킨마

기우

奇遇 뜻하지 않게 만남. 杞憂 일어날 가능성이 희박한 일을 근심함.

- 삐-. 삐-. 삐-.

3시 알람이 울렸다. [5시 선] 이라고 적혀 있는 화면이 후지이 마히로의 시선에 들어왔다. 부모에 조부까지 죄다 요양 보내 버렸으니 귀찮은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아주 죽을 병은 아니었는지 옆자리 어른들과 혼담이 오갔다고 했다. 후지이는 한숨을 한번 내쉬고 나갈 준비를 했다. 아침부터 날이 아주 화창하질 않았는데 저녁에는 또 비까지 올 작정인지 숨에 습기가 느껴져 불쾌하기까지 했다.

어찌되었든 사람을 새로 만나는 자리이니 후지이는 멀끔하게 나가야만 할 것 같아서 괜히 머리를 조금 만졌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걸린 거울 앞에 앉아 안 하던 화장까지 하고, 깔끔한 블라우스에 치마-거기에 적당한 커피색 스타킹-를 입었다. 마히로는 구태여 예의를 차리고 싶지 않았지만 어른들의 유난도 한몫했기에 등 떠 밀리듯 현관 앞에 섰다. '후지이 마히로'라는 이는 꼬리표 같은 소문만 없다면 어디 흠 없는 이였기에 멀끔한 낯을 하고 혀 위에 추를 얹는다면 전부 괜찮을 터였다. 이번엔 눈에 우산이 걸렸다. '들고 나갈까, 아니 됐다.' 마히로는 금새 고개를 작게 흔들고는 휴대폰과 집 열쇠, 그리고 지갑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섰다. 약속 장소가 어디더라.

도보로 20분 걷고 지하철로 다섯 정거장. 아주 멀리 떨어진 위치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가깝다고 말할 수도 없는 거리는 사람을 지치게 만든다. 언제부터였던 가. 아 그날 술을 마시지 말았어야 했는데. 아닌가 오히려 잘 됐나. 킨시상 집이 약속 장소 근처였던 것 같은데. 오늘 보는 사람은 나이가... 아, 서른네 살 이라고 했나. 그쪽도 어지간히 시달리겠네, 오래 보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마히로는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가만히 몸을 싣고 이리저리 생각을 굴렸다.

- 이번 역은 ■■역, ■■역 입니다-.

어느새 내릴 역이다. 4시 30분, 시간은 여유있었다.

만나기로 한 카페는 역에서 가까웠다. 도보로 9분 거리였다. 후지이가 카페에 도착했을 때엔 선을 보기로 한 상대는 이미 와 있었다. 만나기 전에 미리 받아 본 사진과 똑같아 몰라볼 수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후지이 마히로 입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으레 상투적인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상대는 마히로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자리에 있었던 건지 이미 잔이 비워진 커피가 하나 있었다. 후지이는 테이블은 한번 훑곤 주문하고 오겠다는 말을 하고 카운터로 갔다. 바나나 푸딩 크림 라테. 마히로의 흥미를 끄는 메뉴가 하나 있었다.

- 블랙커피 따뜻하게 한 잔 주세요. 설탕은 괜찮아요.

- 네- 250엔 입니다.

후지이는 커피를 주문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올 때는 들리지 않던 빗소리가 들렸던 것도 그쯤이었다.

대화는 평범했다. 바나나 푸딩 크림 라테 대신 주문한 따뜻한 커피는 썼고 자신의 맞선 상대는 평범하게 엘리트였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엘리베이터 식으로 진학하고 해외에서 대학원을 나와 연구원이 되었다고 한다.

남자는 후지이 마히로에게

- 의사는 다시 하실 생각이 없나요?

따위의 질문을 했지만 후지이는 대수롭지 않게

-글쎄요.

라는 싱거운 대답을 내놓았을 뿐이었다. 요즘 악마가 너무 많아 위험하다- 던 가, 데블헌터 일을 하면서 위험했던 순간은 없냐- 라던 가 지금의 마히로로서는 그저 헛웃음만 나오는 말들에 '따분하다.' 라는 감상이 절로 들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하나 생각났다. 경악할 일은 많았어도 그게 싫지 않았는데. 후지이 마히로는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 ...그래서 그날-

- 야마모토 상, 오늘은 제가 몸이 별로 안 좋아서 그만 가볼게요.

마히로가 이 말을 꺼낸 것은 대화한지 1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비는 여전했고, 당장 약속을 엎는 마당에 도움을 받기도 싫었다.

그런 날이 있지 않나, 괜히 밖에 있고 싶은. 마히로는 집으로 곧장 가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조금 떨어진 공원에서 멍하니 비를 봤다. 잠깐, 아주 미친 척을 한번 해볼까 라는 생각도 아주 잠깐, 오늘 일로 전화가 오면 어떡하나 라는 걱정도 잠깐, 아까 떠올렸던 이는 어떻게 살고 있으려나 하는 호기심 한번과 어쩌면 결혼을 했을지도 모르겠네, 아니 어쩌면 이사를 갔을지도- 따위의 생각까지 흘렀을 때엔 이미 테츠카무 킨시의 집 앞이었다.

- 띵-동.

그리고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하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이사를 갔다면 다른 사람이 문을 열어줄 것이고, 결혼을 했다면 다른 여자-어쩌면 남자-가 나오겠지 아, 아니 어쩌면 지금처럼 조금 수더분해진 아는 얼굴이 나온다거나.

