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 숭배 2
부하의 손을 통해 미네에게 편지를 보낸 지 몇 주가 지나고 달이 바뀌었다. 그동안 미네는 빠르게 회복하여 글씨도 가지런해졌다. 반면에 다이고는 업무 스트레스 때문인지, 앉아있던 시간이 길어서인지 상처를 회복하는 속도가 느렸다. 그래도 이제 아픈 곳은 없었고 다리에도 어느 정도 힘이 생겨 많이 걸을 때만 지팡이를 쓸 수준이 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뒤 외출 절차를 거친 다이고는 부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실로 오랜만에 원외로 나갔다. 미네와 함께 가기로 했기에 본부에서 보낸 차가 대기 중인 주차장으로 향하면, 부하들이 가져다준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미네가 먼저 와서 홀로 서 있었다.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온 다이고를 보자마자 입을 살짝 벌렸다가도 말을 않고서 허리를 깊이 숙인다.
예상보다 빨리 만난 건지 늦게 만난 건지. 많은 말들이 떠오르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다사스럽게 말을 할 분위기가 아니기도 했다.
"허리 펴, 미네."
다이고는 이 애증의 형제가 당장이라도 껴안고 싶을 만큼 반가웠으나 꾸욱 참고서 어깨에 손을 탁 올렸다. 얼굴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미네는 약간 살이 빠져 있었고 작은 흉터들이 남은 얼굴에 생기라곤 없었다. 늘 자신만만하던 표정 대신 버림받은 작은 동물 같은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자 어머니의 말이 떠오른다.
미네가 너를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는데, 너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미안하지도 않아?
뒤이어 왜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려 했는지 떠오른 다이고는 유지하던 침착함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울면서 주먹을 날린 뒤, 쓰러진 배신자를 꽉 안고 얼굴에 눈물 젖은 뺨을 부비고 싶은 충동을 겨우 억누른다.
"……그동안 만나러 가지 않아서 미안해."
"아뇨. 제가 더 죄송합니다."
미네는 대답을 하며 눈동자를 내리깔았고 다이고는 어깨 위에 둔 손을 뗀 뒤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일단은 나중에 얘기하자. 중요한 자리에 늦을 수 없잖아."
"알겠습니다."
동요하는 다이고와 달리 미네는 전과 같은 딱딱한 태도를 보였다. 곰살궂은 성격이 아니지만 그래도 회장님은 잘 지내셨는지, 라는 한 마디 없는 것이 조금 섭섭하게 느껴진다. 아니, 물어볼 수가 없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쓸데없는 기대를 품었던 자신을 비웃는다.
둘은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탔다. 침묵 속에서 재빠르게 풍경이 지나가는 창밖만 보는 다이고는 자신이 먼저 말을 해야 미네도 편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지냈어? 다친 곳은 어때? 좋아, 그렇게 말을 꺼내야지.
결심과 달리 입을 열어도 말은 나오지 않았고 드디어 만났다는 반가움과 그가 저지른 일들의 서러움이 뒤섞여 울고 싶은 마음이 목까지 차오른다. 울음을 참기 위해 입술에 힘을 주고 유리창에 비치는 미네를 슬쩍 보면 그도 창밖만 보고 있다.
다이고는 의형제와 계속 껄끄러운 분위기로 있기 싫었기에 머릿속에서 할 말들을 정리한 후 그를 부른다.
"미네."
조용히 부르는 목소리에 미네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다이고는 그의 힘없는 눈을 쳐다보며 인상을 구겼다.
"다시는 그런 멍청한 짓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너도 많은 걸 깨달았을 테지."
"알고 있습니다."
대답을 한 미네는 고개를 푹 숙였다.
"너는 그렇게 도망쳐선 안 되었어. 나를 두고 떠나면 내가 납득했을 것 같아?"
"아닙니다."
조금 전까지는 울고 싶었는데 얘기하다 보니 사건들이 떠올라 지금은 화가 났다. 다이고는 잠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입을 닫았다. 자꾸 원망을 쏘아붙이면 미네가 위축될 것이기에 분노를 죽이며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을 하기로 한다.
