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글

Bruised Fruit 4 (끝)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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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워키에서 보낸 추수감사절은 꽤 즐거웠다. 아끼는 헌팅캡을 쓰고, 잘 보관한 가죽장갑을 끼고, 블레이저 위에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를 두르고, 눈을 게슴츠레 뜨고,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전날 자란 수염을 깎지 않으면 충분히 청년으로 보였다.

목요일, 혹시나 도망칠 경우를 대비해 근처의 길을 익히기 위해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다. 금요일, 콘슈와 그의 일행과 함께 조작된 신분증을 들이밀고 카지노에서 목표물을 기다렸다. 토요일로 넘어가던 밤, 술에 취한 목표물에게 일부러 시비를 걸어 바깥으로 끌어냈다. 소란스러운 휴일을 틈타 재빨리 차에 태운 뒤 스페인어를 섞은 저음으로 그를 협박하는 일은 좀 재밌긴 했다. 동료들-이라 칭하는 것도 우습지만-은 꼬맹이 제이크가 제법이라고 칭찬했다. 다 같이 새벽 내내 사후 처리를 하고는 호텔로 돌아와 곯아떨어졌다. 토요일, 다들 카지노나 유흥을 즐기러 나갔지만 제이크는 지고지순한 마음으로 하루종일 텔레비전이나 보았다. 일요일, 아침을 먹은 후 콘슈가 시세로의 집 앞에 떨궈 주고 그가 받을 보수에 대해 알려 주었다.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집에서 쉬다가 쌍둥이는 뭘 하고 있을지 궁금해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사실대로 말할 수 없으니 일주일 만에 만난 둘에게는 삼촌이 사는 밀워키에서 삼촌 친구들과 밤새 게임을 하고 잔뜩 먹고 마셨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무리 처단해야 할 악인이라도 사람을 죽이고 다닌다는 이야기보단 술을 마음껏 마셨다는 이야기가 더 낫지 않은가?

스티븐에게 연휴 내내 뭘 했냐고 묻자 우물쭈물하며 마크의 눈치를 보는 것이 눈에 띄었다. 아무래도 마크가 다시 주도권을 쥐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냥 평범하게 아버지랑 칠면조를 뜯고(스티븐은 못 뜯고) 도심으로 가서 쇼핑을 하거나 했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범상치 않은 일들이 지나간 일상은 여전했다. 수업 시간에 똑 부러지는 마크의 모습, 클럽 활동을 끝낸 스티븐과 도서관에서 마크를 기다리다가 퇴근한 마크의 눈총 세례를 받는 저녁, 정신이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약사, 모험담을 들려주니 좋아라 하던 주유소의 무리, 졸업반이라고 과한 과제들.

그렇게 한 달이 지나자 시카고의 추위는 말할 것도 없이 연일 뉴스에서 떠들어댔고 모두가 크리스마스에 들떠 있었다. 제이크는 콘슈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잘 빠진 주머니칼이나 사 달라고 말해놨었는데, 느닷없이 스티븐이 뭘 갖고 싶냐고 묻길래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애도 아니고, 그런 거 됐어."

방학식을 해서 일찍 마친 12월 중순이었다. 똑같이 일찍 마칠 거라고 했던 마크의 귀로를 기다리는 스티븐과 카페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 속으로 기쁘긴 했지만 어려운 형편을 알고 있는 데다 친구끼리 선물 교환을 하는 게 쑥스러워서 손까지 휘저으며 거부했다. 스티븐은 눈썹을 늘어뜨리고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머그컵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고마워서 그래."

턱을 괴고 삐딱하게 앉아있던 제이크는 뭐라 할지를 몰랐다. 제이크도 이런 자신과 스스럼없이 친구가 되어준 스티븐-과 마크-이 고마웠다. 연말이기도 하니 사이좋게 셋이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교환하고 작게 파티라도 해서 우정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그럼 우리집에서 파티할래? 마크랑 셋이서. 어때?"

스티븐은 움지럭거리던 손가락을 멈추고 고개를 돌린다.

"마크도?"

"당연히 마크도 있어야지."

"밀워키에 안 가?"

밀워키? 아, 삼촌이 거기 산다고 거짓말했었지.

"삼촌이 올해는…… 친구들이랑 여행 간대. 그러니까 마크 데리고 와."

