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k] 글

약속의 땅 1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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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초조함이 떠오른다.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 별생각이 없던 마크는 시카고에서 런던으로 이어진 여덟 시간의 비행을 마친 뒤, 인파와 함께 우르르 몰려오는 긴장감에 정신을 다잡으려고 자세를 똑바로 했다. 아마 시차와 낯선 환경에 심장이 놀라서 날뛰는 걸지도 모른다.

두근거리는 가슴속을 진정시키려고 코로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는다. 이방인을 환영한다는 것처럼 익숙지 않은 냄새들이 뇌에 남으려 하지만 그것을 거부한 마크는 허리에 힘을 주고 흔들림 없는 걸음을 유지한 채 사람들 속에 섞여 공항 밖으로 나가본다. 어차피 볼일만 보면 떠날 곳이다. 구경은커녕 서 있는 시간조차 아깝게 느껴졌다.

"머리가 아프구나."

대도시의 공항이라 발 디딜 틈이라곤 없지만, 겨우 찾은 빈 자리에 서서 난생처음 내딛는 땅의 익숙한 공기를 들이켜고 한숨 돌리는데 뒤따라온 아버지가 말했다. 고개를 돌리면 그는 관자놀이를 왼손 검지로 누르며 얼룩덜룩 지저분한 땅바닥을 보고 있다.

"빨리 가서 쉬어."

이미 밤이 되어버린 런던 하늘을 올려다본 마크는 무뚝뚝하게 대답하며 손목시계로 고개를 내린다. 시간을 확인하고 아버지와 자신의 간단한 짐이 든 캐리어를 끌고 택시가 늘어선 곳으로 걸어갔다. 긴 대기 줄에 서자 이제 초조함은 사라지고 빨리 쉬고 싶다는 짜증스러움이 가슴속을 맴돈다. 이동하는데 차창 너머에서 시선을 빼앗는 도심의 불빛들조차 특별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일찍이 예약했던 호텔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저녁도 거르고 먼저 잠들었다. 마크는 호텔 일 층에 자리 잡은 편의점에서 담배를 샀다. 그러고는 근처에 서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선객들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가 영국식 억양을 곁들인 일상적인 대화로 돌아간다. 그런 것마저 달갑지 않은 기분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런던의 밤하늘에 대고 불평스러운 말을 내뱉지만 그것들은 희뿌연 연기에 가려져 보이지 않은 채 사라져 간다.

어머니의 부고는 이미 몇 주 전에 들었다. 장례식 일자가 겨우 잡혔기에 마크는 아버지와 둘이서 오래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나러 런던에 왔다. 멀어진 가족을 그리워한 적 없는 아버지가 그를 억지로 끌고 왔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이럴 때 가장 노릇을 하려는 아버지의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한때의 모두는 사랑하고 웃던 시절이 있었다.

아버지의 집 어딘가에 처박혀 아직도 존재할지 버렸을지 모를 가족 앨범, 떠올리려 해도 흐릿한 기억들, 그러나 잊혀지지 않을 이름들. 이제는 얼굴도 선명하지 않은 가족과는 삼십여 년 전에 헤어졌다. 한 번도 연락을 나눈 적 없는데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버지가 이제와서 어머니에게 속죄하려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크에게는 스티븐이라는, 몇 분 늦게 태어난 쌍둥이 동생이 있었다. 그 둘이 열 살도 되기 전-일고여덟살 즈음이었을 때-아버지와 어머니는 갈라서게 되었다. 늘상 무뚝뚝하고 휴일에는 이길 리 없는 시카고 컵스의 중계에 맥주나 축내며 잡지사에서 근무하던 아버지. 그에 반해 다정하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던 프랑스어 교사 어머니. 어떻게 만나서 사랑에 빠지게 되었는지 생각하면 아직도 신기한 분들이다.

