무가 환공에게 바친 것이 무엇인지 비가 알게 된 것은 제나라에 보낸 간자를 통해서가 아닌 서고를 방문하면서였다. 태사씨는 대대로 노나라의 서고를 관리했으며, 대부인 비 역시 서고에 종종 방문하여 글을 베껴가곤 했다.

단초는 그가 지나가듯 자공에 대해 투덜거렸을때였다.

“자공 이사람은 춘추까지 베껴가도록 해주었는데, 서신에 제대로 답도 안 해주는군.”

그의 지나가는 말을 들은 태사는 난감하다는 듯 “자공이 춘추를 베끼게 허락해주셨습니까?”하고 질문했다. 항상 까만 도포를 입고 다니는 얼굴이 거뭇한 노인은 자신의 까만 수염을 쓸었다. 그의 현묘하고 새까만 눈이 흑요석처러 반짝인다.

“그래, 허락했네.”

비가 짐짓 뒷짐을 지고 방약무인하게 대답하자, 태사는 안타까운 듯 들고 있던 책을 만지작거렸다. 자공이 역상, 노춘추를 베껴가게 해달라고 해서 중요한 문서니 베낄 수 없다고 거절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는 대부의 이름을 대거나 몇 번 더 조르지 않고 다른 책을 베껴갔다고 했다. 비는 문득 호기심이 일어 그 책들의 이름을 물었다. 모두 낡은 책으로 조잡하고 책끈도 다 삭아가는 것들로 일부는 전체가 유실되어 죽간 두세개만 있을 뿐인 큰 가치는 없는 책이라며 태사는 비에게 책들의 목록을 적어주었다.

황의(黄衣), 현군(玄君), 통주토성(通往土星), 수신(水神), 교전의(敎典儀)...

태사의 말대로, 그들은 알아보기 힘든 옛 글씨체로 쓰여있어 비가 읽기는 힘들었던데다, 대부분 조각난 채로 하나의 죽간이 되기 조차 어려워 책이라기보단 거의 조각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죽간이 아닌 뼈에 새겨진 것도 있었는데 태사의 말로는 은나라때의 글을 모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그리운 듯 덧붙였다. 비의 조부인 계평자 계손의여는 은나라때 글을 모으는 것을 좋아해 자택에 그러한 글귀를 많이 수집했었다고 한다.

비는 자택으로 돌아가 서고를 둘러보았다. 그의 부친인 계환자 계손사는 이 서고를 좋아하지 않았고 어린시절 그가 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두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차피 비는 책보다는 사냥과 수레몰이에 관심이 훨씬 많았기에 별채 서고의 자물쇠는 녹이 슬어 열리지 않은 지 벌써 한갑자는 된 듯 했다. 비가 자물쇠를 비틀어 열자마자 퀴퀴한 냄새의 서고는 죽간이 삭는 냄새가 났다. 그 눅눅한 냄새에 그가 평소 느꼈던 비릿함과 역함마저도 사라진 것같았다. 죽간 더미는 책장에 쌓인 것도 있었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쌓여있기도 했다. 먼지와 거미줄을 넘어가며 작은 화로에 불을 붙이자, 서고 안이 빛으로 가득 찼다. 서고의 가장 깊은 안쪽에는 조그마한 대문이 있다. 비가 허리를 숙여 그 허리까지 정도나 오는 작은 문을 여니, 두 기둥 사이 위패와 사람 머리통만한 청동기, 그리고 여러 책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비는 먼지 쌓인 청동기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그것은 호랑이같은 얼룩덜룩한 무늬가 있고, 다리가 긴 짐승이 앉아 사람을 머리부터 씹고 있는 모양으로 주조된 솥이었다. 그 모양이 어찌나 생생한지, 당장이라도 솥에서 피가 넘쳐흐를 것 같았다.