"살아 줘서 고마워."
그러자 미네가 고개를 들고 다이고를 바라본다.
"회장님……."
어쩐지 부끄러워진 다이고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미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눈에 훤했기에 그걸 보면 다시 울 것만 같았다. 하여간, 너란 녀석은.
"이제 절대 회장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조금 전과 달리 힘이 들어간 대답에 다이고는 고개를 돌려 미네를 보았다. 결의를 다지는 그 표정이 꼭 예전의 미네로 보이자 다이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파리하던 얼굴이 드디어 빛을 찾았던 것이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저는 회장님 곁 말고는 갈 곳이 없는데…… 그런데……."
미네의 충성심은 여태 다이고가 만나며 아랫사람으로 삼았던 자들 중에서도 가히 특별했다. 딱히 뭘 잘해 준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미네는 그의 인생에 정말 다이고 밖에 없는 것처럼 굴었다. 의심으로 시작된 관계는 신뢰를 쌓았고 그 때문에 더 늦기 전에 형제의 잔을 나누기까지 했다. 언제까지나 다이고의 옆에 있을 사람. 그것을 깊이 깨달았으니 다행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렇다. 자신도 언제까지나 미네의 옆에 있을 사람인 것이다. 한 번 지어진 다이고의 미소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미네는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간만에 가는 본부에서 아는 얼굴들과 안부를 물으며 인사를 나누고 있자 어머니가 달려왔다. 어머니는 다이고보다 미네를 먼저 걱정하며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러면 미네는 죄책감에 고개를 숙인다.
"고개 들거라, 미네. 너는 잘했는데 왜 그렇게 고개를 숙이는 거야."
"아닙니다."
"다이고가 못 챙겨 줘서 내가 다 미안하네."
"그렇지 않습니다……."
옆에서 답답한 주거니받거니를 보던 다이고는 속으로 한숨을 쉬고 어머니가 살이 빠졌느니 뭐니 하며 미네를 놓을 때까지 기다린 뒤, 함께 본부 안으로 들어갔다. 키류는 막 시작된 나팔꽃 재건 때문에 바빠서 오지 못했다. 그런 얘길 하자 미네는 그렇군요, 하고 짧은 대답을 했다. 건물에 들어서자 조용히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닫았다.
조직원들이 한데 모여서 생전 카시와기의 무용담을 찬양하고 그가 어떻게 의롭게 떠났는지 들으며 명복을 빌었다. 묫자리는 역대 조직 간부들의 자리로 정해졌다. 시신을 못 찾았기에 묘는 만들지 않고 비석만 세울 요량이다.
덜 회복된 몸으로 엄숙한 시간이 끝나자 다이고는 한숨 돌리고 싶어서 미네와 둘이서 마당의 구석진 곳으로 가 담배를 피우려 했다. 왼손에 쥔 지팡이에 무게 중심을 싣고 오른손으로 상의를 뒤져 담뱃갑을 꺼내는데, 갑자기 미네가 그것을 채가더니 한 개비 꺼내 입술에 들이댄다. 다이고는 그것을 입에 물었다. 그러자 미네가 그의 라이터로 불까지 붙여 준다. 그리웠던 순간에 다이고는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저도 그때 돌아오지 못했다면, 무덤 없는 비석이 세워졌을까요."
말없이 서로 연기만 내뿜던 와중에 갑자기 미네가 먼산을 보며 물었다. 다이고는 목소리를 낮추고 배신자인 게 알려졌다면 그딴 건 국물도 없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때 아무도 몰랐다면 너도 똑같이 동성회의 묫자리에 비석이 세워졌을 거야. 최고로 좋은 자리에."
"나중에 그 옆에 회장님의 무덤이 생기겠군요."
"내가 그렇게 유언을 남긴다면 말이지."
영양가 없는 농담을 주고받자 분위기가 풀리며 마치 사건 이전으로 돌아간 기분이 된다. 다이고는 그제야 미네와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마주 보며 즐겁게 말하는 것이 오랜만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았다.
