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사쿄] 엇갈린 로맨스
오미사쿄 게스트북 [춘하추동 오미사쿄~오늘도 사랑해~] 여름 파트
점점 커지는 곤충들의 울음소리, 푸른 녹음과 풀냄새, 따가워지기 시작하는 햇살과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초여름 어느 날의 풍경. 생명력이 움트는, 무언가가 시작될 것 같은 공기. 그런 분위기에 등이 떠밀렸다.
초여름의 더위와 양손에 한가득 들린 장바구니의 무게 탓에 땀투성이인 얼굴. 당연하게도 이런 몰골로 고백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바람에 날리는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치는 익숙한 향수 냄새가 왠지 유독 가슴을 간질이는 기분에. 홀린 듯이 입을 열어버렸다.
“사쿄 씨. 좋아해요.”
툭, 자기도 모르게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는 뒤늦게 급히 입을 다물었지만 그런다고 이미 꺼낸 말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둘러대 무마할 생각으로 제 옆을 걷고 있던 사쿄를 힐긋 훔쳐보자, 길 한가운데에 멈춰선 채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이런 분위기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며 둘러댄다 한들 분명 좋은 반응은 나오지 않겠지.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진중한 눈빛에, 이미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사무치게 와닿았다.
“…….”
그렇지만 충동적인 고백에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 상황을 지켜본 후에 천천히 마음을 전할 생각이었는데. 분위기에 취했다고는 해도 역시 너무 섣불렀다.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어버린 것을 뒤늦게 자책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는 일. 머리를 굴려보지만, 눈치가 좋은 사람이니 그를 상대로 솜씨 좋게 얼버무릴 자신도 없었다.
굳은 공기 속에서 오미가 할 수 있는 것은 조용히 발을 옮기는 것뿐. 찌르르 울리는 곤충의 울음소리와 바로 옆에서 나란히 발을 옮기는 발걸음소리가 침묵 속에서 유독 크게 들려왔다. 청량하게 느껴지던 바람도 지금은 오히려 공허하게만 느껴졌다. …어떻게든, 수습해야 하는데.
“…아, 하하. 못 들은 걸로 해줄래요?”
“…하아. ……. 그래.”
이런 말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어떻게든 꺼낸 말에 고개를 끄덕여 준 것은 그나마 다행인 일이었지만, 사쿄가 내쉰 작은 한숨 속에서 느껴진 것은 조금의 불편함이었다. 조금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나. 이런 반응이면 자신에게 환멸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 차라리 속 시원하게 차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머릿속을 맴돌았다.
대답을 입 밖으로 낸 사쿄의 발걸음이 조금 빨라져 자신을 앞서 걷고 있는 것이 이 상황에서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지금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스스로도 짐작조차 되질 않았지만, 분명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닐 테니. 이런 꼴불견인 모습을 좋아하는 상대에게 보이고 싶을 리가 없었다.
두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조용히 사쿄의 뒤를 따라 걷는 오미의 머릿속에 온갖 상념이 들이닥쳤다. 바로 몇 초 전에 고백이 무산된 직후 그 상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걷는 것은 그다지 즐거운 기분이 아니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사쿄의 옆을 나란히 걸을 자신이 없었다.
극단원 기숙사가 이렇게 멀었던가. 오늘따라 돌아가는 길이 유독 더 멀게만 느껴졌다.
* * *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수고했어!”
“하아, 이제 끝이냐……. 수고-.”
“엄청 덥슴다!”
감독, 이즈미의 연습 종료 선언과 함께 레슨실의 은근한 긴장이 풀리고, 한둘씩 스포츠 드링크를 집어 목 뒤로 넘기며 한마디씩 사담을 입에 올렸다. 후끈한 연습실과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이 이제 여름의 더위가 부쩍 무르익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수분 보충에 신경 쓰고,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언제든 말해줘. 날이 꽤 더워졌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한 명씩 드링크를 건네준 이즈미가 이번에는 스포츠타월을 꺼내 들자, 아자미가 한숨을 푹 내쉬며 사쿄를 흘겨보았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망할 사쿄가 에어컨 트는 걸 허락만 해주면 될 일인데.”
“이 정도 더위는 참아. 무대에서도 덥다고 투정 부릴 셈이냐.”
“하? 연습하다가 몸이 상하는 게 더 문제잖아.”
