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 2
어머니의 집으로 가는 길에 스티븐은 오히려 아버지가 없는 편이 낫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상이지. 빨리 꺼져줘서 오히려 고마운데."
"나도 아빠를 봐도 기쁘다는 생각은 없었거든. 마크 너는 안 그래. 오랜만에 보니까 좋다."
마크는 싱긋 웃으며 피곤할 스티븐의 손에서 가방을 들어 주었다. 삼십 년 만에 만났다고 스티븐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런던에 처음 온 마크에게 계속해서 설명을 하며 걸어가다가 넘어질 뻔하기도 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도 자꾸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며 떠들어댔다. 천진하고 엉뚱한 모습에 마크도 계속 실없는 웃음이 삐져나온다.
대로변 쪽에 위치한 어머니의 집은 책이 아주 많았다. 서점이나 국립 도서관에서나 볼 법한 큰 책장이 두어 개나 있었고 작은 책장은 더 많았다. 책상에도 책이 잔뜩 쌓여 있다. 대부분 전공인 프랑스와 관련된 것이다. 다른 나라 언어도 공부 중이었는지 낯선 언어에 관한 책이나 사전 같은 것들도 있었다.
"괜찮아?"
그렇게 물은 것은 마크가 아닌 스티븐. 책장을 구경하다 돌아보면 정말 안 돌아가도 되냐고 묻는다. 마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직장에 휴가를 낸 상태라고 대답했다.
스티븐은 오른손으로 넥타이를 느슨하게 만들며 그동안 쌓였던 얘기를 듣고 싶다고 한다. 그래도 형제인데, 더 이상 멀어질 순 없잖아. 마크는 그 말에 가슴 속 어딘가가 찌르르한 감각을 느낀다. 스티븐도 많이 외로웠겠구나. 허약한 몸으로 어머니의 보살핌이 없으면 아파서 울었을 텐데 그 시절에는 마크마저 없었다. 지금은 나아졌다 해도 당시에 함께한 외로움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똑같은 얼굴에 비슷한 헤어 스타일이지만 지어지는 주름은 달랐고 인상도 다른 묘한 존재가 서로의 눈앞에 있었다. 고요한 어머니의 집, 스티븐은 마크와 술을 마시며 영국에서 지내온 이야기들을 해 주었다. 미국 억양과 영국 억양이 섞여서 동네 아이들이 재미로 따라 했다든가, 항상 책 읽는 것만 좋아해서 지금도 친구가 없다든가, 어머니와 둘이서 프랑스 관광을 갔었다든가. 책에서 이집트 문화를 접한 뒤부터 관심을 가져 상형문자까지 공부할 정도로 고대 이집트에 빠져들어 대학도 관련된 쪽으로 진학했었고, 현재는 박물관 가이드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 헤어졌던 형제는 마크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한참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던 스티븐은 크고 둥그런 눈을 깜빡거리며 마크를 쳐다보았다. 마지못해 마크는 별로 자랑스럽지 못한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전히 정이 없는 아버지, 똑같이 친한 친구 없는 실정, 현실 도피로 입대했으나 불명예스럽게 끝난 결말, 악몽과 방황, 겨우 경비회사에 취업하게 된 일. 마크의 이야기를 듣던 스티븐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똑같이 태어났어도 우리는 너무 달라졌어."
걸어온 갈림길은 완전히 반대로 뻗어져선 다시 돌아갈 길이 없다. 그러면 이 길은 나중에 갈라진 게 아니라 처음부터 쭈욱 일직선이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나직이 내뱉은 말에 스티븐은 코를 훌쩍이며 잔흉터가 많은 마크의 손을 잡아준다.
"아니야, 마크. 아니야. 우리는 똑같아."
위로하듯 눈을 감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모습에 마크는 소리 없는 웃음이 나왔다. 어떻게 이렇게 똑같아도 다를 수가. 스티븐은 감은 눈을 잠시 뜨지 않고 있다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린다.
"근데 마크…… 나 좀 피곤하거든. 술을 마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지금 자고 싶은데."