짧은 간격을 두고 함께 태어났지만 마크와 스티븐도 부모님처럼 정반대였다. 세상에 나왔을 때부터 탈 없던 형과 달리 스티븐은 몸이 허약했다. 잔병치레도 끊이지 않았고 육류만 먹으면 곧잘 토해서 부모님은 늘 스티븐에게 매달렸다. 스티븐은 크면서 마크와 체격이 비슷해질 만큼 건강해졌으나, 어릴 적부터 방 안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었던 탓에 취미는 독서나 비디오 감상같이 실내 위주로 활동하는 것들이었다. 외출을 자주 하지 못하여 자연스레 해외 문화 쪽에 관심을 가졌다. 어머니는 스티븐의 곁에서 자주 책을 읽어 주었고 가끔은 둘에게 간단한 프랑스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마크는 부모님의 당부대로 스티븐을 잘 돌봐주었다. 밥 먹는 속도가 느린 스티븐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옆에서 기다려 주고 스티븐이 먼저 잠들 때까지 등을 두드려 준 적도 많았다. 그러면 쌍둥이인데도 스티븐이 몇 살 더 어린 동생처럼 느껴지곤 했다.

동네의 덩치 큰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강한 맷집, 주먹, 날렵함을 가진 골목대장 마크는 날씨와 스티븐의 몸 상태가 좋을 때 둘이서 낮은 산이나 언덕을 누비길 좋아했다. 소심하고 겁많은 스티븐의 담력을 키우기 위한 동굴 탐험은 마크마저 심장이 두근거리는 모험이었다. 둘의 신발은 금방 너덜거렸고 옷도 매일 세탁했을 정도였다.

둘의 사이가 영원할 거라 생각한 시절, 손이 많이 가던 스티븐은 어머니의 고향인 영국으로 가버렸다. 마크는 여전히 시카고에 남아 아버지와 살았다. 어머니와 스티븐이 너무 보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이혼한 날부터 가족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 흔한 술에 취해 사과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가족의 애정을 받지 못한 어린 마크의 가슴 속에서 자라던 파아란 나무는 끝내 시들어 버렸다. 십 대에 접어든 마크는 더 이상 나이테가 생기지 않는 죽은 나무를 베어냈다. 가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던 나무는 그루터기만 남은 채 방치됐다. 가끔 마크는 거기에 앉아 어머니와 스티븐을 떠올렸다가도 돌아오지 않는 과거라는 것을 깨닫고 마음속에 뿌리내린 그루터기에 발길질을 했다.

혼자 울분을 삼키고 참는 법을 먼저 익힌 마크의 사춘기에 반항이란 없었으나 방황은 있었다. 둘이서만 살 작은 집으로 이사한 후, 독립할 여유가 없던 마크는 계속 아버지와 살았다. 고등학생 때는 집에도 잘 들어가지 않고 그때 사귄 친구들과 뒷골목이나 쏘다녔다. 아버지는 일찍부터 일터에 나갔기에 얼굴을 마주치는 것도 일주일에 몇 번 되지 않았다. 만날 일이 없으니 갈등도 없고 당연히 유대도 없었다.

대학에 진학하지도 않고 꿈도 없이 갖은 잡일을 하다가 다가오는 현실과 아버지와의 관계에 무게감을 느껴 도피성으로 입대를 했다. 어릴 때에도 힘쓰는 일에 재능이 있었는데 의외로 적성에 맞아 오랫동안 복무했다. 피를 나누지 않아도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좋은 것이다. 마크는 점점 가족에 관한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조국의 번영과 안녕을 위하던 어느 날, 비밀리에 투입된 위험도가 높은 임무에서 상관이 민간인이 얽힌 대형 사고를 저질렀다. 관련된 이는 강제 전역을 당하고 몇몇은 실형을 선고받는 일까지 일어났다.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았던 마크는 며칠에 걸친 혹독한 조사만 받았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다신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던 시카고 땅에 선 마크는 초조했다. 이제 뭘 해야 하지? 전문적으로 배운 거라곤 주먹질, 총질, 칼질뿐이었다. 불명예스럽게 돌아온 마크는 자신이 애정을 가졌던 집단이 일으킨 짓에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악몽을 꾸다가 불면증에도 시달렸다. 밖을 나가면 사람들이 손가락질하고 수군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서로 없는 존재 취급하던 아버지마저 마크를 걱정할 정도였다. 결국 아버지의 권유로 한동안 병원에 다녔다.

상태가 나아진 뒤에는 경호나 경비 일이라도 해 볼 요량으로 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아버지의 집에서 나와 작은 방을 구했다. 특이한 이력과 너무 이르지 않은 나이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자 여유란 걸 느낄 새가 없었다. 마침내 제복을 맞춰 입고, 무전을 달고,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버릇이 붙은 마크는 경비회사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것이 몇 년 전의 일이다.

