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글

약속의 땅 3 (끝)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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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은 어머니의 집에서 떨어진 동네에서 혼자 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아침을 먹은 후 그의 자취방에서 입을 옷이나 양말 등을 가지고 왔다. 검은색 계열의 옷가지가 많은 건 마크의 취향과 다를 게 없어 보였으나, 요상한 패턴의 셔츠들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패션 감각이 영 형편없다는 스티븐의 주장에 납득한다. 마크 자신도 옷 입는 감각이 없어서 옷장을 열면 블랙, 네이비, 카키, 진한 그레이, 연한 그레이, 어중간한 그레이, 그런 색만 가득했던 것이다. 그래도 칙칙한 조합의 색과 괴상한 무늬의 셔츠들은 좀 아니라고 본다.

임시긴 하지만, 삼십 년 만에 다시 살게 된 형제는 어릴 때로 돌아간 것마냥 들떴다. 헤어지기 전에 함께했던 모험들에 대해 아련한 기억을 공유하고 서로의 습관과 성향을 알아갔다. 마크는 굴곡진 인생에 조금 지쳤지만 연륜이 있었고 스티븐은 공부에 몰두하느라 요령도 없었고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몸만 큰 상태였다. 이러면 혼자 남게 된 스티븐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마크는 경비회사를 때려치우고 영국 이민 비자를 고려해보기로 한다.

박물관 취업을 준비 중인 스티븐이 도심의 쇼핑몰에서 파트타임 일을 할 동안 마크는 어머니의 물건을 정리했다. 깨끗한 책들은 골라내서 교육 기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스티븐이었다면 곧바로 정리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깊은 정이 없는 그이기에 빠르게 정리되는 거라 생각한다. 마음속에 잔류하는 미련을 덜어내듯 책장은 듬성듬성 빈 곳이 많아져 갔다.

한 번은 옷을 정리하고 싶어서 옷장을 열면 스티븐이 말렸다. 아직 엄마 냄새가 남아있으니 당장 정리하고 싶지 않다길래 옷장은 다시 봉인된 상태다. 그냥 섬유 유연제 냄새일 뿐인데. 하지만 그 냄새는 스티븐이 엄마의 집에 올 때마다 맡을 수 있는 냄새였다. 엄마와 마주 보고 저녁을 먹을 때면 맡았을 터이고, 똑같은 향이 나는 이불 속에 들어가 잠을 잤을 것이다. 마크와 다르게 애지중지 자란 스티븐이라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사흘 후, 화장된 어머니의 유골함을 대로변 근처의 공동묘지에 묻으러 가는 날이 되었다. 이날도 스티븐은 내내 울어서 참석한 어머니의 지인들은 형제를 구별할 수 있었다. 돌아가셔서 다시 만나게 됐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네요. 죄송했어요. 어쩐지 사과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푹 쉬세요. 머릿속인지 가슴속인지,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말을 전했다.

흰 꽃을 한 송이씩 올려두고 고인의 안식을 위한 기도를 올린 사람들은 제 갈 길로 돌아갔다. 마크와 스티븐은 묘지를 떠나지 못했다. 정확히는 스티븐이 그랬다. 둘은 벤치에 앉았고, 마크는 우는 스티븐의 어깨를 오른팔로 감싼 채 토닥였다. 스티븐은 외투 주머니에서 휴대용 티슈를 꺼내 코를 풀고 눈물을 닦았다.

"이제 갈까?"

먼저 일어서서 손을 내밀면 스티븐은 말없이 손을 잡고 일어선다. 쌀쌀한 기온인데도 손이 따뜻해서 계속 잡고 싶었지만 놓은 후 주머니에 찔러넣는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스티븐이 쓰러질 것 같아서 옆에서 보폭을 맞추며 느릿하게 걸었다.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인지, 돌아와서도 스티븐은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침대에 털썩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어린아이처럼 우는 다 큰 어른. 마크는 옆에 앉아서 다시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스티븐은 마크의 이름을 부르며 옆에 있어 줘서 고맙다는 한마디를 길게 발음했다. 훌쩍거렸으니 혀 놀림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계속 울면 엄마도 싫어하실 거야."

