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내 청춘 러브 코미디는 잘못됐다

ㅂㄴ

튀긴쥐 by h43m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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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땜에 나 병신됐어…….”

박도현은 레전드 인터넷 소설의 한 구절을 중얼거렸다. 박살 난 알고리즘은 추천 피드랍시고 이런 걸 띄웠다. 평소라면 쿨하게 관심없음으로 대응했겠지만, 최근의 박도현은 좀 다르다. 유치한 대사가 꼭 자신의 이야기 같다. 그날 이후로 박도현은 어딘가 고장난 사람처럼 지내고 있다. 입맛도 없고 (원래 깨작이는 편이다.) 잠도 못 자고 (대체로 새벽 세시까지 리그오브레전드 솔랭 돌리느라) 무엇보다 예고없이 심장이 덜컥거린다. (이유 미상) 이런 걸 어디가서 말할 수는 없는 법이라, 네이버 지식인에 익명으로 의료 태그까지 달아가며 질문을 올렸다.

[내공 30] 요즘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심장이 잘 떨어집니다. 내공냠냠 금지.

ㄴ 심장암이 의심됩니다.

ㄴ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아니에여???

차라리 눈을 감고 싶어지는 수준의 댓글이 달린다. 하지만 눈을 감으면 그날의 현장이 필름처럼 촤르르 펼쳐진다.

너는 아무하고나 이래?

그러니까 그날. 박도현은 실수였다고 변명한다. 기억 속 어렴풋하게 끼치는 알코올 냄새가 그 증거였다. 그때 박도현과 한왕호는 이미 만취 상태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포개지는 입술의 감촉은 여전히 선명하다. 한왕호의 입술은 의외로 따뜻했다. 잘도 서늘한 소리를 하는 입술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박도현은 처음으로 운명이 야속하다.

やはり俺の青春ラブコメはまちがっている

박도현 한왕호

1

한왕호는 언제나 물비린내가 나는 커피를 마셨다. 커피에 쓴맛과 신맛만 있다고 생각했던 박도현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전부 오산이었음을 깨달았다. 미뢰를 건드리기보다는 비위를 시험하는 것 같은, 가령 하수구나 개천에서나 맡을 수 있을 냄새였다. 학교 앞 로터리 메가커피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최현준은 커피 머신을 제대로 세척하지 않으면 그런 맛이 난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성인 남성 손보다 족히 큰 라지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오백 원에 팔고 있는 교내 카페에 컴플레인을 걸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애초에 대부분의 학우님들은 그 카페의 커피를 기호식품보다는 연료 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이 보였다. 카페에 사람이 가장 들끓는 시간은 1교시 직전이었다. 오전 8시 30분 즈음 커피를 쥔 사람들은 전부 눈 밑이 퀭했다. 반면 느즈막한 오후에는 오전 시간대에 비해 비교적 매장이 텅 비었다. 여유와 함께 만끽할 만한 맛은 손톱만큼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던 것이다. 의문스러운 점은, 그 카페는 커피를 제외한 나머지 메뉴는 맛있지는 않아도 괜찮은 축에 들었다. 그러니까 딸기스무디도 아이스티도 나쁘지 않았다. 유리문에 ‘모든 커피 메뉴 1000원~2000원’이라고 자신있게 써붙인 주제에 오직 커피만이 절망적인 맛이 나는 이상한 카페.

그렇다고 해서 박도현이 내돈내산한 커피는 맛이 있냐, 하면 처음부터 승부가 되지 않았다. 박도현은 커피를 못 마셨다. 그렇다면 밤샘과제나 1교시는? 21세기에 잠을 깨울 도구가 커피 뿐인 것은 아니었다. 너는 커피 없이도 생활이 되냐는 최현준의 물음에 박도현은 제법 수 세기 전 처형당한 프랑스 왕비처럼 대답했다. 커피를 못 마시면 몬스터를 마시면 되잖아.