가족의 흔적을 잘라낸 그루터기에 발길질하던 십 대도, 도망치기 바빴던 이십 대도 아닌 삼십 대 중후반이 된 현재. 집을 나온 뒤 몇년내내 연락이라곤 하나 없던 아버지에게서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다. 헤어진 어머니가 런던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와 더불어 자신에게 쌍둥이 동생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스티븐.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에 눈을 끔뻑거리고 입술이 벌어진다. 머릿속에서 다시 그 이름을 반복했다. 스티븐. 내 동생.

어머니와 스티븐이 영국으로 간 뒤 어떻게 살았는지 몰랐는데, 그쪽에서 어떻게 해서 아버지에게 연락이 닿은 모양이다. 마크는 어머니에 대한 흐릿한 기억들을 메마른 애정으로 선명하게 닦고 싶었지만 이미 애정을 잃은 기억은 더 이상 선명해지지 않았다. 다만 어린 스티븐에 대한 애정은 아직 갖고 있었다. 자주 아프던 몸인데도 어디든 떠나던 용감한 스티븐 스펙터-지금은 어머니의 성을 따른 스티븐 그랜트는 잘 지냈을까?

어찌 된 일인지 이야기를 더 들어보면 놀랍게도 스티븐이 직접 연락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함께 장례식장에 가 달라고 부탁하는 투로 말했다. 마크는 가족 모두가 이렇게 된 원인은 아버지의 지분이 가장 크다는 생각을 해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스티븐이 마음에 걸렸다. 마크는 통화를 끝내자마자 먼지 쌓인 캐리어를 꺼내어 닦았고 옷장에 숨어있던 검은 정장을 찾았다.

영국의 장례 과정은 미국과 조금 달랐기에 장례식 일자가 잡힐 때까지 최소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마크는 아버지가 알려준 스티븐의 전화번호를 자신의 휴대전화에 입력만 해 두고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했다. 오랫동안 교류가 없었는데도 스티븐은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에게 연락을 해왔다. 이상하게 미안한 마음에 연락할 수가 없었다. 마크는 또 가족과의 관계에서 도망쳤다.

이후 장례식 일자가 정해졌고, 스티븐의 안내를 숙지한 스펙터 부자는 런던에 오게 되었다. 여기 오는 게 맞는 걸까. 어머니도 스티븐도 우리처럼 서로를 잊고 살았을 텐데.

마지막 연기를 뱉은 마크는 다 피운 담배를 유려한 손짓으로 쓰레기통에 튕겨 넣었다. 객실로 돌아가면 아버지는 정말 피곤했는지 세상모르고 쿨쿨 자고 있다. 따뜻한 물로 얼굴을 한 번 씻은 마크는 거울을 보며 지금의 스티븐도 이렇게 생겼을 거라고 생각한다.

다음날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였다. 몇 시간을 굶은 탓에 짧은 시간 동안 조식을 몇 접시씩 비운 부자는 검은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호텔을 나섰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어머니는 재혼도 하지 않고 쭈욱 스티븐과 살았기에 스티븐 혼자 장례식장 자리를 지켜야 해서 마중 올 수 없다고 한다. 스티븐이 알려주었던 주소대로 택시를 타고 가면 조용한 동네로 진입한다. 이윽고 작은 회관이 나타나고 택시가 멈춰선다.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얼굴도 모르겠지만 나와 똑같은 얼굴이니 바로 알아보겠지. 마크는 택시비를 지불하고 아버지와 다른 사람들을 따라 회관 쪽으로 걸어갔다. 아직 시작되기 전이라 조문객들이 회관 마당을 어슬렁거리고 있다.

마크는 검은색 옷으로 통일된 사람들 속에서도 곧바로 스티븐을 찾았다. 스티븐은 회관 출입구에 서서 끊임없이 손님맞이를 하고 있었다. 같은 곱슬머리지만 잘 빗어넘긴 자신의 헤어스타일과 달리, 밤새 잠을 못 잤다고 말하는 듯 가르마를 탄 헤어스타일은 유난히 구불거림이 부각되어 보였다. 눈은 조금 부어있지만 미소를 잃지 않고 사람들을 환영하고 있다.