이제는 익숙한 풍경. 아자미와 사쿄의 신경전에 이즈미는 익숙하게 오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평소라면 싸움이 시작할 쯤부터 사이로 끼어들어 말릴 타이밍을 재고 있었을 오미가 오늘은 아자미의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음에도 그쪽으로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쿄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모양. 물론 사정을 모르는 이즈미나 다른 가을조 단원들로서는 당황스러울 뿐. 이즈미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며 당황하는 사이, 사쿄의 한숨이 레슨실을 울렸다.
“시끄러워. 그 정도 몸 관리도 못 할 근성이라면 에어컨을 틀어주면 춥다고 감기라도 걸리겠군. 헛소리 그만 하고 개인 연습이나 해. 난 먼저 나간다.”
더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양 등을 돌린 사쿄는 그대로 연습실을 나섰다. 평소의 사쿄라면 절약 정신이 부족하다느니 어쩌니 하며 일장연설을 벌이며 아자미와 신경전을 벌이다 오미가 중재에 나선 후에야 머리에 오른 열을 가라앉혔을 텐데. 평소와는 달리 싱겁게 끝나버린 언쟁에 당황한 건 오히려 아자미 쪽이었다.
“뭐야…….”
찜찜한 기분에 짧게 중얼거린 아자미는 이즈미가 건네준 스포츠타월을 목에 두른 채 당혹감에 머리를 긁적일 뿐. 어색한 공기 속, 사쿄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던 오미는 그제야 사쿄가 나간 레슨실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반복된 오미나 사쿄의 이상행동에 가을조가 어렴풋이 의문을 품기 시작할 무렵, 시간은 그들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빠르게 흘러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다. 그 덕에 학교에 가지 않은 단원들로 북적이는 MANAKI 기숙사는 평소보다도 소란스럽게 들뜬 분위기였다. 학생들은 모여서 미리 방학 숙제를 하거나 방학을 알차게 쓸 궁리를 하는 중. 평소라면 그런 소란 속에서 간식을 챙겨주던 오미와 조용히 하라며 한두 마디씩 잔소리를 했을 사쿄는 방에 있는 게 분명함에도 거실에 나오질 않았다.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들뜬 기분으로 남성 잡지의 ‘인기 있는 남자의 여행지’ 파트를 읽고 있던 타이치. 화려한 경관의 야경 사진을 손짓하며 ‘이런 곳에서 멋지게 사진을 찍는 검다!’ 하고 들뜬 목소리로 말하다, 묘한 위화감에 주방 쪽을 휙 돌아본 타이치는 이내 그 위화감의 정체를 깨닫고 옆에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던 반리에게 말을 걸었다.
“반쨩, 요즘 오미 군, 역시 좀 이상한 것 같지?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역시 평소랑은 다른 것 같다고 할까……. 방에서도 계속 멍하니 있고.”
“확실히, 연습 때도 평소랑은 다른 것 같고. 오늘도 평소 같으면 주방에 있을 시간 아냐? 더위라도 먹은 건가.”
“으음……, 그거랑은 조금 다른 느낌이지만…….”
반리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빠진 타이치의 모습에,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자미가 다가와 말을 얹었다.
“망할 사쿄 때문 아냐? 생각해보니 최근에 둘이서 제대로 이야기하는 것도 본 적이 없고, 사쿄도 평소랑은 다르게 조용하던데. 시끄러운 것도 싫지만 이쪽도 이것저것 신경 쓰여서 짜증나.”
“아-, 그 아저씨도 좀 이상했지. 그 사람은 걱정되기보다는 쓸데없는 잔소리가 줄어서 좋긴 하지만.”
반리는 그렇게 말하며 키득댔지만, 역시 리더로서 신경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 만지작거리던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잠깐 고민하는 듯 턱을 괸 채 생각하던 반리는, 우선 부딪혀보기로 한 건지 몸을 일으켰다.
“시끄럽게 잔소리해대는 건 별로지만, 어울리지도 않게 조용한 것도 나름대로 기분 나쁘니까. 어떻게든 해 볼까.”
싸움이라도 걸러 가는 모양새로 소매를 걷어붙인 반리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타이치를 돌아보았다.
“오미, 지금 방에 있지?”
“응, 내가 나올 때까지도 계속 방에 있었어.”
“좋아, 쳐들어갈까.”
