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글

적응할 시간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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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 주제 : 금붕어

눈을 뜨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늑함을 유지하는 이부자리와 켜켜이 쌓인 책들, 언제 변할지 몰라 관심을 주기에 적절한 영국의 날씨, 대도시에서의 삶이라는 흔한 표현. 그런데도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롭다……."

듣는 이도 없는데 나직하게 중얼거린 스티븐은 어릴 적부터 배를 차갑게 해선 안 된다던 어머니의 말을 따라 여름용 면담요를 배에만 덮은 채 모로 누워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본다. 빗물이 잘 닫힌 창문에 부딪혔다가 내리 떨어지고 있다. 톡, 톡, 규칙적인 소리가 마치 연이어서 내지르는 귀여운 인사 같다고 생각한 스티븐은 둥그런 눈을 치켜뜨고 미소 지었다. 안녕, 빗방울들아. 잘 가, 빗방울들아.

으레 어른이 되면 그렇듯 스티븐도 사랑하는 부모님의 품을 떠나 박물관 큐레이터라는 꿈을 이루기 위해 도심으로 왔다. 그는 형제가 없는 외아들이었고 친근하고 엉뚱한 성격 덕분에 영국의 작은 동네에서 이웃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그러나 런던은 그렇지 않았다. 내 주변인들만 그런 걸지도, 라고 생각하기엔 대부분의 사람들이 날씨처럼 쌀쌀맞게 굴었다. 도시 사람들은 너무 바빠 자기 일밖에 모르니까 그런 거야.

런던에 처음 왔을 때, 자신도 막 도시 사람이 되어 바빴기에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었다. 허무하고 갈피를 못 잡는 이 감정을 잊고 살았는데 몸은 간직하고 있던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물질적으로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갔다. 플랫에는 책이 점점 늘었고 자잘한 가구도 사 와선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 두었다. 그러고는 그 가구들 위에 또 새로 산 책들을 쌓았다. 마음에 드는 책들은 자주 읽어서 첫 문장을 줄줄 외울 정도였다.

사소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멀리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댔고, 배경음악마냥 텔레비전을 꺼놓은 적 없었고, 혼잣말도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오늘 아침, 자신이 외롭다는 걸 인지하자 익숙한 것들이 괴리적으로 다가왔다.

이제는 생명이 없는 것들에 의지하지 말자. 스티븐은 새 책과 가구를 사지 않기로 결심하고 텔레비전도 식사 시간, 여가에만 틀기로 했다. 혼잣말은 어쩔 수 없는 버릇 같은 것이라 내버려 두기로 한다. 어차피 들을 사람도 없는데, 뭐.

강박과도 같던 습관을 떨쳐냈으니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될 것 같다. 아는 사람의 수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만 용기를 내어 묻기로 한다. 스티븐은 즐길 거리가 넘쳐나는 어른이면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자신이 마치 제약 많은 어린아이처럼 느껴졌다.

"저기, 도나. 물어볼 게 있는데요. 외로움을 이겨내려면 어떻게 하죠?"

종일 같이 붙어서 일하는 상사 도나는 스티븐이 어떻게 최종 면접까지 붙었는지 이해되지 않는 사람이다. 무시하는 말을 잔뜩 하고 부려먹는 데에 혈안이 되어있긴 해도 어쩌다 가끔 도움이 될 때도 있었기에 가장 먼저 물어보았다(다정하신 어머니께선 걱정하실 게 뻔하니 이런 고민을 말씀드리지 않기로 했다). 작업용 탁자 너머의 도나는 새로 뽑은 가격표를 하나하나 홀더에 끼우던 손을 멈추고서 빤히 쳐다보았다.

"너도 외로움을 타? 생각 없이 사는 줄 알았는데."

"네, 뭐… 아마도요."

"잘 이겨낼 방법을 알려줄게. 이 가격표를 전부 끼우고, 이것들을 저기 위에 놓고, 전표를 모두 정리하고, 저 상자 안에 든 제품 태그도 교체하고, 다음 달부터 있을 전시에 맞출 디스플레이를 연구하고, 신상품 리스트를 정리하고, 봉제 인형 비닐을 뜯고……."

"아, 아니에요. 저 안 외로워요… 아마도요."

"외롭다고 생각되면 언제든지 여기 있어도 돼. 이참에 창고 열쇠 넘겨줄까?"

박물관의 기념품 담당 총괄자인 도나는 블레이저 주머니를 뒤져 물류 창고 열쇠를 들어 보였다.

"아뇨, 됐어요."

"어차피 줄 생각도 없었어."

도나는 약 올리듯 한마디하고 열쇠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너한테 맡겼다가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네… 그렇죠."