장난스레 말하자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때부터 눈물이 많았거든. 마크 네가 부러워. 나도 더 이상 울고 싶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눈물이 안 멈춰."

말을 마친 스티븐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한줄기 흐른다.

"내가 안 슬프다고 생각해?"

"아니, 아냐. 물론 너도 오늘은 슬프겠지. 방금 한 말은……."

"실은… 그래, 우는 너를 보고 있으면 슬퍼."

스티븐은 자신의 말을 자른 마크를 쳐다본다. 마크도 퉁퉁 부은 눈동자를 보았다.

"분명 엄마도 너도 똑같은 날에 떠나버렸는데…… 이상하게 네가 우는 모습이 엄마의 죽음보다 더 슬프게 느껴져."

"……."

"내가 엄마한테 정이 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아. 너도 아빠가 돌아가셨다면 이렇게까지 울진 않았을 테니까. 그냥… 엄마랑 떨어진 기간이 너무 길었다는 걸 기억해줘."

자신에게서 느낀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마크는 변명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지만 사실인데, 라는 생각도 했다. 스티븐은 마크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다. 누군가와 이런 식으로 밀착한 적 없던 마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묵직하고 따뜻한 체중에 안정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이에게 이 옆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나도 이해해. 이젠 기억도 희미하고, 서로 연락 한번 없었잖아. 네 말대로 아빠가 돌아가신 거였다면 나도 슬프지 않았을 거야."

우리 인생을 망친 사람이잖아. 스티븐은 그렇게 말하고서 눈동자를 치켜떴다. 마크는 바로 옆에서 코 막힌 숨소리까지 들려오는 스티븐의 손을 잡았다. 충동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이 따스한 몸을 끌어안고 품에서 실컷 울도록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뒤따른다.

더 울고 싶으면 울라며 용기내어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데 스티븐이 몸을 떼내고 자세를 고친다. 배가 고프다며 일어선 스티븐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괜히 능청스레 구는 것이 훤히 보이자 마크는 웃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육즙이 가득한 마크의 접시와 달리 스티븐은 투명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채소와 계란, 버섯, 콩 같은 것을 소스에 끓여 빵과 곁들여 먹었다. 남들에겐 시시하지만 둘에게는 소중할 신변잡사에 대해 떠들었다. 삼십 년의 세월이 무색해질 만큼 친근하게 대화하며 농담도 섞었다.

정말로 어머니를 떠나보냈다는 현실과 종일 운 탓에 기운이 없어진 건지, 이른 저녁 무렵 스티븐은 먼저 침대로 들어갔다. 마크는 바닥에 앉아 침대에 편히 등을 기댄 뒤 소리를 최대한 줄이고 텔레비전을 보았다. 뉴스를 보면 영국도 미국만큼이나 기상천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미 잠든 줄 알았던 스티븐이 텔레비전 불빛이 깜빡거린다고 중얼거리자 마크는 텔레비전을 껐다. 시시각각 발하는 빛이 눈꺼풀을 건드린 것 같다. 고요하게 장막이 가라앉은 실내. 늦지 않은 밖에선 차량이 지나가는 소리와 비명을 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일찍 잘 생각은 없었으나 지켜보던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곧바로 침대에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갔다. 스티븐은 몽롱한 상태로 마크가 누울 수 있도록 꿈틀거리며 이동했다. 넓은 등만 보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마크는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연다.

"스티븐. 이쪽으로 와 봐."

스티븐은 부름에 이끌려 등지고 있던 몸을 휙 돌렸다. 마주 보게 되자 그의 어깨까지 이불을 걸쳐주고 살살 쓰다듬어준다.

