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gg] 그림+글

우상 숭배 3

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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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곳에 도착하자 다이고는 곧장 미네의 병실로 향했다. 데려다주기보다는 쌓인 앙금을 풀고 싶었다. 둘은 조심하세요, 알고 있어, 와 같은 말밖에 하지 않았다.

보좌하는 부하들을 물리고서 미네의 걱정과 함께 지팡이에 의지해 천천히 실내로 걸어 들어가면, 늘 처리해야 할 서류가 쌓여 있는 다이고의 병실과 달리 아무것도 없어서 적막하게 느껴졌다.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을 이곳에서 성치도 않은 몸으로 종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 이제 다이고의 가슴속에는 아픔을 닮은 감정만이 떠올랐다. 동정심 이전에 미안함이 컸다.

짧은 순간에도 이리저리 살피느라 다이고가 눈동자만 움직이며 천천히 침대에 앉자 소리 없이 문을 닫은 미네도 따라서 옆에 앉는다.

"미안해."

드디어 한 마디를 툭 꺼낸 다이고는 차오르는 무언가를 견디려 했다. 그러자 지팡이를 쥔 오른손에 힘이 꽉 들어가고 허벅지 위에 올려둔 왼손에도 저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다이고는 핏줄이 선 자신의 왼쪽 손등을 바라보았다.

"왜 사과하시나요……."

작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면 미네는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는 것 같으나 다이고의 눈에는 미세한 슬픔이 보였다.

"너를 내버려 둔 것 같아서."

말의 내용과 다르게 담담한 목소리가 나왔다. 슬픈 듯한, 위로하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미네를 보다가 울어버렸다는 꼴사나운 역사를 만들기 전에 모든 감정을 눌러 죽여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미네는 다이고에게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세월에 빛바랜 병실 바닥을 쳐다본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시선을 피하는 건데. 솔직하지 못하고 자꾸 괜찮다고 하는 미네가 안타까워 다그치는 말을 생각 속에서만 내뱉은 다이고는 계속 그의 갸름한 옆얼굴을 보며 입을 연다.

"여태 너를 만나러 가지 않은 걸 네가 벌처럼 느끼길 바랐어. 뒷처리들을 하느라 꽤 바쁘기도 했지. 그리고…… 몸 상태도 안 좋았어. 그때 옥상에서 일어나자마자 무리한데다 네가 '그런 짓'을 해서 정신적으로도 충격이 컸거든. 그래서 잘 먹지도 못했어."

"……죄송합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널 만나면 한심하게 울 것 같기도 했고."

"회장님……."

미네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다이고를 본다. 속마음을 털어놓자 아픔을 닮은 미안함이 가신 다이고는 미소를 짓고서 단단한 어깨에 손을 올린 뒤에 그를 위로하듯 서너 번 쓸어 주었다.

"미네. 많이 보고 싶었어. 좋지 못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라도 만나서 널 보니 좋아."

미네의 얼굴이 조금 찡그려지더니 마른 입술을 살짝 벌렸다가도 겨우 숨을 삼킨다. 턱을 살살 떠는 것이 마치 울음을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이럴 때엔 울어도 괜찮은데.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녀석이군. 그렇게 생각한 다이고는 팔을 더 뻗어 어깨를 감싼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미네답게 좋은 향기가 코로 옅게 들어와 다이고는 안정감이 들었다.

"저도 보고 싶었습니다."

낯간지러운 말이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드디어 미네가 웃었다. 비록 설게 보이는 미소라 해도 다이고의 가슴속은 미네가 웃어 주었다는 기쁨으로 가득 찬다.

이제서야 만난 둘은 겨우 솔직해졌다. 다이고는 어깨를 탁탁 두드려 준 뒤 떨어진다. 크게 한숨을 쉬자 미네가 왜 한숨을 쉬시냐고 묻는다.

"이제 정말 다 끝난 느낌이 들거든. 정리도 거의 다 했고, 희생된 사람들의 명복도 빌었고, 나팔꽃도 다시 세우는 중이고…… 미네 너도 다시 내 옆에 있고."

다이고가 대답하자 미네는 온화한 눈웃음을 짓는다.

