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g] 그림+글

우상 숭배 1

underneath by 시그
1
0
0

끝났다. 다이고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막 병실의 베드 테이블 위에 정신없이 펼쳐놓은 서류들에 서명을 마친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입으로 긴 한숨을 내쉰다. 안도감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남은 불안이 없는지 걱정도 되는 기분이다.

어둠에 갇혔다가 또 다른 어둠 속에서 정신을 차린 다이고는 자신을 덮친 많은 것들을 용서했다. 보이지 않을 만큼 부옇게 흐린 수면 아래서 갑자기 물보라를 치며 튀어나온 정체불명의 덩어리들은 다이고에게 시련을 주었다. 그중에서 가장 믿고 있던 것을 품은 덩어리가 제일 컸다. 나밖에 할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고, 빨려 들어가기 직전에 그것을 품에 안으면 덩어리는 용서받은 충격으로 터져서 흩어졌다.

흩날린 조각들 앞에 무릎 꿇고 절망하는 과정에서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미네는 배신자가 아니라던 키류의 말을 믿었던 다이고는 그저 씁쓸하기만 했다. 미네도 악의는 없었을 것이다. 중심으로 삼을 것이 필요했을 텐데 혼란스러워서 방향이 엇나갔을 뿐이다. 함께 조직을 부흥시키자는 목표를 위해 잔을 나누고 기꺼이 몸 바쳐 온 미네가 그렇게까지 할 리 없다. 도피성으로 이렇게나마 믿으려 했다.

그래서 다이고는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손으로 모든 것을 마무리해 나갔다.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떨쳐버리고 미네를 믿고 싶다는 생각을 품자 빨리 둘이서 함께 조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천천히 둘의 복귀를 위해 많은 일을 하나씩 끝장내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회복하는 도중에 부하들이 날라다 주는 결재 서류를 처리하고, 식욕이 없어도 조금 더 먹고, 어머니와 대화할 땐 억지로 웃으려 노력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터진 덩어리들의 조각을 그러모아 아무도 모르게 깊은 곳에 묻었다.

리처드슨만 사망한 것도 마치 강제된 운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둘은 운 좋게 나뭇잎들을 거쳐 아래에 있던 차량 위로 떨어졌으나, 리처드슨은 예고도 없던 죽음의 상황에 이미 떨어지면서 심정지 상태였다. 거구의 시신이 카자마에 의해 거둬진 직후, 병실에서 안정을 취하던 다이고는 그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듣자마자 아픈 몸뚱이와 절뚝거리는 걸음으로 카자마를 만나러 갔다.

주차장에서 카자마의 차에 올라타 남몰래 이야기를 나눴다. 문책할 것이 산더미지만 리처드슨을 제거한 것으로 끝났으니, 미네를 살리든지 죽이든지 알아서 처리하라는 카자마의 말을 따라 다이고는 어떻게 해서든 미네를 데려오려 했다. 그래서 키류와 다테에게 요청해 셋이서 작당하여 거짓을 꾸몄다. 조직을 집어삼키려던 리처드슨은 끝내 다이고를 찾아냈다. 다이고를 죽이는 데 실패한 리처드슨을 저지하던 미네와 그는 함께 떨어져 죽었지만 미네는 살았다. 따위의 간단한 것이었다.

다테가 이야기들을 꿰맸고, 키류가 증인이 되어 주었으며, 다이고는 부하의 입을 통해 조직에 그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의심의 목소리들이 있었지만 평소 미네의 충성스러운 행실도 있었고 조직의 모두가 어수선한 때였기에 어물쩍 넘어가게 되었다. 혹자는 죽은 칸다가 스파이가 아니었냐는 소릴 하기로 했다.

