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글

Bruised Fruit 3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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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국에서 사무보조일을 마친 토요일. 제이크는 서둘러서 돌아와 집 정리를 했다. 만일을 위해서, 라며 후견인이 주었던 총기류는 물론 누가 봐도 수상한 사람으로 보일 만한 것들은 다 치웠다. 그러고는 스티븐을 위해 여분의 담요도 꺼내놓았다.

약속했던 여섯 시가 다 되어가자 제이크는 과연 스티븐이 마크를 잘 달래고 올지 궁금했다. 어쩌면 마크가 영악하게도 폭력적인 모습이 아니라 동정심을 자극하는 연약한 모습을 보였다면 스티븐의 마음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굳게 마음먹은 만큼 뿌리치고 올 확률도 있기에 냉장고를 뒤적이며 스티비가 먹을 풀이나 사러 갈까, 하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면 목도리를 두른 채 코를 훌쩍이는 스티븐이 서 있었는데 마치 가출이라도 한 것처럼 짐가방을 하나 들고 있다. 너 혼자 그렇게 있는 게 낯설다, 하고 농담하자 자기도 그렇다며 배시시 웃는다.

"뭘 그리 싸 왔어?"

"잠옷이랑 내가 먹을 도시락."

"마크가 용케도 식탁 안 엎었나 보네. 안 그래도 너 먹는 게 까다로워서 뭐라도 사러 나가려 했는데."

마크는 뭐든 잘 먹지만 스티븐은 고기를 전혀 먹지 못하는 체질이었다. 묵직한 가방을 들어주며 집 안으로 들어가자 스티븐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내부를 살핀다.

"지금 너만 있어?"

"당연하지."

"그… 네 뒤를 봐준다는 무서운 사람들 말야. 없어?"

"아니, 나 혼자 사는데."

티 내지 않았지만 그 역시 제이크를 따라다니는 무시무시한 소문을 신경 쓰고 있던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 스티븐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해준 적이 없다. 갑자기 콘슈가 찾아오면 어쩌지? 올 일이 있다면 내일까지 오지 말라고 연락해둘 걸 그랬다. 만약 콘슈가 온다면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하는 삼촌 정도로 둘러대야겠다고 생각한다.

"혼자 어떻게 살아? 너 설마…… 어른이야?!"

"너랑 나이 똑같거든."

멋대로 상상하고 멋대로 충격받은 표정을 지은 스티븐은 제이크를 따라오며 시세로의 위험함에 대해 쫑알쫑알 떠든다. 그게 재밌었던 제이크는 웃으며 먹을 거나 사러 가자고 재촉한다.

그들은 오늘 밤을 위한 준비를 하러 나갔다. 스티븐을 설득해 맥주도 사기로 하여 제이크는 조금 더 어른스러워 보이려고 헌팅캡을 눌러썼다. 가죽 장갑까지 끼고서 타는 수단이 자전거인 것은 폼이 나지 않지만 바구니가 달린 스티븐의 자전거를 같이 타고 나아갔다. 워낙 추운 탓에 스티븐이 얼굴을 등에 딱 맞붙였다. 제이크는 두터운 외투 너머 느껴지는 스티븐의 무게와 체온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주 가는 집 근처의 마트는 아직 학생인 제이크를 알아볼 수 있기에 추위 속에서 20분을 달려 옆 동네인 버윈까지 갔다. 마트로 들어가면서 춥다고 오두방정을 떠는 스티븐과 달리 제이크는 들어갈 때부터 눈에 띄지 않게 침착하게 행동했다. 한 바퀴 빙 둘러보며 스티븐이 좋아하는 과자와 음료, 자신이 씹어먹을 육포 같은 것을 사고 마지막으로 주류 매대를 둘러본다.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스티븐이 이것저것 살피는 동안 제이크가 맥주를 두 병 집어 들면 쇼핑도 끝났다.

서른이 넘어도 담배나 주류를 계산할 때에 신분증 확인이 요구되므로 잘 봐 스티비, 하고 나이가 조작된 신분증을 건넸다. 어디서든 잘 써먹는 것이기에 그대로 통과된다. 스티븐은 밖으로 나와 산 것들을 자전거 바구니에 넣으며 우와, 뭐야 아까 그거, 하고 눈을 빛냈다가도 주춤거린다.

"너 그렇고 그런 사람들이랑 연결된 게 진짜구나……."

"그 소린 그만 좀 하지 그래? 오늘은 우리 둘이서만 노는 날이잖아."

"미안해."

"빨리 타. 춥다."

사실이긴 하지만 내 비밀을 알면 너는 나랑 어울리지 않겠지. 나를 경멸하고 마크에게 잘못했다고 빈 뒤에 다시 그 녀석이 만든 우리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겠지. 제이크는 묵직한 발놀림으로 페달을 힘껏 밟아가며 등에서 느껴지는 체온이 식지 않기를 바란다.

