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글

Bruised Fruit 2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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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순진하고 착한 녀석이다. 치안에 대해 오르내리는 지역에서 낯선 자신과 길거리에 쪼그려 앉아 개미 구경을 했을 때처럼 기본적으로 사람을 의심하는 법을 모른다. 그 역할은 마크가 다 하고 있으니 그럴 것이다. 스티븐의 태도가 워낙 무던하기에 제이크는 그를 스티비라는 유치한 애칭으로 부를 만큼 놀리고 귀여워하며 형제처럼 대했다. 마크에게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는데, 이유는 몰라도 그는 여전히 제이크를 좋아하지 않았다. 미간 주름은 펴질 줄을 몰랐고 형제인 스티븐의 물음에도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마 이 타운이 싫은 걸 수도 있고 이런 곳에 살던 제이크가 스티븐과 친해진 게 마음에 안 들 수도 있다. 웬만하면 제이크도 언제든지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 가능성이 농후한 마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처음 만났을 때부터 변함없이 예민하게 구는 마크의 태도에 그 마음도 변하기 시작했다. 일부러 아침에 만나면 스티븐에게만 어깨동무를 하고 길에서 보면 큰 소리로 이름을 불러 옆에 있는 마크를 자극했다. 그럴 때마다 마크는 제이크를 어떻게든 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스티븐은 해맑게 웃으며 반응해 주다가 마크에 팔을 잡혀 질질 끌려갔다.

장난이 심했던 탓인지 마크는 쌓인 스트레스를 못 이겨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항상 셋이서 만나는 길목에 스티븐은 목도리로 얼굴 반을 가린 채 혼자 추위를 견디며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어보니 어젯밤부터 마크가 끙끙 앓고 두통에 머리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다고 한다. 얘기를 하는 스티븐의 얼굴은 더 피곤해 보였다. 악명 높은 시카고의 겨울이 찾아왔기에 감기구나, 라는 말로 넘기자 스티븐은 의심하지 않고 그렇겠지? 라고 대답했다.

처음으로 마크가 없는 하루였다. 마크 없이 수업을 듣고 마크 없이 둘이서 점심을 먹고 마크 없이 돌아간다. 약간의 허전함을 느끼지만 크게 다가오진 않았다. 오후가 될수록 심해지는 추위에 오늘은 클럽 활동도 다 취소되고 다들 따뜻한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오늘은 약국에서 일하지 않는 날이었고 스티븐이 너무 추우니 따뜻한 거라도 마시고 가자길래 도심의 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자 맞이해주는 따스한 온기와 커피의 향에 부르르 떨고는 빈 창가 자리에 책과 가방을 올려둔 뒤 제이크는 카페라테를, 스티븐은 핫초코를 골랐다.

"뭐야, 스티비. 웬 한숨이야. 졸업이 코앞이라 할 게 많아서 그래?"

자리에 앉은 스티븐이 한숨을 쉬자 제이크는 뜨거운 음료를 후후 불고는 물었다. 파트타임 일을 하러 간 마크를 도서관에서 기다리며 해치우는 과제와 졸업 준비에 걱정이 많은 모양이다. 게다가 언제 머리가 아플지 모를 마크를 위해 두통약이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도 써야 했다.

"……제이크. 너라면 얘기해도 될 것 같아."

"무슨 얘긴데?"

좀처럼 보기 힘든 스티븐의 진지한 얼굴에 제이크도 덩달아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던 허리를 폈다.

"9월에 새 학기가 시작되고 너를 만난 게 겨우 두 달도 되지 않았지만 말야, 네가 마크 다음으로 편하게 느껴져."

스티븐은 머그컵의 두툼한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말하다가 부끄러운지 음료를 한 입 마셨다.

'당연히 그러겠지. 같이 다니는 사람이 마크밖에 없는데.'

문득 저 말이 진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크만큼이 아니라?"

약간 짓궂은 질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스티븐은 머뭇거리다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는다. 어쩌면 마크보다 더, 라는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마크를 어떻게 생각해?"

뜬금없이 튀어나온 스티븐의 물음에 생각을 정리하려고 다시 커피를 마셨다. 과일을 보면 가르지 않고도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만큼 단편적인 마크의 행동들에 생각을 정리할 필요는 없지만, 스티븐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최대한 부정적인 말들을 추려낸다.

"수업 시간에 보면 뭐든 잘하던데. 발표도 잘하고 테스트 점수도 좋은 거 같더라고."

"다른 건?"

"다른 거?"

수업 태도에 관한 얘기가 아닌 것을 눈치챈 제이크는 뒤통수를 긁적거리다가 망설이던 말을 꺼낸다.