비는 청동기 옆에 널부러진 아무 죽간이나 빼냈다. 먼지와 함께 죽간이 펼쳐지고, 그 위에 비교적 새로 쓰여진 글이 쓰여 있었다.

 

<현군(玄君)>의 예법에 따라 성심껏 제사를 지낸 이후 오한과 구토가 사라졌다. 위(衛)에서 온 번씨(繁氏)는 은인(殷人)의 후예로 현군에 정통했다.

채읍(采邑)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거(莒)를 공격하여 포로를 얻었다.

신에게 이를 바치며 계손씨의 안녕을 기원한다.

부왕(副王) 유격(猶格)․삭탁사(索托斯) 여러번 불렀으나 답하지 않다.

 

조부 계평자때 거나라를 공격한 적이 있었으니 필시 그때의 일일 것이다. 할아버지가 쓴 글을 읽고 있으려니 기분이 이상했다. 비는 종손이 아닌 첩의 자식이라 조부와 대화를 한 적은 없었으나, 먼 발치에서 본 조부가 자신과 닮은 사람이라 여겼었다. 어쩌면, 부친보다 자신이 조부를 닮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할아버지의 글씨는 반듯하지는 않았으니, 그처럼 수레를 몰거나 사냥을 하는 것을 좋아하셨던 듯 하다. <현군>이라는 책은 자공이 베껴간 <현군칠장>을 말하는 듯 했다. 비는 계속해서 할아버지의 기록을 읽었다.

 

거인(莒人) 열을 벌(伐)하고, 셋을 묘(卯)하였다.

계씨가 흥성합니까?

답이 없다.

 

서고 안에서 문득 찬바람이 불어오는 듯 하다. 아무것도 아닌 의미를 모르는 문장을 비는 세 번 더 읽었다. 골 속에서 문득,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 날, 갈대 속에서 들려온 짧고 먼 비명. 비는 홀린 듯 비명속에 죽간을 더 읽어 내려간다.

 

벌하고, 묘하고, 해하고, 세하고...

자르고, 쪼개고, 치고, 발라내고...

 

이윽고 어느날 계평자가 38명을 세(歲)하였을 때, 신이 응답한다.

 

계손의여의 자손이 흙더미를 세운다.

나아납(奈亞拉), 나아랍, 나아랍 이아. 세 번 외치다.

 

할아버지, 계평자는 여기에 주석을 달았다.

 

흙더미는 봉토를 의미하니, 필시 내 자손은 나라를 세우리라.

 

비명소리가 뚝 끊겼다. 비는 그 문장을 다시한번 읽었다. 내 자손은 나라를 세우리라. 계손씨가 나라를 세워 군주가 된다. 자공은 노나라의 임금이 노나라 땅에서 죽지 못하리라고 했다. 두 가지가 모두 하나를 말하고 있었다.

비가 할아버지의 위업을 이어야 한다고!

비는 신기하게도 이 죽간 더미에서 현군이 바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계평자의 죽간에서 세걸음 떨어져 깊숙한 안쪽에 그것은 있었다. 소보다 작고 개보다는 큰 동물의 뼈를 균일한 크기로 잘라 끌로 그 위에 글귀를 새긴 그 책은 세월을 입증하듯 누렇게 떴으나 동시에 새것처럼 반질거렸다. 그 책은 뼈 주인들의 가죽을 잘 말려 끈으로 써서 묶여 있었다. 비는 그것을 그냥 알 수 있었다.

 

<현군칠장비경>

이 책의 내력은 첫 구절에 적혔다.