하지만 한왕호가 사주는 커피는 마셨다. 천 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내려졌다. ‘동아시아 문화 연구 동호회’의 부장이었던 한왕호는 동아리방에 세 명 이상 모이면 부원들을 데리고 나가 교내 카페에서 커피를 샀다. 메뉴 선택권은 없었으나 공짜를 마다할 이유 역시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 반기를 들거나 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박도현의 고충이라면 이러한 관례에도 불구하고 한왕호가 박도현을 ‘특별히’ 예쁘게 여겨 얻어마시는 커피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새내기이자 신입 부원인 박도현은 비린내가 역한 커피를 거절하지 않았다. 자기 취향 하나 말하지 못할 정도로 소극적인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타지 생활을 꽤 한 덕분에 눈칫밥 먹는 데에는 도가 텄던 탓이다. 납작 엎드리면 반은 가는 것은 국적불문이었다. 아예 미국처럼 수평적 구조를 추구하는 나라라면 한국인 특유의 싸바싸바가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박도현은 10대를 중국의 상하이에서 보내고 귀국한지 약 4개월 째였고 미국에는 가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2

동아리방들이 위치한 D동 5층에서 동아시아 문화 연구 동호회는 제법 유명했다. 일명 동문연. 505호 알아? 하면 아~ 그 동아리 하는 정도. 자대의 여타 동아리들처럼 번듯한 이름 없이 설명적이고 딱딱한 작명이 오히려 눈에 띄었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옆 방은 하이브리드 옆옆 방은 댄스웨이브 따위로 작명 센스들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그 동아리’ 취급 받는 것과 별개로, 동문연이 무슨 활동을 하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동문연은 동아리 홍보 시즌에도 흔한 홍보지 하나 뿌리지 않고 동방 문만 굳게 닫고 있었다. 그 좁은 문을 기어이 열어 젖힌 것은 다름 아닌 박도현이었다.

“입부 신청서. 어디에 내야 하나요?”

“…누구세요?”

박도현은 그때 한왕호를 처음 봤다. 파마끼가 남아 곱슬거리는 흑발이 뒷목을 완전히 덮은 남자. 어디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것처럼 헤진 빈백에 척추 수술비로 3000만원은 족히 나올 것 같은 자세로 누운 폼이 인상적이었다. “동아리 가입하러 왔는데요…….” 박도현이 신청서 종이 달랑거리며 주춤대자 그냥 거기에 두고 가라는 대답을 끝으로 다시 빈백에 고개를 처박았다.

쪼끄맣고 순진하게 생겼는데. 보기랑 다르게 성격은 좀 더럽네……. 했는데 잠에서 덜 깨 그랬다는 것은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알았다. 말이 오티였지 신입부원은 박도현 뿐이었기 때문에 회식에 가까웠다. 가성비의 성지였던 학교 앞 로터리 삼겹살집에서 한왕호는 팔을 걷고 직접 고기를 구웠다. 지갑이 얇을 때 제일 맛있는 건 역시나 남의 돈으로 먹는 고기라서 박도현은 열심히 먹었다. 삐쩍 말랐는데 잘 먹네 도현이? 한왕호는 그렇게 말하며 구워지는 족족 박도현의 앞접시에 삼겹살을 올려줬다. 아 왕호 형 신입만 먹이면 어떡해요. 박도현의 옆에 앉은 A가 실실 웃으며 한왕호에게 핀잔을 주자 한왕호도 눈 하나 꿈쩍 안하고 받아쳤다.

“닥쳐 새꺄. 아직 어려서 많이 먹고 많이 커야 돼.”

박도현은 한왕호의 특별대우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열댓 명 모아놓은 소수동아리에서 1학년은 박도현 혼자였으니까. 한국의 사회생활은 지극히 연령주의적이었고 짬밥 순이라는 단어마저 존재했으나, 예외적으로 갓 스무살에게는 너그러웠다. 방금 구워 따끈따끈한 삼겹살도 한왕호가 은근슬쩍 빼주는 소주잔도 스무살의 특권임을 박도현은 알았다. 고질적인 역할 놀이였다. 그러니까, 박도현을 특별히 예뻐했다기보다는 내년이 되면 자연스럽게 박도현도 졸업해야 하는 막내라는 신분. 그래서 박도현은 떠먹여주는 복을 굳이 내치는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았다. 우직하다가도 요령있게 구는 것은 박도현의 장점이었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용 동아리만큼이나 직관적인 네이밍치고 동문연은 친목 동아리에 가깝다는 것도 오티 자리에서 알았다. 별다른 대외활동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동방 필요한 사람들끼리 유령 부원 좀 더 얹어서 서류를 내는 일이야 비일비재하니까. 어쩐지 뭐하는 동아리인지 에타에 물어도 모르고 선배도 모르고 며느리도 모르더라. 중어중문학과 박도현은 전공 관련한 스펙을 쌓으려고 했었다. 잠시 아차 싶었다.