스티븐은 들리지 않을 만큼 미미한 한숨을 내쉬고 도나의 지시대로 바삐 움직였다. 내일은 휴일이라 자질구레하게 손이 많이 가는 일들을 미룰 수 없었다.

어둑어둑한 밤. 크로스백을 고쳐 매고 귀로에 오른 스티븐은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다가 뒤에서 빵,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걸음을 멈추자 차에 탄 도나가 운전석에서 손을 내민다.

"처진 어깨에 힘 좀 주지 그래? 오늘은 맛있는 거 잔뜩 먹고 기운 차려."

"어… 고마워요."

"휴일 잘 보내!"

말을 마친 도나는 스티븐을 내버려 두고 나아간다. 스티븐은 그래도 신경 써 주려는 도나의 차에 대고 마음속으로 감삿말을 전했다.

도나의 말대로 오랜만에 맛있는 걸 잔뜩 먹기로 한 스티븐은 도심을 돌아다니며 그가 먹을 수 있는 비건 요리들을 포장해왔다. 그래, 맛있는 걸 먹고 평소처럼 좋아하는 일을 하면 외롭지 않을 거야.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스티븐은 텔레비전부터 틀고 타인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 온 것들을 먹기 좋게 정리했다.

접이식 간이 탁자를 펼쳐서 기세 좋게 한 상 가득 차렸지만, 다 먹기엔 많은 양이어서 결국 꾸역꾸역 먹다가 지쳐버렸다. 입가에 묻은 타히니 소스도 닦지 않고 침대에 앉은 그대로 벌러덩 드러누운 스티븐은 천장을 바라본다.

"똑같이 외로운데 많이 먹고 외로운 것뿐이잖아……."

사람 구경을 하지 않는 시간이 되자 외로움의 존재는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전날 먹다 남은 것들을 먹어 치운 뒤, 침대에 엎드려서 책을 읽거나 책상에 앉아 고전 명화 직소 퍼즐을 맞추거나 산책을 하거나 하며 어떻게 해서든 휴일을 버틴 스티븐은 열심히 일을 하고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용 휴게실에서 보안팀 소속인 JB에게 슬쩍 다가갔다. 보안을 책임지는데다 제임스 본드가 연상된다며 JB라 불러달라고 요청한 그는 고객들과 도나 다음으로 대화를 많이 주고받는 사람이었다. 넓은 박물관의 보안을 담당하는지라 모든 직원과 대화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와는 나이도 엇비슷해 농담도 자주 하는 무던한 사이였다.

"저, JB. 물어볼 게 있는데요. 가끔씩 외로울 때 어떻게 해요?"

"우와, 스코티. 요즘 외로워?"

도나처럼 의외라는 반응을 보인 JB는 휴대전화에서 시선을 떼고 스티븐을 훑어보았다. 스티븐은 짤막한 그 순간이 조금 불쾌했다. 네 꼴을 보면 사랑해줄 사람이 없는 게 당연하다는 눈빛이었던 것이다.

"네, 좀… 아마도요. 그리고 스티븐이에요."

"귀여운 동물이 나오는 동영상을 보는 게 최고야. 가만히 멍때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거든."

"영상이 끝나면 결국 똑같잖아요."

"심심할 때 보고 있으면 좋다니까? 그리고 난 외로울 틈이 없어. 동영상 보는 것 말고도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는 손에 쥔 휴대전화를 흔들어 보였다. 스티븐은 종이책을 더 가까이하는 성격이라 저는 딱히? 라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그럼 이 앱 다운받아봐."

"뭔데요? 우, 싫어요!"

JB의 휴대전화 화면을 본 스티븐은 얼굴을 찡그렸다.

"외롭다면서? 너처럼 외로운 사람들이 많이 쓰는 거야. 전부 익명에다 거리순으로도 찾을 수 있고, 멀리 있으면 영상 통화도…."

"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건 싫어요. 저 이만 갈게요. 점심시간 거의 끝났어요."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어버린 스티븐은 도망치듯 휴게실에서 나왔다.

도나의 말대로 맛있는 걸 잔뜩 먹어도 외롭고, JB의 말대로 하루종일 휴대전화만 붙들고 있어봤자 똑같이 외로울 것이다. 점심 이후 도나와 교대하여 카운터에 선 그는 한 여성이 앞을 지나가자 연애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마음을 접고 만다. 취미, 관심사, 가치관이 같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는 건 아무리 큰 도시와 수많은 인구에 둘러싸여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는 오늘도 고대 역사와 유물에 감명받아 기념품을 구매하는 고객들에게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그는 오늘도 수다 좀 떨지 말라는 상사의 꾸지람을 듣는다. 그는 오늘도 얘기 하나 들어줄 사람 없는 것에 고독과 애석함을 느낀다. 그는 오늘도…….