<현군>은 환몽경(幻夢境)의 신들이 소유한 책으로 처음에 알백이 가지고 와 후손에게 알도록 하였으나 이윽고 상족이 옛 글을 잊고 제사를 멀리하며 한 은나라 임금이 이 책을 두려워하여 태웠으나 22대 임금인 무정(武丁)이 다시 갑골(甲骨)에 새긴 것을 주공이 태우려 했으나 무경(武庚)이 다시 모아 복원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부의 서고에 있는 책은 무경이 다시 만든 책 원본이 아니고 다시 모아 조부가 엮은 책인 듯 했다. 칠장은 시경, 서경, 예경, 악경, 역경, 춘추, 신보의 일곱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인간 세상이 아닌 저 너머 세상의 것으로 옛 신이 부르던 노래, 이사(伊斯) 종족의 역사, 제사지내는 법, 감히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상제보다 더 높은 신을 위한 노래, 주문과 술법과 산명법, 인간과 짐승이 뒤섞인 옛 종족의 역사, 위대한 신들의 부르기 어려운 이름의 목록으로 정리했다. 조부가 열심히 모았으나 조각난 일곱 장을 모두 복원할 수는 없어 중요한 부분들이 많이 빠지고 훼손되었다.

뼈를 손끝으로 더듬을때마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으나 더 이상 그 소리는 두려운 소리가 아니었다. 가문의 영광을 경축하는 소리였다. 책이 그에게 간언하는 듯했다. 그렇기에 비는 알 수 있었다. 옹무 역시 제 환공에게 같은 방법을 진언했으리라는 것을.

비는 많은 시간을 <현군(玄君)>을 읽는데 썼다. 너무 많이 읽다보니 가죽끈이 너덜너덜해져 세 번이나 끊어졌는데, 기이하게도, 자고 일어나면 끈은 다시 붙어있었다. 현군은 총 일곱장으로 이루어진 기서로 상서보다 더 오래 전에 쓰여졌으며, 이조차도 한번 번역되어 골책에 베껴쓴 것이었다. 시, 서, 예, 악, 역, 춘추, 목록 일곱장으로 이루어졌으나 완전히 갖춰져 있지는 않아 읽기가 난해했다. 책은 저절로 붙는 기이한 힘을 가졌는데, 이렇게 쪼개지고 훼손된 것은 필시 현군의 신비로운 힘을 두려워한 누군가가 일부러 훼손한 탓일 것이다.

비는 점점 더 사냥을 자주 나갔다. 그는 사냥감으로 할아버지를 쫓아 현군의 역(易)에 쓰여진 제사를 재현하고자 애썼다. 여전히 구토와 두통에 시달렸으나, 이미 치료할 방법을 거의 알고 있었으므로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비는 점점 자신의 몸에 활력이 넘친다고 느꼈지만, 동시에 말수는 줄어들었다.

어느날 아들 강(强)이 그에게 물어왔다. 그의 낯은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비는, 눈을 굴렸다.

“아버지, 어째서 어린아이 우는 소리를 내십니까?”

“내가 언제 어린아이 우는 소리를 냈단 말이냐?”

비가 역정을 내며 강을 꾸짖자, 강은 거의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비의 소매를 잡았다.

“아버지, 무섭습니다. 그만 하십시오. 그 소리는 그만 내십시오.”

비는 자신의 소매를 잡아챘으나, 강은 쉽사리 소매를 놓지 않았다. 몇 번이나 휘둘러 옷깃을 고친 후 비는 엉덩방아를 찧고 황망해하며 엉거주춤 일어나 비의 소매를 다시 잡으려는 강을 피하듯 뛰어갔다. 강은 첩의 자식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다. 강은 그가 아니라, 그의 조부가 아니라 그의 아버지를 닮았다. 어쩌면 남유자를 닮았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그는 그 시선을 피해 은신처로 뛰어갔다. 그의, 그의 조부의 서고로. 그 책을 다시 읽기 위해.