"너를 엄청 신경 쓰는 거 같아. 맨날 자기는 두통에 시달리면서도 네가 안전한지 살피고 있잖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에 스티븐은 또 길게 한숨을 쉰다. 그러고는 제이크를 보는데 늘 처진 눈에 웬일로 힘이 들어가 있다.

"내가 엄청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말한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뭐, 뭔데. 아까부터 자꾸……."

스티븐은 고개를 모로 돌린 채 머그컵을 바라보며 말을 꺼낸다.

"마크랑 나는 어릴 때부터 주로 집의 뒷산에서 놀았어. 거기엔 다람쥐도 많았고, 버려진 동굴도 있었고, 외나무다리도 있었거든. 우리에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동생이 한 명 더 있었어. 동생이 좀 커서는 우리가 늘 놀던 동굴로 데려갔지. 그날은 여름이었고 소나기가 올 줄 몰랐어."

잠자고 듣던 제이크는 불길한 결말이 될 것 같아 스티븐의 입을 막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이후에 쌍둥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스티븐이 이 이야기를 꺼낸 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혹시 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게 맞아. 우리는 갑자기 차오른 물속에서 동생을 꺼내지 못했어."

목소리를 확 줄이자 그의 말은 주변의 소음에 숨어들어 갔지만 바로 옆에 앉아있던 제이크는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생각도 못한 어두운 이야기에 긴장감이 몰려와 점점 가슴이 두근거린다. 스티븐은 제이크를 쳐다보지도 않고 약간 식은 음료를 마시고 말을 잇는다.

"우리는 잘 때마다 악몽에 시달렸고 아빠는 정신이 불안정해진 엄마를 병원에 보냈어. 자식이 자식을 죽인 거나 다름없으니 제정신으로 있을 수 없는 게 당연했겠지. 허가를 받아서 병문안을 가면 엄마는 괜찮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어. 우리를 보면 울고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고…… 한 번은 엄마에게 붙잡힌 마크가 뺨을 세게 맞았어. 나는 멍하니 서 있던 마크를 끌고 병원에서 도망쳤어. 우리는 그 뒤로 엄마를 만나러 가지 않았어. 우리가 열다섯 살 때부터 거의 이 년을 입원해 있었는데 엄마는 그대로였어. 마음의 문이 완전 닫혀버린 거야. 우리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서 더 만나러 가지 않은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 그동안 병원비가 너무 많이 쌓여서 빚이 되었어. 그러다가… 올해 초에 엄마가 돌아가셨어."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하나씩 맞춰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 목이 타서 커피를 쭈욱 마셔도 스티븐이 내뱉는 말처럼 씁쓸한 맛이 남아돌자 제이크는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마크는 동생이 죽은 것도, 엄마가 병원에 들어간 것도, 아빠가 빚더미에 앉게 된 것도 전부 자기 탓이라고 생각했어. 그 애는 나도 잃고 싶지 않아서인지 언젠가부터 내 일에 간섭하기 시작했어. 어딜 가는지, 누굴 만나는지, 오늘은 뭘 하는지. 점점 더 심해져서 사소한 것마저 자기 뜻대로 되게 하려 했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화를 내면서 폭력적으로 변했어. 지금은 마크가 불안해서 그러는 걸 아니까 불안해하지 않도록 말을 따르고 있어도 처음에는 이해 못해서 자주 싸웠어. 마크는 내 옆에 자기가 있을 자리가 없어지면 죽어버릴 거라고, 그런 말까지 했어. 나는 무릎 꿇고 빌면서 그러지 말라고 애원했어. 그날 마크와 껴안고 울면서 서로를 용서했어. 근데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 텐데… 내 어깨를 내어주고 목에 닿는 뜨거운 숨을 느꼈는데, 아픈 것처럼 앓는 숨소리에 마크가 뭔갈… 많이 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어."

평화로운 가족을 덮친 연이은 불행에 마크가 스티븐의 행동 하나하나에 집착하게 된 것까진 이해했으나 집착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소리에 이 형제를 내버려 둬도 괜찮을지 고민하게 된다. 단정 짓기 어려운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스티븐은 적당한 온도로 내리식은 음료를 다 마시고는 입술에 묻은 잔여물을 핥았다.

"여기로 이사 온 건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 아빠가 내린 결정이었어. 빚이 많으니 힘들어도 돈을 많이 버는 일을 선택하셨거든. 지금 아빠는 일하는 곳에서 먹고 자면서 2일에 한 번씩 집에 오고 계셔."

"그래서 마크는 클럽 활동도 안 하고 일을 하러 가는 거구나."