"그래, 피곤했겠다."
스티븐은 마크의 손을 놓고 식탁에서 일어선다. 같이 자리에서 일어난 마크는 스티븐이 넘어질까 봐 부축해서 넓은 침대까지 데려다준다.
"손님용 이불 필요하면 저기 옷장에서 꺼내면 돼. 너무 피곤해서. 먼저 자서 미안……."
벌건 얼굴을 한 스티븐은 드러눕자마자 눈을 감는다. 금세 잠이 든 그의 옆에 걸터앉은 마크는 이마를 내려온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빗어서 간지럽지 않도록 넘겨주었다. 아직 그리운 잔향이 남아 있을 침대에서 자그마한 숨소리를 내다가도 표정을 찌푸린 채 뒤척이는 것은 꽤 지켜보는 재미가 있었다. 곤히 자는 스티븐을 바라보던 마크는 옷장에서 이불과 담요를 꺼내 누워본다. 계속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한쪽으로 치운 뒤 일어섰다.
마크는 스티븐이 깨지 않도록 발걸음을 죽이고 어머니의 집을 찬찬히 살펴본다. 벽면에는 학생들과의 추억, 스티븐의 추억까지 담긴 사진들이 붙어있다. 당연하게도 자신과 닮은 어린 스티븐이 유치가 하나 빠진 이를 드러내며 장난스레 웃고 있다. 이 무렵의 마크는 무얼 했는지 떠올려본다. 좋아했던 만화 시리즈나 영웅이 등장하는 액션 영화는 떠오르지만 아버지의 무관심에 당시 또래들이 부모님과 함께 겪었을 법한 즐거운 기억이 잘 없다.
부모님과 함께 겪었을 법한 즐거운 기억. 가족 넷이서 바닷가에 놀러 간 적은 있었다. 무늬도 색깔도 똑같은 옷을 맞춰 입고 각자 좋아하는 인형을 손에 들고 어머니와 산책을 하던 때도 떠오른다. 소아과든 공원이든 어디든 어린이가 갈 만한 곳마다 똑 닮은 쌍둥이라며 관심을 받은 단편적인 기억도 있다. 우리는 어딜 가든 함께였지.
헤어졌어도 스티븐은 마크 없이 웃을 수 있었는데, 마크는 스티븐이 없어지자 웃을 수 없었다. 이제는 바라지도 않는 애정에 고독을 즐기는 편이라고 억지로 부정해온 자신의 유약함을 인정해야 했다. 누군가의 따뜻한 눈빛과 뜨거운 손의 열과 속 깊이 근질거리는 감각을 원하고 있었다. 오늘, 겨우 몇 시간 같이 있었지만 스티븐에게서 낯설지만 따스한 그리움 같은 것을 느꼈다.
어쩌면 끊겨버린 모성을 어머니의 성품을 닮은 스티븐에게서 느끼는 걸지도 모른다. 어머니도 스티븐과 같은 눈으로 웃으셨을 것이다. 스티븐처럼 다른 이의 마음을 위로해주고 좋아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 전념할 수 있는 단순한 용기를 지니셨을 것이다.
스티븐이 옆에 있으면 나는 다시 웃을 수 있다. 똑 닮은 얼굴을 바라보고 따뜻한 손을 잡으면 불안 같은 건 느낄 수 없다. 외로운 우리 둘 사이에 필요한 건 우리 둘뿐이다.
마크는 어린 스티븐의 사진에서 오랫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마크는 느지막이 눈을 떴다. 스티븐은? 이라는 생각에 일어나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담요가 흘러 떨어진다. 어머니의 흔적을 살펴보다 자신이 한켠에 치워놓았던 여벌 이불에 누워 잠이 든 모양이었다. 고개만 들어 침대를 올려다보면 스티븐은 없었다.