이 짓거리는 지금의 다이고가 최대한 할 수 있는 조치였다. 배신자를 영웅으로 만들고 진실을 감춰버리는 일. 오히려 그렇게 치부하는 편이 더 나았다. 그렇지 않고 회의를 거친 후 만장일치의 결과로 미네를 파문시켰다면 평생 그에게 가슴속 어느 한 켠을 내 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미네는 다이고에게 많은 의미를 가진 자였다. 친구이자 동료, 어쩌면 그 이상의 견고한 믿음으로 연결된 사이였을 수 있다.

그걸 알면서도 비겁하게 다이고를 위한답시고 나쁜 결말로 도망치려던 미네를 속죄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린 다이고는 우선 그를 강제로 입원 시켜 치료부터 받게 했다. 미네는 다이고처럼 오랫동안 의식을 잃지 않았고 현재는 깨어난 후 회복 중에 있었다. 보호자 명목으로 의사를 만나면 머리부터 떨어지지 않아 다행이었다고 한다.

같은 병원에 있었지만 다이고는 일이 마무리될 때까지 미네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자신이 의식을 잃었을 동안 늘 미네가 보살핀 걸 모르기도 했고 아직 정신적으로 회복되지 못한 채 얼굴을 보면 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꼴사납게 울면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살아 줘서 고마워. 죽지 못한 배신자에게 하는 말치곤 너무나 다정하다는 걸 알고 있어도 그런 말밖에 나올 수 없을 것이다.

숱한 만남과 배신에 흔들려 왔으면서도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한 회장님은 그렇게나 미네를 믿고 있었으며, 사죄하는 방법은 잘못됐지만 다이고를 위해 나선 것이기에 그의 실수들을 감안해 주기로 했다. 그래서 진실을 품은 덩어리를 끌어안았고 터진 조각들을 남들 모르는 곳에 묻어 용서한 것이다.

하루에 한 번 미네의 상태를 살핀 뒤 보고하러 오도록 명령한 부하에게서 미네가 깨어났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된 다이고는 활력을 약간 되찾았다. 조금 더 후에 그가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고 하자 다이고는 생각해둔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완전히 용서받기 위해서 미네는 할 일들이었다. 다이고는 오로지 부하들을 통해서만 미네에게 지시했다. 전화도 문자도 다정한 말도 한 번도 하지 않고 편지만 써서 그들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제 돌아갈 곳이라곤 다이고의 옆뿐인 미네가 이것을 일종의 벌이라 느끼길 바랐다. 물론 다이고도 미네를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착잡했지만 고진감래라는 말을 되새기며 참았다.

미네에게 내린 첫 번째 지시는 건강 회복이었다. 미네, 앞으로 너와 내가 할 일이 많아. 몸도 마음도 건강히 회복한 뒤에 만나자. 짧게 쓴 편지를 부하를 통해 보냈고 답장이 이틀 만에 다이고에게 전달되었다. 골절된 팔의 회복이 덜 되어서 삐뚤한 글씨로 죄송하다느니, 볼 면목이 없다느니, 그런 말들이 적혀 있었다. 잘못을 비는 어린아이 같이 느껴져 그의 움츠러든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미네도 반성하고 있으니 좋은 징조였다.

다이고는 미네의 편지를 잘 접어서 협탁에 올려두고 생각날 때마다 읽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감히 회장님을 뵐 면목이 없습니다. 병원에서 깨어난 뒤부터 못난 저에게 이렇게까지 아량을 베풀어 주심에 감복하여 밤마다 잠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회장님의 편지를 받고 어제는 처음으로 쉼 없이 잤습니다. 저는 언제까지나 회장님 편입니다. 미네 요시타카 올림.

내 편지를 받았을 때 무슨 심정이었을까. 이런 답장을 쓸 때에는? 어깨를 두드리며 다 괜찮다고 해 주고 싶다. 빨리 미네를 만나고 싶었지만 우선적으로 처리할 일들에 집중했다.