그러나 이미 삼겹살도 얻어먹은 차에 저 못하겠습니다 하기란 박도현은 그렇게 얼굴가죽이 두꺼운 편이 되지 못했다. 차라리 관대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하는 사람들일 뿐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박도현은 동문연이, 특히 한왕호가 마음에 들었다. 도현아 잔 비었어- 하면서 능구렁이처럼 소주잔에 물을 따라줄 때에는 후광도 비치는 것 같았다. A와 한왕호가 과격한 표현을 입에 올려가며 투닥거릴 때는 좀 부러웠다. 어쨌거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박도현은 그 본능에 충실했다. 중의 입장이어도 절에 질리기 전까지는 마찬가지로 기꺼운 것이 순리에 맞아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잘 지내보고 싶다고……. 박도현은 술김에 홀로 다짐한다.

“신입은 우리 동아리 어떻게 알고 들어왔어?”

“제가 중어중문학과거든요.”

순간 싸해지는 분위기. A의 표정이 차게 식는다. 테이블 끝에서는 헉, 하는 소리도 들렸다. 한왕호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박도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짠하자 짠.”

한왕호가 짠을 외치며 얼어붙은 분위기를 능숙하게 풀었다. 다들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잔을 부딪혔다. 박도현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한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박도현이 할 수 있는 것은 어리둥절한 채로 잔을 비우는 것 뿐이었다.

3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 이유로 전공을 밝히자 꽂힌 차가운 시선들의 원인을, 박도현은 동방에 세번 째 출석한 날에 비로소 알게 됐다.

그러니까 네이밍을 왜 그렇게 한 거냐고. ‘동아시아 문화 연구 동호회’라고 하면 순진하게 한국 중국 일본의 역사와 문화를 음미할 것만 같잖아. 더 나아가면 (박도현의 기대대로) 학점 인정이 되는 프로그램 정보를 공유할 수도 있는 거고……. 고루한 이름 뒤에 한국 버추얼 유튜버 오타쿠, 중국 무협소설 오타쿠, 일본 아니메 오타쿠가 숨어있을 줄은 몰랐다. 어쩌다가 나란히 붙어있는 세 나라는 오타쿠 문화의 메카가 되어버린 것일까? 마니아의 세계를 전혀 알지 못했던 박도현은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냥 만화 동아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하고 A에게 슬쩍 묻자 만화 동아리는 또 따로 있다는 동문서답이 돌아왔다. “만화 동아리에 들면 해야 하는 활동도 많고……. 무엇보다 장르의 다양성이 훼손된다고.” 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대답도 함께. 오타쿠 인도주의를 지향하겠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장르의 다양성이 뭔데요 님아……. 때 묻지 않은 갓반인이자 한왕호의 언어로는 리얼충인 박도현에게는 징버거나 유키노시타 유키노나 거기서 거기였다.

이 사실은 곧 소주잔에 물을 따라주던 메시아 a.k.a 한왕호(후광 옵션 존재)도 박도현이 이해할 수 없는 부류 -오타쿠- 라는 의미가 된다. 그 한왕호가? 부정하고 싶었다. 어쩐지 한왕호는 동방에서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많이 했다. 현지인처럼 구사하는 것은 아니었고 일본어를 전혀 못하는 박도현도 뉘앙스로 해석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를테면 박도현이 빈백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자 “大丈夫ですか?” 물어보는 식이다. 그럴 때마다 박도현은 “아 넵.” 하고 대답하기는 했으나 한국어로 해요 씨발……. 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을 종종 억눌러야만 했다.

동아리 가입 3일만에 박도현의 안에서 한왕호의 이미지는 와장창 박살이 났다. <그날 본 꽃의 이름을 우리들은 모른다>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남자에게서 후광을 찾아본다는 게 더 우스운 일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박도현은 끈질기게 동방에 얼굴을 비췄다. 이상한 데에서 근성 있는 것도 물론 맞았으나 본질적인 이유는 한왕호에게 있었다. 후광 옵션은 삭제된지 오래다. 그렇지만 마이너스는 아니다. 여전히 한왕호는 박도현에게 살가웠으며 친해지고 싶었고,

“도현아 오타리아 볼래? 빌려줄게.”

