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석승효- 스테일메이트

녘죠찌개 by 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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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뭔씹개적폐오타쿠글,,, 내가 보기엔 포타엔 자동 말머리 같은게 필요하다(?)

누군가가 움직이는 체스말이 되어본 기분을 느끼는게 처음은 아니었다. 화정 장학생이 되기로 자처했을 때부터, 구승효는 조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폰이었다. 필요할 때마다 원하는 자리에 승진 시켜서 부려먹는, 그런 편한 말. 어느날은 비숍의, 또 어느날은 나이트의 걸음으로 걸어야 하지만 구승효 자체의 가치는 여전히 그저 그렇게 치부되었다는 얘기였다.

선대 회장, 그리고 지금의 조남형 회장의 이르기까지. 구승효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쓰임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 주인이 조금 더 거칠게 부려먹는 느낌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이건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임이 아니다. 나는 그냥 내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희생 당하지 않을 궁리나 하는게 나아. 그렇게 생각하며 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구승효의 체스판이 멈췄다.

“네?”

“왜 말귀를 바로 못 알아들어. 해외 발령 취소라니까.”

“…죄송합니다.”

“나가봐.”

허리를 숙이고 나온 승효는 이해할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상대를 얼마나 더 잘 아냐는 부분으로 주인을 따진다면 구승효가 오히려 자신있었다. 말을 다루는 사람은 말의 쓰임에 대해서는 알아도 말의 기분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말은 자신을 움직이는 주인의 기분까지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조남형 회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구승효를 어디에 써야 할지는 알아도 의지나 자부심 따위를 고려할 가치는 없다 여겼다.

이제와서 해외 발령이 너무한 처사였다고 생각하며 철회하지는 않을 위인이라는 거지. 구승효가 아는 조남형은 그랬다. 그럼 이건 대체 뭐지? 다시 상국대 병원으로 돌아가는 내내 구승효는 있었던 일을 복기해봤다. 갑자기 내가 해외에 가는게 이득이 아니게 되기라도 했나.

지금으로서는 가장 설득력 있는 수였지만 화정에 대한 이슈는 거의 알고 있는 승효기에 고개를 저었다. 조남형의 계산이나 감정을 다 고려해봐도 뭔가 이상한 결정이었다. 새로운 화정의 회장은 구승효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 쓸모는 인정할지라도 아버지의 개였다는 사실에 거부감이 있었다.

전 회장이 구승효를 워낙 예뻐했기 때문에, 또 조남형 회장과 비교하곤 했기에 더더욱 꺼려했다. 전 회장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기억에 박혀있는듯 했다. 승효야,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말 대단한 노인이었다.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들리는 말을 하다니. 조남형 회장은 그게 아들 삼고 싶어하는 아쉬움이라고 받아들였던 모양이지만 구승효의 귀에는 전혀 다르게 들렸다.

네가 암만 예뻐도 피붙이는 아니니 어쩌겠냐. 그런 의미였다. 정말 아꼈다면 진작에 구승효에게 뭐라도 떼어줬겠지 제 아들에게 물려줬겠나. 승효가 이마를 짚었다. 설마 이제와서 구승효를 내다 버리고 싶어지기라도 한건가. 차라리 그쪽이 지금으로서는 설명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구는 젊은 회장이라도 기본적으로는 재벌가 인간이라 계산속이 우선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결국 희생되나 싶어 씁쓸해졌을 때 전화가 왔다. 그러자 절로 웃음이 났다.

“오 의원님 진짜 저한테 감시라도 붙여놨습니까?”

-무슨 일이 있었나보네요.

“저 해외발령 취소 됐습니다. 아… 이 소식 좋아할 사람이 의원님 밖에 없어서 좀 늦게 알려주려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전화를 하시네요.”

-저만 좋은 일인건가요?

“하아, 뭐, 저도 이 나이 먹고 롱디는 좀 껄끄럽긴 했는데….”