"하지만… 마크는 안 좋아할 거야."

왜지? 스티비도 같이 할 자리인데? 제이크는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으리라 예감한다. 반지의 제왕을 보았던 날 이후에도 마크의 통제와 집착에는 크게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스티븐은 마크에게 한 소리 들었을 테고, 요즘 들어 더 기를 못 펴는 거겠지. 스티븐은 부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무조건 자기 할 말부터 쏟아내는 성격이었다.

"왜? 별다른 약속 없으면 우리집에서 놀자. 이번에는 꼭 밤 새워서 네가 좋아한다던 툼 버스터도 보고 술도 많이 마시고 원하면 담배 피우는 것도 가르쳐 줄게."

좋지 못한 말들에 제이크는 중간부터 목소리를 낮추며 스티븐을 유혹했다. 스티븐은 한숨을 쉬고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뭘 하든 상관없어. 대신…… 마크는 안 데려갈래."

"정말 그래도 돼?"

또 벌, 아니 훈련, 아니 교육, 아니 혼자 있는 버릇을 들이려는 건가? 이제 내년이면 정말 졸업하고 성인이 되니까?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 스티븐이 큰 용기를 낸 것에 감동한 제이크는 아까 말한 대로 선물 교환을 하자고 했다. 표정이 밝게 변한 스티븐은 이집트 상형문자 그림을 수놓은 담요와 쿠션 세트를 갖고 싶다고 했다. 겨우내 집에서 그 담요를 덮고, 그 쿠션에 등을 기대어 이집트에 관한 공부를 하면 능률이 더 오를 거라길래 제이크 입장에선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사 주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제이크, 너는 뭘 갖고 싶어?"

콘슈가 사 줄 주머니칼 말고는 딱히 갖고 싶은 게 없었다. 정확히는 스티븐에게서 받는 것이었다. 제이크는 삐뚤하게 앉아있던 자세를 고치고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넣었다.

"그냥 너랑 같이 있는 시간이면 될 것 같아."

정말 바라는 게 없기에 재밌게 논다면 그것도 선물이 아닐까. 스티븐은 입을 다물고 당황해했다. 놀린 게 아닌데 장난이라 생각했나 보다.

마침내 알았다는 대답을 들은 제이크는 씨익 웃으며 크리스마스에 뭘 할지 계획을 짰다. 제일 먼저 저녁 먹으면서 툼 버스터를 보자. 그리고 대전 게임도 하자. 이미 삼촌한테 다른 거 사 달라고 했는데 너랑 놀 거니까 게임기로 바꿀 거야. 크리스마스니까 맥주 말고 와인이 낫겠지? 치즈도 먹자. 너 치즈는 먹을 수 있냐? 케이크는 뭐가 좋을까? 이번엔 도시락 같은 거 싸 오지 말고 같이 만들어 먹자. 원하면 며칠씩 있다 가도 돼. 방학이잖아. 제이크는 처음으로 보육원이 아닌 집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보내게 되자 신이 나서 마구 떠들어댔다.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 세 시에 만난 제이크와 스티븐은 도심으로 가서 쇼핑을 했다. 마크에게 뭐라고 했냐고 물었는데 그냥 솔직하게 다 말했다고 한다. 마크가 화내지 않도록 일부러 아빠가 있는 자리에서 말했더니 아빠는 오히려 책만 읽는 자신이 친구랑 논다는 것에 좋아했다고.

둘은 덜덜 떨며 자전거를 끌고 또 버윈으로 가서 크리스마스 캐럴이 흐르는 마트로 향했다. 면허는 있어도 누구 하나 차가 없는 것에 불평을 하다가 이것도 지금밖에 할 수 없는 추억이라며 웃었다.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사람들을 헤치고 직접 조리할 식재료, 와인과 큐브 치즈, 초콜릿 무스케이크 등을 사서 힘겹게 돌아왔다.

산 것들을 정리한 뒤에는 소파에 앉아 차를 탄 컵을 꼬옥 쥐고 손부터 녹였다. 툼 버스터는 스티븐이 어릴 때 사 놓은 DVD를 가져왔다. 어젯밤, 마지못해 가정용 게임기를 사 들고 방문했던 콘슈는 잔소리를 하려다가 한숨을 쉬고 즐겁게 놀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 게임기를 품에 안은 제이크는 그의 산타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라고 했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래서 완벽하게 흘러갈 줄 알았다. 제이크의 한 마디만 아니었다면.