…비록 이딴 소리를 할지라도. 박도현은 한왕호의 어디에 매력이 존재하는지 추론하다가 권력이라는 해답에 다다랐다. 맨날 라이트노벨 정발 소식만 찾아보고 있을지언정 동문연의 실세는 한왕호가 꽉 붙잡고 있었으니까. 그렇다 원래 남자의 매력은 부와 사회적 위치에서 온다. 박도현은 자신의 결론에 스스로 납득했다. 실제로 한왕호는 자신의 권력을 제대로 사용할 줄 알았다. 더불어 유지하는 법조차도. 그러니 매번 부원들 입에 들어가는 데에는 카드를 척하고 내미는 거다. 한왕호의 수였다. 박도현은 매번 한왕호가 사다주는 역한 커피를 얌전히 받아마시며 한왕호의 약은 점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때면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약아빠졌는데 밉상은 아니어서.

중국에서는 농담삼아 같은 학급 친구들끼리 ‘大哥’하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한왕호에게 따거라고 하고 싶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한왕호는 동생이라면 전부 예뻐하는 듯 했지만 박도현은 그중에서도 좀 더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승부욕과 궤를 같이 하는, 이상한 오기였다. 선배가 후배를 예뻐라 하는 것은 대학 사회의 불문율이었다. 실제로 귀엽지 않아도 귀여워하는 문화의 답습. 그중에서 한왕호는 혼모노임을 알았던 건 한왕호의 같은 과 후배인 서대길이 동방에 방문했을 때였다. 박도현과 같은 24학번이라던 서대길은 한왕호를 형 형 불러가며 잘 따르는 듯 했다. 박도현에게 약간의 컬쳐쇼크를 주었던 것은, 박도현 인생에서 손에 꼽는 씹덕이었던 A와 서대길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대화했다는 점이었다. 호쇼마린 이 사람이 형 오시예요? 가치코이 안 할 거면 버추얼 왜 함. 하하하 형 개웃겨요.

듣자하니 동방 밖에서는 한왕호가 서대길을 끼고 다닌단다. 박도현은 기민한 감을 발휘해서 단번에 계산을 내렸다. 한왕호가 좋아하는 순둥 담백한 성격에 무지했어도 예쁨 받을 것 같은 준수한 얼굴. 그런데 한왕호처럼 한본어 섞어가며 말을 했다. 도출된 답은 이랬다. 음 왕호 형이 예뻐할 만 하네……. 질투가 났거나 한왕호에게 섭섭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상한 오기만큼은 별개의 것이어서. 이는 향후 행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냐 하면,

“읽어볼게요.”

“오 진짜? 내일 가져올게?”

<오타리아> 라던가 <오레가이루> 같은 이상한 약칭을 가진 라이트노벨 권유마저 예스맨으로 행동하는 것. 한왕호는 박도현을 라이트노벨의 세계에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순수하게 기뻐했다. 박도현의 깜찍한 계획은 어느정도 성공인 듯 했다. 동아시아 문화에 관심 있어서라는 순진한 가입 사유에 차가워졌던 동문연 사람들도 박도현의 변화(피나는 노력을 곁들인)를 달가워했다. 그제야 부원으로써 인정받았다는 감각에 안도감이 드는 한편 당연지사 공들인 결과인 것 같기도 했고…….

어쨌든 박도현의 목표는 한왕호의 예외다. 스무살의 특권과 대학 사회의 불문율을 전부 지워버려도 존재를 확실히 남기는.

4

…그게 온갖 애니메이션 팝업 스토어에 끌려다니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어느날 한왕호가 말했다. 도현아, 때가 됐다. 그 뒤로 6등신 여고생 캐릭터 등신대들 즐비한 곳들에 끌려다녔다. 언젠가 한왕호가 사주는 커피 받아마시며 좀 집돌이인 편이라고 말했던 것은 귓등으로 흘려들은 모양이었다. 코엑스부터 강남까지 곧잘 따라다닌 박도현에게 한왕호는 이랬다.

“생긴 거랑 다르게 외향적이라서 의외였어, 좀 진지한 성격일 줄 알았는데.”