"미네, 혹시…… 내가 다시 데려와서 후회 같은 거 한 적 없어?"

꺼내기 조심스러운 질문이지만 이런 부분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물었다. 미네는 고민하는 모습도 없이 곧바로 없습니다, 하고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만약 돌아오지 못했다 해도 후회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날 목숨을 함부로 한 것도 회장님을 위해서 한 거니까요."

의형제를 맺기 전부터 보인 미네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면 진정성 있는 대답이다. 섣불리 배신하지도 않을 녀석이 삐뚤어졌던 것은 오로지 자신이 의식을 잃었기 때문. 내가 좀 더 판단력이 있었어야 했는데, 내가 좀 더 강했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된 다이고는 어느새 미네에게 동화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미네."

"제가 드릴 말씀인걸요."

다이고는 미네를 보며 웃었다. 미네도 겸연쩍은 듯, 다시 수줍게 미소를 띠고 다이고를 본다. 볼 일이 없는 이런 미소마저 지을 수 있게 되다니. 다이고는 이제 정말로 미네가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다시 주가 바뀌었다. 시간이 맞으면 둘이서 만나는 것이 일상이었고 재활에도 열심히 참여했다. 다이고는 많이 걸어야 한다면서 일부러 다른 층인 미네의 병실까지 걸어 다녔다. 아직 지팡이 없이 오랫동안 걷는 것은 무리였으나 짧은 거리를 제 발로 나아가는 걸음걸이가 나아지고 있었다.

미네는 신경 손상의 후유증으로 가끔 팔이 저렸다. 함께 있으면 갑자기 왼손으로 오른팔을 잡고 주물거리곤 했다. 다이고는 그 모습을 보고 많은 희생에 비하면 철저히 가벼운 대가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들을, 모든 이들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도망쳤던 녀석의 정신머리와 사지가 멀쩡한 걸 보면 오묘한 기분이다.

아무것도 없던 미네의 병실에는 점점 책이나 야요이가 챙겨주는 간식거리 등이 늘어갔다. 혼자 살아온 미네와 달리 아랫사람들을 거느리는 집안답게 그들은 손이 큰 편이었다.

때때로 다이고는 간부진 재편성을 위해 미네와 의논하고 나서도 채우지 못한 빈자리들을 그려 넣은 종이만 쳐다보았다. 간부들이라곤 두 명뿐인 지금, 같은 수순을 밟을 자가 또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산다는 것도 이미 옛말이다. 이제 뒷세계도 바깥 사회와 전혀 다를 것이 없다.

미네는 고뇌하는 다이고에게 복귀하고 나서 유력한 후보가 될 조직원들을 만나 보는 게 어떻냐고 제안했다. 야요이가 현재 조직을 통솔 중이니 딱히 끼어들 문제 될 일 없이 잘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직접 조직원들과 대면 중인 야요이에게 몇 명을 추려내 달라고 요청하면 된다. 다이고는 으음, 하더니 그러는 게 좋겠다고 대답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표정도 볼 수 있고, 회장님의 가치관과 잘 맞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겠네."

엄연히 업무에 관한 회의 중이기에 직함으로 부르자 다이고는 이럴 때마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요구한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사소한 건 신경 쓰지도 않았을 터인데, 이제는 미네와 좀 더 허물없는 사이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 다 형제도 없고 친형제 같은 관계가 되어 평생을 의지하며 살아갈 생각이기에 작은 것부터 고쳐나가야 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사적인 얘기가 아니라서."

"아무리 일 얘기라 해도, 우리 둘만 있을 때도 편하게 대해 줬으면 좋겠어. 너랑 나는 형제니까."

더 늙으면 서로 말을 낮추어 이름으로 부르고 휴일에는 팬티차림으로 배를 벌렁 깐 채 긁적이는 늘어진 모습까지 볼지 모른다. 물론 미네가 그런 식으로 늙진 않겠지만 다이고는 빨리 모든 걸 드러내는 날이 왔으면, 하고 생각한다.

"네…… 다이고 씨."

형제, 좋은 울림에 미네가 이를 살짝 드러내며 미소짓자 다이고도 만족한 듯 음! 하고 웃는다. 자신들은 한 걸음씩 나아가는 중이다. 천천히 가면 될 것이다.