"마크가 없는 게 아쉽네. 걔랑은 이런 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두 손으로 머그컵을 감싸고 있던 스티븐은 고개를 돌리고 제이크를 쳐다보았다. 제이크는 동의하지 않냐는 듯 재주 있게 한쪽 눈썹만을 올려 보인다. 그러자 스티븐은 고개를 떨구고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찻물 속에서 일렁이는 자신의 모습을 본다. 언제나 발랄하던 스티븐이 주눅 든 모습을 이상하게도 자주 목도하게 된 제이크는 계속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하기로 한다.

"너 요새 마크 이름만 나오면 표정이 변해. 무슨 일 있었어?"

스티븐은 고개를 들고 자신들을 비추는 시커먼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본다.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던 제이크는 그 옆모습을 보다가 서둘러서 탁자에 머그컵을 올려두었다. 스티븐이 갑자기 울었던 것이다. 역시 무슨 일이 있었구나. 스티븐이 쥐고 있던 머그컵도 탁자에 살짝 둔 뒤 말없이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두드려준다. 조용히 눈물을 흘리던 스티븐은 코를 훌쩍거리며 그에게서 떨어진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스티븐은 눈을 내리 깐 채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는 모습에 제이크는 코에서 날숨을 길게 내쉬며 마크가 만든 우리 속에 갇혀 우는 것도 자유롭지 못한 스티븐을 안타깝게 여긴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렇게 말하면 스티븐은 고개를 저었다.

"……추수감사절에 마크랑 또 싸웠어. 아빠는 그때 이웃들을 만나러 나가서 집에 마크랑 나밖에 없었어. 어쩌다가 말다툼을 해서 싸우게 됐는데, 네 말만 따르면서 살기 싫다고 했어. 그러니까 마크가 그럼 제이크 말은 왜 듣냐길래 거기서 걔 이름이 왜 나오냐고, 제이크는 너랑 다르다고 했지."

스티븐치고는 꽤 거친 언행이라 볼 수 있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크에게 대들었다는 얘길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근데… 근데 마크가…… 화가 많이 났었나 봐."

말을 하던 스티븐은 손까지 떨면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드디어 마크가 스티븐을 때리기라도 한 건가? 좋았던 기분이 금세 곤두박질친다.

"내 팔을 잡고 방으로 끌고 가더니… 내가 누구 말을 들어야 되는지 가르쳐 주겠다면서……."

"때렸어?"

나직이 묻자 스티븐은 또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와 비교당해 화가 난 마크가 스티븐을 방으로 끌고 가서 때리지도 않았다면, 뭘 했을지 알아채는 데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이크는 불현듯 한 달 전, 추수감사절 연휴 내내 뭘 했냐고 묻자 우물쭈물거리며 마크의 눈치를 보던 스티븐이 떠올랐다. 형제를 돕긴커녕 병적인 집착만 악화되었다. 마크가 스티븐을 억지로 범한 것은 힘의 과시일 뿐이고 그 수직적인 관계는 아직 지속되고 있는 듯했다. 제이크는 짧은 곱슬머리가 부드럽게 얽히고설킨 머리통을 안아 주었다.

슬픔이 오래 머물기엔 즐거운 시간이 아주 길게 남아 있었다. 토닥여주고 쓰다듬는 손길에 평온을 되찾은 스티븐과 마트에서 샀던 식재료들을 다듬으며 농담을 하자 그는 조금씩 웃음을 되찾았고 고기는 없지만 꽤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들어냈다. 툼 버스터는 인디아나 존스와 비슷한 느낌이었는데, 스티븐이 어릴 적부터 좋아한다던 이유를 깨달았다. 우연히도 주인공의 이름이 스티븐 그랜트였던 것이다. DVD 케이스에 적힌 '어떠한 두려움이 닥쳐도 물러서지 않는 스티븐 그랜트 박사'라는 카피 문구처럼, 화면 속이 아니라 옆에 있는 스티븐 그랜트도 언제 울었냐는 듯 헤헤거리며 초콜릿 무스케이크를 떠먹고 있다.