동시에 어떤 소리가 들려오자 일어나서 침실 같은 공간을 벗어난다. 거기엔 스티븐이 있었다. 그는 등을 보이고 서 있었는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손등으로 얼굴을 비비고는 코를 훌쩍인 뒤에 몸을 돌렸다. 웃음을 치장하고 있어도 이미 물든 눈동자와 코끝은 숨길 수 없었다.
"어…… 잘 잤어? 너무 잘 자길래. 피곤할 것 같아서 안 깨웠어."
스티븐의 목소리는 물먹은 콧소리가 섞여 있었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둘 다 달랐지만 스티븐의 슬픈 표정에 가슴속에선 저릿하고 묵직한 느낌이 들어선다. 스티븐이 돌아오지 않을 추억에 잠겨 질식하기 전에 마크는 팔을 벌렸다. 그것이 어떤 신호인지 깨달은 스티븐은 처음엔 거절했다가도, 이내 그를 껴안으며 슬픔을 덜어냈다.
"너무 슬퍼…… 엄마가 보고 싶어."
잠깐 소리 내며 실컷 운 스티븐은 떨어진 뒤 마크의 얼굴을 보고는 또 눈물을 흘리며 엉엉 운다. 마크는 슬픔에 슬퍼하는 스티븐을 보자 슬펐다. 한때는 모든 것을 함께 경험한 형제였는데. 상실의 아픔을 혼자서만 견디는 모습은 멈춰있던 둘의 시간을 깨뜨리며 마크의 연민을 끌어냈다. 우느라 뜨거워진 몸을 안아주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울음소리가 어찌나 서럽던지 슬픔이 전염된 마크도 스티븐 몰래 어깨 너머에서 눈썹을 찡그렸다. 조금씩 훌쩍거리자 마크도 우는 것을 안 스티븐은 떨어져서 뺨에 남은 눈물 자국을 엄지로 쓸어준다. 어느 누구에게서도 받지 못한 따스함에 마크는 애틋한 감정을 느껴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러나 마크의 미소에 스티븐은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스티븐이 계속 울까 봐 울기를 그친 마크는 스티븐이 안쓰러워 울었는데 스티븐은 그런 자신을 보고 또 운다. 어쩐지 이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나도 그만 울 테니까 너도 그만 울어. 괜찮아."
어설픈 위로에도 진정이 된 스티븐은 훌쩍거리는 목소리로 늦은 아침 식사를 권했다. 어머니의 집에 자주 온 그는 헤매지 않고 주방 공간에서 머그컵과 티스푼을 준비한다.
"무슨 차 마실래?"
"커피 없어?"
"참, 미국은 모닝커피지."
목재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은 마크는 아무거나 타 달라고 부탁한다. 스티븐은 주전자에 물을 담고, 토스터 전원을 켜고, 냉장고에서 달걀을 꺼냈다. 도와주려던 마크는 스티븐의 만류에 의자에 가만히 앉아서 눈으로만 바쁜 뒷모습을 좇았다. 이윽고 노릇노릇 구워진 식빵과 계란 프라이들이 접시 위에 단정하게 오른다. 오트밀도 먹을 거냐고 묻길래 다이어트할 때 질리도록 먹어서 싫다고 하자 뜨거운 물에 완성되는 인스턴트 스프를 내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마크는 포크로 식빵을 찍어 먹으려다가 계속 실패하자 손으로 집어 먹으며 물었다. 스티븐은 고민거리가 너무 많다고 대답했다.
"고민?"
"응, 마크 네가 왔으니 유산 분배도 해야 할 것 같고 이 집도 정리를……."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한 바퀴 돌려 집을 살펴본 스티븐의 얼굴은 다시 울 것 같았으나 이번에는 꾹 참는다. 어머니와의 많은 추억이 생각난 거겠지.
"나눌 필요 없어. 다 네 거잖아."
스티븐이 고개를 휙 돌리고 이쪽을 쳐다본다. 둥그렇게 뜬 눈, 한쪽 눈썹이 올라간 오묘한 표정. 자신은 지을 수 없을 재밌는 표정이다.
