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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ised Fruit 1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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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ised Fruit

멍든 과일

알 카포네가 한때 시카고를 주름잡았다는 것은 시카고 사람이면 모를 수가 없더랬다. 대부분의 시민들에겐 흔적을 지워야 할 역사였으나 '일부' 시민들에겐 자랑스러운 사실이 되기도 했다.

시카고는 겉으로 보기엔 번쩍거리며 미시간 호수를 곁에 두고 있는 아름다운 대도시였지만 여느 도시가 다 그렇듯 빛이 들지 않는 곳도 제법 있다. 대학교 캠퍼스가 있는데도 범죄가 빈번한 남부 쪽이라든가-범죄 발생률 상위권에 이름이 들기에 이 도시는 그리 안전한 곳이 아니다. 음침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신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무뢰배들만 구석으로 밀어낸 듯 넓지만 좁게 느껴지는 타운에서는 하루하루가 생존을 위한 싸움과도 같았다.

그런 싸움 속에서 열일곱 살의 그는 알 카포네가 머물렀던 시세로에서 후견인이라는 존재에 의탁하며 거의 홀로 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낳아준 부모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십 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아기일 때부터 자라온 보육원에서 한 번 난동을 피웠는데(하지도 않은 짓에 누명을 씌워지자 화가 나서 다 엎어버렸다) 그 소동으로 인해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 내부에서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힌 그는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설의 벽 너머로 보이는 바깥 사회는 가능성이 많아 보였다. 새로 친구를 만들 수도 있고 과거가 될 지금을 숨길 수도 있다. 어쩌면 시카고를 떠나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처음부터 시작할 수도 있었다.

이제 그는 아늑하지만 기회가 없는 둥지에서 벗어나 바깥 사회로 나갈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만 14세부터 근로 능력을 인정받기에 이미 17세인 그는 주말에만 하는 파트타임 일을 시작했다. 허름한 약국에서 사무보조일을 했는데 노령에 가까운 약사가 눈도 침침한데다 손도 느리고 컴퓨터 조작에 더듬거려서 젊은이를 채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장부를 조작하여 감기약을 몇 개 빼돌려서 모아놨다가, 근처 주유소를 자주 찾는 껄렁한 라티노 무리에게 팔아대며 쏠쏠한 재미를 보았다. 어떤 종류의 감기약은 과다복용하면 부작용으로 환각 증세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단순 무식하고 어린 녀석들에게는 즐거움이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런 점을 이용했다.

그때부터 사회에서 터부시되는 자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소위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생겨나자 그들이 맡는 잡일에도 함께 했다. 그는 기다란 손가락을 가지고 있어 손재주가 좋았고 의외로 총도 잘 쏘았다. 각종 도구를 쓰는 법과 험악한 말투와 그들이 즐겨 쓰는 은어 같은 것을 익혔다. 시세로에 살기도 했고 잔머리 굴리는 것에서도 지지 않기에 그는 자신이 알 카포네와 같은 전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이름과 행적이 후대에까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면 비참한 말로는 대가로 지불하는 값이리라.

그들의 뒤에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마음에 꽤 들어 한다는 말을 듣자 기쁜 감정까지 느껴졌다.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고 자처한 남성은 약국까지 찾아와 자신의 조직에 몸담을 것을 권했다. 그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어느 쪽으로든 쓸모 있는 존재임을 확인받는 것은 무리를 지어 사는 인간의 삶에서 궁극적이고 희망찬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후견인의 압박에 못 이긴 시설은 그를 내보내 주었고 그는 둥지를 벗어난 첫걸음을 내디뎠다. 법적 보호자로 이름을 올린 후견인은 시세로에 작은 집을 준비해주고 가끔 찾아와서 그가 잘살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면 큰 선글라스를 낀 채 기른 머리를 위로 말아 묶고 유난히 코가 긴 후견인의 양자가 된 느낌이었다.

소문은 빨리 퍼지는 법이기에 그-제이크 로클리는 학교에서마저 혼자가 되었다. 어울리던 녀석들은 겉으로만 센 척을 한 모양인지 슬슬 멀어졌고 아직 아닌데도 벌써부터 위험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이야기들이 돌아다녔다. 점점 소문에 살이 붙자 교사들도 제이크를 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몇 달만 다니면 졸업이라 시간 낭비하는 학교에 다니기 싫다고 투정 부리자 후견인이 고등학교 졸업장 정도는 따놓으라고 혼을 내서 억지로 다니는 중이었고, 테스트도 과제도 낙제를 면할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은퇴가 가까워진 약사의 부탁으로 이제 평일에도 2일씩 일하게 되었기에 정규 수업 과정이 끝나면 자전거를 타고(처음부터 그의 것이었는지 훔친 것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노쇠한 약사가 기다리는 약국으로 향한다. 대개는 여유로워서 과제를 해치우고 똘똘하고 착한 학생인 척 굴며 데이터를 마음대로 고치고 약을 빼돌린 다음에는 후견인이 마련해준 단층 짜리 집이 있는 낙후된 동네로 향한다. 가끔씩 돌아가는 길에 있는 마트에서 간식거리를 사기도 했다.