승효가 혀를 찼다. 솔직히 그는 연애를 깊게, 오래 해본 적이 많진 않았다. 인생 전부를 화정에 바쳤고, 무엇보다 화정이 우선순위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많이도 싸웠다. 넌 나야 화정이야? 그 질문을 왜들 그렇게 많이 하는지, 그때마다 구승효는 대답할 수 없었다.

고민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단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너보다 회사가 우선이라고 말하는게 예의가 아니라는 것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이었지. 그래서 오영석 의원과 연애를 하기로 결심했을 때는 먼저 이 사실을 밝혔다. 당신보다 화정이 더 우선일 수도 있다고. 그러자 영석은 예쁜 미소를 짓더니 고마워요, 말해줘서. 그런 대답을 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해줄 수 있을까. 구승효는 가끔 이 모든게 꿈이 아닌가 싶었다. 일에 미쳐있는, 그래서 연애고 결혼이고 전부 애저녁에 포기한 제게 이렇게 딱 맞춘 것 같은 사람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국회의원인데.

오영석 의원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국회의원이었다. 백령해전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산증인이며 영웅이었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아름다운 얼굴, 그러나 단호한 자세 때문에 정치에 대한 혐오를 불식시킨다는 말까지 자아내는 정치인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그런 인간이 저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혹시 이것도 정치의 일환인가 싶었을 정도였다. 구승효에게 정치인 오영석은 눈은 즐겁지만 어쩐지 껄끄러운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은 진짜 취향이긴 하지. 예쁜 것에 환장하는 구승효에게 이런 미인은 알고도 삼키는 독이었다. 미인에 미쳐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옛날 황제들에 대고 구승효는 욕을 하곤 했었다. 돈보다 중요한게 어디있다고? 하지만 오영석을 알고나자 살짝 이해가 되려고 할 지경이었다.

뭐 지금 상황에서는 안 맞는 비유긴 하다만. 경국지색에 빗대기엔 오영석은 화정도 감히 어쩌지 못하는 거물이었다. 차기 대권 주자와 척을 지고 싶어하는 재벌가가 어디있겠는가. 영석이 승효와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승효를 통해 친분을 쌓으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키지 않지만 자리도 몇번 만들어줬었지. 턱을 괴고 떠올리던 구승효의 몸이 점점 세워졌다. 그러고보니 언제부턴가 조 회장이 구승효에게 오영석 의원에 대해 떠보지 않게 되었다.

구승효가 생각하기에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화정과 영석이 의견이 맞아 구승효가 필요하지 않게 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영석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치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비주류를 자처하는 사람이고 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걸 선호했다.

화정같은 재벌가와 손을 잡으면 언젠가는 휘둘리게 된다는 걸 모를 위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화정과 접촉하는 자리를 꺼려할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승효에게 그런 자리를 안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언질도 없었다.

화정 쪽도 마찬가지였다. 영석과 완전히 틀어졌다면 조 회장은 그 화풀이를 구승효에게 했을 사람이었다. 그리고 관계 개선할 방안을 요구했겠지. 이렇게 애매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터였다.

작금의 조 회장은 승효에게 화가 났다기보다는 오히려 불편해하는 것처럼 굴었다. 구승효는 그제야 자신이 품고 있던 의문의 정체를 알았다. 조 회장이 저를 불편해 한다. 늘 목줄이 묶인 채 오랜 시간 훈련받은, 그래서 목줄을 풀어준대도 못 나가는 개처럼 다루던 조 회장이 구승효를 꺼려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만드는게 가능한 사람은 구승효 주변인물 중 단 한 사람 뿐이었다. 하나 있는 자식이 손자 대신 안겨준 강아지 예뻐하기 바쁘신 부모님이 그럴 힘이 어디있을까. 당연히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제 애인이 이유인게 분명했다.