"이제 내일이면 드디어 키류 씨를 만나는군."

"그렇네요. 참, 아이들 선물은 사셨나요?"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바로 백화점으로 가셔서 이것저것 주문하신 모양이야. 오키나와까지 알아서 배송될 거라고 먼저 연락을 주셨더라고."

"잘됐네요."

빨리 키류를 만나고 싶은 다이고는 추억에 잠긴 듯 옅은 미소를 짓는다. 문득 정신을 차린 것은, 옆에 앉아 있는 미네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미네? 하고 부르면 그도 눈을 꿈뻑거리며 고개를 돌린다.

"너무 행복한 표정이시길래……."

어쩐지 머쓱해진 다이고는 헛기침을 한 번 내뱉는다.

"좀 보기 흉했지? 내가 제일 존경하는 분이라서 그랬나 봐."

그렇게 대답하자 미네는 다시 얼굴을 그의 쪽으로 돌린다.

"아닙니다. 보기 좋습니다."

"하하. 키류 씨도 건강해진 널 보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저도 빨리 뵙고 싶네요."

둘은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렇게 헤어진 다음 날, 이른 시각에 둘은 예의 병원 밖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불편한 다리로 절뚝이며 움직이다가 몸을 단정히 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서두르다 보니 셔츠 단추를 다른 구멍에 끼우는 실수까지 한 다이고는 그래도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짐을 들어 주거나 보좌를 해야 했기에 덩치 좋은 수행원 겸 경호원 한 명만 대동하고 미네와 만났다. 미네는 주름 없는 셔츠 위에 며칠 전 야요이가 사 준 회색 블레이저를 걸치고 있었다. 물론 거절했었지만, 야요이가 중요한 만남이지 않냐고 밀어붙였고 다이고도 잘 됐다 싶어서 거들었기에 미네는 그것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떠올리고 웃음이 나온 다이고는 잘 어울리네, 한마디를 했다.

"맞춤이 아니라 기성복이지만 딱 맞아서 좋네요."

아무래도 살이 빠져서 더 그럴지도. 다이고는 그렇게 생각하고 갈 길을 재촉했다. 둘은 수행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나리타 공항으로 향한다. 다이고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고서 놀러 가는 기분이 되어 약간 들떴다. 미네도 오랜만에 휴양지로 떠나는 느낌인 건지 계속해서 웃는 얼굴로 다이고와 이야기를 했다.

한 시간 걸려서 도착한 나리타 공항에서 수속을 밟고 탑승한 뒤, 약 세 시간이 지나면 오키나와의 나하 공항이었다. 날씨는 좋은 날인 만큼 좋았고 비성수기인데도 관광객이 많다. 이런 곳은 잘 오지 않기에 사람들 사이를 헤쳐가며 어렵게 식당가로 올라간다. 시간 절약을 위해 전에 다이고가 오키나와에 왔었을 때 간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했다.

공항이 남쪽에 위치해 있어서 현지에서 차를 빌리기로 했다. 교통편은 알아서 하겠다던 다이고의 말대로 모든 과정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시간도 많이 잡아먹지 않았고 자신이 끌어들인 미네를 배려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기나긴 길을 이동하는 사이에 미네는 잠이 들었다. 다이고는 평온하게 자는 미네를 보다가 자신도 깜빡 잠이 들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장거리를 이동해서 꽤나 피곤했다. 약 세 시간 뒤, 다이고가 키류와 통화하며 큰 거리를 지나 점점 해변가 근처의 주택가로 들어갔다. 저 멀리 나팔꽃의 건물로 보이는 지붕이 나타나자 둘은 고개를 빼꼼 들고 그쪽을 보았다.

점점 가까워지는 파도 소리와 햇빛에 반짝이는 바다에 다이고는 드디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행원이 나팔꽃 근처에 차를 세우자 미네가 재빨리 내려 차 문을 열어 주었다. 다이고도 지팡이를 짚고 내리면 키류와 하루카가 입구에 서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간 다이고는 키류와 악수를 했고 미네는 허리부터 숙였다.