"그동안 힘들었지."

"응……."

스티븐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제 내가 있으니까 걱정 마.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넌 항상 행복해야 돼."

"마크……."

졸음과 반응 사이에서 헤매던 스티븐은 부어오른 눈을 가늘게 떴다. 마크, 너도 행복해야지. 나만 행복할 수는 없어. 분명 그렇게 말하려는 것을 안다. 마크는 어깨를 쓰다듬던 손을 그 너머로 보내고 스티븐을 품에 안는다. 코에 닿이는 머리칼, 말캉거리는 살덩이, 단단한 뼈의 감촉, 그것들을 이루는 체온. 홀로 남은 따뜻한 존재를 지켜야 자신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이 애타게 우는 모습을 보자 슬펐다. 사랑했던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슬프게 다가온 것을 깨닫자 스티븐과 함께 있어야 스스로가 완성됨을 느낀다. 어릴 때처럼 내가 지켜주고 내가 행복하게 해야 해. 나는 고통받더라도 스티븐이 괜찮다면 상관없어. 아버지의 손에 키워진 게 나라서 다행이야. 만약 그게 너였다면 나는…….

마크는 잃었던 사소한 것들을 떠올리게 해 주는 동생에게서 가슴 시린 애정을 느낀다. 항상 옆에 있던 스티븐이 사라지자 너무나 외로웠고 너무나 괴로웠다.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이젠 헤어지고 싶지 않아. 스티븐이 했던 말이 반추된다.

눈을 내리깔면 코앞에 스티븐이 있다. 거의 잠들었을 테니 머릿속에 남지 않을 거라 생각한 마크는 손가락으로 스티븐의 머리칼을 치운 뒤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애정 표현이었으나 여운이 남아 한 번 더 판판한 이마에 입을 맞춘다.

"……마크."

작은 부름에 크게 놀란 마크는 목을 뒤로 쭉 뺀다. 스티븐이 반쯤 감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죄를 지은 것마냥 심장이 덜컥하는 충격에 사고가 정지된다.

"마크……."

품 안의 스티븐은 부은 눈으로 여전히 마크를 바라보고 있었고, 기다리는 거라 생각한 마크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또 이마에 짧게 입을 붙이면서 이번에는 눈을 감았다. 스티븐이 싫어할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자책을 닮은 후회가 떠올라 쳐다보기 두려웠던 것이다.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느릿하게 눈을 뜨면 스티븐의 눈동자가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잠에 넋이 나간 건지 여전히 눈빛은 게슴츠레했다.

"스티븐."

싫다면 사과할 요량으로 이름을 부른다. 실은 정말 잠들어서 의식하는지 확인하는 것이었으나 그런 위선을 앞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 숨었다. 그러나 스티븐은 위선 뒤에 숨은 마크를 찾아낸다. 반만 뜬 기묘한 눈빛으로 마크의 뺨에 손을 올린다. 얼굴이 천천히 다가가자 그는 눈을 감는다. 마크는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는 것을 멈췄다. 물렁한 입술은 말라서 아무런 촉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수염 자국끼리 맞닿여 따끔하고 간지럽다. 형제끼리 키스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머릿속에선 차례로 감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스티븐… 스티븐……."

이름을 부르며 키스하는 건지, 키스를 하며 이름을 부르는 건지 뭐가 먼저인지 모른다. 마크는 애정을 바라는 원초적인 욕구에 스티븐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리광 부리면 스티븐은 다 받아줄 거라고, 엄마와 같이 따뜻하게 안아줄 거라고. 그러나 정작 어리광은 스티븐이 부리고 있었다. 마크의 입맞춤을 받던 그는 울음을 닮은 콧소리를 내며 한숨과 함께 마크의 이름을 내뱉었다.

"미안해. 미안…… 마음대로 해서 미안해."

