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이후
짧게 / 신서백 빨리 인사하러 와
유난히 흐린 날이었다. 하룻밤 사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려 창문을 열었지만, 들어오는 것은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습한 공기뿐이었다. 자연적 환기 대신 기계적 환기를 선택한 현대인은 공기청정기를 작동시켰다.
"선생님? 친구분이 오셨어요."
"아, 가영 씨!"
"끝나고 시간 되는지 여쭤보러 왔어요. 맛있는 커피를 파는 곳을 알아냈는데, 어떠세요?"
"좋아요. 마침 오늘 오후 진료가 없거든요."
"제가 다 알아보고 왔죠. 그럼 이따 봬요!"
가영 씨는 직원에게 단팥빵을 하나씩 안겨준 뒤 사라졌다. 선생님 친구분 빵 진짜 맛있어요. 저 이거 먹은 뒤로 프랜차이즈 빵집 절대 못 가잖아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환자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불어났던 환자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늦은 점심을 때우며 추가 예약 건을 확인하자 익숙한 성이 눈에 띄었다. 서00. 혹시, 하는 마음에 이름을 확인했지만 다른 사람이었다. 날이 흐려서 그런가, 감성적인 기분이네. 지혁이는 잘 지내려나.
예약이 접수되었다는 메세지를 보내자마자 문이 열렸다. 경쾌한 발소리와 함께 들어온 사람의 모습을 보고 나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서, 지혁 씨?"
"네, 써 가이드입니다~"
"이름이 다른데 어떻게…?"
"그건 영업 비밀이라서요."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속삭인 서지혁이 싱글벙글 웃었다. 치과에 가야 할 때가 됐는데 다른 치과에는 노을이가 없더라고요. 말랑한 게 자꾸 생각나서 왔습니다. 음, 여긴 주황 고래가 아니라 초록 고래네요? 이름이 있나요? 유니트 의자에 눕기 직전까지 서지혁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스케일링 기기를 가져오는 척 핸드폰을 가져와 여전히 활발한 단체 메신저에 짧은 연락을 남겼다.
스케일링이 끝나고 서지혁에게 가글을 시키는데 치과의 문이 거세게 열렸다. 여기에 개자식이 있다면서요! 당차게 외치며 들어온 사람은 이지현과 백애영이었다. 최근에 지현 씨가 애영이와 연락이 된다며 기뻐하긴 했는데, 만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애영 씨?"
"안녕하세요. 음,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나요?"
"네. 전 잘 지냈어요. 선생님은 잘 지내셨나요?"
"아니! 선생님은 못 지냈어. 왜냐면 애영이 너랑 서지혁 저 개자식하고 신 팀장이 말도 없이 사라진 게 너무 서운해서 잠이 안 온다고 하셨거든!"
"인사는 했는데…."
서지혁의 사소한 항변은 철저히 무시당했다. 모두를 대표해 이지현이 따발총처럼 서운함을 전달하는 사이 나는 다른 예약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직원을 퇴근시켰다. 오후 진료가 없어서 진짜 다행이야.
지현 씨 옆에 같이 서서 서지혁의 잘못 아닌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데 다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덩치의 사람이 작은 치과에 들어왔다. 신해량이었다. 진짜야? 입을 떡 벌린 채 굳어있자, 신해량이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인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선생님."
"오랜… 아니 이 사람은 또 어디서 튀어나왔어? 지금 너희 세 명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심란했는지 알아? 살아있으면 살아있다고 답을 하라고!"
지현 씨의 포효는 김가영과 유금이가 올 때까지 줄어들지 않았다. 음, 할 말 대신 해줘서 속이 후련한걸. 우리는 카페를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김가영의 빵집에 모여 앉았다. 전 좀 길게 휴가 써서 한국 온 건데 제가 나오는 바람에 수정 언니가 아직 잡혀 있어요. 이 세 명 만났단거 알면… 아마 그 날이 체력단련실 물품 교체해야 하는 날일 거예요. 이지현의 말에 백애영이 슬쩍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마 수정 씨한테 전화하는 것 같지?
그 후로도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다. 빵집을 개업했는데 사람들이 많이 찾아줘서 폐업하진 않아도 될 것 같다. 빵집 덕분에 치과도 잘 되는 것 같다. 요즘 등산에 재미를 붙였다. 이런 일이 있었다. 요즘은 잠도 잘 잔다. 김재희도 잘 살고 있다. 안부 대신 전해달라.
길고 긴 여름 해가 질 때까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이제 가야할 것 같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삼스레 그들이 입고 있는 평범한 반팔에 청바지가 눈에 띄었다. 그러고 보니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네.
"이번엔 어디로 가시나요?"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영업비밀이군요. 알겠습니다. 대신 아무 말 없이 엽서나 간식만 보내지 말고 잘 지내고 있다는 한마디라도 써서 보내주면 좋겠어요."
"예압, 알겠습니다!"
장난스레 대답한 서지혁이 예의 그 웃음을 지었다. 안 쓰겠구나.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세 사람을 배웅했다. 다치지 않고 멀쩡한 모습으로 얼굴을 보여준 것이 기뻤다. 평범한 20대처럼 돌아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저들에겐 짧은 인연이겠지만 간간이 연락하며 지냈으면 더할 나위 없겠다. 나는 애틋한 전 직장동료들을 한 번씩 꽉 안아주고 수많은 걱정과 바람을 한 문장으로 축약해 건넸다.
"오늘 얼굴 볼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또 볼 수 있을까요?”
"저도 좋았어요. 다음에도 올게요. 언니, 다음에 봐요!"
"잘 지내십시오."
"다음에 또 치과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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