"허리 펴, 미네."

언젠가 다이고도 그 말을 했었다. 키류의 말에 미네는 허리를 펴고 그와 악수를 했다. 키류의 어깨 너머로 아이들이 툇마루에 서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그러다가 미네를 보고는 후다닥 방 안으로 달려간다. 다이고는 그것을 약간 애석하게 느꼈지만 키류를 위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루카도 많이 컸구나."

하루카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하루카는 오랜만에 본다며 활짝 웃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옆에 서 있는 미네에게 눈동자를 돌리고 입을 다문다. 다이고는 그것도 씁쓸하게 느끼며 아무렇지 않은 척 미네를 본다.

"자, 미네. 가 봐야지."

"네."

넷이서 척척 걸어가자 다이고의 수행원도 뒤를 따라왔다. 차례로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거실 겸 응접실에 선 키류가 큰 목소리로 불러도 아이들은 쭈뼛거리며 쉽게 들어오지 않으려 한다. 그럴 만도 하지. 자리에 앉은 다이고가 고개를 돌리며 이리저리 둘러본다.

"새 건물 냄새가 나네요."

"어어. 고맙다, 다이고."

"저는 서류 처리만 했고 미네가 모든 비용을 냈어요."

그 말에 미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들었지, 얘들아. 다이고 아저씨와 미네 아저씨가 미안하다고 다시 우리집을 만들어 주셨어. 미네 아저씨도 반성을 많이 했어. 더는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키류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몇몇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온다.

"키류 씨, 저희 아직 삼십대밖에 안 됐어요."

다이고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키류의 옆에 선 하루카도 손짓하며 아이들에게 들어오라고 권한다. 키류는 다이고의 맞은편에 앉고서 아이들을 한 명씩 소개했다. 모두 부끄러워하며 고개만 살짝 끄덕인다. 다이고도 한 명씩 눈을 맞추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

"사과부터 해야겠지. 소중한 집을 그렇게 만들어서, 다른 사람들을 다치게 해서 정말 미안하구나."

말을 마친 다이고는 밥상에 이마가 닿을 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곧바로 미네도 그를 따라했다. 고개를 든 다이고는 자신들이 진심으로 반성했다며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사과의 뜻으로 선물을 샀다고 하자 아이들답게 표정이 조금 밝아진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키류의 말에 다이고는 손사래를 치며 당연한 거라고 말했다. 하루카에게 차 좀 내어 달라는 키류의 요청과 함께 아이들은 시커먼 아저씨들끼리 이야기를 하도록 내버려 둔 뒤 저들끼리 떠들며 방으로 사라진다.

"빈손으로 와서 죄송해요."

"일부러 여기까지 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지. 그나저나 아이들 선물을 누님이 직접 고르셨다니 기대가 되네."

"뭘 사신 건진 모르겠지만, 저희가 고른 것보다 훨씬 낫겠죠."

"누님은 옛날부터 센스가 좋으셨으니까. 몸 상태는 어때? 아직 지팡이를 짚고 있던데……."

"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어요. 매일 재활도 하고 있고요. 이제 짧은 거리는 걸을 수 있어요."

키류는 다행이네, 라고 한 뒤 미네를 보았다.

"미네도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감사합니다."

미네가 고개를 숙이는데 마침 하루카가 찻물이 담긴 컵을 세 잔 내려놓는다. 다이고는 고마워, 라고 하며 차를 마셨다. 곧이어 미네가 고개를 들자 하루카와 눈이 마주친다. 하루카는 살짝 인상을 쓰고는 머리카락이 휘날릴 만큼 홱 일어나서 방을 나간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를 키류와 다이고는 어색하게 눈빛을 교환했고 미네는 말없이 차를 마신다.