거부하는 듯한 반응에 마크는 잘못을 빌고 싶었다. 멋대로 손을 댄 나를 용서해줬으면 좋겠어. 거의 그럴 것이라는 밑도 끝도 없는 확신에 몸을 맡겨본다. 마크를 바라보는 스티븐은 크게 숨을 내쉬며 호흡을 정돈한다.

"난 괜찮아."

"스티븐……."

형제는 눈을 맞춘다. 이번에는 더 깊이 파헤치며 서로의 생생한 숨을 느낀다. 물기 어린 소리와 동시에 마크의 등에 돌린 스티븐의 팔에 힘이 들어간다. 놓치지 않겠다는 은밀한 경고에 마크도 그를 더욱 세게 껴안았다. 점점 몸에서 열이 오르는 것을 깨닫는다.

이 삐뚤어진 애정은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마크는 스티븐을 통해 다정한 모성애를 투영했고 스티븐은 마크를 통해 단단한 부성애를 대리만족했다. 각자 부족한 것을 서로에게서 얻으며 완전함을 추구한다. 거기엔 본능적인 욕망이 동반된다. 이제 동생의 위에 올라탄 형은 입맞춤을 내리며 옷을 끌어 올린다. 형과 혀를 섞던 동생은 어깨를 살며시 밀어냈다.

"하… 흐…… 마크……."

가슴께까지 드러난 스티븐은 위를 쳐다보던 눈동자를 내리깔고 말한다.

"이상하게 너랑 이러는 게 싫지 않은 게 이상해……."

마크는 허리를 약간 숙이자 거기에 움츠러드는 스티븐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손가락에 닿인 이마는 굉장히 뜨겁고 축축했다.

"우리가 삼십 년 동안 떨어져 살아서 완전히 남이 된 거니까 이럴 수 있는 걸까? 내가 마크 너를 다른 사람처럼 느끼는 게 가능할까?"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어머니와 스티븐을 없는 것처럼 여기며 살아온 마크는 그를 타인처럼 느낄 수 있지만 스티븐은 어떨까.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연락해 자신의 안부를 묻고 싶어 했었다. 하지만 마크는 어머니 얘기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거절의 말만 했을 테고 어머니는 낙심하셨을 것. 그 모습을 보고 자라온 스티븐은 마크를 다시 만날 그리운 형제로만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러니 남처럼 느끼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나를 다른 사람처럼 느끼고 싶어?"

눈동자를 크게 굴리며 고민하는 것이 얼굴에 다 드러나자 웃긴 마크는 뺨을 쓰다듬는다.

"깊이 생각하지 마, 스티븐. 나한테 다 맡겨."

지금은 둘 다 이성을 되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마크는 다시 입을 맞추며 오른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왼손으로는 노출된 스티븐의 맨살에 손을 댄다. 그러자 스티븐의 몸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옆으로 손을 옮겨 넓은 가슴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것을 손끝으로 어루만진다. 그러자 마크의 입 안에서 스티븐의 목소리가 작게 메아리친다.

입을 떼고 숨을 고르는 마크는 밑을 바라본다. 스티븐의 흑갈색 눈동자에 서서히 창밖의 어스름이 내려오며 밤이 되어감을 알린다. 스티븐은 손을 들어 뺨을 쓸었고 마크는 고개를 틀어 그 손바닥에 입 맞췄다. 다른 손이 올라와 마크를 감싸자 마크는 허리를 낮추고 딱딱한 어깨 밑으로 손을 넣어 뜨거운 몸을 감싼다.

이건 분명 틀렸지만,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정결했던 어머니의 침대 위에서 자식들은 불결한 사랑을 나눈다. 부모의 육신을 반씩 갖고 태어난 형제는 하나가 되자 완전함을 느낀다. 거기에는 마찰열밖에 없다. 이 뜨거움이 죄악의 대가라면 기꺼이 형제를 품는 죄를 짓다가 화상을 입겠다.

