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석승효- 피조물

녘죠찌개 by 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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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영화 박쥐에서 영향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뭔씹 개적폐오타쿠글 주의

피부 삭은 냄새에 잠에서 깨어났다.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설익어서 시계를 확인해보니 아직 새벽 5시였다. 주름 진 손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몸을 더듬고 있었고, 느물하게 성감대를 자극하는 손길이 짓궂은데도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아 가만히 창밖만 바라봤다.

“이런, 늙은이가 깨웠나보구만.”

“…아닙니다. 일어나려던 참이었습니다.”

물러나는 손길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다. 몸의 주인이 깨어난 것이 늙은 이에게는 흥이 깨지는 요소인듯 했다. 구태여 그걸 캐묻지 않았다. 나날이 낡아가는 육체로, 한창 나잇대 남자를 안는 것이 여의치 않아 잠들었을 때나 탐해보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늙으면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 해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아 그런가. 끌끌거리는 목소리에 가래가 끓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비위를 맞춰야했다. 아직 정정하신걸요. 그 말에 노인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웃다가 이불을 끌어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생생한 나신을 탐내며 말했다.

“그래도 역시 젊은게 달라.”

“….”

탁한 눈에 깃든 열망은 육욕 따위가 아니었다. 탐나는 그릇을 보는 것 같이 번들거리고 있었고 그 사실이 진절머리가 났다. 가질 수 없는 걸 욕망하는 인간이 얼마나 추한지 매일 눈뜨고 봐야 한다는 건 삶을 비참하고 무료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시한번 창밖을 봤다. 끝이 잘 보이지 않을만큼 넓게 펼쳐진 화원이었으나, 분명히 끝이 존재했다. 그리고 거기가 발을 디딜 수 있는 한계선이었다.

이 집을, 노인의 구역 밖을 나갈 수가 없다. 몸을 무겁게 짓눌렀지만 일어나야했다. 오늘은 오늘의 일정이 있으니까. 노인의 비위를 맞추려면 제 쓸모를 다해야 한다. 바늘 자국이 수없이 나있는 제 팔뚝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침대에서 일어나자 노인이 기꺼워하는 눈치였다. 그에게 잠든 젊은 몸은 배출구일 뿐이고 깨어난 싱싱한 육체는 기생할 출입구다. 경멸을 삭히며 매미 울음 소리에도 긴팔을 챙겨입을 때 노인이 송장 목 비트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승효야,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알지?”

승효는 대답없이 미소지었다. 이 또한 10여년을 반복하니 의도를 생각하기보다 앞서 얼굴이 움직였다. 습관이란게 얼마나 무서운지, 그리고 관성이란 얼마나 따분한지. 뒤를 돌자마자 얼굴을 굳힌 승효가 침실 문을 활짝 열었다.

어느 한적한 시골에 위치한 저택의 일과란 늘 따분했으나 목가적이진 않았다. 삶의 순환이나 생산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일 것이다. 승효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몸을 씻고 노인의 서재에 놓인 커다란 나무 의자에 묶여야 했다.

아무것도 걸치지 못한채 사지가 결박된 채로 있으면 간호사 출신이라던 고용인이 들어와 팔에 바늘을 꽂고 피를 뽑았다.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순결한 피여야만 한다고 노인이 고집한 탓이다.

처음엔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소름 끼쳤지만 지금은 감흥없는 눈으로 서재에 장식된 박제 매를 바라봤다. 플라스틱 의안이 부자유스럽게 번쩍이는 걸 빤히 바라보며, 영원히 접히고 만 날개가 얼마나 컸을지 따위를 가늠해보았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노인이 아기처럼 상기된 얼굴로 조심스럽게 팔뚝을 내밀었다. 승효의 피를 노인에게 주사하는 동안 다른 고용인이 의자에서 풀어주고 옷을 입혀주면 노인의 흡혈도 끝이 났다.

젊어진 느낌이라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좋아하는 노인에게 고용인들과 같이 박수를 쳐줬다. 짝, 짝, 짝, 아무런 의미도 없이 세번 박수를 치고 나면 드디어 아침을 먹을 수 있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떠 식당에 들이치면 승효는 아침부터 일어났던 일과, 눈앞에 보이는 추한 얼굴에 입맛이 떨어진 채로 깨작거렸다.

