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독일철학

독일고전철학 1차과제

칸트철학에서 도덕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칸트 철학은 독단론과 회의론 사이에서 생긴 철학의 위기로부터 시작된다. 형이상학은 신, 자유, 영혼 등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 다루는 학문이다. 이것을 알기 위한 방법으로 크게 두 갈래가 있었으니, 합리론과 경험론이다. 합리론은 이성에 근거하여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험과학과 형이상학이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는 난점을 가진다. 물리세계는 인과법칙을 따르는 기계론, 정신세계는 자유의지를 갖는 자유론으로 해명하는데, 둘 사이의 상관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해명 없이 주장하기만 하는 것은 곧 독단이다. 반면 경험론은 지식의 원천은 경험이며, 이성은 경험에 뒤따르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학문, 자아동일성, 신 등 모든 것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부정하는 회의주의로 빠지게 된다. 경험에 따른 지식은 모두 개연적이기 때문에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독단론과 회의론은 형이상학의 위기뿐만 아니라 학문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는 문제를 야기했다.

형이상학과 지식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지식을 가질 수 있을까? 칸트는 이를 위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일으킨다. 지금까지는 대상이 존재하며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그에 따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우리는 우리 정신의 특성이나 구조에 따라서만 대상을 알 수 있다. 물 자체는 알 수 없으며, 마음활동 역량 전반에 떠오르는 표상(representation)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긴다. 우리 정신은 지식을 획득할, 즉 무언가를 알 수 있는 역량이 있는가? 보편적이고, 필연적이며, 또한 확장 가능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을까? 지식, 앎은 경험과 독립적으로 언제나 확실성이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에 선험적(a priori)이며, 이전의 사유에 무언가를 더해서, 즉 확장해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종합적(synthethic)이다. 경험과 무관하면서도 무언가를 확장시킬 수 있는 ‘선험적 종합 판단(a priori synthethic judgement)’이 가능하다면 학문적 앎도 가능하다. 그러니 우리 정신을 철저히 탐구해서 ‘인간에게 선험적 종합 판단을 할 역량이 있는지’를 먼저 알아내야 하며, 그것이 이론 판단 곧 칸트의 3대 비판서 중 첫 번째인 『순수이성비판』의 주제다.

우리는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되, 회의주의의 낭떠러지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인간은 정신 능력의 한계 내에서 보편성, 필연성, 확장성을 가진 지식이 가능하다. 인간 정신은 곧 이성이며, 이성은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감성(감수성)으로, 무언가를 받아들이는 역량을 의미한다. 바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직관이라고도 부른다. 감성은 받아들이기만 하기 때문에, 이걸 통해 들어오는 것들은 아직 잡다한(manifold) 상태에 불과하다.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감성에 비해 지성(understanding)은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이성 능력이다. 지성은 잡다를 분류하고 종합하는 범주화, 개념화의 역할을 하며, 이 능력을 통해 우리는 사고하고 이해하게 된다. 상상력(구상력)은 이질적인 감성과 지성을 매개해주며, 하나의 상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이른다. 동떨어져 있는 지성을 나란히 잇따르는 감성으로 직관화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이미지를 그려내는데, 이 일반적인 이미지를 칸트는 도식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이성활동을 할 때 항상 동반되고 수반되는 마음의 작용이 있으니, 그것이 통각(통일적 자기의식)이다. 우리는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지식을 얻을 수 없고, 지성만으로도 지식을 얻을 수 없다. 최종적으로 우리 인식이 ‘x is y’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감성과 지성, 상상력이 협업을 해야 한다. 이것들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능력이 바로 통각인 것이다.

이성의 구조가 이렇기 때문에,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지식은 인간 정신 내로 포착 가능한 표상(representation)에 관한 것이지, ‘물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인간 앎에 대한 이러한 정의는 학문과 형의상학의 안전을 보장한다. 형이상학은 인간 이성의 능력을 탐구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 이성은 주어진 표상을 거슬러 올라가 궁극적 종합을 하고자 한다. 나에게 지금 주어진 표상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로 인해 불가피하게 감성적으로 주어질 수가 없는, 오직 지성적인 사고인 이념이 생겨난다. 지식은 감성에 주어진 표상을 지성으로 질서지우는 감성과 지성의 종합이기 때문에, 감성적으로 주어질 내용이 없는 이념은 지식이 될 수 없다. 오직 ‘사유’만 가능한 대상에 관해 형이상학은 오랫동안 서로 대립하는 찬반논쟁을 해왔다. 이 논쟁에 나오는 명제들은 이율배반(Antinomy)의 관계를 가진다.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이는 이성에 대한 신뢰만 잃게 할 뿐이다. 칸트는 물 자체와 현상(표상)을 구분하는데, 이 명제들은 현상을 다루는 규칙들을 현상으로 주어질 수 없는 물 자체에까지 확대해서 적용하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 지식은 언제나 우리 표상과만 관계하기 때문에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는 이 명제들은 지식이 될 수 없으며 둘다 성립할 수 없다.