비는 때로 서고에 사냥한 사슴을 끌고왔다. 가죽쟁이나 사냥꾼이 하는 천한 일이라 여긴 적도 있었으나 이것은 실로 중요한 제사의 일부였으므로, 스스로 연습해야하는 일이었다. 비는 자신이 노쇠했음을 알았으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움직일때는 다시금 자신의 몸에 활력이 돈다고 느꼈다. 머릿발이 솟구치고, 눈에 힘이 들어가고, 사슴의 목을 내리쳐 그 육신을 저 하늘 문을 지키는 신에게 바친다. 벌(伐)한다. 솟구치는 피는 자신의 힘이 되고, 입가에 맴도는 비릿함이 사라진다. 이윽고, 비는 이 피맛이 도는 고기를 씹을 때 자신의 구역질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가신이 내오는 식사를 물리고 생고기를 씹었다.

비는 더는 구역질하지 않았다. 두통도 사라졌다.

이는 필시 유격(猶格)이 그의 제물에 마음을 움직여 그에게 힘을 내려주셨음이라. 유격(猶格)․삭탁사(索托斯). 두려운 귀신, 무서운 신. 만물을 무심히 여기고, 사람을 추구(芻狗)나 제웅으로 여긴다. 신중의 신, 신들의 문지기. 계평자는 시신이 남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마치 허물을 벗듯, 녹아버리 듯 어느날 쭈굴쭈굴한 사람 가죽이 되어 속이 텅 비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가죽만을 장례지내면서 사람을 묻기는커녕 사람을 닮은 제기도 묻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계평자는 유격을 위해 제사지내, 신에게 선택받아 환몽경 너머의 땅에서, 옛 신 곁에서 경을 치고 춤을 추며, 그의 머리를 낫게하고 속병을 낫게하며 또한 그를 끊임없이 다그치는 듯 했다. 비는 사슴의 뼈를 쪼개어보고,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여겼다.

유격 삭탁사. 이야, 유격 삭탁사. 비는 청동기에 사슴 고기를 넣어 불을 뎁히며 여러번 신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의 말씨는 조금씩 둔중해져 이윽고 신의 이름은 요그 소토스 정도로 늘어졌다.

겨울이 되어 도성에는 눈이 쌓였다. 사냥을 다니기 좋은 계절이라 국군 역시 사냥을 갔으나, 비는 병을 핑계로 그 사냥에 따라나서지는 않았다. 대신 비는 마부인 번씨(繁氏)를 데리고 사수 강변으로 갔다. 겨울의 갈대들이 숨죽인 강변에 살얼음이 얼어있는 곳에서, 멀리 국군의 병사들과 대부들이 깃발을 흔드는 것을 조용히 보고만 있었다. 번씨는 추위 때문인지 수레를 끌며 손을 떨고 있었다.

“나리, 날이 추우니 들어가시지요.”

“우리 노나라 국군이 보이는구나.”

“나리...”

비는 고개를 훽 돌려, 번씨를 노려보았다. 이제 마흔이 된 그는 건장한 장정이었으나 어쩐지 한손으로도 그의 목을 비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조부가 말하기를, 번씨는 은나라의 후예로 <현군>에 통달했다고 했다.”

비는 조금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그는 번씨가 사슴같이 보였으나, 꾹 참고 말을 이었다.

“그러니 너는 내가 모르는 현군 칠장의 수수께끼를 알겠지? 할아버지에게 했듯 내게도 가르쳐다오. 국군을 잡아 제사지내려면 어떤 방식을 써야하느냐?”

“나리,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리의 조부님을 섬긴 것은 저의 조부입니다.”

번씨의 목소리는 두려움으로 가득차있어, 비는 그 목소리에 자신이 흥분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키가 커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힘줄이 자라나고, 등뼈가 곧아져, 이윽고 쑥쑥 자라나 그는 장년의 마부를 내려다보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 할아버지가 거나라 군주를 사로잡아 제사지냈을 때 그를 반으로 갈랐느냐? 아니면 목을 쳤느냐? 아니면 살가죽을 벗겼더냐?”