미네를 보면 사건에 관해서 많은 말을 할 줄 알았다. 주차장에서 미네를 오랜만에 봤을 때 떠오른 말들이 지금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저 예전처럼 무던하게 마주 서서 담배나 피우며 조용히 잡담만 해도 안정적이다. 이렇게 된 거, 벌은 집어치우기로 한다. 병실로 돌아가면 매일 미네를 보러 가야지. 그렇게 생각한 다이고는 담배를 든 오른손의 엄지로 미간을 긁었다.
재활이나 신변잡사 등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다가 다이고가 다시 나팔꽃 재건에 대해 말을 꺼내자 미네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우고 손을 내린다.
"키류 씨에게도 사과하러 가야겠군요."
"나도 생각하고 있었어."
미네가 키류 씨를 다시 만나도 괜찮을런지. 어쩐지 걱정이 되는 다이고는 약간 뜸을 들이고 말을 잇는다.
"그…… 내가 이제 좀 여유가 생겼으니, 다음 주쯤 키류 씨를 만나러 갈까 하는데 어때."
그렇게 제안하면 미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다시 평소의 눈빛으로 돌아간다.
"좋습니다."
"지금 상태로 오키나와까지 갈 수 있겠어?"
"문제없습니다."
그건 그렇다. 다이고는 아직 지팡이에 의지해야 오래 걸을 수 있었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졌던 미네는 멀쩡히 두 다리로 잘만 걸었던 것이다. 게다가 몸의 회복력도 징그러울 만큼 좋은지 당장 퇴원한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혹은, 매일 서류나 잡일에 시달리던 다이고와 달리 그는 자신의 사업 뒷정리 말곤 할 일이 딱히 없었기에 재활과 병행해 푹 쉬었을 수도 있다. 다이고는 다친 미네를 입원시키고 병실로 돌아와 거짓을 꾸밀 때부터 가끔 악몽을 꾸었고 식욕도 없었고 웃음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통편은 내가 예약해 둘게."
"네."
"선물도 사서…… 역시 남자애들은 장난감이고 여자애들은 인형인가?"
그렇게 묻자 미네는 살짝 미소를 짓는다.
"장난감 가지고 놀 나이들은 아니니 책이나 자습서가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나는 그때 뭘 했더라…… 너는?"
"네?"
"너는 어릴 때 뭘 하고 놀았어?"
단순히 궁금해서 물은 것인데 미네는 웃음을 거두고 눈을 내리깐다. 눈치를 보니 좋지 못한 질문을 했다고 깨달은 다이고는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말라고 덧붙였다.
그때 다이고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여태 미네는 사소한 추억을 곁들인 과거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 잘난 미네였기에 집안도 풍족하고 남 부러울 것 없이 자랐을 거라 여겼다가, 키류에게서 미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전해 들은 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아냐. 내가 쓸데없는 질문을 했네."
"언젠가…… 언젠가는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내리깐 눈을 올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미네의 눈빛이 바뀐 걸 본 다이고는 놀랐다. 무언가가 가득 찬 눈에 져버린 다이고는 먼저 시선을 돌리고 담배를 피웠다.
"이제 네 이야기를 들을 시간은 많아. 하고 싶을 때 해도 돼."
"감사합니다."
다이고는 주차장에서 봤던 얼굴과 차 내에서 본 얼굴, 그리고 방금 본 얼굴을 머릿속에서 비교했다. 나 없이 항상 그런 얼굴로 혼자 좁은 병실에 갇혀 있었을까. 나를 만나고 나서야 그런 얼굴을 할 수 있게 되었을까. 어머니가 했던 말씀이 다시 반추되며 미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시 돌아가 많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다이고는 미네와 병원으로 향한다. 아까와 달리 돌아가는 차 내에서는 말을 아꼈다. 이제는 슬픔과 분노가 번갈아 가며 마음속을 괴롭히지 않았고 그 자리에는 차분함이 들어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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