집으로 돌아온 뒤 작은 거실에 사 온 것들을 펼쳤다. 못생긴 스핑크스 그림이 박힌 스웨터로 갈아입은 스티븐이 가방에서 직접 만든 도시락을 꺼낼 동안 제이크는 어제 빌려온 DVD를 보여 주었다.

"1탄은 없더라고."

스티븐은 아쉬운 소리를 냈다. 제이크는 <두 개의 탑>을 재생할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편히 기댔다. 집 안의 모든 불은 꺼져 있었고 어둑해진 바깥에서는 겨울 공기가 유령마냥 온기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다. 라디에이터의 열과 두툼한 스웨터, 어깨에 걸친 담요는 몸을 따뜻하게 만들었지만 스티븐과 있다는 현실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마크 없이 보내는 시간을 어색해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고 정말 오래된 친구의 집에 있는 것처럼 편해 보여서 제이크도 한시름 놓았다.

스티븐은 저녁 식사로 직접 만든 샌드위치를 제이크와 나눠 먹고(어쩐지 마크의 분노가 느껴지는 맛이었다) 후식으로는 견과류가 들어간 판 초콜렛을 쪼개서 데운 우유와 함께 먹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는 과자 봉지를 손에 들었고 제이크는 고기 안 먹는 대신 저런 걸 많이 먹나, 하고 생각했다. 이어서 3탄인 <왕의 귀환>을 틀기 전에 한숨 돌린다. 제이크는 스티븐이 먹던 과자 봉지에 긴 손가락을 넣어 몇 개 뺏어 먹다가 육포를 잘근잘근 씹으며 맥주병을 건넸다.

모든 주에서 스물한 살이 되어야 음주가 가능하지만 범상치 않은 삶을 사는 중인 제이크는 일찍이 술맛을 깨우쳤고 담배도 피울 줄 알았다. 둘 다와 거리가 멀어보이는 스티븐은 병뚜껑을 따 주자 강아지처럼 코를 킁킁거렸다. 둘은 병을 들어 건배를 하고 내용물을 들이마신다.

"처음 마시는 거 아냐? 어때?"

그렇게 묻자 스티븐이 입을 쩝쩝거린다.

"상상하던 거랑 좀 다른데…."

"그래도 마실만 하지?"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술맛이 익숙해질 때까지 한 모금씩 마시다가 영화를 보며 천천히 한 병을 다 비워냈다. 모처럼 자유롭게 노는 건데 더 살 걸 그랬네, 하고 생각하지만 스티븐의 주량도 모르는 데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문제 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기에 다른 음료를 권했다.

<왕의 귀환>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시계를 보면 새벽이었다. 역시 명작이야, 하고 옆을 보면 스티븐은 눈을 비비면서 하품을 하고 있었다.

"스티비, 졸려?"

"맥주도 마셔서 더 그런가 봐. 너랑 밤새야 하는데……."

"그래도 안 자고 잘 참았네."

대견하다는 투로 말하자 그는 실실 웃으며 느릿한 말투로 반지의 제왕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잘 거면 침대로 데려다줄게."

제이크는 어깨를 덮고 있던 담요에서 빠져나와 스티븐의 팔을 잡고 그를 침실로 데려갔다. 제정신인 듯 아닌 듯 몽롱한 스티븐을 잘 눕힌 다음 거실에 어질러진 것을 치우고 DVD도 케이스에 잘 넣었다. 곧바로 잠이 오지 않았기에 입가심이라도 할 생각으로 다시 침실 문을 열어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내디디며 서랍에 숨겨뒀던 담배를 찾는다. 그러자 스티븐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인기척에 잠들지 못한 건지 스티븐은 눈을 비비적대다가 반쯤 감긴 시선으로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어슴푸레한 달빛을 통해 그의 손에 들린 물체를 알아본 뒤에는 눈썹을 살짝 찡그린다.

"너 그런 것도 해?"

"대마도 아닌데 어때."

제이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넌 안 자?"

"마크가 걱정돼서 잠이 안 와."

자신의 신세를 체념한 스티븐의 눈빛과 오늘은 들을 일 없을 줄 알았던 이름에 방금 붙인 담뱃불처럼 분노가 확 타오른 제이크는 방 창문을 조금만 열며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그렇겠지, 하고 생각을 고쳐먹는다. 편두통에 시달릴 정도로 집착하는 마크와 떨어진 적이 없는 데다 여기 오는 것을 두고 싸웠으니 불안할 것이다.

제이크는 잔기침을 해대는 스티븐을 위해 등을 돌리고 서서 창밖을 향해 담배를 피운다. 멀리서 시정잡배의 고함과 광기에 사무친 비명과 바이크가 매섭게 달리는 소리 같은 것들이 들려오지만 그건 시세로에서 일상적인 소리였다.

"마크가 걱정되면 돌아가지 그래?"

고개만 뒤로 돌리고 퉁명스레 내뱉자 그건 안 된다고 한다.

"다 마크를 위해서야. 내가 돌아가면 소용없잖아. 이 시간에 나가는 게 무섭기도 하고."