비장한 목소리로 입을 연 반리가 105호로 발을 옮기자, 아닌 척하면서도 사실은 사쿄의 상태가 줄곧 신경 쓰였던 아자미 역시 반리의 뒤를 따랐다.
105호의 문 앞에 선 반리가 두어 번 문을 두드리자, 들어오라는 오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문을 열고 발을 들인 방 안은 평소와 다른 점이 없는 것같이 보였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정돈이 깔끔하게 되지 않아 평소보다 조금 어수선한 느낌. 의자에 앉아있는 오미의 안색이 조금 어두운 것 역시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방 안을 둘러보던 반리는 무어라 운을 뗄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곧바로 본론부터 입에 올렸다.
“오미, 혹시 사쿄 씨랑 싸운 거?”
“응? …하하. 갑자기 무슨 일인가 했더니. …그런 건, 아니야.”
반리의 돌직구에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고백을 했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부끄럽다거나 사쿄에게 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고백을 한 상대의 손에 커왔던 극단 내 최연소의 순진한 소년이 듣고 있는 자리였다.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쉬이 입을 놀릴 안건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아자미의 앞에서 사쿄가 얽힌 이야기는 돌려 말하는 것조차 곤혹스러웠기 때문에 오미로서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이 최선이었다.
이런 화제가 나온 지금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아자미의 시선과 마주하는 것조차 묘하게 죄책감이 든 오미는 아자미를 힐긋 쳐다보다 시선을 돌리며 입을 굳게 다물어버렸고, 그런 모습에 아자미는 의아한 듯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재촉하듯 말을 건넸다.
“어떻게든 해보라고. 저 쫌생이 사쿄가 먼저 사과할 리는 없으니까.”
“싸운 건 아니지만. 그게……,”
“흐응. …뭐, 대충 무슨 일인지는 알 것 같네. 그런 거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알아서 잘 해결해 봐. 다른 녀석들한테는 적당히 둘러서 말해둘 테니까.”
“…고마워.”
오미의 어중간한 태도만으로 무슨 일인지 대충 파악한 듯한 반리는, 여전히 의문을 해소하지 못해 혼란스러워하는 아자미의 등을 떠밀며 말을 내뱉고는 방을 나섰다.
“어떻게든, …인가.”
반리와 아자미가 나가고, 닫힌 방문을 멍하니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린 오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한숨을 푹 내쉬는 것 정도였다.
어떻게든 할 수 있다면 벌써 해결했겠지. 오미로서도 이렇게 사쿄와 관계가 소원해진 채로 지내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매일 마주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에게 말을 걸 용기는커녕 눈을 마주하는 것조차 두려운 상태에서 마음이 편할 수 있을 리가.
사쿄와의 관계가 애매해진 탓에 극단원들도 곤란해 하는 것은 역시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장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이 마음을 포기할 수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오래 품어온 마음은 쉬이 접을 수가 없었다.
앉아서 고민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오랜만에 달리고 올까. 복잡해진 머릿속을 비우기 위해, 오미는 오토바이 키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섰다. 바닷바람이라도 맞으면 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까 하는 조금의 기대를 안고.
* * *
오미가 기숙사로 돌아온 것은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난 후. 무언가 생각이 있는 것인지, 오미는 제 방문을 지나쳐 106호실 앞에 섰다. 긴장이라도 하는 건지 노크를 하기 위해 들어 올렸던 손을 공중에 멈춘 채로 한참을 망설였지만, 반리가 했던 말이 자신을 재촉하는 기분에 결국 문을 두드렸다.
짧은 기다림 뒤에 열린 문틈으로 보인 것은 사쿄의 얼굴. 사쿄는 방문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아무 말도 없이 다시 문을 닫으려 했지만, 오미가 급히 손잡이를 붙잡아 당기며 입을 열었다.
“저, 할 말이 있는데.”
“……. 하아. 뭐냐. 짧게 끝내.”
“…….”
닫으려던 문을 힘으로 당기며 막아서는 오미의 모습에 문을 닫으려 손잡이를 당기던 힘을 천천히 뺀 사쿄는 한숨을 내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오미에게는 이렇게까지 냉담하게 대한 적은 없었을 터인데. 이렇게까지 명백히 자신을 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면 싫더라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음을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마음이 있던 상대라도 그 마음이 식을 만한 무드도 뭣도 없는 최악의 고백이었다. 대충 눈치채고 있었던 사실이긴 하지만, 최근에는 사쿄와의 접촉을 줄곧 피한 탓에 대화다운 대화조차 한 적이 없었던 오미로서는 직접적으로 이런 냉대를 받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한들 이미 늦은 일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후회보다는 이 뒷일을 생각하는 것. 열린 문 너머로 아자미가 방 안에 없다는 것을 확인한 오미는 짧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고백, 받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이고 자시고, 못 들은 걸로 해달라고 한 건 네 녀석 아니었냐.”