마크라면 어느 클럽에 들어가도 뭐든 잘할 것 같은데. 쌍둥이의 현실이 애석하게 느껴진 제이크의 말에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가 돈은 자기가 벌 테니 나는 하고 싶은 걸 하랬어.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서 대학교도 그쪽으로 가고 싶었는데 형편이 안 좋아……. 그러고 보니 우리 성이 왜 다른지 궁금했었지? 편부모 가정 혜택을 받으려고 그랬어. 엄마가 병원에 들어갔을 때-아마 정신이 멀쩡했을 때 이혼하고 갈라졌겠지만 우리는 계속 아빠랑 살고 있어."

말을 많이 한 탓에 스티븐은 약간 쉬어버린 목소리로 제이크의 이름을 불렀다. 섬약한 부름에 고개를 돌리자 스티븐도 이쪽을 쳐다본다.

"마크가 못되게 굴 때마다 내가 몰래 사과할 테니까…… 마크를 이해해줬으면 좋겠어."

숨기고서 새로이 시작해도 될 텐데 비밀을 까발리는 걸 보고 어떻게 미워할 수 있을까. 자신도 밝히지 못한 비밀이 많지만 유일한 친구인 쌍둥이와 멀어지고 싶지 않으니 언젠가는 말해야겠다고 생각한다. 아니, 말하면 오히려 더 멀어질 비밀들이려나.

우선은 어려운 얘길 해 줘서 고맙다고 하자 스티븐은 감격한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너라면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어, 라고 말했다. 어린 동생의 죽음, 죄책감, 미쳐버린 엄마, 미칠 지경인 아빠, 밤마다 찾아오던 악몽, 내 말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사라질 것 같은 형제, 그를 향한 삐뚤어진 소유욕-이것들을 다 이해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넌 계속 마크랑 그렇게 살 거야?"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스티븐의 눈이 크게 떠진다.

"난 이해했으니 상관없는데 나중에는 어떻게 할 건데? 너희 둘 중 누가 직장에 들어가면, 미래에 네가 대학에 가면, 그때도 마크가 정해주는 대로 살 거 아냐."

친해지는 사람이 생기면 마크에게 꼬박꼬박 알려야 하고 마크가 정한 시간대에만 외출할 수 있을 현실에 스티븐은 입을 살짝 벌렸다가 닫았다.

제이크는 아픈 과거를 들추며 마크를 이해해달라고 부탁하는 스티븐을 결코 이기적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과거의 망령이 깃든 채 스티븐에게 의지해야 살 수 있는 마크가 측은하기도 했다. 스티븐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고 모든 것에서 불안을 느끼는 마크가 제정신을 차리려면, 스티븐이 마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그나마 가까운 사람인 제이크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할지 모른다. 마크를 놀릴 때와 같은 자극이 있으면 뭔가 깨닫지 않을까?

"…우리가 마크를 도와줄까?"

"어떻게?"

흥분한 스티븐은 고개를 들이밀고 다급하게 물었다. 마크를 이해한 스티븐은 외부에 도움 청할 생각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도움을 청하려 해도 정신병원에 대한 불편한 기억과 부족한 돈 때문에 마크가 말렸을지도 모른다.

"마크는 네가 혼자 돌아다니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걸 두려워하고 있어. 너 혼자서 무사히 밖을 다닐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 안심하지 않을까?"

그럴싸한 연결고리를 만들자 순진한 스티븐은 눈동자를 굴리다가도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좋아, 스티비. 이번 주말에 우리집에 놀러 와. 너 혼자서만."

제이크를 좋아하지 않는 마크는 스티븐이 그의 집에 놀러 간다고 하면 크게 충격받을 것이다. 허락해 준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파격적인 조언에 입력이라도 된 프로그램마냥 스티븐의 입에선 곧바로 마크의 이름부터 튀어나왔다.

"마크가 싫어할 텐데……."

"마크가 화를 내고 집 안 가구를 다 부숴버려도 네 의견을 똑바로 전해 봐. 너도 네 삶이란 게 있잖아."

"그건… 그렇지."

"네가 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네 의지라는 걸 강력하게 표현해야 해. 이걸 잊지 마."

어깨에 손까지 올리고 말하자 스티븐은 살짝 미소 짓는다.

"고마워. 마크한테 잘 말해 볼게. 아, 이제 가야겠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스티븐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제이크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그래, 더 추워지기 전에 돌아가자. 마크도 너를 찾으려고 맨발로 뛰쳐나와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르니까."

"우, 아무리 마크라도 그렇게까진 안 해."