이브 날의 밤이 무르익자 둘은 와인 마개를 따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며 서로를 비웃고 나서 와인을 따라 마셨다. 점원의 설명을 듣고 골랐던 것이 포트 와인인 줄 몰랐던 제이크는 단맛이지만 도수가 높은 와인에 금방 취해버린다. 주류에 면역이 없는 스티븐은 더 빨리 취해서 이미 시뻘건 얼굴을 하고 있다. 꼬여가는 발음으로 재잘거리다 한숨을 푹푹 쉬던 그는 유리잔에 남은 것을 단숨에 마신다.

"터프한데, 스티비."

실실거리며 놀리는 투로 말하자 스티븐은 코를 찡긋거렸다.

"속상해서 그러는 거니까 놀리지 마."

"갑자기 뭐가 속상해."

"진짜로 더는 마크의 말을 듣지 않을 거야. 마크는 나를 사랑해서 지켜주는 거라고 했지만, 그냥 자기가 불안한 거 아냐."

술에 취해 감정적으로 변한 스티븐은 형제의 삐뚤어진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말들을 내뱉고는 안쓰럽다고 동정한다. 그는 사육되는 우리에서 나오려 하다가도 물러나고 있었다. 아마도 갈팡질팡하는듯했다. 스스로의 약점을 드러내고 몸에 손을 댔다 해도 마크는 뱃속에서부터 함께 큰 쌍둥이이고, 가족들의 상실을 겪고 저리되었으니 무조건 밀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스티븐마저 마크를 밀어내면 누가 추락하는 마크의 손을 잡아줄까?

"그치만 너도 마크를 사랑하니까 이해해준 거잖아. 이해해서 사랑한 게 아니고."

마크에게 강제로 몸과 마음을 저당 잡힌 스티븐은 반항하고 맞서 싸우기도 했지만 결국 발목을 잡는 건 하나였다. 마크가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를 이해하기 위한 가족다운 사랑이었다.

"그래… 그렇지."

스티븐은 빈 잔을 손에 들고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이젠 네가 더 좋은데도… 마크를 사랑해야겠지……."

열일곱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낯선 말에 제이크는 눈을 크게 뜨고 스티븐을 쳐다보았다.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는 시선을 느낀 스티븐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돌린다. 소파에서 약간 몸을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한 제이크는 붉어진 귀에 낮게 속삭인다.

"키스할래?"

충동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스티븐은 놀라서 고개를 휙 돌리다가 바싹 붙어있던 제이크와 코끝이 맞닿았다. 기회를 놓치지 않은 제이크는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고 입을 맞췄다. 스티븐은 얌전히 있었고 그러자 입술의 감촉을 음미할 여유가 있었다. 뜨겁고 부드러웠지만 긴장한 탓에 촉촉하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로 넘어가던 날, 제이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열을 나누었다. 강제적이라 해도 마크와 몇 번은 했을 스티븐은 타인을 받아들이는 게 익숙해 보였다. 괴로움에 헐떡거리다가도 간간이 희락이 섞인 목소리를 내며 제이크의 걱정을 덜어준다.

스티븐의 뜨거운 몸속으로 파고들수록 숨어있던 비밀은 현실이 된다. 동생을 잃고, 엄마를 잃고, 아빠는 책임을 지고, 스티븐 혼자만 남고, 다가오는 사람들은 모두 위험하고, 그들에게서 스티븐을 보호해야 하고, 그런데 스티븐은 자꾸 벗어나려 하고, 그래서 가두었더니 바깥세상의 이름을 부르고, 누구의 이름이 더 중요한지 알게 해야 했고, 그래도 스티븐은 바깥세상의 이름을 부르고 싶어 했다. 그가 부르짖고 싶어 한 이름이 된 제이크는 현실을 비밀 속에 숨긴다.

파정을 맞이한 스티븐은 제이크의 가슴께에 누워 심장 소리를 들으며 무성한 음모를 손가락으로 쓰다듬다가 잠들었다. 제이크는 자전거를 탔을 때처럼 전해져오는 스티븐의 무게와 체온을 껴안고서 사람이 너무 행복하면 침착해진다는 진리를 깨닫고 눈을 감았다. 그 상태로 크리스마스가 반나절이나 지났다. 잠에서 깬 둘은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면서도 웃었다.