하, 승효는 기가 막혀졌다. 저를 움직이는 손이 하나인줄 알았더니 둘이었단다. 그간 티 하나 안 내려고 노력했을 그 예쁜 얼굴에 주먹을 날려야 할지 입을 맞춰줘야 할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손을 쥐었다 펴면서 생각하던 승효는 영석에게 연락을 넣었다.

“대화가 필요한 것 같다는게 무슨 의미에요, 승효씨?”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승효씨.”

“헤어지자는 말 아니니까 앉아요. 참나.”

일부러 좀 심술을 부리긴 했다. 저 몰래 이런 상황을 만든게 좀 괘씸해서. 그러나 바로 얼굴이 하얗게 굳은채 온걸 보니 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하여간 사람이 왜 저렇게 예뻐가지고. 혀를 찬 승효는 앉아서 차를 마시다가 툭 던졌다.

“내 애인이 이렇게 유능한 사람이었던 적이 처음이라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 일단 그래도 고생 하셨습니다. 연애하면서 일하기도 바쁘실텐데.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의원님 체력 한번 대단하네요.”

“….”

“제가 눈치 못 챌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의원님 같은 사람이 해외 발령 취소 나면 내가 뭔가 이상한 낌새 맡을 거라고 예상 못했을리가.”

“미안해요. 미리 말 안 해줘서.”

“진짜로? 진짜 미안합니까?”

영석은 말없이 찻잔을 들어 마셨다. 승효가 헛웃음을 지었다. 부정하지 않는다라… 영석은 아무래도 미안하지 않고 앞으로도 이런 일을 반복할 생각인듯 했다. 왜? 그런 의문을 뱉기도 전에 영석이 입을 열었다.

“승효씨가 화정과 나, 둘중 하나를 선택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어요.”

“왜요, 내가 당연히 화정을 선택할까봐?”

“그런가요?”

이번엔 승효가 말을 잃은 채 입술을 핥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전 연애와 영석은 좀 다르긴 했다. 다른 사람이 뒤에서 이런 짓을 했다면 승효는 대화를 하자고 하기 전에 헤어지자고 문자로 보내고 연락을 차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명을 할 기회를 준 것도 이례적이었고, 그 기회를 실시간으로 걷어찼는데도 마주보고 있는 것은 엄연히 특별 취급이었다.

그런 사람을 과연 화정을 위해 버릴 수 있었을까? 스스로도 의심스러운 문장이었다. 영석은 아무래도 구승효 자신도 모르는 애정의 깊이를 가늠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얗고 예쁜 얼굴과 달리 응큼한 구석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래서 정치인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하는가 보다 싶었다.

“그러네요. 내가 내 생각보다 의원님을 참 많이 좋아하긴 하나 봅니다.”

“승효씨….”

“그런 것까지 알면서 내가 나몰래 뒤에서 수작 부리는 걸 싫어할 줄 몰랐다고 말하진 않겠죠.”

영석은 대답을 포기했고 승효는 소파 팔걸이를 툭툭 친 뒤 말을 이었다.

“화정하고 엮이는게 싫었으면 그냥 말을 하면 되잖아요. 아무리 나라도 좋아하는 사람이 싫다는 걸 억지로 강요하진 않습니다.”

“그게 싫었던게 아니에요.”

“그럼.”

“…내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걸 참을 필요를 못 느꼈어요.”

승효의 눈썹이 올라갔고 영석은 늘 그렇듯 조용하고 차분하게, 어딘가 이상한 말을 털어놓았다.

“차라리 승효씨를 인질로 잡고 협박했다면 한번은 져줬을 거예요. 그정도로 나한테 중요한 존재라는 걸 각인 시켜줄 수 있다면 그럴 가치가 충분했거든요. 근데… 그러지 않더라고요. 마치 나한테 승효씨가 그정도로 대단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당혹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상상도 못했던 대답을 듣고 있으니 구승효는 이마가 지끈거려왔다. 어딘가 소름끼치는 사람인건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중증일 줄이야. 더 기가 막히는 건 따로 있지만.