두 번째 지시는 나팔꽃의 재건이었다. 모든 비용은 미네가 지불할 것이고, 나중에 같이 가서 키류 씨와 아이들에게 사과할 생각이다. 그런 내용의 편지를 보내자 미네도 거기에 동의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동의까지 얻었으니 다이고는 즉시 부하들을 시켜 관련 업체들을 추려냈다. 본인이 직접 책임지고 싶었기에, 대략적인 견적과 상담 후에 받은 서류들을 수시로 검토했다. 연락을 받은 키류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다이고는 자신과 미네 둘이서 수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그와 관련된 서류들에 서명을 끝냈다. 거뭇거뭇 먼지가 낀 천장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내린 다이고는 당장 키류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서류에 서명을 다 했으니 조만간 건설업체 사람이 방문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키류는 바쁜지 답장이 금방 오지 않는다. 다이고는 휴대전화를 베드 테이블에 내려두고 앉은 채로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오랜만에 어머니가 병문안을 오시기로 한 날이다. 일을 다 끝내면서도 다이고는 야요이에게 차마 속사정을 밝힐 수 없었다. 어머니가 자신과 의를 맺은 미네를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가. 미네가 살았다고 전했을 때도 곧바로 평정심을 잃고 엉엉 우신 분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만큼 똑같이 미네를 아끼는 어머니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았다. 아마 평생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이고는 부하에게 연락을 넣어 서류를 가지러 오라고 명한 뒤 어머니를 맞을 준비를 했다. 천천히 일어나 지팡이에 의지하고 서서 왼손으로 협탁과 너저분한 베드 테이블 정리를 한다. 예리한 어머니 앞에서 말실수하지 않기 위해 짜놓았던 거짓된 이야기를 다시 떠올렸다.

서류를 부쳐 달라고 부하에게 전달한 뒤, 약속한 시각보다 이르게 야요이가 다이고의 독실로 찾아왔다. 회장 대행을 하고 있었기에 바쁜 몸인데도 그가 좋아하는 먹거리를 챙겨 온 야요이는 사과를 깎아 주며 몸 상태부터 물었다.

"아직 신경 쓸 일이 많지만 천천히 나아지는 중이에요."

갑자기 야요이는 신경질적으로 다 깎은 사과 조각을 다이고의 입에 쑤셔 넣었다. 자식이 무사한 것에 동작은 난폭해도 애정이 가득한 걸 알기에 웃으며 으적으적 씹어먹었다.

"얼마 전까지는 밥 한 숟갈도 못 먹었잖아요. 많이 나은 거죠."

"아픈 몸으로 무슨 일들을 그렇게 많이도 처리한 건지 신기하다니까. 너는 조직의 기둥이야. 지금보다 더 잘 먹고 잘 자고, 알겠지?"

"이제는 할 일도 거의 끝나서 그럴 거예요."

"그나저나 미네는? 이 병원에 있다며. 그동안 너무 바빠서 몇 호실인지 듣지도 못했네."

어머니라면 당연히 물을 걸 예상했기에 다이고는 사실대로 고한다. 미네를 데리고 돌아온 뒤부터 한 번도 보러 가지 않은 것, 전화도 하지 않은 채 지시만 내린 것. 그러자 야요이는 한숨을 쉬었다.

"미네가 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미안하지도 않아?"

그가 뒤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모르는 야요이가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녀석을 보면…… 제가 힘들 것 같아서 그래요."

나긋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어쩐지 작은 독실에 크게 퍼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이고의 대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야요이가 가만히 있자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무겁게 내리깔렸다가 사라진다.

"만나긴 할 거지?"

"당연하죠. 미네가 퇴원하면 카무로쵸를 통째로 전세 내서 축하 파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에요."

이번에는 대답에 거짓이 없었다. 야요이는 자신이 깎은 사과를 오물거리며 다음 달에 시간이 있는지를 물었다. 모든 것이 정리된 지금,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카시와기의 고혼을 달래기 위해 비록 시신은 없어도 명복을 비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 앉아서 서류 결재만 하는 처지였기에 시간이 있다고 대답했고, 미네에게도 전하겠다고 대답했다.

카테고리
#기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