그 뒤론 전과 같았다 별다른 안부는 서로 묻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직장에 다니고 같은 부서는 아니었지만 옆 부서 사람의 근황 정도는 이 직장에 사생활이 그다지도 없었다. 후지이 마히로의 꼴은 말 그대로 물에 젖은 생쥐 꼴이었고, 기껏 입은 블라우스는 다 젖어 속옷이 비처보일 지경이었기에 테츠카무의 신세를 졌다. 생각보다 별거 없었다. 빌려 입은 옷은 품이 많이 컸고, 자신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몇 개월 전에 나던 냄새와 같아졌다.

- ...

- ...

그렇게 서로 한참을 말없이 쇼파에 앉아있었다. 조금 찬 온도가 손끝에 닿아 옮긴 시선에, 낯설게 보는 익숙한 이의 얼굴은 연민도 동정도 없어서 생각 같은 건 어찌 되어도 좋았다.


밤새 퍼붓던 비가 아침까지도 머물러 마히로와 킨시는 조금 늦게 일어났다. 마히로는 두통이 몰려오는 그제서야 정신이 들었다. 잠시 뭐라 변명을 해야하나 머리를 굴릴 때 즈음에 밥먹자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부억엘 가보니 킨시가 간단한 아침을 차린게 보였다. 마히로는 이제 와서 도망치는 것도 모냥이 퍽 웃기지 싶어 식탁에 앉았다.

후지이 마히로는 음식을 한참 천천히 씹었다. 맛은 좋았다 다만, 다시 머릿속이 온통 어지러워서 한참을 씹고 있을 뿐이었다.

- 맛없어?

- 아뇨, 맛있어요.

- 킥, 꼭 돌씹는 것 같은 얼굴인데.

"기분 탓이겠죠." 같은 말을 뱉고선 다시 말없이 젓가락을 움직였다. 조금 으슬거리는 것이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오랜만의 관계에 근육통이 찾아온 건지도 모르지. 밥은 여전히 맛있네, 지금 내 표정이 이상한가. 같은 생각들이 온통 마히로의 머리를 채웠다가 어제의 선자리가 떠올라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 ...킨시 상은 궁금한 거 없어요?

- 무슨?

...무슨- 이라니. 마히로는 김이 다 새는 기분이었다. 밤에 비를 다 맞고 찾아온 사람이 어디서 뭘 하다 온 건지 궁금해 하지 않는 저 사내의 무심함이 원망스럽다가도 '그럼 그렇지 생각은 또 나만 많지' 싶었다.

- 어제 선보고 왔었거든요.

- 그렇냐?

- 네, 근데 재미없어서 그냥 왔어요.

- 켁, 바람맞혔네~

- 킨시 상은 결혼 생각 없어요?

물어보지도 않은 말들과 물어보지 않아도 되는 말이 튀었다. 마히로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 아니에요, 마지막은 그냥-

- 없어.

간단명료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 대답마저 테츠카무 킨시 다웠다. "그럴 줄 알았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밥은 맛있어요." 아까보다 숨쉬기가 조금 답답했다. 어제가 날이 꿉꿉해서 그랬나, 비가 지금까지 와서 그런가, 아니면 스스로 그만하자 해놓고 기어이 찾아와서는 매달린 꼴이 스스로도 우스워서 그랬나.

- 1년.

갑작스럽게 귀에 꽂힌 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 더도 덜도 말고, 1년.

뭐가 1년이라는 건지 마히로는 어지러웠다.

- 당장 결혼 생각. 없어. 있을리가. 사귀지도 않는데 결혼은 무슨.

알 수 없는 말들. 아니, 어쩌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말들이 이어졌다.

- 연인부터 시작해. 그리고...1년동안 너한테 다른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1년 뒤에도 괜찮겠다 싶으면, 그땐 후지이가 아니라 테츠카무가 되는거다.

- ...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다면, 저건 고백이나 다름없는 말이 아닌가. 테츠카무는 못된 사람이다. 정말 지독하게 못됐고 타인의 기분을 헤아리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지이 마히로는 그런 그의 말들이 위로가 되었다. 어째서, 대체 어째서. 그저 온전히 마히로로서 있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들 중 하나인 것이 그 이유일까. 고작 그런 이유라면 마히로는 더 이상 이걸 고작이라 치부할 수가 없었다.

- 뭐야, 왜 말이 없어. 저기요 마-히로씨.

- 아, 아아...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 뭐? 그러니까 빨리 좋은 사람 찾아. 1년 안에 못찾으면 진짜 40대 아저씨랑 결혼하게 될거라고~?

장난스러운 음성이 귀에 꽂혔다. 마히로는 다시 잠시간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머리를 헤집어 놓는 손길이 거칠어도 나쁘지 않은 감각이었다.

틀어놓은 티비 소리가 그제야 들렸다.

- 오늘 날씨는 맑을 것으로 예상되며-

화창한 날이다.


오너님 안녕허세요?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제가 퇴고를 한걱ㅆ죠? 제가 간질말랑 썰푸는데에 재능이 지지리도 없어서 그냥 글을 써왔습니다,,,, 평소 쓰던 글은 어디 안간다고,,,, 눅눅 꿉꿉st이긴 한데요....! 노력해봤습니다 마히로 시점은 어렵네요....제가0차인데도ㅋㅋ 다 쓰고 글을 다시 읽으니 동인프레스50% 정품50%이 되어버린 느낌인데 쓰는 동안 일단 저는? 즐거웠다네려(ㄹㅇ홍끼마지진심2000%) 2차동인 안사귀는CP 그러나 어쩌면 결혼할 수도 있는 세계선이라는건 달콤하네여.............

+ 오타와 비문을 수정했습니다,,, 분명 퇴고를 했는데도 비문이 가득이라 부끄럽네요,,, 24.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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