이후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사는 이야기, 농담, 앞으로의 할 일들을 늘어뜨리면 즐거운 시간을 따라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손목시계로 시각을 확인한 다이고는 슬슬 돌아가기로 한다. 번화가의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 날 일찍 도쿄로 떠날 예정이다. 키류와 아이들이 다음에 또 보자며 손을 흔드는 것을 뒤로하고 셋은 온 길을 돌아가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차창 밖으로 풍경을 보는 다이고는 계속 말없이 앉아만 있던 미네가 신경 쓰였다. 뭐,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장본인이 그 자리에서 화기애애하게 떠들 처지는 아니긴 하지. 건강하게 잘 있는 걸 보여 주었으니 그걸로 된 것 같다. 앉는 자세를 고치는 척 곁눈질로 미네를 보면 또 팔이 저리는지 왼손으로 오른팔을 꽈악 잡고 창밖을 보고 있었다.

다이고는 수행원과 같은 방이었고 자동적으로 옆방은 미네 혼자 쓰게 되었다. 체크인 후 미네와 헤어진 뒤 객실로 들어가면 긴장이 풀려 한숨부터 나온다. 키류도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고, 아이들도 자신들을 용서해 주는 것으로 보여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보다 일의 원흉인 미네가 있는데도 경계를 풀고 다가와 준 것이 마음속에 좋은 추억으로 자리 잡는다.

수행원의 도움으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뒤, 제공되는 샤워 가운을 입고 침대에 앉아 통유리 너머 오키나와의 저녁 풍경을 본다. 다음에는 좀 더 오래 머물며 미네와 느긋하게 관광이라도 하고 싶다. 몸도 마음도 편해지자 하품이 나왔다. 노곤했기에 아쉬운 마음을 안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간만에 병실 침대가 아니라서 몸이 예민해진 건지, 적당한 아침에 눈이 뜨인 다이고는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 돌아갈 채비를 하기 위해 협탁에 올려 두었던 휴대전화부터 찾는다. 램프에서 규칙적으로 불빛이 깜빡거리는 휴대전화를 열어보면 어젯밤 시각으로 키류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고맙다느니 이제는 아이들도 괜찮을 거라느니 좋은 말들뿐이다.

[바쁘신데 맞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히 미네를]

어떻게 써야 고맙다는 마음이 잘 전해지려나. 아침이라 아직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 모양이다. 멍하니 손 안의 작은 화면만 보던 다이고는 눈을 감는다. 부은 눈이 눈꺼풀을 올리는 것을 거부하지만 이겨내고서 슬슬 눈을 뜬다.

[바쁘신 와중에 방문해서 폐가 되진 않았을지 모르겠네요. 무엇보다 미네를 좋게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들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고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만족스럽게 답장을 보낸 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를 끝내고 약속한 시각에 미네와 호텔 입구에서 만난 다이고는 잘 잤냐고 물었다. 미네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수행원이 공항으로 향할 차를 가지러 간 사이 둘은 흡연 구역으로 가서 담배를 피운다. 폐 속은 흐려지지만 머릿속은 맑아졌다.

"사실 난 푹 못 잤어. 오랜만에 바깥에서 자서 그런가 봐. 침대는 좋았는데, 그치?"

다이고의 물음에 미네는 급히 연기를 내뱉고 대답한다.

"회사에 다닐 적에는 출장이 잦아서 호텔에 자주 묵곤 했었습니다. 사람마다 체형과 잠버릇이 다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편하게 맞는 침대라면 만족할 수밖에 없겠죠. 아무리 궂은 날씨여도, 기껏 사 먹은 밥이 맛없어도, 쇼핑할 때 바가지를 써도, 힘들게 돌아와서 침대에 누우면 모든 게 용서되니까요. 이 호텔의 침대도 그랬습니다."

장거리 이동과 불편한 자리를 가졌음에도 침대에 누우니 모든 걸 잊고 잘 잤다는 말이었다. 다이고는 피식 웃었다.

"미네는 호텔 침대에 일가견이 있는걸."

"회장님, 목소리를 조금 낮춰 주세요.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습니다."

다이고는 미네와 농담을 할 건덕지가 생겨서 무심코 즐겁게 말했다가 바깥인 걸 깨닫고서 놀란 얼굴로 입을 닫았다. 물론 미네도 농담이었기에 눈웃음까지 지으며 웃는다. 이제는 얼굴에 약간 살이 붙어 마치 마른 꽃 같이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미네를 보며 어제 나팔꽃에서도 그렇게 웃었더라면, 하고 아쉽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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