둘은 테이블에 팁을 올려둔 뒤 시시덕거리며 웃고는 가방을 멨다. 정상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에 떠들어대던 스티븐과 헤어진 제이크는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아무렇게나 꾸며낸 말 치곤 상당히 전문적인 느낌이 강했다며 스스로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시카고답게 변덕스러운 추위가 한풀 꺾인 다음 날도 마크는 등교하지 않았다. 아침에 만난 스티븐의 말에 의하면 어제 꽤 많이 나아졌었는데 자기가 그런 말을 해서 다시 몸 상태가 나빠졌다고 한다. 그런 말? 무슨 말? 하고 물으려던 제이크의 머릿속에서 어제가 지나갔다.

"오늘 집에 가면 다시 말할 거야. 어제 많이 생각했거든. 마크는 혼자 시간을 보낼 줄 알아야 해."

마크도 스티븐도 정상적으로 사회에 녹아들려면 그래야만 했다. 스티븐이 기특한 제이크는 늘 정돈되지 않는 머리를 헝클이며 장난을 쳤다.

방과 후 약국에서 감기약을 빼돌린 뒤 과제를 하던 제이크는 토요일에 스티븐과 무엇을 할지 생각한다. 친구가 생기면 하고 싶은 일이 있긴 했다. 밤새 과자를 먹으며 영화 보기. 제이크치고는 유순한 소망이지만 아이들이 바글대는 보육원에서 자란 데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단순한 경험을 한 적이 없기에 그 소망을 스티븐과 달성하고 싶었다.

내일 스티비를 만나면 무슨 영화를 좋아하는지 물어봐야지. 참, 콘슈가 만들어준 가짜 신분증도 있잖아. 술 마시자고 해 볼까? 먹고 싶던 육포도 사고……. 제이크는 과제를 하다가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적어 내려갔다.

금요일인 다음날도 마크는 나오지 않았다. 스티븐은 어제 마크랑 엄청 싸웠다고 한다. 이기적인 마크가 또 죽어버릴 거라는 말을 했는지 묻고 싶었지만 스티븐이 워낙 진지하게 말하고 있길래 참았다.

"난 제이크랑 놀고 싶은데 넌 제이크를 안 좋아하잖아. 내 옆에 있고 싶으면 너도 따라와. 그렇게 말했어."

"되게 상처받았겠다."

"이렇게까지 된 건 내 책임도 있으니까 마크가 빨리 적응하도록 만들어야지. 고마워, 제이크. 너 아니었으면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았을 거야."

그래, 그랬을 거야. 다 큰 어른이 형제 한 명 때문에 친구도 못 사귀고 외출도 마음대로 못 하고 이거 입으라 하면 입어야 하고 저거 먹으라 하면 먹어야 하고 그냥 사육됐을 거야. 제이크는 잔인한 말들을 떠올렸다가도 스티븐의 미소에 생각하길 멈춘다.

"마크도 변하려는 걸 보니 잘됐네. 그나저나 너는 무슨 영화 좋아해? 내일 밤새 영화 보기 하자. 과자도 사자."

어릴 때 마크랑 해봤겠지만 다른 사람과 해본 적 없을 밤샘 계획에 들뜬 스티븐은 양손으로 주먹을 꼬옥 쥐고 가슴께에 갖다 댄다. 그가 설레고 있다는 몸짓언어였다.

"우와, 이런 거 처음이야! 나 그거 좋아해. 툼 버스터."

"그게 뭐야?"

보육원에서 교양을 쌓으라고 이름난 영화를 틀어주는 날이 있었지만 주로 눈물을 흘릴 만한 지루한 걸작들 위주였기에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툼 레이더는 들어봤는데, 툼 버스터는 스티븐이 좋아한다고 하니 왠지 괴상한 컬트 영화일 거라 추측한다. 제이크의 생각을 읽었는지 스티븐은 눈썹을 내리고 가슴께에 모아둔 손도 내린다.

"박사랑 조수가 고대 유적을 탐험하는 영화인데, 네가 재미없어할 것 같아. 밤을 새울 거면 차라리 시리즈물을 연속으로 보자."

각자 다른 수업을 들으러 헤어졌다가 만난 점심시간의 토론 끝에 선정된 것은 반지의 제왕 3부작이었다. 제이크는 마지막 영화가 작년에 개봉되었기에 지금도 경쟁이 치열할 거라며 방과 후에 바로 DVD를 빌리러 대여점에 갔는데, 역시나 1탄인 <반지원정대>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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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제 3부작의 1탄이 없음 = 마크 스티븐 제이크 중 마크가 없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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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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