그 다음은 일과라고 할 것이 없다. 노인은 산의 정기를 받으러 간다며 혼자서 나가버리고, 승효만이 갇힌채 책을 보거나, 화원을 거닐거나, 그도 아니면 명하니 옅은 초록빛 벽지를 바라보며 누워있는 게 전부였다.

아, 차라리 잠들어서 영원히 깨지 않고 싶다. 손끝을 발갛게 물들이듯 스며드는 햇빛을, 손가락을 꿈틀여 만져보던 승효가 그런 생각을 할 때 고용인이 문을 세번 두드렸다. 노인이 돌아왔다는 뜻이다. 이렇게 이른 시간에 귀가라니, 낯설었지만 아주 없던 일도 아니라 그저 기력이 그새 쇠하였나보다 생각할 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온 노인은 혼자가 아니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와 죄송합니다.”

“승효야, 인사드리거라. 이쪽은 오영석 선생님이라고 아주 중요한 분이야.”

“…처음 뵙겠습니다. 구승효 입니다.”

“오영석 입니다. 남편분께 듣던 것보다 더 아름다우시네요.”

승효가 그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나, 이번만큼 빈말이라고 생각된 적도 없었다. 그렇게 말하는 이방인의 얼굴이 너무 아름다웠던 탓이다. 하얀 얼굴과 단단하고 날렵한 턱선. 선명한 이목구비와 파랗게 날이 선듯한 안광. 대리석을 섬세하게 건드려놓은 것 같기도 했고, 신을 박제해놓은 듯 느껴지기도 했다. 낯설고 또 새로운 감각에 홀려 쳐다보던 승효가 영석과 눈이 마주쳤다.

꼭 영혼이 들추어진 것 같았다.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관통당하는 것 같아서 승효가 절로 숨을 삼킨 뒤 고개를 슬쩍 돌렸다. 승효는 밖에서 제가 어떻게 보이는지를 알고 있다. 노인이 승효에게서 피를 약탈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구승효야 말로 돈많은 노인에게 젊음을 담보로 기생하는 속물인 것이다.

늙은 부자의 젊은 배우자. 영석이라는 남자가 자신을 어떻게 볼지 너무나도 분명해서 승효는 민망해졌다. 그건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저를 그렇게 바라보는 시선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별다른 감흥이 없어진지 몇년째인데, 이제와 돈에 노인에게 팔려왔던 시절로 돌아간다니.

두말할 것도 없는 퇴행이었으나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오히려 매일 같이 빠지는 피로 창백했던 심장이 간질거리기 시작해서 승효는 입술을 말아물며 고개를 가볍게 숙인 뒤 노인쪽으로 애써 고개를 돌렸다.

노인은 제법 성질이 고약했다. 그걸 표출할 기력이 없을 뿐이지. 새벽 5시에 일어나지 않으면 말동무가 없어서 적적하다고 하소연을 해대고,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승효가 처음 이 집에 팔려왔던 날을 들먹이며 그사이 나이를 제법 먹은, 여전히 젊은 육체를 은근히 탓했다.

그래서 승효가 이 집에서 하는 일은 큼직하게 따지면 오로지 하나였다. 노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 그걸 위해 시선을 줬더니 노인이 슬쩍 턱짓을 했다. 방으로 들어가라는 의미다. 비밀 얘기가 하고싶으신 모양이군.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방으로 들어가려는데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면 식사 같이 하시죠.”

당황한 승효가 다시한번 지시를 받기 위해 노인을 쳐다봤지만, 노인 또한 예상 외의 상황에 영석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영석은 그런 노인과 승효에게 번갈아 웃어줬고, 노인의 떨떠름한 허락이 떨어져 승효 또한 불편하게 식당으로 향해야 했다.

노인은 손님을 상석에 앉히려고 했으나 영석은 집 주인을 두고 거기에 앉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결국 노인이 상석에 앉은 채 승효는 영석과 마주 앉게 되었다. 손님과 같이 식사를 했던게 언제였는지 까마득한 승효는 애써 침착함을 가장했다.

승효의 젊음은 노인에게 마냥 약은 아니었다. 태생이 욕심많고 의심많은 그에게 젊고 아름다운 배우자는 늘 자랑스러운 트로피고, 제 여전한 기력을 자랑할 고깃덩이였지만 동시에 벌레가 꼬이는 꽃이었다. 때문에 손님이 오면 승효는 늘 인사 한번 한 뒤 방에서만 지내야 했다.

