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는 존나 아무것도 아니다

죄송한데 그정도 아니세요

2N년을 살면서 많은 사랑을 해 봤다. 남자도 만나고, 여자도 만나고, 논바이너리도 만나고, 연상, 연하, 이성애자, 레즈비언, 양성애자, 범성애자...... 이 세상 모든 유형의 사람을 사귄 건 아니지만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만났다고는 자부할 수 있다. 서로를 인식하고 가까워져 사랑하게 된. 나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은 제각기 다른 사람이었지만 딱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극성 나르시시스트에 회피형 인간, 그리고 가스라이팅에 도가 튼 전형적인 피해망상적 인간이라는 점이다.

특징을 크게 3가지로 분류했지만, 저 셋은 그냥 한 세트라고 보면 된다. 편의상 나르시시스트라고만 하겠다.

나르시시스트의 사전적 정의를 물으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다들 알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나르시시스트는 그보다 더 포괄적이다. 이들은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아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 나머지 남을 개차반 취급하기도 하고, 자존감이 너무 낮아 남을 깎아내리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는 나르시시스트도 있다. 자신을 사랑하는 건 잘못이 아니다. 자존감이 낮은 것 역시 개인의 성향이다. 다만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기에, 그것도 자신들이 사랑한다는 상대방에게 피해를 끼치는 게 크나큰 문제다. 자신감이 부족하여 표면적으로 주목받는 걸 힘들어하는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들이 주를 이룬다.

이들의 첫 번째 특징으로는 다른 사람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자신감을 회복하고, 좀 더 높이 올라가려는 사람들에게 "그거면 될까?", "해 봐도 안될 텐데.", "나는 아프니까/정신병자니까/자존감이 낮으니까 해도 안 될 거야.(그러니 너도 같아.)" 면서 끊임없이 자존감을 깎는 말을 던진다. 나르시시스트가 실제로 아프거나 정신적/신체적 장애가 있어 체념한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나아가려 하는 행동조차 제약을 건다면 그건 그저 남의 발목을 잡는 이기적인 행위에 불과하다. 전 애인 중 하나는 정신병이 있는 본인의 처지를 자꾸 비관한 적이 있다. 나 역시 정신병이 있지만 나아지려는 사람이었기에,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응원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정신병이 나아야 될 이유가 없으니 병원에 가질 않는다 했으며, 자기파괴적인 자해적 행위도 자꾸만 시도했다. 연인인 내가 보기 힘들다고 감정에도 호소했지만, 상대는 한결같았다. 자살시도를 하고, 먼 미래에 죽을 거라 하고, 해 봤자 안 될 거라는 말을 자꾸만 반복했다. 열심히 살려는 나까지 주눅이 들어 그만하라고 했지만, 상대방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똑같은 처지의 사람 한 명에게는 그만하라 말린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내게 간섭이 심하고 아무 데나 참견하려 한다고 일갈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기껏 건져 살렸더니, 왜 자신이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냐며 뺨을 때리는 적반하장이 그들의 사고방식이다.

두 번째로는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한다. 그들은 대개 회피성 성향이 있는데,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바람이 문제를 회피하게 한다.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상황에도 도망치기 급급하다. 말을 거는 상대방을 피하다가, 상대방이 지쳐 떨어질 때까지 도망친다. 때로는 유유히 다시 나타나 상대방에게 사과하기도 한다. 그러나 믿지 마라. 같은 행동을 또 다시 반복한다. 자기가 원할 때만 다가가고 원할 때 도망치고. 나르시시스트들은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해서 "내가 좀 연락을 잘 안 받아서...", "내가 기억력이 좀 안 좋다보니...", "싸우는 건 싫어." 같은 말로 자신을 포장한다. 한 마디로 개소리다. 자기가 싫은 걸 싫다고 하질 못해서 상대방에게 의견을 떠넘기는 아주 미성숙한 행동이다.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되기 싫다고 상대방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행동이다. 나이를 먹고도 자신의 의견 하나 제대로 표출하지 못한다.

연애를 하더라도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그들은 연애 초반에는 그 누구보다 잘 대해주며 애정을 퍼붓는다. 그러다 몇 번 만남이 지속되면(대개 한 두번으로 짧은)상대방을 귀찮아한다. 연인으로서 바라는 요구를 간섭이라 치부하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얘기를 나누자고 해도 상대방이 자신을 구속한다고 혼자 결론내린다. 연인과는 하지 않는 연락을 친구랑은 잘만 하고. 만남은 힘들다면서 다른 사람들과는 잘만 어울리는 회피형들은 빨리 뜨거워지고 빨리 식는다. 다만 식었다고 인정하면 매정해질까봐.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차기 미안해서 같은 이유로 상대방을 놓아주지도 않는다. 답답한 상대방이 이별통보를 하고 나서야 상대를 놓아준다. 이들이 더 질이 나쁜 이유는, 다른 상대를 만나서는 이런 회피형 성향을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봐 가면서 만만한 상대에게만 만만하게 대한다. 상대방이 이에 반박하면, 상대방이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가스라이팅한다.