너무나 똑같은 얼굴, 너무나 똑같은 눈동자, 그러나 다른 눈빛. 마크는 저도 모르게 이끌린 것마냥 그쪽으로 걸어간다.

"……스티븐."

조용히 이름을 부르자 똑같은 얼굴이 잠깐 굳었다가 마크? 하고 한 마디를 쥐어짜낸다.

"스티븐? 너 맞지?"

분명하게 똑같은 얼굴인데도 믿을 수 없어서 웃긴 질문을 했다.

"마크!"

스티븐은 두 팔 벌려 마크를 껴안았고 당황한 마크도 그를 안아 주었다. 가라앉은 비누향을 한껏 들이킨 뒤 떨어져서 보면 스티븐은 울상이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이미 벌게진 코를 훌쩍거린다.

"마크…… 보고 싶었어. 와 줘서 너무 고마워."

하지만 마크는 어머니와 스티븐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영국으로 갔으니 이제 만날 일이 없다고 생각했고, 군인이 되었을 때도 오로지 훈련과 업무에만 몰두했기 때문이다. 방황 후에 들어간 새 직장에서도 다른 가족을 지키는 일만 생각했고 자신의 가족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생각한 적이 없었다. 마크는 약간 어색하게 미소를 짓고 그와 악수를 했다.

스티븐은 곁에 다가온 아버지를 보고 주춤거리다가 악수를 한다. 그럼 그렇지. 스티븐도 아버지를 그리워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내가 어머니를 그리워하지 않은 것처럼.

아버지와 스티븐 사이에 침묵만 감돌자 견딜 수 없어진 마크는 주위를 둘러보며 아무 말이나 한다.

"사람들이 꽤 많이 왔네."

"응…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셨거든. 대부분 선생님이랑 학생들이야. 혹시 기억나? 우리한테도 가르쳐 주셨잖아."

"어……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니는 변함없이 이곳에서도 프랑스어 교사였던 모양이다. 동료 교사들과 학생들, 이웃들이 어머니의 가는 길을 함께 하러 와 있다.

"멀리서 오느라 피곤할 테니 저기 앉아서 쉬고 있어. 난 인사를 해야 해서."

스티븐의 손짓에 고개를 돌리는데 바로 뒤에 인사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마크는 급히 자리를 비켰다. 바깥 벤치 대신 마당 구석에서 아버지와 함께 말없이 스티븐 쪽을 바라본다. 회관은 계속해서 낯선 사람들로 붐볐고 스티븐 혼자 그들을 상대했다. 인사를 하고 악수를 나누고 위로를 받는다. 못마땅한 마크가 아버지에게 우리도 좀 돕는 게 어때? 하고 스티븐에게 가려는데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있으면 오신 분들에게 불편할 거다."

불화로 인해 가족은 갈라졌고 어머니는 혼자서 스티븐을 키웠다. 그리고 이웃들은 그 모습을 봐왔을 터. 삼십여 년 동안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은 전남편이 갑자기 나타난다면 어머니를 사랑한 이웃들에게 꺼림칙할 거라 생각한 마크는 그를 내버려 둔 채 혼자 스티븐의 옆에 다가섰다.

마크가 옆에 서자 스티븐은 그를 쳐다보았다.

"마크?"

"우리 엄마잖아. 나도 서 있어야지."

"으응…… 고마워."

똑같은 얼굴이 둘이니 스티븐은 계속하던 감삿말에 자신의 쌍둥이 형이라는 말까지 덧붙이는 꼴이 된다. 힘들어 보이는데 좀 쉬는 게 어떠냐고 물으면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마크는 아버지와 살아온 자신과 달리 어머니와 스티븐의 유대가 깊은 것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어릴 때 몸도 약했고 지금은 심적으로도 힘든데 계속 무리하는 걸 볼 수 없던 마크는 스티븐이 조금이라도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끌고 가서 아무 데나 앉히려고 팔을 잡는데, 곧 식이 시작될 테니 모이라는 안내 방송이 들려와 말을 꺼내지 못한다. 마크는 재빨리 팔을 놓았고 스티븐은 붉게 충혈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들어가자."