혹시라도 손님이 승효에 대해 물어보는 일이 생긴다면 손님이 가고 난 뒤에 노인은 하루종일 뭘 하고 지냈느냐고 이야기를 해달라 조르기도 했다. 혹시라도 밖에 나가서 눈이 맞은 적이 있을까 검사하기 위함이었다.

오늘 이건 한동안 괴롭겠군. 그래서 평소라면 손님이 제게 관심을 두는게 싫고, 내키지 않은 승효였으나 우아하게 포크와 나이프를 쥔 영석을 힐끔거리고 있으니 추궁 좀 듣는게 대수인가 싶어졌다.

영석의 식사는 조용하고 깔끔했다. 칼로 고기 자르는 소리 같은 소음이 거의 나지 않은채 정중한 모양새가 상석에 앉아 입을 쩍쩍 벌리며 게걸스럽게 먹는 노인과 비교되었다. 승효는 어쩐지 비참해지는 느낌에 조심스럽게 식사를 이어갔다. 그러나 쩡, 식기 깨지는 소리가 났다. 노인의 접시가 무너져있었다.

힘이 주체가 안 되는 모양이라고 껄껄 웃던 노인이 음식이 튄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노인이 없는 식사는 처음이라 승효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굳어있을 때 영석이 말을 걸었다.

“잘라 드릴까요.”

“아, 아뇨. 괜찮습니다.”

의외의 제안에 승효는 얼른 거절했고 제 성급한 반응에 혹시 상대가 기분 나빠할까 관찰했다. 그러나 영석은 무안해하거나 아쉬워하는 기색 없이 가만히 웃었고, 승효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 시선에서 의도가 읽히지 않는 것이 승효의 목울대를 울렁이게 했다.

구승효는 기민한 편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러니 까탈스러운 노인네 비위를 맞추며 이 감옥에서 살아남고 있는 것이고. 남의 눈치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울 것도 없는 머리를 가졌으나 정말 이상하게도 영석의 마음만큼은 보이질 않았다.

그게 거부감이 들진 않았다. 다소 의아했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 사람의 머릿속에 들어가보고 싶다.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할 때 영석이 승효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다시 손을 움직였다.

이번엔 나이프 소리가 제법 들렸다. 손에 힘을 실었는지 커다란 손에 핏줄이 불거져있었고, 슥슥 마찰음과 함께 쩍, 육즙 담긴 고깃덩이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핏기가 도는 살덩이를 한번 더 잘라 피와 즙이 뚝뚝 떨어지게 만든 영석은 그걸 천천히 입에 넣었다.

벌어지는 모양 좋은 입술과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 그리고 혀 따위가 고깃덩이를 삼키는 모습이 느릿하게 눈에 들러붙었다. 육즙으로 살짝 젖은 입술을 엄지로 훔치는 모습에 승효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피처럼 붉고 선명한 의도였다. 일부러 살덩이를 집어 삼키는 모습을 승효에게 보였다. 그 적나라함에 끌려간 승효는 그가 원했던 대로 식사를 의식하게 되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영석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승효의 몸이 점차 달아올랐다.

자리가 불편해졌다. 몸이 안절부절 못하게 되어, 어정쩡하게 든 나이프와 포크를 내려놓지도 못하고 있는 승효를 보며 영석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렸다. 얼굴이 확 달아로는 승효는 더이상 지켜볼 엄두가 나지 않아서 시선을 제 접시로 잡아끌었다.

제 접시에도 살코기가 놓여있었다. 영석과 달리 거의 먹지 않은 것이었다. 노인이 돌아오기 전까지 식사를 멈춘 것이었으나 아찔할만큼 식욕이 돌고 있었다. 머뭇거리던 승효가 고개를 들었을 때 영석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쩐지 부추기는 것 같아서, 속내를 드러내자면 그러길 바라면서 승효가 제 나이프를 들었다.

나이프 끝이 고깃덩이를 누르면서 육즙이 접시 위로 흘렀다. 마냥 무르지 않고 살짝 당당한 덩어리를 조심스럽게 자르자 이로 으깨면 입안이 젖을 것 같은 결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안에 넣자 퍼지는 향에 낮은 신음을 낼 뻔한 승효가 천천히 씹었다. 그 모습을 영석이 지켜보고 있었다.