오늘은 다른 하루가 될 것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스티븐은 계산을 하다가 기다리는 관람객들이 반려동물에 대해 나누던 이야기를 듣고 반려동물을 떠올렸다. 동물은 대체로 좋아하지만 집에 쌓인 책과 자잘한 가구들을 위해서 고양이는 안 되었다. 바깥 활동보다 실내에서 활동하는 걸 좋아하니 강아지도 후보 탈락. 말을 따라 하는 앵무새도 이웃에 방해가 될 테니 안 돼. 무엇보다 그가 사는 플랫은 대로변에 있어서 마당이 없기에 소형동물만 키울 수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후보로 남은 것은 물고기였다. 소음도 없을 테고, 관리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고, JB의 말대로 넋 놓고 보기만 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터였다. 오늘은 웬일로 잔업이 없어서 스티븐은 일찍 퇴근하고 관상어 전문점으로 향했다. 저절로 웃음이 나오며 가슴속이 두근거렸다. 외로움이 잊고 있던 순수한 기쁨을 다시 찾게 해주었다는 아이러니에 고마움을 느낀다.

아예 모든 것이 처음이라고 하자 점원은 대략적인 설명을 해 주고는 다른 궁금한 것은 인터넷에 잘 나와 있으니 검색해서 찾아보라고 했다. 스티븐은 사무적으로 친절한 점원에게 불만을 품었지만 빨리 주문을 마치고 싶었기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인터넷에 널린 정보가 이 점원보다 훨씬 전문적일 것 같기도 했다.

오래오래 함께하고 싶어서 수명이 긴 녀석으로 추천해달라고 말하면 점원이 금붕어가 모인 코너로 데려갔다. 관리만 잘해주면 두 자릿수 넘게 살 수 있다는 말에 스티븐은 꼭 그렇게 해야지, 하고 결심한다. 그를 어둠에서 밝은 빛으로 이끌어 줄 것처럼 반짝거리는 금붕어들이 헤엄치는 커다란 어항 옆에 작은 어항이 있었는데, 거기에도 금붕어가 몇 마리 있었다. 물어보니 선천적인 기형어들인데 데려가실 거면 할인해 드린다고 한다.

대도시의 작은 관상어 전문점에서 스티븐은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지느러미 한쪽이 비정상인 금붕어를 보자마자 이 녀석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스티븐에게는 아프면서도 애틋한 존재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바라보려고 저도 모르게 어항에 손을 대다가 주의를 주는 점원의 말에 바로 손을 떼고 사과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네, 괜찮아요. 스티븐은 아주 적게 할인받은 금액에 살을 더 붙여 충분히 좋은 용품들을 고르고 주문을 마쳤다. 추가금을 지불해 배달 요청까지 끝내고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금붕어 키우는 방법을 조사하고 이집트와 관련된 장식품을 찾아다녔다.

다음 날 저녁, 요청한 시간에 맞추어 주문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도착했다. 제대로 왔는지 하나하나 체크한 뒤 설치를 끝내고, 드디어 작은 금붕어를 커다란 어항에 퐁당 넣자 녀석은 갑자기 바뀐 환경에 어리둥절한 건지 이리저리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스티븐은 아직 인터넷에서 주문한 장식품이 도착하지 않아 텅텅 빈 어항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집안일을 할 때에도 수시로 빛나는 어항 쪽을 보며 금붕어가 잘 돌아다니고 있는지 확인했다.

지느러미 한쪽이 매우 작다는 걸 인지했을 때 동질감을 느꼈다. 짝이 없는 쓸쓸한 처지와 아무도 데려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정해진 결말에 자신을 투영한 것이다. 너랑 나는 똑같구나. 넓고 험난한 세상을 헤엄치는 건 나뿐이겠지만.

스티븐은 오랫동안 함께 살 친구에게 소중한 이름을 붙여주기로 한다.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의견을 구해보기도 했다. 그렇죠, 제가 키울 반려동물이니 제가 짓는 게 더 좋겠죠. 부르기 쉬운 단순한 이름을 생각 중이에요. 그나저나 엄마, 엽서는 또 언제 보내주실 거예요? 자주하는 전화도 좋지만 가끔은 엄마가 쓴 글씨가 보고 싶어요. 바쁘신 건 알지만 시간 나실 때 써주세요. 또 얘기가 샜네요. 이만 끊을게요.

답은 가까이서 찾을 수 있었다. 지금은 8월이었고, 8월August에서 따와 금붕어의 이름은 거스Gus가 되었다.