분노든 슬픔이든 어쨌든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인 마크가 스티븐 없는 집에서 차분히 혼자 생각하기를 바란다. 평소의 마크라면 꽤 이성적이고 담백한 행동거지를 보이지만, 스티븐이 관련된 일이라면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기에 진정하고 있을지 뭐라도 부수고 있을지 판가름할 수가 없다.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은 걸 보면 나름 스티븐을 배려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스티비가 내 흔적을 달고 돌아가도 얌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마크가 볼 수 있는 곳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제이크는 냄새야말로 보이지 않아도 가장 알아채기 쉬운 흔적이라 생각하고 다 피운 담배를 재떨이에 올려둔 뒤 새 담배를 꺼내 피운다. 창밖을 향해 있던 몸을 돌리고서 냄새가 잘 스며들도록 방 안으로 숨을 내뱉자 스티븐은 단속적인 기침을 하면서도 불평 없이 겨울 이불을 코까지 끌어올린 채 창밖을 바라본다.

제이크는 지금 이 순간이 마치 그들이 정사를 하고 난 뒤와 같다고 느낀다. 스티븐은 취기와 잠기운에 젖은 눈동자를 반만 뜬 채 이불 속에 누워 있고 자신은 여운에 잠겨 담배를 피우는 그런 풍경.

소음들은 빠르게 지나가다 가라앉아 두 사람만을 의식하게 만든다. 제이크는 깊게 잠이 든 스티븐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뒤 방을 나와 소파에 누워 눈을 감았다. 그러다 어떤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소파에 앉아서 돌아보면 스티븐이 거실에 두었던 짐가방을 뒤적거리며 갈 채비를 하고 있다. 이미 옷을 갈아입었고 간단하게 세수도 한 건지 앞머리가 덜 마른 채 흔들거린다.

"미안, 깼어?"

"돌아가려고?"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보면 아직 아침이었다.

"마크 때문에 빨리 가 봐야겠어. 어제 너무 재밌었어, 제이크. 다음에 또 놀자."

현관에서 다급하게 말을 내뱉은 스티븐은 두고 갈 뻔한 목도리를 잘 챙기고 집을 나선다. 제이크도 인사를 하고 그를 배웅했다. 이러면 마크를 혼자 두는 게 교육이 아니라 벌이 된 것 같다.

다음 날, 제이크는 드디어 마크를 만날 수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할까 싶었는데 마크는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이제 두통은 다 나았냐고 물으면 비아냥거리는 것 같아서 이번 주에 있을 추수감사절에 뭘 할지나 물어보았다.

"아빠도 휴일이라 집에서 우리끼리 파티를 할 거야. 너도 올래?"

스티븐이 대답했다가 질문도 했다. 대놓고 제이크를 초대하는 걸 보니 어제 돌아가서도 심하게 싸운 것 같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제이크는 나흘이나 되는 연휴 동안 후견인을 따라 '일'을 하러 가야 했다. 빈틈이 많은 시기이니 목표물을 처치하기 좋은 때라는 것이다.

"미안, 삼촌이랑 보내야 해서 연휴 동안 여기 없을 거야. 밀워키에 가야 하거든."

"그렇구나."

칠면조 고기를 먹지 못하는 스티븐은 추수감사절마다 아빠가 만들어주는 비건 요리에 대해 떠들어댔다. 마크는 시종일관 아무 말 없이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어떤 의미로는 그게 더 무서웠다.

수요일 저녁, 근처 주유소를 알짱거리는 친구들에게 약국에서 빼돌렸던 감기약들을 파는데 한 명이 보이지 않았다. 물어보니 이 짓거리의 후유증이 생겨 입원 중이라고 한다. 약으로 병을 얻고 약으로 다시 치유한다는 게 웃겼다. 제이크는 이런 감기약 뭉치든 뭐든 약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결심했다. 후견인인 콘슈도 백해무익이라며 약은 절대 하지 말 것을 권했었다.

내일부터 추수감사절인데 뭘 할 건지 묻길래 콘슈와 일행을 따라 밀워키의 카지노에 출몰할 타겟을 죽이러 간다고 대답했다. 말단인 녀석들은 조직의 중견인 콘슈와 일하는 걸 부럽다고 하며 자기들 덕에 출세했으니 비싼 밥이나 사 달라는 농담을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콘슈는 이미 제이크의 집에 와 있었다. 그 몰래 만든 푼돈을 챙기고 돌아온 제이크는 새로운 삶이 이토록 싫어질 수가 있나 싶었다. 보육원을 벗어나지 않았어도 스티븐과 마크는 시세로에 이사 왔을 것이고 개미 구경이든 뭐든 어쨌든 학년이 같으니 서로를 알았을 것이다.

이런 신세만 아니었으면 둘의 집에 놀러 가서 불쌍한 아버지도 만나고 추수감사절 만찬을 즐겼을 텐데. 이제 알 카포네를 꿈꾸지 않는 제이크는 스티븐이 오던 날 숨겨두었던 것들을 찾아서 제자리에 돌려놓고 콘슈의 계획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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