그말인즉슨 커뮤나 슥뽕하는 방구석 씹덕들이랑은 다르다는 이야기인가. 그야 다르겠지. 박도현은 한왕호만을 위한 5분대기조였다. 생각이 확장된다. 그렇다면 생긴 건 방구석 씹덕이라는 뜻……? 박도현이 잠시 고뇌하는 사이 한왕호는 에스프레소 잔으로 탑을 쌓는 릴스 보여준다. 한왕호와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는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애니 보고 인스타 감성 카페 가고. 비장했던 박도현의 전략은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것 같았으나, 새로운 의문이 치고 나온다. 고등학생 때 손 잡고 운동장 걷는 연애나 하던 박도현은 갑작스럽게 생겨난 어른st 자유와 사랑의 여지가 당황스럽다. 이런 건 여자친구랑 하는 거 아닌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련 당한 건 아닐까. 진지한 성격인 줄 알았다는 건 또 무슨 뜻이야. 한왕호의 모든 말을 파헤쳐 보고 싶었다. 한왕호가 끼고 다니는 후배가 되면 목적 달성일 줄 알았는데, 라운드 2가 시작됐다. 한왕호는 박도현과 눈이 마주치면 언제나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만만한 사람은 확실히 아니다……. 이를 간과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자기도 모르는 새 한왕호의 나오라는 연락만을 기다릴 때였다. 박도현은 혼란스럽다.

바닥으로 치닫는 과생활의 기전은 이곳에서부터 시작된다. 한왕호의 독점 신청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소수학과인 중어중문학과 내에서 박도현은 불투명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아는 학교 사람이라곤 한왕호, 동문연의 누군가 1, 동문연의 누군가 2, 그리고 아주 가끔씩 서대길. 어휘 수준이 다소 서브컬쳐적으로 변모하는 것은 비가역의 영역이었다. 한왕호의 생활 일본어까지 드문드문 쓰게 될 때 쯤 박도현은 그제야 정체성에 의심을 품었다. 이를테면 야도미진타가 혼마메이코를 애타게 부르는 장면이 슬프다는 건 이해가 되는데 눈물 주륵주륵 흘리는 감수성은 태생의 문제다. 박도현은 오타쿠에 재능이 없었다. 이것 또한 당연한 이야기다. 박도현이 오타쿠 연습생이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오로지 한왕호의 퍼스트였기 때문이다. 자각이 늦었으니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였다. 하지만 어떻게? 이미 1학기를 한왕호에게 상납한 박도현은 이제 와서 저 오타쿠는 소질이 아닌 거 같아요 탈퇴하겠습니다.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코 꿰였다는 걸 자각할 때면 한왕호가 귀신같이 커피를 사왔다. 그럼 박도현은 그 비린내 나는 커피 마시면서 다시금 한왕호의 어장에서 헤엄쳐야 했다.

한왕호와 자신의 관계가 어부-어장 속 물고기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속히 말하는 유레카의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가라 오타쿠 박도현의 비극적인 사건이라 함은 한왕호라는 혼모노 오타쿠가 박도현의 전심전력을 눈치 채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한왕호는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도현아 근데 왜 이렇게 무리해? 라고. 주어도 맥락도 없는 발화였으나 박도현은 대충 짐작했다. 그래서 놀란 체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냥요. 한왕호는 대답이 없다. 은은한 미소 머금고 아메리카노 홀짝일 뿐이었다.

“그럼 형은, 왜 저 데리고 다녀요?”

“그냥.”

그리고 덧붙인다. 도현이 너 애쓰는 거 보기 좋아서.

네? 박도현의 머릿속에 단 하나의 단어가 떠오른다. 아……. 이거 그건가 어장관리? 후배들 줄줄이 이끌고 다니기에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본격적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우습게도 한왕호를 향한 어떠한 실망이나 부정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다만 조금 구체적으로 삔또가 상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더하라고? 난공불락이다. 하지만 박도현의 미련한 장점이라면 결국 근성이었고. 까짓거 끝까지 해드리겠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왕호의 심연 같은 눈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 할 수 있냐고. 그 도발에 순순히 걸려들겠다고 선언한 것은 결국 박도현의 쪽이다.

5

하지만 가끔은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내가 물고기 중에서는 1등 물고기이려나.

6

재고의 시간. 한왕호의 매력이 부와 권력에서 나온다는 문장에는 분명한 오류가 있다. 박도현은 그런 결론에 도달한다. 애초에 밥 사준다고 해서 대형으로 모시고 싶은 게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부터 완결난 사실이었는데. 박도현은 아차 싶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왕호는 어장 활용의 귀재였다. 속이라고는 내비치지 않는 주제에 남 속마음 읽는 데에는 도가 터서. 자신의 부름이 박도현에게 불가항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것 같았다. 박도현은 알고 있다. 보이지 않는 권력 관계가 있으며, 한왕호가 절대적이라는 명제는 어쨌거나 사실이라는 점을.