번씨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뼈로된 책이 내는 것과 똑같은 소리를 내며 수레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강변을 달음질 친다. 비는 그의 단번에 그를 뒤쫓았다. 거추장스러운 장검도, 옷도 벗어던지고 번씨를 뒤쫓아갔다. 그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금세 번씨의 어깨를 움켜쥐고, 그의 목을 씹었다. 으적으적 소리가 나며, 목의 살갗이 갈라지고 쇠비린내 나는 맛이 배어 나온다. 사슴과는 전혀 다른 그 선명한 맛이란. 그제야 알겠다. 망한 은나라의 왕, 신(辛)은 신들과 제사지내며 이 맛을 함께 맛보고 비로소 그 자신 또한 저 너머에서 온 신의 피가 흐르고 있음을 알고 자신을 제신이라 칭한 것이다! 그는 한참이나 번씨를 음미하고, 달이 떴음을 알았다. 반나절을 번씨의 살점을 물어뜯는데에 보낸 것이다. 거대한 보름달이 그를 비추고 있었다. 이미 국군은 사냥을 끝내고 궁성으로 돌아간 듯 했으나 상관 없었다. 그는 이 커진 몸으로 한달음질만에 엄성으로 가서 국군 장을 제 손으로 찢어버릴 것이다. 번씨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현군 네 번째 장에 적힌 숨겨진 비의(秘儀)를 달 너머 혼돈 속에 도사린 신들이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저 하늘이 아닌 저 하늘 너머에 살고 있다. 자미성이 화성에 삼켜질 때 엿볼 수 있는 저 너머, 반고가 세상을 나눈 땅 바깥의 여전한 혼돈에 살고 있다. 그들이 달에 비친 틈으로 자신들의 제사장, 제자, 자손에게 속삭인다.

국군의 그 풍성한 몸의 두 다리를 자르라. 그가 죽어가며 비명을 지르게 두라. 천천히 피흘리고 죽어가며 그는 신들에게 노래를 연주할 것이고, 더욱더 큰 노래를 위해 그 살가죽을 벗기라. 신들이 대답해 준 신비를, 신들의 이름을 살가죽에 새기고 살점은 우리가 함께 나누어 먹으리.

그러나 비는 더 전진하지 못하고 멈추어섰다. 사공이 얇은 살얼음을 쪼개며 노를 저어 오고 있었다. 얇은 얼음은 쩍 갈라지는 불쾌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보름달에 반짝이는 은빛의 칼날이 있었다.

비는 그를 알아보았다. 검은색의 비단 심의를 입은 그는 노인의 제자로, 6년이나 상을 치르고 제나라로 떠난 자공이었다.

그러나 “나를 알아 보겠소?”하고 묻는 것은 자공이 아니라 그의 곁에 선 사공이었다. 그는 초립을 던지고 몸을 숙이더니 활시위를 당겼다. 비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그는 한참늙었고, 수염은 하얘졌으며, 얼굴은 주름투성이었으나, 그 얼굴을 잊지는 않았다. 그가 쫓아가 죽이고 싶었던, 아버지 계환자의 가신인 정상(正常)이었다.

계환자는 죽으며 유언을 남겨 정실인 남유자 뱃속의 아이가 남자아이면 그 아이에게 작위를 물려주도록 했다. 여자아이를 낳았으면 좋았을 것을. 아니면 여자아이로 살았으면 좋았을 것을. 이미 그가 대부자리를 승계했음에도 정상은 국군에게 남유자가 낳은 아이가 남자아이라고 고자질했다. 그래서 비는 남유자의 아이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 집안 사람을 죽이게 한 죄를 묻고자 했으나 정상은 이미 위나라로 도망간 후였다. 그러니 어떻게 그 얼굴을 잊겠는가?

정상은 눈에 핏발을 세우고 한발 더 비에게 화살을 쏘았다. 비는 화살을 맞은 것이 어째서인지 몹시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가 비명을 지르자, 갈대숲이 흔들리며 어린아이 우는 소리가 사방을 메웠다. 자공은 작은 배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니부의 제자 중, 변(卞) 사람 자로의 검과 창이 가장 뛰어났다고 한다. 자공의 검도 이토록 유려한데, 자로는 얼마나 뛰어났던가?