제이크는 스티븐이 갖고 싶다고 했던-이집트 상형 문자가 새겨진 담요와 쿠션을 건넸다. 그는 그것을 집에 들고 가지 않았다. 3주짜리 겨울방학 내내 제이크의 집에 오면 쿠션에 등을 기대고 담요를 덮었다. 그리고 더 이상 마크가 파트타임 일에서 돌아올 때까지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기다리지 않았다. 콘슈가 찾아오지 않을 때, 제이크가 조직이든 약국이든 일하러 가지 않을 때 그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삼촌이 사 준 게임기로 대전 게임을 하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몸이 살짝만 닿아도 침대로 향했다.

제이크는 이제 밝힐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여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끄집어냈다. 부모님이 누군지도 모르고 보육원에서 자랐다는 말에 울상을 짓던 스티븐도 삼촌이라고 했던 사람이 실은 보스였고 처단해야 할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한다는 대목에서는 움찔거렸다. 그래도 날 사랑해주면 안 돼? 제이크는 자신의 약한 부분을 드러내고 동정심을 자극하는 꼴이 마크와 같다고 느꼈다.

어느 날은 모아둔 감기약을 팔러 가는 자리에도 데리고 갔다. 친구들이 '¿Quién es?(쟨 누구냐?)' 라고 묻길래 'No tienes que saberlo(몰라도 돼)' 라고 대답했다. 아직 스페인어 기초밖에 모르는 스티븐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물품을 건네고 돈을 받는 과정뿐이었지만, 시세로의 뒷면을 직접 경험하자 굉장히 무서웠던 모양인지 다시는 거기에 데려가지 말라고 혼났다.

새해가 되던 날에는 스티븐의 초대를 받아 그들의 집을 방문했다. 스티븐이 무슨 소릴 했는진 몰라도 둘의 아버지는 제이크를 마음에 들어 했다. 다 같이 카운트다운을 하고 2005년이 되어도 마크는 언짢은 표정을 풀지 않고 대답도 무뚝뚝하게 했다. 이 싸움에선 내가 이긴 건가? 이겼다기보단, 마크가 선택받지 못한 거겠지.

의지하던 스티븐이 관심을 주지 않자 마크가 가진 마음의 병은 서서히 나아졌다. 스티븐을 닦달하지도 않고 어디서 무얼 하는지 집착하지 않게 되었다. 스티븐에게 요새 마크의 두통은 어떠냐고 물으면 괜찮아졌다고 해서 기분이 좋았다. 처음으로 돌아간 충격 요법이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제이크는 아무렇게나 꾸며낸 말치곤 역시 전문적인 느낌이 강했다며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했다.

그는 빛깔 좋은 구체들 사이를 헤치고 언뜻 보면 썩은 것처럼 보이는, 멍이 든 과일 하나를 손에 집어 들었다. 생긴 것도 못난 것이 과연 맛이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멍든 부분을 잘라낸다 하더라도 본래의 향과 혀에 찌르르 닿는 단맛은 그대로 남는 법이다. 칼을 들고, 떨어뜨리지 않도록 꽈악 잡고, 시커멓게 변한 부분을 쿡 찌르고, 손을 베이지 않을 만큼 아슬아슬하게 쭈우욱 내려간다. 잘라낸 부분을 휙 털어낸 뒤 한 입 베어 물면 농익은 맛이 느껴졌고 과즙이 삐져나와 턱을 타고 손바닥 아래로 흐른다.

한 편, 그는 자신의 멍든 부분을 스스로 잘라냈다. 속을 감추는 질긴 껍질을 깎지 않고 그대로 잘라서 내다 버렸다. 검게 멍든 부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뭉텅뭉텅 썰어내고 속을 파내면 한가운데에 웅크린 씨앗이 나타났다.

그는 스티븐이 과육 없이 자신의 씨앗만을 삼키길 바란다. 뱃속에서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 가지를 기르고, 열매가 맺히면 입을 열 때마다 자신과 똑같은 향기가 날 것이다. 스티븐은 그의 열에 처박힐 때마다 향을 뿜을 테고 그러다 뱃속에서 자란 옹골진 열매들을 토해낼 것이다.

자신의 향기와 맛이 나는 과실을 잉태한 스티븐. 이른바 사랑의 결실이라는 위대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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