그렇게 한왕호 자취방에도 입성했다. 집에서 2차 하자는 한왕호의 종용에 못 이겨 방문한 원룸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동방 어지럽히며 사용하길래 자기 집도 그런 꼴일 줄 알았는데 이쪽은 아예 텅 비어있었다. 하여튼 극단적이군. 방의 절반을 차지하는 토퍼를 밀어 치우자 제법 두 사람이 앉을 공간이 나왔다. 한왕호는 머그컵에 참이슬 빨뚜 가득 따라 박도현에게 건넸다. 이미 아슬하게 주량을 채운 박도현은 한왕호의 잔을 채우다 조금 대담한 질문을 했다. 아무한테나 이래요?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여자친구 안 만들잖아요.”

“현실에 없는 거야.”

“아 넵…….”

맞다 이 사람도 A나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전에 들었던 A와 서대길의 대화와 흡사해질 것 같아 박도현은 빠르게 발을 뺐다. 그렇지만 한왕호는 유키노시타 어쩌고 같은 여자가 현실에 존재한다고 해도 그 여자랑 손 잡고 주말 저녁에 성수 한복판 돌아다닐 것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애니 여캐 월드컵 비슷한 대화를 했다. 저는 근데 유키노보단 하루노가 더 좋아요. 좀 성숙한 쪽이 취향이세요? 아니 말을 왜 그렇게 해요. 박도현은 시덥잖은 대화하다가 맞은편에 있는 전신거울과 눈이 마주친다. 거울에 비친 상이 약간 흐릿했다. 좀 취했나. 그렇지 않아도 얼굴에서 화끈거림이 올라왔다.

“솔직히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야. 형이 평소에 나한테 하자고 하는 거, 데이트잖아…….”

“취했어? 이제 그냥 말 놓게?”

“어, 그냥 해. 나이 차이 얼마나 난다고.”

“도현이 미쳤네.”

그렇게 말하는 한왕호는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박도현은 약간 욱한다. 지금 나는 누구 때문에 이러고 있는데요. 부서져라 웃는 얼굴이 괜히 재수가 없다. 난 이런 거 여자친구랑도 안 했어. 미친 소리가 우수수 나왔다. 박도현은 그렇게 취하지 않았다. 아직 한왕호가 건넨 머그컵의 바닥은 한참 남았고, 애초에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으며, 이딴 소리 하는 와중에도 이성의 끈만큼은 애써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사람마다 참을 수 없는 순간은 종종 생기며 결국 일말의 취기라는 것은 최적의 변명이어서. 박도현은 취기를 가불해서라도 할 말이 많았다. 작은 원룸에 두 사람 색색거리는 소리와 머그컵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한왕호는 박도현의 주정 아닌 주정을 말없이 들었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한 마디 했다.

“너 여자친구 있어?”

“지금은 없고 고등학생 때.”

“넌 뭐……. 좆고딩 때 얘기를 하니.”

“형하고만 노는데 여자친구를 어떻게 사귀냐고.”

한왕호가 머그컵에 든 소주를 단숨에 마셨다. 문득 박도현은 동문연 술자리에서도 한왕호는 슬슬 밑잔 빼던 것을 기억한다. 박도현은 조금 풀린 혀로 말했다. 형 잘 마시네 아예 못 마시는 줄 알았어.

"너땜에 술 말려서 그래.“

간결하고 날선 질책이 돌아온다. 그러나 툭 뱉는 말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표정을 지어서, 그러니까 특유의 광대가 동그랗게 올라오는 웃음을 짓고 있어서. 박도현은 조금 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 된다. 억하심정으로 똘똘 뭉친 것 같은 남자. 그러나 박도현은 한왕호가 싫지 않다. 라운드 2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닥쳐오는 다음 라운드다. 어째서 박도현은 한왕호라면, 뭐든 괜찮은지에 대해서. 그래서 도통 넘어가지 않는 아메리카노도 넙죽 받아마셨고 별 시답잖은 만화책을 읽었는데. 한왕호 때문에 저질렀던 지극히 개인적인 기행들이 몽글몽글 떠올라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도현아아……. 너 진짜 똑똑한 줄 알았는데.”

“…어?”

“씨발 진짜 눈새니.”

에휴. 한왕호는 구태여 한숨 흉내를 냈다. 정작 박도현의 한숨에는 개의치 않는 듯 했다. 그러더니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러면 너는. 너는 아무하고나 이래? 이랬다. 뜬금없이.

“그러니까.”