“그건, 그렇지만……. 최근에 다들 저희 눈치를 보는 게 느껴져서요. 이대로라면 연습에 지장이 생길 것 같고.”
“하아……. 일단은, 말해봐.”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심으로 연기와 마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걸 이용해 기회를 만드는 것은 양심에 찔렸지만, 역시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등을 떠밀었다.
“저랑, 한 번만. 같이 바다에 가주세요.”
“……뭐?”
“데이트 같은 걸 원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한 번만이라도. 단둘이서 어딘가 가보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은 알고 있다. 고백까지 한 시점에서 같이 나가고 싶다는 말은 사심을 담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쯤은 당연한 일. 심지어는 단둘이라는 조건까지 걸어놓고 데이트를 원하는 게 아니라는 말을 해 봤자 설득력이 있을 리가 없다. 물론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오미의 말을 듣던 사쿄는 고개를 내저을 뿐.
“영문을 모르겠군. 더구나 이런 한여름에 가봤자 사람 구경이나 할 텐데.”
“오늘, 오토바이로 드라이브를 하다 꽤 한적한 바닷가를 봤거든요. 차로 가기에는 조금 험한 길이라서 그런 것 같던데.”
“가려면 오토바이를 타야 한다는 말이군. …나보고 네 오토바이에 타란 말이냐.”
“…하하, 역시 무리겠죠. 죄송해요, 이상한 걸 물어서.”
역시 눈치가 좋은 사람이다. 제 생각을 숨길 생각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미는 그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어색하게 웃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뒤이어 들려오는 것은 예상외의 대답.
“하아. 이번 한 번 만이다. 우리 때문에 연습에 지장이 생기고 있으니. 어떻게든 해결은 해 봐야지.”
“……!”
알고 있다. 사쿄 본인이 말했다시피 요청에 응한 것은 자신이 좋아서, 라는 형편 좋은 이유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렇지만 우선은 그와 단둘이서 외출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려 해도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분명 얼빠진 표정이겠지. 오미는 그런 얼굴을 숨기려 사쿄의 표정을 살필 틈도 없이 급히 몸을 틀어 발을 옮겼다.
“그, 그럼 전 먼저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사쿄 씨도 나갈 준비 끝나면 대문 쪽으로 와 주세요.”
“…그래.”
사쿄의 대답과 함께 끼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외출의 준비 정도야 오래 걸리지 않을 터. 같이 나가자고 청한 주제에 이쪽에서 늦을 수는 없는 일이니 오미는 들뜬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며 급히 발을 옮겼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마음이 쉬이 가라앉을 리가 만무. 긴장과 설렘으로 떨리는 손으로 예비용 헬멧을 꺼내고, 오토바이를 대문 앞에 세우는 동안에도 들뜬 마음은 가라앉을 낌새가 보이질 않았다.
심호흡을 하며 어떻게든 진정하려 애쓰는 사이 문소리가 나 돌아보면, 얇은 카디건을 걸친 사쿄가 걸어 나왔다. 용기 내서 말을 꺼낸 것까지는 좋았지만, 왠지 얼굴을 똑바로 보기 힘든 기분. 무어라 말을 걸어야 할지 몰라 말 대신 헬멧을 건넨 오미가 급히 오토바이에 오르자, 사쿄는 건네받은 것을 머리에 쓴 후 탠덤용 뒷자리에 몸을 걸쳤다.
“…그, 위험하니까, 허리. …꽉 잡아 주세요.”
“하아…….”
오미가 건넨 말에 들려온 것은 짧은 한숨. 괜히 심장이 철렁하는 기분이었지만, 이내 사쿄가 제 허리에 팔을 두르자 다시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더위가 한풀 꺾이기 시작한 시간인 덕에 밀착한 몸이 불쾌하진 않았지만, 허리에 팔을 두르며 제 등에 밀착한 사쿄의 몸이 느껴지자 왠지 열이 오르는 기분. 오미는 어떻게든 제 신경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급히 오토바이의 시동을 걸었다.