"나, 나는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서 엄마랑 너를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마크는 스티븐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말을 덧붙였다. 스티븐은 고개를 떨구고 손을 내밀어 마크의 손가락 관절을 주무른다. 마크도 자신과 똑같지만 다른 손을 바라본다.
"엄마도 너를 많이 보고 싶어 하셨어. 아빠한테 연락한 적도 꽤 있었는데 연락 한 번 안 오더라구."
"난…… 전혀 몰랐어. 아빠가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했어."
어머니에 대한 감정을 완전 접었던 걸까. 억지로 헤어졌으니 만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건데. 아버지는 스티븐이 보고 싶지 않았던 걸까. 스티븐도 강제로 떠난 거라 당연했을 건데.
"어쩌면 아빠도 용기가 없었던 거겠지."
똑 흘러나온 스티븐의 목소리에 마크는 고개를 들었으나 그는 여전히 마크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우리가 가족이었다는 걸 잊지 않기 위해서, 부모라는 책임을 지기 위해서 한 명씩 맡았어도 아빤 내게 관심이 없었어. 지금도 그렇고. 어제도 말했지만… 아빠에게서 멀어지려고 입대를 했었어. 안 좋은 일이 터져서 우리 부대가 강제로 전역을 당했을 땐, 솔직히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마크도 크면서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했었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을 맞이한 건 서로의 행복을 위한 이별이었다. 아직 어린 자식을 부양해야 하는 의무와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애정. 반복되는 직장과 삶. 집을 나온 이유 중에는 아버지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계속 이렇게 살 거면 완전히 정을 떼고 인연을 끊는 게 나을 거라고.
"이러면 되겠다."
스티븐이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깜짝 놀란 마크의 손을 놔두고 이리저리 손짓까지 하며 말한다.
"네가 여기서 사는 거야, 마크."
"뭐?"
"그러면 엄마가 살던 이 집도 그대로 둘 수 있고 더 이상 아빠에게 신경 안 써도 돼."
"잠깐, 잠깐만."
"왜?"
"그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마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스티븐의 제안은 쉽게 결정을 내릴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어머니와 스티븐에 대한 불편한 감정들을 견딜 수 없어 떠나게 된다면? 그리고 또…….
"근데 이 집, 혼자 살기엔 너무 크지 않냐. 책장이 공간 차지를 가장 많이 하는데 정리하고 나면 그만큼 공간이 또 생기잖아."
상처가 생긴 마음에 또 상처가 생기지 않도록 거절의 말을 돌려서 하자 스티븐은 생각에 잠긴다. 눈을 감고 입술에 힘을 준 채 얼굴을 찌푸린다. 잠시 후, 그가 눈을 뜨자 또 무슨 기상천외한 말이 튀어나올지 몰라 긴장하게 된다.
"그렇긴 해. 나도 가끔 와서 자고 가긴 했는데."
"그런데도 나 혼자 살라고? 감당하기 힘들 거야."
툭 내뱉자 스티븐이 일어나서 얼굴을 들이댄다.
"마크! 아까부터 계속 생각한 게 있어."
"뭔데?"
"나도 여기서 같이 살게. 그러면 되겠지?"
"아니, 그러니까……."
"어렵게 다시 만났는데…… 이젠 헤어지고 싶지 않아."
마크는 입을 닫았다. 눈앞에 있는 스티븐의 표정을 보자 굳어가던 마음이 다시 녹는 듯했다. 지어본 적 없는 낯선 표정을 한 똑같은 얼굴. 이미 둘 사이에 새겨져 버린 약속과도 같은 금기사항-헤어짐. 마크는 한숨을 한 번 내뱉는다.
"엄마 일 처리하는 걸 끝낼 때까지만이야. 어차피 물건 정리하려면 이 집에서 지내야 될 것 같으니까."
"다행이다. 마크 너랑 같이 있으면 안심되거든. 엄청 오랜만에 만났는데도 이상하게 그러네."
'어릴 때의 좋은 기억만 갖고 있으니 그럴지도…….'
마크는 대꾸 없이 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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