이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이제라도 영석을 피해야 한다거나 뭔가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구승효 본인이었다. 남말 할 처지가 아니네. 아무래도 구승효도 오영석에게 미쳐있는 모양이었다.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에 아찔해진 승효가 입가를 쓸었다. 기분이 아주 나쁜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기쁜 것도 아니었지만. 승효는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싶어서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지금같은 취급을 받는게 정말 싫었다면 내가 화정을 나왔을 겁니다. 조 회장에게서 도망쳤겠죠. 나도 그정도는 할 줄 압니다. 이 상황은 내가 선택한 거라고요.”

그러자 영석이 얼굴을 굳히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승효씨, 아무도 군인에게 네가 선택한 전장이라고 말하지 않아요.”

이럴 때 구승효는 오영석이 아직도 군인처럼 생각한다는 걸 느끼곤 했다. 어쩔 수 없겠지. 군인으로 살았던 세월이 길기도 했고, 아직 군인일 때 받았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 미치겠네. 구승효는 그런 흔적들을 마주할 때마다 제 의지가 한풀 꺾이는 걸 마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다독여 세울 생각이 들진 않았다.

난 군인이 아닙니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구승효도 오영석이 그 다음으로 할 말이 무엇일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정말 군인과 크게 다른가? 명령한대로 움직이고, 도망치려면 모든 걸 버려야 하는 제 처지가, 이 장기말 같은 삶이 명확히 구분할 수 있을만큼 나은가? 불행히도 아니기에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하아, 일단 알겠습니다. 날 위해서 그랬다는데 더 나무라기도 좀 그렇고요.”

“….”

“하지만 분명히 말해두는데, 난 이런 일 넘길 정도로 의원님을 좋아하긴 하지만 두번째는 자신 없습니다.”

“알겠어요.”

대답만 잘해요. 승효는 그렇게 생각하며 혀를 찼다. 그런 승효에게 웃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영석은 팽개쳐놓은 일거리를 챙겨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림 앞에 놓여있는 작은 테이블 위 체스판으로 다가갔다.

판 위에는 말이 오직 세개 뿐이었다. 하얀색 킹, 그리고 검은색 킹과 퀸으로 승진한 폰. 오영석은 조심스럽게 폰을, 아니 제 퀸을 있어야 할 하얀색 킹의 옆자리에 두었다. 오영석이 원하는 전개는 킹과 퀸의 승리가 아니었다.

스테일메이트. 킹이 체크메이트 상태가 아니지만 이번 차례에 스스로 체크메이트가 되는 자충수밖에 남지 않았을 때를 의미한다. 영석은 물론 이길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퀸이 희생되어야 하거나, 그럴 여지가 생기는 것은 사양이었다. 때문에 승리를 포기하고 무승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려면 상대인 검은색 킹이, 조 회장이 둘 수 있는 수를 차단하고 퀸이 아군이 아닐 수 있다 의식하도록 만드는 게 필수였다. 그 과정에서 구승효에게 조 회장이 견제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자신임이 드러나게 되었지만 기분이 상당히 좋았다.

수가 읽힌 건 원래라면 불쾌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영석은 생각만 해두던 걸 확인받게 되었다. 구승효가 제 평생을 바친, 제 모든 것인 화정보다도 오영석을 좋아한다.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모든 말을 희생하고, 가진 수를 다 들킬 가치가 있었다.

영석은 승효의 마지막 말을 생각했다. 두번째는 자신 없다… 그래서 영석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건 한치의 거짓말도 없는 진심이었다. 알겠어요. 앞으로는, 절대 안 들키도록 할게요. 그렇게 생각하며 영석이 손가락으로 퀸을 쓸었다. 언젠가는 스테일메이트로 그를 이 체스판에서 내려가게 만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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