“그, 그럼 출발할게요.”
“…그래.”
오토바이가 움직이자 허리에 둘렀던 사쿄의 팔에 힘이 들어갔고, 더욱 밀착되는 느낌에 오미는 긴장하며 핸들을 꽉 붙들었다. 짧지 않은 오토바이 경력 덕에 어떻게든 목적지를 향해 오토바이를 몰 수는 있었지만, 심장의 고동이 빨라지고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열이 오른 몸은 부딪혀오는 바람으로 식히고, 심장 소리는 오토바이의 진동으로 어떻게든 얼버무릴 요량으로 속도를 올리면 사쿄의 손이 제 앞에서 깍지를 끼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은 기분. 이유는 전혀 달랐지만, 볼프를 나온 이후로 오토바이를 타며 이렇게까지 심장이 뛰는 경험은 퍽 오랜만이었다.
“…….”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무어라 한 마디라도 꺼내고 싶었지만, 오미는 잠깐 달싹거리던 입술을 이내 꾹 다물었다. 입을 열더라도 바람 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제대로 전해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듯 속으로 곱씹었지만, 사실은 말을 건넬 용기가 나지 않았을 뿐. 사쿄가 제 뒤에 동승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제 허리를 꽉 끌어안고 있는 탓에 목소리가 제대로 나올지조차 의문일 정도로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상한 목소리라도 나오지 않으면 다행이겠지. 지금은 복잡해진 머릿속과 격하게 뛰는 심장을 어떻게든 진정시키려 애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런 혼란 속에서 도착한 바다는, 막 저물어가는 해가 노을 져 주황빛 물결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속도를 천천히 늦추며 인적이 드문 곳에 오토바이를 멈춰 세우자 귓가를 울리는 맑은 파도소리가 떨리던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혀주었다. 오토바이에서 내려 헬멧을 벗은 사쿄 역시 생각보다 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 탠덤이 불쾌하진 않았을까 걱정했던 터라 그의 표정을 확인한 오미가 안도하며 헬멧을 벗자, 열이 올라 뜨겁던 볼을 바닷바람이 스쳐 식혀주었다. 인적 드문 모래사장에, 잔잔한 파도 소리.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닷바람.
“…기분, 좋네요.”
“뭐, 생각보다는 괜찮군.”
바다를 향하던 고개를 돌려 사쿄를 바라보면, 입가에 옅게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쿄의 이 표정을 본 것만으로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저 바다를 보고 돌아갈 목적은 아니었던 터라 지금은 마음을 다질 필요가 있었다.
짧게 심호흡을 하던 오미가 천천히 바다 쪽으로 발을 옮기면, 사쿄는 그의 뒷모습을 잠깐 바라보다 뒤따라 발을 옮겼다. 두 쌍의 발이 모래를 밟는 소리가 파도 소리 사이로 들려왔다. 그 소리가 멈춘 것은 오미가 바닷물에 젖은 모래의 경계선 바로 앞에서 발을 멈춘 후.
오미는 멍하니 바닷속으로 잠겨가는 해를 바라보다, 깊게 심호흡을 한 후 뒤돌아 제 뒤에 조용히 서 있는 사쿄를 바라보았다.
“사쿄 씨.”
“…….”
“좋아해요.”
“…….”
두 번째 고백. 파도가 오미의 발뒤꿈치를 스쳤지만, 오미는 움직이지 않은 채 가만히 사쿄를 바라보았다.
“그런 꼴불견인 고백으로 사쿄 씨를 향한 마음을 전하고 싶진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미 말해 버린 이상, 다시 좀 더 괜찮은 곳에서. 말하고 싶었어요.”
“…….”
“이런 말, 불편할 거라는 건 알아요. 거절해도 괜찮아요. 그렇지만, 이번엔 제대로 대답이 듣고 싶어요. 거절한다면 마음은 깨끗이 접을 테니까. …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이때까지 같은 어중간한 태도로 대하진 않을 거예요.”
“…하아.”
다시, 그때와 같은 한숨. 이번에는 확실히 마음의 각오도 다진 상태에서 한 고백이었지만, 이런 반응에는 역시 평정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사쿄의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리고 있으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군, 네 녀석은.”
“…네?”