마크는 머쓱한 기분으로 밀려드는 사람들을 따라 회관 안으로 들어갔다. 싱긋 웃고 있는 어머니의 사진,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 에펠탑 근처에서 우스꽝스러운 자세를 취한 어머니와 어린 스티븐의 사진, 학생들이 작별 인사를 쓰고 알록달록 꾸민 도화지 같은 것들도 벽에 걸려 있다. 옆에서 걷던 스티븐이 손가락으로 사진 하나를 가리키며 길게 설명한 다음 활짝 웃자 마크도 웃어 주었다. 반응을 바라는 것처럼 똑바로 쳐다보며 웃길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는 고인을 관에 모신 채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며 작별 인사를 하는 시간이 있으나 영국은 그렇지 않다. 장의사의 안내에 따라 제일 앞줄에 앉은 마크는 사진 속에서 영원히 시간이 멈춘 어머니를 보았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과 많이 달랐다. 흰머리가 늘고 주름도 많고…… 하지만 보는 이에게 안정감을 주는 미소는 여전하기에 어머니가 평안하게 사신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버지와 멀어진 건 옳은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아버지가 마크의 왼쪽에 앉는다. 오른쪽으로 곁눈질하면 스티븐은 옆에서 벌써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다. 어깨를 탁탁 두드려주자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누군지 모르는 노인이 추도사를 읊었고 어머니와 맺은 인연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머니는 훌륭한 교사로서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다. 이웃들은 모두 그랜트 씨를 사랑했다. 삼십 년 만에 재회한 스티븐의 성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추도사가 끝날 무렵 다가온 장의사가 스티븐에게 손수건을 건네고 나오라는 손짓을 한다. 스티븐은 눈가를 닦은 뒤 일어서서 앞으로 나간다. 울먹거리며 벌벌 떠는 인사를 끝으로 장례식이 끝났다. 스티븐은 마크에게 다가와서 자기가 잘했냐고 물었다.

"이런 데선 잘하지 못해도 괜찮아."

"그래도 다들 어렵게 와 주셨는데…… 너도 그렇고."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어릴 때랑 그대로면 어떡해, 울보야."

마크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검지로 이마를 톡 치자 스티븐은 장난스레 눈썹에 힘을 준다.

"그래, 내 우는 얼굴보단 엄마를 더 기억할 테니까."

나이만 먹었지 정말 바뀐 것이 하나도 없다. 마크가 기억하는 스티븐과 똑같아서 좋았다.

조문객들이 회관을 나가는 길에 작별 인사나 감사말을 적은 카드를 스티븐에게 주었다. 모두가 떠나자 장의사는 스티븐과 이야기를 나눴고 그동안 마크는 다른 장의사와 함께 벽에 붙어있는 어머니의 추억들을 떼냈다. 이야기를 마친 스티븐은 양손 가득한 카드와 지역 단체에 기부해 달라는 소정의 금액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마크도 사진들을 정리해서 스티븐의 가방에 넣어주었다.

"이거…… 여기 오기 전에 집에서 써온 거야."

시카고를 떠나기 전, 오랫동안 만나지 않은 어머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말들을 적은 편지를 챙겨왔다. 다른 분들 거랑 같이 보관해줘, 라고 말한 뒤 작별 인사를 담아 편지에 한 번 입을 맞추고 스티븐에게 건넸다. 스티븐은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나 마시며 회포나 풀까, 하고 보면 울음소리도 아무 말도 없던 아버지는 바로 귀국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 표정에서 속내를 읽은 마크는 아버지나 어머니나 여러 가지 의미로 참 한결같은 분들이라고 마음속에서 자조했다.

마크는 꽤 오랜만에 만나기도 했고, 깊은 슬픔에 빠진 스티븐만 놔둔 채 떠날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경비회사에 휴가를 신청하고 런던까지 날아온 것이다. 이제 스티븐의 유일한 가족은 이런 아버지와 마크뿐이니까. 마크는 아버지와의 상의 끝에 잠깐 영국에 남기로 했다. 아버지는 업무가 있으니 오래 머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변명을 하고 자리를 뜬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매정하게 구는 아버지에게 화가 솟구친 마크는 멀어지는 뒷모습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스티븐은 마크의 분노에 놀라지 않고 뭐, 그렇지, 하고 동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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