스티븐은 어머니에게 하던 사소한 말들을 거스에게 하게 되었다. 여름휴가 시즌이 되자 늘어난 일들을 떠넘기려는 도나에 대한 불평, 오늘 점심에 먹은 것, 아직도 밤마다 외롭냐는 JB의 짓궂은 농담, 새로 주문한 어항 장식품, 어머니에 대한 소중한 추억, 조금은 덜어진 외로움, 작은 물고기라도 힘차게 살아가려고 날갯짓을 하는 것에 대한 감상.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가 늘었다.

"거스, 내 몸이 요즘 너무 이상해.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쑤시고 아파. 내 잠버릇이 이렇게 고약했나 싶어……."

최근 들어 붓고 쑤시며 근육통이 오른 몸을 이끌고 출근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마치 정신이 잠든 동안 깨어난 몸이 주인 몰래 밖으로 나갔다가 들어오는 듯했다. 스티븐은 자신의 증상을 깨달았다. 말로만 듣던 몽유병이야! 몸에 생긴 멍이나 상처들이 하루만 자고 나면 싹 낫는 건 이해할 수 없지만 결정적으로, 잠에 취한 정신은 바닥 청소를 하지 못한다. 퇴근한 스티븐은 실수로 집 열쇠를 떨어뜨렸고 그걸 줍다가 현관에 아주 적게 남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핏자국을 따라 구석에 놓인 구두 밑창을 들여다보고선 비명을 지르며 구두를 집어 던졌다.

"이제 어쩌지…… 엄마한테 말하면 엄청 걱정하실 텐데……."

스티븐은 인터넷을 뒤적거리며 정확한 원인이 없지만 높은 확률로 스트레스일 거라는 글들을 보고 너무 외로운 나머지 이렇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갑자기 느껴진 외로움에 신경 쓰느라 습관도 바꾸고 금붕어도 데려올 만큼, 큰 어항 속을 헤엄치는 작은 그에겐 힘겨운 싸움이었던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하려 노력하고 부정적인 생각에서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하려고도 의식했다. 정신이 자는 동안 몸이 사고를 치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방법을 연구했다. 우선은 밖으로 나가려는 몸을 집에 묶어두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혼자 살아 옆에서 봐줄 사람도 없으니 자기 몸은 자기가 지켜야 했다.

처음에는 침대 기둥에 얇은 끈을 묶어 발목에 연결했었는데, 자는 동안 조여와서 아팠기에 끈은 잘라버렸다. 그러고는 새로 산 것이 가죽 족쇄였다. 온갖 음란한 말이 붙은 설명을 헤치고 튼튼해 보이는 것으로 하나를 주문했다. 작은 택배 상자가 도착했을 때도 성적인 장난감을 산 것마냥 부끄러웠다. 그리고 침대 아래에 부드러운 모래를 깔아 아침마다 발자국이 나 있는지를 확인했고 현관문에도 테이프를 붙였다.

깨어난 몸이 다 보고 있었던 걸까? 문에 붙인 테이프가 강제로 뜯기거나, 족쇄가 풀려있거나, 모래 위에 발자국이 찍힌 일은 없었지만 아침을 습격하는 근육통은 여전했다. 스티븐은 자신이 만든 덫이니 자신이 걸릴 수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매일 밤 현관문에 테이프를 붙이고, 모래를 정리하고, 부끄러운 족쇄를 찬 채 잠들었다.

"이 끔찍한 상황에서 날 도와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 네가 사람이 된다면 좋을 텐데. 팔 한쪽은 작지만 대신 다른쪽 팔은 엄청 두껍고 튼튼하겠지? 매일 밤 나가려는 나를 붙잡을 수 있을 거야…… 잘 자, 거스. 새벽에 무사히 돌아와서 내일 아침에도 네 먹이를 챙겨줄 수 있길 바랄게."

오늘 밤도 자신의 몸뚱이가 무사하길 바라며, 밖으로 나가지 않길 바라며 마지막으로 족쇄를 점검한 스티븐은 눈을 감았다.

밤을 닮은 푸르스름한 빛이 나는 어항 앞에 선 마크는 기우뚱하게 헤엄치며 돌아다니는 작은 생명을 눈으로 좇는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해, 스티븐."

마크는 금붕어를 잡으려는 듯한 동작으로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가, 어항에 손바닥을 갖다 댄 채 불규칙한 물결을 한참이나 바라보고서 현관문에 붙은 테이프를 떼고 달빛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어항의 바깥면에는 아무도 모를 손자국이 생겼다.

———

적응하는 건 셋 모두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살 수 있는 거스, 낯선 일들에 적응해가는 스티븐, 스티븐의 새로운 버릇에 적응하려는 마크.

1화 이전 시점을 상상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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