“고백을 했으면 차일 생각을 하기 전에, 받아 달라고 무슨 말이라도 해 보란 말이다. 항상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기나 하는 그 성격, 질색이니까.”
“아…….”
주연을 맡게 되었을 때도 들었던 말. 그렇지만 그 때와 말투는 전혀 달랐다. 거절당할 각오 정도는 해 두었지만, 질색, 이라는 단어에는 역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 해는 완전히 진 후. 아직 노을빛이 어슴푸레하게 남아있었지만, 천천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 쏴아, 하는 파도 소리와 함께 오미의 발을 덮었다가 빠져나가는 바닷물. 찬 바닷물이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던 자신을 붙잡는 기분에 억지로 고개를 들어 사쿄의 얼굴을 마주보면, 빨갛게 물들어있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어……,”
당황스러운 기분에 벌린 입에서 바보 같은 소리만 새어 나왔다. 그럴 리가. 사쿄 씨는 내 고백을 전혀 달가워하지 않았을 텐데. 화가 났다거나, 그런 이유로 머리에 피가 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아무리 어둡다 해도 그 정도 분간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그저 일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내뱉은 고백이었던 만큼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오미 쪽.
“그, 저, …싫은 게, 아니었나요……?”
“한 번도 싫다는 말은 한 적이 없을 텐데.”
“그, 그렇지만,”
듣고 보니 확실히, 사쿄에게 확실한 답변을 들은 기억은 없다. 그렇지만 고백을 얼버무린 후에 들려왔던 불편한 듯한 한숨도, 나란히 걷기 싫다는 듯 급히 움직이던 발걸음도, 오늘 제게 보였던 냉랭한 태도도. 당연히 싫다는 의사 표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쿄의 눈길에서 느껴지는 것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안경 렌즈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쿄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똑바로 오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 좋아. 좋아하니까 더 짜증이 나는 거다.”
“무슨……,”
“좋아하는 녀석이 고백을 하더니, 갑자기 오히려 자기가 당황하고는 못 들은 거로 해달라고 하면. 나는 뭘 어쩌라는 거냐.”
“…….”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했지만, 결국 얼굴이 새빨개진 채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헤매는 사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는 표정.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려 해도 머리가 따라주질 않았다. 온몸에 열이 올랐다. 아마 얼굴은 사쿄 이상으로 빨갛게 달아올라 있겠지. 발목까지 차올라 철썩대고 있는 바닷물 덕에 겨우 체온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해달라는 말 따윈 안 할 거니까.”
사쿄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다시 오미를 똑바로 바라보며, 오미가 서 있는 바닷물이 차오른 자리로 다가갔다. 신발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오미의 바로 앞에 선 사쿄는 잠시 멈칫하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솔직히, 그런 면 때문에 짜증은 났지만. 좋아하니까, 더 짜증이 났던 걸지도.”
“그, 그럼……,”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더 설명해야겠냐.”
“정말, 앞으로도 제가 사쿄 씨의 곁에 있어도 되는……,”
사쿄의 말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오미의 모습에, 사쿄는 잠깐 미간을 좁히고는 손을 뻗어 오미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오미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뒤이어 느껴지는 것은 입술에 맞닿는 부드러운 감촉.
맞닿았던 입술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떨어졌지만, 감촉만은 여전히 남아 있는 느낌이었다. 멍하니 자신의 입술을 잠깐 만지던 오미는, 눈 바로 앞에서 새빨간 얼굴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사쿄의 눈길에 그제야 실감이 난 듯 표정이 천천히 밝아졌다. 그 모습에 픽 웃으며 움켜쥐었던 멱살을 놓은 사쿄는 멋쩍은 기분을 숨기려는 양 주먹으로 툭, 오미의 가슴을 치고는 등을 돌렸다.
“잘 부탁한다, 후시미, …오미.”
“읏……, …네, 사쿄 씨, 아니, …사쿄.”
“반말하지 마.”
“하핫. 한 번쯤은 괜찮잖아요.”
뒤돌아선 사쿄를 뒤에서 꽉, 끌어안자 바다 냄새가 섞인 익숙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제 품 속에서 나는 사쿄의 향수 냄새가, 이제까지의 고민을 모두 깔끔하게 날려주는 것만 같았다.
선선하게 부는 바닷바람, 발목을 간질이는 파도, 짭잘한 바다 냄새, 머리 위를 수놓은 은하수. 한여름의 풍경이 둘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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