이런 거 하시냐고. 그렇게 말한 한왕호가 기습적으로 입을 맞췄다. 어, 잠시만……. 이거 뭐지. 생각치도 못한 전개에 박도현은 잠시 얼어붙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왕호는 고개 틀어가며 뭉근하게 입술을 비볐다. 뜨뜻미지근한 숨결과 함께 싸한 알코올 냄새가 훅 끼쳤다. 입술 위로 꾹 눌리는 입술은 따뜻했다. 의외로 한왕호는 능숙했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박도현이 중국에서 학창시절 보낼 동안, 한왕호는 얼마나 많은 박도현 같은 존재를 만났을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한왕호에 의해 붙잡힌 턱이 저릿했다. 더듬거리며 한왕호를 밀어내자 한왕호는 순순히 밀려났다. 푸하. 여전히 상황 파악이 덜 된 박도현이 숨을 몰아쉬자 게슴츠레 눈을 뜬 한왕호가 시끄러운 웃음 소리를 냈다. 이럴 땐 입……. 벌려야지.

8

그 뒤로 한왕호의 호출이 없었다. 동시에 박도현은 세미-정신병자가 된다. 귀여니 소설 같은 거 좀 보고 지식인에 질문 올리고. 이런 평소 같지 않은 행동들. 박도현이 남자 하나때문에 인소 대사처럼 병신 될 작자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지만.

한왕호의 연락을 기다리는 건 관성이었다. 박도현은 조련당했다고 자조했다. 이제는 문장에 확신이 있다.

그 며칠 동안 박도현은 천국과 지옥 홍탕과 백탕을 오간다. 1단계 부정 그게 전부 꿈이었다고 생각하기. 이어서 2단계는 자기합리화. 둘 다 술김에 실수했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그러나 납득이 안됐다. 술 취해서 입술 부비는 건 이성적으로 불가하다. 유감스럽게도 박도현은 감성으로 주무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론맹신주의의, 약간 냉소적인 성정. 그렇다면 3단계로 넘어간다. 해탈. 그래 그냥 내 청춘은 좀 화끈한가 보다. 분명히 한왕호한테 미친 소리 줄줄 늘어놓을 때까지만 해도 이성이 있었는데 입 맞춘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회로 자체가 휘발되어버린 것 같은. 동방 가면 얼굴이나 마주칠까 싶어서 얼굴에 철면 깔고 505호 문을 열었으나 한왕호는 다음날도 그 다음날에도 오지 않았다. A에게 왕호 형 휴학한 건 아니냐고 묻자 종종 잠수 탄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그 한왕호가 후배랑 키스 좀 했다고 휴학 때려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황당할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든 생각. 이것도 어장관리의 일종일까. 대형 떡밥 하나 문 채로 낚여버린 어류가 된 기분.

그러나 박도현의 황당무계한 상상은 그곳에서 그친다. 한왕호와의 어색한 재회는 문과대 앞 흡구에서 이뤄진다. 진짜 구라겠지. 그런 생각 하는 동안 흰색 후리스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 뻔뻔하게도 말을 걸어왔다. 도현이 안녕. 박도현은 한왕호 볼 낯이 없어서 그냥 어어.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란히 서서 담배를 태웠다. 물론 박도현 혼자서. 박도현은 그 날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러자 한왕호가 코웃음을 쳤다. 구라치지마세요 그럼 왜 지금 나한테 반말 쓰는데. 다시 할 말을 잃는다. 그야 한왕호의 말대로 전부 거짓말이었으니까. 부정하고 자기합리화까지 다 거쳤는데도 순간을 구성하는 모든 게 족족이 떠올랐다. 원룸 특유의 눅눅한 냄새부터 취기 섞인 더운 숨. 그리고 한왕호의 입술이……. 따뜻했던 것 까지.

“형도 담배 피우는 줄 몰랐네.”

“옛날에 끊었어.”

“그럼 흡구는 왜 왔어?”

“네가 여기 있을 거잖아.”

“근데 왜 안 피우는 거야? 궁금했는데.”

“건강에 안 좋으니까. 난 오래 살 거야.”

“…….”

“그런데 방금 피울까 고민했어.”

“아하. 좆같은 일 많아서?”

“아니.”

네가 나한테 불 붙여주면 좋을 것 같아. 의외의 대답에 박도현이 한왕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왕호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중얼거렸다. 도현아 너 왜 이렇게 어렵냐? 한왕호의 말들은 전부 의미심장하다. 박도현은 한왕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가 어려워 그쪽 좋아서 별 짓 다 했는데. 이 말은 속으로 삼켰다. 대신에 나 원래 쉽진 않아, 하고 능청스레 대답했다. 한왕호가 푸스스 힘빠지는 웃음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쉽지 않네.”