작년에 만난 친구 하나가 있다. 그는 애인이 있었지만, 내게 간간이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나는 단순히 친구로서 애정을 표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물으니 플러팅이었단다. 계속 플러팅을 하니 나 역시 마음이 열렸고 좀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강압적으로 나와 성적인 관계를 맺다가 다른 사람에게로 눈을 돌려 버렸다. 내가 싫다곤 안했지만, 좋다는 말은 부담스러워하는 티가 났다. 내가 좋다는 말은 간섭이고, 자신이 좋단 말은 플러팅이라니.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었다. 여담으로 저 다른 사람에게도 내가 당한 일을 말해줬더니 그는 오히려 내가 자신을 견제하고 질투한다며 가스라이팅을 했다. 도리어 사과를 한 것도 나였다. 그렇지만 지금 다시 생각하면 둘은 그냥 끼리끼리 어울린 것 뿐이다.

전 연인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다. 사귄 지 4일 만에 연애 감정이 없다며 이별 통보를 했다. 연애 감정이 없는 건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 집 주소나 비밀번호처럼 사적인 정보를 제공하고, 애정표현을 하며 상대방이 자신을 좋아하는 걸 인식하는 상태였다면 처음부터 연애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그와 친구로라도 잘 지내고 싶어 친구로서는 괜찮냐고 물었고, 그는 괜찮다고 답했다. 그러나 내 연락에 답하지 않던 그는 내가 좋아요를 누른 것마저 부담스러웠는지 인스타 팔로워를 끊었다. 친구로서 지내고 싶지 않다면 지내고 싶지 않다고 직접 말하면 된다. 앞과 뒤가 다르면 의도를 파악할 수 없으니 상대방의 입장에서는 당황스럽고, 앞으로의 일에서도 그를 불신할 수 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는다. 상대방은 분명 말했는데, 자신은 기억에 없단다. 했던 말을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상대방이 여러 번 일러준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린다. 기억력이 나쁘다, 내가 원래 멍청하다는 말로 회피하면 상대방은 수긍하지만 이런 경향이 반복되면 좋게 보일 수는 없다. 엄밀히는 기억력이 나쁜 것도 아니다. 자신이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그 정도로 중요하질 않으니)기억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올해 알고 지냈던 지인이 딱 이랬다.

지인은 알고 지낸 지 며칠 만에 내게 돈을 빌렸다. 대학생에다 가족에게 생활비를 일절 지원받지 못하는 내겐 꽤나 큰 돈이었으나, 금방 갚겠단 말을 믿고 빌려 주었다. 그러나 그는 돌려주지 않았고, 빌린 돈이 쌓였는데 돌연 잠수를 탔다. 나중에야 다시 돌아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지만, 그 돈을 받는 데는 반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돈을 갚지 않는 시간 동안 만나자는 연락이나 식사 제안이 왔지만, 차라리 그 돈을 모아서 갚는 걸 먼저 하면 되지 않는가? 감기가 걸려 아프댔는데 이동거리가 1시간 10분이 넘는 장소에서 보자고 하고, 차가운 음식을 먹이고. 돌려달라는 돈을 주지 않아 장문으로 대화를 시도하자 '답하고 싶지 않다' 며 피해 버렸다. 상대방은 피하면 끝이지만, 나는 그 큰돈을 받을 수 없으니 그 동안 어렵게 새 일을 구하거나 굶으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사실을 가져와서 대화를 시도해봤자 상대는 그저 회피하고, 나는 "기억력 안 좋은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 예민하고 깐깐한 사람." 이 되어 버린다. 나는 지금도 진심으로 궁금하다. 그가 과연 그의 부모나 직장 상사, 다른 인간관계의 사람들에게까지 이렇게 대했을까?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내현적 나르시시스트들의 특징에 대해 설명해 봤다. 그들은 누군가에겐 자애롭고, 친절하고, 재미있는 최고의 인간이겠지만 나에게는 답답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었다. 만일 사랑을 하려는 누군가가 이 글을 본다면, 꼭 저런 유형의 사람들은 피하길 바라며, 이미 자신의 연인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저렇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 자신만 사랑하여 남은 사람으로조차 대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는 우리 자신은 너무나 소중하다. 꼭 당신을 사랑해주는 좋은 연인을 만나길! 그리고 자신이 해당 유형들에 속한다면, 제목을 한 번 더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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