졸업 후 어두운 길에 빛이 들 찬란한 미래만 바라보는 제이크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다가 낯선 사람들을 보았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 둘이었는데, 똑같이 생긴 얼굴로 봐선 쌍둥이라고 생각했다. 짧게 스쳐 지나간 시선으로 힐끗 보면 한 명은 왠지 버릇없게 생겼고 한 명은 좀 멍청하게 생겼다. 그들은 내일, 허가, 길, 학교 같은 단어들을 입에 올렸으나 자전거로 빠르게 지나갔기에 대화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며칠 후, 자전거를 타고 약국으로 향하던 제이크는 얼마 전에 본 쌍둥이 중 한 명을 발견했다. 버릇없게 생긴 녀석과 멍청하게 생긴 녀석 중 누구일까? 점점 속도를 줄이며 얼굴을 살피면 정돈되지 않은 헤어스타일과 처진 눈을 한 멍청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멍청하게 생긴 녀석은 크로스백을 메고 왼팔에 책 한 권을 안은 채 길가에 쪼그려 앉아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겉옷의 소매가 손의 반을 덮고 있었기에 더 멍청해 보였다.

계속 뭘 보는지 궁금해져 자전거에서 내린 제이크는 그의 옆에 슬쩍 다가섰다. 갑자기 드리워진 그림자에 녀석이 고개를 들자 구불거리는 짧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흔들거렸다. 둥그런 흑갈색 눈동자가 빤히 쳐다보자 인사라도 할까, 하다가 타이밍을 놓쳐 말을 하지 않았고 멍청하게 생긴 녀석도 별말 없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발밑을 보면 개미들이 줄지어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옆에 서서 개미 구경을 같이하던 제이크는 스티븐, 이라는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 버릇없게 생긴 녀석이 제이크를 쳐다보며 경계하는 표정으로 다가왔다. 스티븐. 이 녀석의 이름이구나. 스티븐은 일어나서 제이크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제이크는 얼떨결에 자신도 손을 흔든다.

"누구야?"

"몰라. 갑자기 옆에 서더니 별말 없길래 같이 개미 구경했어."

"스티븐, 내가 말했잖아. 이 동네 사람들은 다 조심하라고."

"알았어……."

제이크는 며칠 전처럼 멀어져가는 쌍둥이 형제의 대화를 들으며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비록 그들이 사는 타운이 후미지고, 범죄율이 높아 상점들이 일찍 폐점하고, 어쩌다 뉴스에 이름이 오르고, 늦은 밤에는 사람 한 명도 쏘다니지 않지만 그런 부류로 오해받는 것이 싫었다. 아직은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그 소망은 다음 날 이루어졌다. 밤늦도록 과제를 하다 잠들었기에 하품을 늘어뜨리며 자전거를 끌고 등교하는데 호기심을 자극하는 묘한 쌍둥이가 저 멀리서 걸어가고 있었다. 똑같은 곱슬머리지만 한쪽은 깔끔하게 뒤로 넘겼고 한쪽은 오른쪽으로 넘겨서 뒤통수만 봐도 알아보기 쉬웠다.

쌍둥이는 아무래도 이 모턴 고등학교로 전학 절차를 밟은 모양이다. 빠르게 다가간 제이크는 스티븐의 어깨를 탁 쳤다. 스티븐이 멈춰 서자 같이 걷고 있던 형제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자 굵은 눈썹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저 주름이 펴질 때가 있긴 할까, 라고 생각한 제이크가 손을 들어 보이자 그를 알아본 스티븐이 밝게 인사한다.

"어제 나랑 같이 개미 구경한 애야, 마크!"

"그래서? 그게 뭐?"

"아, 제발 그러지 좀 마. 미안해… 이름이 뭐야?"

스티븐은 눈썹을 찡그리며 마크를 나무라다가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제이크 로클리. 너희는?"

"스티븐 그랜트. V가 들어간 스티븐이야. 얘는 마크 스펙터. 얘도 C가 들어간 마크야."

똑같이 생긴 얼굴이지만 그랜트, 스펙터. 웃긴 이름은 둘째치고, 성이 다르다.

"너희 쌍둥이 아냐? 왜 성이 달라?"

"어… 그건……."

악의 없이 순전히 호기심으로 물어본 건데 스티븐이 대답할지 말지 머뭇거리자 마크가 손을 들고 스티븐을 제지한다.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하거든. 한 배에서 나온 건 맞으니까 자세히 알려고 하지 마."

처음 봤던 느낌대로 마크는 정말 버릇없는 녀석이었다. 마크는 가자, 스티븐, 하고 형제의 팔을 잡아끌고 학교 건물을 향해 걸어간다. 제이크는 성격이 대척점을 이루는 그들에게 흥미를 느꼈다. 자전거를 끌고 가면서 오해도 풀 겸 그나마 친근한 스티븐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이사 온 거야?"

"음, 일주일 정도 됐어. 근데 우리가 이사 왔는지는 어떻게 알았어?"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 제이크는 피식 웃었다.

"나도 이사를 하긴 했지만 이 학교엔 계속 다니고 있었거든. 몇 학년이야?"