스티븐은 계속 망설였다. 오늘은 어머니가 땅으로 돌아간 날이었으니 조금 더 슬픔에 절여져 있어도 괜찮은 날이었다. 그러나 마크는 봐주지 않고 그를 밀어붙였다. 올바른 생각을 할까 봐 불안해서 끊임없이 자극을 주었다. 성적 자극을 주다가도 어깻죽지를 깨물기도 하고 녹은 열을 퍼부으며 울부짖게도 만들었다.

감정의 덩어리를 배출하면 마크는 자신이 한 마리의 짐승과도 같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는 죄악의 열에 통째로 몸을 데인 스티븐을 끌어안고 후회의 말을 내뱉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다정한 어머니를 닮은 스티븐은 또 괜찮다고만 해 주었다. 모든 것을 드러낸 형제는 말없이 서로를 안고 있다가 맨몸인 그대로 잠들었다.

먼저 깬 마크는 자고 있는 스티븐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스레 일어나 뻐근한 팔다리를 어기적어기적 휘두르며 욕실로 가서 세수를 하고, 지난밤의 추태와 함께 자란 수염을 깎고, 토하듯이 입 안을 헹구었다. 방으로 돌아오면 스티븐이 이불 속에서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고 있다. 마크는 그 옆에 털썩 앉았다. 아직 둘 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는 상태였기에 스티븐은 놀라서 등을 돌린다. 그러면 어깻죽지에 남긴 잇자국이 보였다.

"괜찮아?"

"아마 그런 것 같아……."

"어제는 제정신이 아니었어. 미안해."

그러자 스티븐이 다시 몸을 돌린다.

"나도 그랬으니까 신경 쓰지 마."

스티븐은 왜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걸까. 차라리 울고 때리면 알아서 여길 떠날 텐데. 마크는 제멋대로 엉켜 있는 스티븐의 곱슬머리를 쓸어준다.

"그냥 솔직하게 말해도 돼. 자꾸 거짓말하지 말고."

"아냐, 정말 괜찮아."

스티븐은 이불 속에서 팔만 내밀어 머리칼을 정리해주는 손을 잡는다. 이런 행동마저 견딜 수 없어진 마크는 그의 손을 뿌리친다.

"나 때문에 너는 나랑 원하지도 않는 짓을 했잖아!"

스스로 소리치고 놀란 마크는 눈을 크게 뜬 채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당황한 건 스티븐도 마찬가지였으나 이내 비척거리며 일어나 앉는다. 그러고는 입을 막고 있는 마크의 손을 떼내었다. 스티븐은 눈을 깔고 자신의 손에 올려진 마크의 손을 바라보았고 마크는 그런 스티븐의 시선을 쫓아 눈을 내리 깐다.

"당연히 너랑 그렇게 되는 건 상상도 못 했어. 하지만 네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입이나 목이나 다른 곳에도 해 주고… 그러는데 거부감이 들지 않더라고. 아직 좀 아프지만 네 거친 모습도 싫진 않았어. 그건 나한테 없는 부분이니까."

"……그럼 이젠 내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져?"

우리가 삼십 년 동안 떨어져 살아서 완전히 남이 된 거니까 이럴 수 있는 걸까? 내가 너를 다른 사람처럼 느끼는 게 가능할까? 그렇게 말했던 스티븐은 자신의 손과 마크의 손에 깍지를 낀다.

"아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아."

스티븐은 대답을 한 뒤 깍지 낀 두 손 그대로 마크의 손등에 한 번 입을 맞추었다.

마크는 처음엔 스티븐을 다른 사람처럼 봤었으나 스티븐은 그를 시종일관 형제로 여기는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처럼 느끼며 육체관계를 맺은 건 무슨 마음일까.

"내가 계속 가족처럼 느껴진다면 왜 받아들인 거야."

"그건 너도 똑같은 마음 아냐?"