단, 세계 안에서의 자유 원인과 자연 원인, 필연적 존재자와 우연적 존재자에 대한 이율배반은 관점에 따라 둘다 성립할 수 있다. 감성적으로 내용이 주어질 수 있는 한쪽 주장과, 애초부터 감성적으로 표상될 수 없는 다른쪽 주장의 대립이기 때문에 현상계의 관점과 물자체의 관점 중에 무엇을 취하느냐에 따라 각각 타당할 수 있는 것이다. 칸트는 여기서 ‘자유’와 신의 존재 및 사유의 타당성을 남겨 놓는다. 현상계의 관점은 우리가 아는 자연 세계는 표상들의 총체이지, 경험이 곧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애초에 경험은 우리의 이성 활동, 구조에 따라서만 조직되는 것이다. 이 정신 구조(능력)만이 경험에 독립적이며, 경험을 형성하는 토대인 선험적(transcendental)인 것이다.

인간을 어떤 관점에서 논해야 할까? 인간을 감성계, 현상계의 존재로서 보면 기계적 인과론을 따르는 존재가 된다. 수많은 인과 연쇄 중 하나에 불과한 존재가 되며, 앞선 사건에 의해 조건지워진다(the conditioned). 오직 나에게 주어진 현상으로만 인간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물자체의 관점으로 인간을 보면 우리는 표상 그 이상의 존재인 것만 같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에 종속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원인이 될 수 있다. ‘지금부터 무언가를 하겠다(practice)’라는 의지(will)는 아직 주어지지 않은 사건에 대한 것이다. 주어진 사건을 두고 해명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건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의지이기 때문에 이론판단과는 다른 실천판단으로 불린다.

가장 좋은 실천 판단은 보편적으로, 필연적으로 좋은 의지다. 특정 조건에 구애받지 않으며 전적으로 자유로운 의지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라고 부를 수 있다. 경험은 전부 조건지워진 것이기 때문에 경험을 따라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자유의지는 선험적 이성, 보편 이성에 근거하여 무언가를 하고자 할 때 발휘되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은, 칸트가 이율배반에서 자유 원인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을 통해 가능한 것이 되었다. 내가 자유의지를 발휘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내 의지의 근거를 살펴봤을 때 알 수 있다. 자유의지는 특정 조건에 구애받지 않는 보편적으로 좋은 의지이기 때문에, 남에게 인정 받고 싶다와 같은 이유는 자유의지의 타당한 근거라고 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조건지어진 의지를 가언적이라고 부른다. 그와 반면 자유의지는 정언적이다. 특정 조건과 무관하게 선험적, 보편적, 자유로운 이성에 근거하여 무조건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정언적인 의지다.

칸트는 자유와 도덕을 ‘도덕 형이상학’을 통해 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쉽게 흔들리고 확실하지 않은 경험 대신, 선험적인 이성에 근거해서 보편적으로 좋거나 좋지 않은 행위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도덕 형이상학에는 정언 명령이라는 공식이 함께 따라온다. 정언 명령은 자신의 행동 원칙이 보편 법칙으로 강제될 수 있는지, 모두가 그러기를 바랄 수 있는지 검토하게끔 하는 명령이다. 다시 말해, 나의 의지가 보편적 의지가 될 수 있는지를 고려하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지는 자유로우면서도 필연적인 행위일 수 있다. 인간의 고유한 특징인 이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가장 인간적이며, 다른 조건에 구속받지 않기 때문에 가장 자유로운 행위이다. 보편 이성에 근거한 의지는 실천 영역에서 이성에 근거한 행위이며, 곧 실천 이성에 근거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단, 자유롭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행복은 행동 결과에 따른 만족감으로 통제할 수 없으며, 행동이 의욕한만큼 완성되지 않을수도 있다. 자유로운 의지로 좋은 행동결과까지 낳는 것은 절대적 존재인 신의 영역에 해당한다. 절대 존재인 신은 경험적 조건에 휘둘리지 않는 완벽한 이성 존재, 즉 전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롤모델을 실천이성에 근거한 보편법칙으로 표상 가능하며, 자기 이성을 자기 행동의 원칙으로 삼아서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에 자발적으로 따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자율(autonomy)이다. 자율성이 우리에게 구체적인 행동의 내용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대신 이것은 인간이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 가능했듯이, 보편적으로 좋은 행동도 생각해낼 수 있게 해준다. 실천 이성을 자유롭게 발휘하기만 하면 우리는 충분히 그러할 수 있다. 때문에 스스로 생각하고 자율적으로 살아야 한다.

칸트에게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다. 다른 것에 얽매이고, 수단을 위해서만 움직이며, 다른 외부 기준에 의해서만 평가되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자발적으로 자유롭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으며,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다. 따라서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며, 그 가치는 다른 것과 비교하여 책정되지 않기에, 인간은 존엄하다.

물론 이 세상은 조건지어진 것들이 많으며 나를 구속하는 것이 많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자유와 현실은 어떻게 연결지어질 수 있을까? 우선 칸트는 인간이 이미 현실안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이성 능력을 반성적으로 살펴봤을 때, 선험적인 이성 구도를 통해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인 경험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감성으로 받아들인 것 없이도 사유할 수 있는 지성 능력 때문에 자유의 가능성도 열려 있는 상태다. 둘째로 칸트는 자유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법, 국가, 정치체제가 그러하다. 칸트의 정치철학은 미학으로부터 나온 공통감 개념과 정언명령을 통하여 구성된다. 셋째로 인류 전체의 차원에서 보면, 인류는 위와 같은 체제의 실현을 통해 조금씩 진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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