배 안쪽이 꼬이는 것만 같아서 승효가 눈을 깜빡였다. 더워서 단추라도 풀고 싶을 정도였다. 뜨거워진 눈으로 영석을 힐끔거릴 때 노인이 자리로 돌아왔다. 갑자기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었으나 몸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안녕히 주무세요.”

처음으로, 노인이 저를 건드리지 않고 잠을 자버리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애매하게 달뜬 몸을 배배 꼬면서 설잠을 잘 수 밖에 없었다. 어디라도 해소하고 싶었고, 노인의 비루한 육체로라도 진정해보려고 했으나 그또한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그럼 이대로 이 열기를 속으로만 삭혀야 하나. 언제까지? 손님이 저택을 떠나고 나서도 한참을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서 승효는 아득해졌다.

그렇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노인과 손님이 오지 않을 화원으로 발걸음을 돌린 차였다. 어느덧 자라서 꺾어도 될만한 장미를 펼쳐놓고 손질을 할 때 누군가 다가온듯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승효의 눈가가 떨렸다. 노인의 그림자라면 이렇게 거대하지 않을 것이다.

“길을 잃으셨나 봅니다.”

“맞게 온 거예요.”

얼굴이 붉어지는 걸 가리려고 승효가 장미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너무 그늘이 진 나머지 가시 하나를 놓치고 말았다. 아, 소리를 낼 때는 이미 손끝이 가시에 찔려 피가 나고 있었다. 어제 그 살코기처럼. 입에 손을 가져다대려는데 손목이 덥썩 잡혔다.

차가워서 놀랄 정도였으나 기묘하게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 여름이라, 서늘함이 오히려 좋았을지도 모른다. 승효가 고개를 올려다보자 영석은 피가 방울처럼 맺혀있는 승효의 손가락을 내려다보다, 그걸 제 입으로 가져갔다. 모양좋은 입술이 벌어지고 가지런한 치아가, 혀가 닿는 감촉에 승효가 움찔했다.

이가 피부를 살짝 짓눌렀고 피가 조금 더 나왔다. 그걸 혀로 훔쳐내면서 손끝을 빠는 동안에도 영석은 승효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손끝에 뾰족한 송곳니가 닿았다. 마주친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아, 승효는 다소 비이성적이지만 영석이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서워요?”

승효가 고개를 저었다. 놀랍게도 무섭거나 끔찍하지 않았다. 제 피를 탐하는 건 노인이나 영석이나 매한가지인데도, 진절머리가 나긴 커녕 오히려 기뻤다. 어차피 누군가 약탈할 것이라면, 차라리 남자가 제 목줄기를 물어뜯으며 게걸스럽게, 전부 앗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건 분명한 희열이었다. 승효가 제가 듣기에도 조금 들뜬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손님도 제 피가 목적이신가 보네요.”

영석은 그 말에 승효의 손끝을 가볍게 빨았다. 읏, 하고 몸을 움츠리는 승효의 손가락을 입에서 뺀 영석은 손목을 잡은 손에서 힘을 빼진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승효의 손을 조심스럽게 뒤집더니, 손등이 위로 가게 만든 채로 속삭였다.

“글쎄요. 그건 부가적인 거라.”

그리곤 입술이 손등에 닿았다. 손길처럼 차디찼지만 어쩐지 데일 것 같아서 승효가 떨리는 눈으로 봤다. 영석은 그런 승효에게 웃어보인 뒤 스르륵 손을 놓고 고개를 살짝 숙인 뒤 눈앞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빈자리를 넋놓고 보던 승효의 숨소리가 점차 거칠어졌다.

가슴이 펑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는 이 저택에 살면서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머리가 어지러운 경험이 결코 없지 않았다. 노인의 요구를 견디기 힘들었을 때, 경계선 밖을 나가지 못한채로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을 때, 그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억압된 것 같은 기분으로 저를 다독여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의 방향으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해방감! 제 피를 젊어지고 싶어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제 것이기에 탐을 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어딘가에 소리치고 싶었다. 손끝이 흥분으로 떨리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했다.

그리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손등에 남은 한기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차가운 손과 입술을 제 체온과 피로 녹이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채로. 그는 지금만큼 자신이 살아있는 인간임을 자각한 적이 없었다.

“승효야, 오늘은 일찍 자려고?”

“네, 조금… 피곤해서요.”