"12학년 됐어. 넌 대학 원서 썼어?"

"아니, 안 갈 거라서."

애초에 시설에서 자라온 제이크는 대학에 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본래는 차량 기술이나 배우려고 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어둠의 길을 걷게 되었다. 스티븐은 자기도 대학에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게 되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난 내가 안타깝진 않은데. 그렇게 생각하자 마크가 이제 그만 말하라는 것처럼 스티븐의 이름을 작게 불렀다.

"미안, 우리는 첫날이라 상담 선생님을 만나러 가야 해. 아는 사람도 없는데 말 걸어줘서 고마웠어. 너는 좋은 애 같아."

"스티븐, 빨리 가자니까."

"또 보자, 제이크."

"잘 가. 그랜트, 스펙터."

좋은 애라는 말을 들었으니 오해는 푼 것 같다. 제이크는 실실 웃으며 형제와 헤어졌다.

다음날부터 제이크는 두 형제와 함께 다니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엇비슷한 시간에 만났고 점심도 같이 먹었다. 이미 친구가 된 스티븐과 다니려 했지만 마크가 스티븐을 뒤따라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방과 후에 스티븐은 역사에 관한 클럽 활동을 했고 마크는 제이크처럼 곧바로 파트타임 일을 하러 갔다. 스티븐은 클럽 활동을 끝내고 마크가 퇴근할 때까지 도서관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돌아간다고 했다.

스티븐이 역사와 문학 위주로 시간표를 짰기에 일찍이 기술을 배울 생각이었던 제이크는 마크와 함께 이공계 수업을 겹쳐 들을 때가 많았다. 스티븐이 칠칠치 못해서인지 마크는 야무진 성격이었다. 궁금한 것도 자주 물어보고 발표할 때도 전혀 떨지 않았으며 심지어 내용도 깔끔했다. 테스트 점수나 태도가 모범적이라 아는 사람이 없는 졸업반인데도 금세 선망의 대상이 된 마크는 스티븐 말고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여학생들을 안달나게 만들었다. 용기 있는 아이들이 제이크를 따로 불러내 마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지만 걘 나 싫어해, 라는 말로 자리를 피했다.

일리노이는 라티노의 비율이 높은 주여서 제이크는 제2외국어로 스페인어를 택했었고 쌍둥이도 그를 따라 스페인어 수업을 선택했다. 쪽지 시험에서는 불량아들에게 모아둔 감기약을 팔며 학교에선 배울 수 없는 실용적인(?) 스페인어를 익히는 제이크의 도움이 컸다. 딱 거기서 끝인 마크와 달리 스티븐은 프랑스어도 배우고 싶어 했다. 제이크는 이러저러한 학문에 흥미를 느끼는 스티븐이 왜 대학에 갈 수 없는지 궁금했지만 그들의 사정이니 묻지 않았다.

제이크는 날이 선 채로 타인을 경계하는 마크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미소를 짓는 스티븐이 재밌었다. 잘 보면 마크는 항상 스티븐 옆에 있으려 했고 스티븐은 가끔 그것을 부담스러워했다. 고개를 돌리고 마크 몰래 심드렁한 표정으로 제이크와 눈이 마주치면 멋쩍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스티븐이 마크를 밀어내거나 화를 내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서로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알고 채워주는 걸 보면 가족다워서 부럽기도 했다.

손님이 오지 않는 약국에서 약사는 졸고 있었고 제이크는 과제를 하고 있던 어느 날, 스티븐이 약을 사러 왔다. 이제는 노령의 약사 대신 판매도 하는 제이크를 알아보곤 당황해하면서도 두통약을 달라고 했다.

"어떤 걸 줄까? 이건…."

설명해주려는데 스티븐답지 않게 급히 말을 끊고 아무거나 달라고 했다. 흠칫한 스티븐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사과한다.

"미안, 마크가 두통을 달고 살거든. 마침 약이 떨어져서 말야. 괜찮았는데 요즘 또 그러네……."

거스름돈을 지갑에 넣고 약을 챙긴 스티븐은 인사를 하고 달려 나갔다. 지저분한 유리문 너머로 사라진 뒷모습을 본 제이크는 생각해본다. 마크는 스티븐과 있어야 한다는 분리불안과 같은 강박증 때문에 두통을 달고 사는 걸지도 모른다. 스티븐은 늘 크로스백에 잡다한 것들을 들고 다니는데 그에 반해 마크는 필요한 것만 들고 다닌다. 언젠가 스티븐이 자기 가방에서 약과 물통을 꺼내 마크에게 주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자존심이 강한 마크가 자신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 테니 대신 스티븐이 챙겨주는 것이다.

괜찮았는데 요즘 다시 그런다는 건 마크가 제이크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었다. 전학생들이 다른 애도 아닌 제이크와 함께 다니자 아이들이 그에 대한 소문(뒷세계 사람들이 뒤를 봐준다)을 알려준 모양인지 마크가 자신을 볼 때면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보았는데, 제이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엄청 웃어댔다. 꼭 그가 스티븐을 빼앗으리라고 확신에 찬 눈빛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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