자공은 그가 방금 갈기갈기 찢은 마부보다 다부지지 못했으나, 목을 꺾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공, 나요, 대부 비! 정상은 그렇다 치고 자공은 어째서 나를 공격하는 겁니까?”

비가 소리를 지르자 자공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냈다. 달빛에 섬뜩하게 검날이 빛났다. 그날, 빗물에 비치던 그 칼날처럼.

“소인과 군자는 같은 병을 앓아도 증상이 다르다더니, 선생님의 말에는 틀린 말이 없소.”

자공의 검은 비의 목을 꿰뚫었다. 비는 작살에 꿰인 물고기처럼 헐떡이며 검을 쥐었다. 그 날, 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 자공은 이렇게 낚시대가 아닌 검으로 ‘물고기’를 낚고 있었던 것이다. 비는 힘을 짜내어 그의 목에 더 깊이 박혀들어가는 검을 쥐고 뽑아냈다. 자공이 비틀거리며 거리를 두는 것과 동시에 정상이 또 활을 쏘아댔다. 비는 뒤돌아 달아났다. 수레도 타지 않고, 옷도 검도 바닥에 놓아둔 채 엄성으로 달려갔다. 벽을 타고 올라가 그대로 바닥으로 뛰어내려 자신의 저택으로 향했다. 목에서 피를 뿜으며 자신의 안뜰로 떨어지자, 쿵 하는 소리에 놀랐는지 간신히 장포를 걸친 사람이 뛰어나왔다. 비는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하고 안도했다. 그의 아들인 강이었다. 그는 목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손을 흔들며 강에게 옷을 가져다달라고, 자신을 안쪽으로 숨겨달라고 했으나 강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비는 부아가 치밀어 말을 듣지 않는 아들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을 쥐고 흔들었다. 몇 번 쥐고 흔들었으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아들에 대한 온정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한번 데구르르 굴렀다. 그가 끔뻑 눈을 느리게 떴다 감자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는 아들이 보였다. 그 앞에는 머리가 없는 거대한 짐승, 기이하리만치 다리가 길고 얼룩덜룩한 네발짐승의 몸이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서고의 청동기에 새겨진 짐승과 같았으나 사람의 머리를 먹을 목이 사라져 있다. 반대로 비는 자신의 목 아래가 없음을 알았다. 그러한 즉슨 그 짐승의 몸이 비 자신의 몸 임을 깨달았다.

자공이 든 검이 이쑤시개로 보일 만큼 커다란 몸은 조금씩 줄어들어 볼품없고 쪼그라든 목 없는 노인의 몸이 되어간다.

“대부께서는 병환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자공이 검을 집어넣고 강을 일으켜세우며 말했으나, 강은 몸을 지탱할 기력이 없는 듯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아, 눈물 한 점 없다니 불효자식이로다.

 

노애공 27년, 계강자 비(肥)가 죽었다. 삼환이 난을 일으킬까 근심한 애공은 월나라를 이용해 삼환을 토벌하고자 했다. 삼환이 애공을 공격하자 애공은 위로 달아났다가, 추로 간 후 마침내 월로 갔다. 국인이 애공을 복위하려 했으나 애공은 유산씨 집에서 죽었다.

계강자의 아들 강이 계소자가 되고, 계소자의 아들이 비(費)를 세워 비혜공(費惠公)에 올랐다. 이후 멸망하여 그 끝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황의(黄衣), 현군(玄君), 통주토성(通往土星), 수신(水神), 교전의(敎典儀)
순서대로 크툴루신화에 나오는 마도서들 이름을 음차 및 번역한 것. 노란옷의 왕, 현군칠장비경(샨의 칠비성전), 토성의 문(The Door to Saturn), 수신 크타아트, 시식교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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