노인이 몸이 동했는지 봉사해주길 원하는 눈치였으나 승효는 처음으로 모른척 했다. 지금은 몸에 영석이 아닌 누군가의 손길이 닿는게 싫었다. 다 죽어가는, 아직은 미지근한 손으로 저를 더듬는걸 참지 못할 것 같았다. 노인은 그런 승효가 떨떠름한지 구시렁거리며 채근했지만 승효는 눈을 꾹 감아버렸다.

아아, 충동이 일었다. 그냥 노인의 얼굴을 베개로 뭉개어 얼마 남지 않은 호흡을 강제로 멈추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대로 영석의 방에 뛰어들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에게 매달려 이로 으깨지고, 잎술로 덮어진채로 탐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두 사람분의 욕구를 지탱한 침대는 버석하고 메말라있었고 날이 밝자 노인은 밤새 있었던 일에 기분이 상한듯 나가버렸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승효는 오늘이 제 피를 노인이 빨아가야 했던 날이라는 걸 깨달았다.

늘 빼먹지도 않을 정도로 중요하게 여겼던 일인데. 놀란 승효가 노인의 뒤를 쫓자 외출복을 챙겨입던 노인이 승효에게 말했다.

“앞으로 서재에 안 와도 된다.”

“….”

“선생님 도움만 받는다면 진짜로 젊어지는 건 일도 아냐.”

그러더니 순간 승효를 번뜩거리는 눈으로 봤다. 동공에 한가득 의심이 담겨있었다. 그는 제 영생과 회춘을 승효와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경계하면서 옷을 마저 챙겨입고 나가버렸고, 승효는 노인이 영석의 정체를 알고 모신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원하는 건 노인과 달리 영석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니까. 승효는 노인이 객사라도 해주길 빌면서 배웅한 뒤 그대로 영석의 방으로 향했다. 고용인들이 노인이 돌아오면 보고할 것을 알지만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문을 세번, 아니, 그 이상을 두드리자 영석의 방 문이 열렸다. 저를 찾아온 승효를 보자 영석이 놀란듯 굳었다. 그리고 승효는 그런 영석을 방안으로 밀어넣었다. 뒤로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승효는 영석을 뒤로 밀다가, 영석이 승효를 말리기 위해 팔뚝을 잡았을 때 그대로 영석의 발등 위로 올라갔다.

그는 무겁지도 않은 듯 고통하나 없는 표정으로 승효를 바라봤고 승효는 그의 목을 끌어안기 위해 발등 위에서 발꿈치를 들었다. 그리고 영석의 목을 끌어안아 제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게 한 뒤 달뜬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내 피를 다 마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승효씨가 저와 같아지길 원한다고 생각했는데요.”

“그럼 나도 차가워지잖아요.”

승효는 영석의 차가운 몸을 따뜻하게 데우고 싶었지, 서로의 차가움을 느끼며 부둥켜안고 싶지 않았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노인처럼 갈망하며 추해지느니, 차라리 누군가의 갈망으로 살고 싶었다. 영석의 입술과 손을 데워주고, 그의 유일한 온기가 되고 싶었다.

“당신같은 뱀파이어도 감정을 느낍니까?”

“…보시다시피.”

“그럼 지금 당장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당신이 내 피에 질리기 전에는 다 마셔줘요.”

“….”

“늙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는지 질리도록 봐서.”

영석은 생각에 잠겨보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통에 빠진듯 했다. 그의 알 수 없던 의도와 정반대로 가는 승효의 요구에 많이 곤란한듯 했다. 그러나 승효는 그게 좋았다. 영석이 고민을 한다는 점이, 그만큼이나 승효의 말을 중요하게 생각해준다는 점이 이로 꿰뚫린 것 같은 관통감과 희열을 느끼게 했다.

오랜 고뇌를 하던 영석이 승효를 조금 더 끌어안았다. 차갑고 단단한 몸에 제 체온을 옮기며 승효가 기대었다. 영석이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분명 후회하겠죠. 지금 당신 말을 들어준걸, 내 뜻대로 하지 않은 걸.”

승효는 이 집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피가 빨리는 존재가 된 이래 첫번째로 웃음을 터트렸다. 기뻐서 머리끝까지 달아올랐다. 아랫배가 꼬이고, 심장이 금방이라도 피를 밖으로 뿜을 것처럼 뛰었다. 드디어! 마침내, 완벽한 존재가 된 것만 같은 환희를 느끼며 영석의 턱에 입을 맞춘 승효가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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