거울의 반사면처럼 비추어진 질문에 마크는 입을 닫는다. 연민에서 시작되어 다시 되찾은 그리움으로 안정을 추구하려 했다. 스티븐을 지켜주는 것은 결국 자신도 연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냥…… 우리는 서로가 잃은 것을 채워 주고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이 들어."

네가 있어야 내가 완성돼. 마크의 대답에 스티븐은 그들의 깍지를 풀고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아……. 이제 어떡하지?"

"뭐가?"

스티븐은 마크를 쳐다본다.

"우리 관계."

마크는 손을 들어 아까처럼 스티븐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스티븐. 너 정말 나를 좋아해?"

십 대 애들조차 꺼려할 표현이지만 이만큼 직접적인 말이 어딨다고. 스티븐의 눈이 한순간 커졌다가 원래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비밀을 들킨 아이처럼 약간 공격적인 말투였으나 목소리는 작았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가슴 언저리에서 두근거림을 느낀 마크는 머리를 쓰다듬던 동작을 거두고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을 보고 있는 스티븐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아야, 하고 몸을 움츠린다. 그러고 보니 어제 깨물었던 것을 깜빡했다. 마크는 웃으면서 허리를 조금 더 숙이고 스티븐을 껴안았다.

차려 먹는 것이 귀찮았기에 아침 식사를 파는 카페에서 아침을 먹은 후 찬 공기를 맞으며 어제 어머니를 묻은 공동묘지로 향했다. 자식들끼리 정을 통해놓고 뻔뻔하게 인사를 하러 온 것은 역시 마음에 걸리지만 옆에 서서 눈을 감고 긴 인사말을 보내는 스티븐을 훔쳐보고 있으면 그런 마음도 사라져갔다. 마크는 추위에 코를 훌쩍이며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래도 스티븐은 아직 눈을 감고 서 있다.

"고해성사라도 해?"

물으면 눈을 뜬 스티븐은 피식 웃었다.

"비슷해. 용서해달라고 빌었어."

"뭘?"

"죄송해서 말이야. 너를 좋아하게 된 게……."

당황해서 말문이 막혔다. 뭐라 할지를 몰라서 그대로 쳐다보고 있었는데, 런던답게 갑자기 비가 오길래 재빨리 달려서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갔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뜨끈한 차를 타서 담요를 덮어쓴 다음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 과정에서 마크는 계속 신경 쓰이던 것을 묻기로 한다.

"엄마가 이런 우릴 용서할까?"

화면 속의 코미디언에게서 시선을 모로 돌린 스티븐은 마크를 쳐다본다. 그러고는 차를 후루룩 한 모금 마신 뒤 목을 가다듬는다.

"내가 빌었으니까 그러실지도 몰라."

대답할 준비가 길었던 것치곤 말은 짧았다. 부끄러운지 다시 텔레비전을 보길래 마크는 뺨에 손을 대고 다시 이쪽을 보게 한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 네가 정말 나를……."

"마크, 내가 선택한 거야. 네가 좋아진 걸 어떡해? 정말 싫었으면 어제는 그런 짓을 하지도 않았을 거고 오늘 당장 널 쫓아냈겠지."

그러고는 입술을 샐쭉거린다. 진심으로 화난 게 아님을 안 마크는 뺨에 대고 있던 손을 머리칼이 무성한 뒤통수로 돌린다. 차의 향이 섞인 작은 입맞춤에 스티븐의 날숨이 떨렸다.

"우린 틀린 게 아니겠지."

"우리에게 있어선 그럴 거야."

두 개의 찻잔이 치워진다. 그 속의 찻물은 찰랑거리다가 가라앉는다. 어깨에 걸쳐둔 담요가 바닥에 떨어지고 텔레비전의 불빛도 달아난다. 대낮의 추위가 창문에 들러붙어 있다가 바짝 오르는 열기에 녹는다.

그들이 고행길 끝에 도달한 곳은 다다르기로 정해져 있던 안식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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