툭 꺼내지는 본심. 박도현은 가만히 한왕호 얘기를 듣다가 피우던 걸 떨어트리곤 밟아 껐다. 담배 배우고 싶으면 말해, 알려줄게. 응 농담이지 당연히. 그럴 것 같긴 했는데.

“근데 형.”

“응?”

“그럼 형도 나 때문에 애썼어?”

“질문의 의도가 뭐야.”

“아니 딱 이것만 말해봐.”

“…맘대로 생각해.”

그럼 됐어. 박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상심리일까? 어쩌면 나는 좀 속 좁은 새끼일지도. 하지만 그런 자기검열따위 의미 없었다. 한왕호의 한탄 하나만으로도 박도현과 한왕호 사이를 지배하던 갑을 구도에 균열이 일었다. 박도현은 이 지점에서 약간의 짜릿함을 느낀다. 지극히 어장 속 물고기의 시점으로, 얼마나 기념비적인 순간인지. 적어도 한왕호의 언어로 신경쓰인다고 증명 받은 셈이었다. 그러나 박도현은 내색하지 않고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담배를 마저 비벼 껐다. 발밑에서 태우고 난 잔해가 잘게 으깨진다.

“그래도 형. 키스는 둘 다 맨정신일 때 하면 좋겠어.”

“무드가 없으시네요.”

“무드 없는 건 그쪽이고요. 날 얼마나 갖고 논 거야.”

형도 진짜 최악이야, 내가 형을 좋아했지 신데렐라마스터인지 뭔지 그런 걸 좋아한 게 아니니깐……. 잠시 정적이 흘렀다. 흘긋 본 한왕호의 얼굴은……. 읽을 수 없었다. 푹 가라앉은 새까만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그래도 뭐, 나쁘지 않네. 형 애쓰는 것도……. 보기 좋아.”

스트라이크다. 박도현의 발언에 한왕호는 조금 아득해진다.

9

한왕호는 난감하다. 귀찮은 건 싫은데 감투 쓰는 건 또 천직이었다. 그러다가 한왕호를 형 형 하며 잘 따르는 동생들이 몇 생겼다. 쿨한 척 다녀도 결국은 남의 애정 무시하지 못하는 편이라 저 좋다는 사람들에게 호오 없이 잘해줬다. 파릇파릇한 박도현에게 커피 한 잔 더 사주는 것쯤이야 한왕호의 세계에서는 당연한 이치.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문제가 발생한다.

박도현은 한왕호에게 순순했다. 시니컬한 표정과 목소리로 지고지순하게 굴었다. 엇갈리는 행동과 반응. 자신을 좋아하는지 그냥 어르신 공경 차원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았다. 한왕호는 박도현에 대해 오랫동안 고찰했다. 벽이 높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못 먹을 감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치면 된다. 그러나 신 포도도 정도가 있는 법이라. 가볍게 실패했다. 한왕호는 박도현이 난감하다. 먼저 연락도 하지 않는 주제에 의심할 여지 없이 예스맨이라는 점에서 난이도는 가중된다. 그 담백한 얼굴로 절절매면서 한왕호가 하는 말들 전부 알아들으려 애쓰는 꼴이……. 이상했다. 뭐 이런 애가 다 있어. 박도현과 만나는 매일매일이 신경전 같았다. 그러나 박도현이 원망스럽냐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박도현은 좋았다. 이 대목에서 한왕호는 스스로의 최악인 면을 자각한다.

박도현은 알까 이쪽도 천하태평하지는 않았다는 걸. 그래서 네가 너무 어렵다고 무심코 고백했다.

“나 원래 쉽진 않아.”

“그러니까. 쉽지 않네.”

돌아오는 반응은 예상대로 시시하다. 멋대로 한왕호가 입을 맞췄던 날도 박도현은 시시했다. 형……. 우리 취했다 자자. 그때 한왕호는 네가 너 잡아먹기라도 하냐며 따지고 싶었지만 1보 물러났다. 취해서 한 키스는 무드가 없다는 박도현의 의견은 힐난했다. 그러나 취기를 변명삼아 밀어붙이지 않은 것은 결국 한왕호 역시 이 다음에 있을 박도현과의 라운드를 은연 중에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딴 기대를 하게 만들다니 박도현은 최악이다. 궤변일까? 그래도 한왕호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도 나만큼이나 최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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