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세리마타] 가디건과 신데렐라

2023. 03. 28

소타스즈 암시 있음

소설판 묘사 포함

세리자와 토모야는 오늘도 누군가의 가디건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남자는 제 손에 들린 얇은 라일락색 가디건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절로 한숨이 새어 나온다. 그의 착잡한 마음을 모르는 듯 손에 달라붙은 천은 부드러웠다. 멀리서 가디건의 주인이 천천히 걸어온다. 세리자와는 자연스레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알아채고 만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머리카락이 살랑거린다. 하얀 손가락이 익숙하게 머리칼을 정리한다.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응시하던 여자가 이윽고 그를 발견한다. 아무 표정 없던 얼굴에 작게 웃음이 번져나간다. 그 모습이, 좋았다.

좋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마는 자신이, 세리자와 토모야는 싫었다. 아니다. 싫지 않았다. 그보다는……. 남자는 이미 이 감정의 이름을 알고 있다. 제법 오래된 일이었다. 그렇기에 왠지 모르게 진 기분이 들었다. 그야 저쪽은 아무렇지 않을 게 분명하니까. 자신은 그저 조카가 좋아하는 사람의 친구일 뿐이다. 20살 정도 어린. 남자는 아무렇지 않게 상대를 향해 손을 흔든다. 여자가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와토 타마키가 가벼운 걸음으로 그의 곁에 섰다. 올려다본다. 세리자와의 시선이 자연스레 아래를 향한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쩔 수 없이, 교차한다.

“오래 기다렸니?”

“아뇨. 방금 왔는데요.”

그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30분 전은 방금일까, 아닐까. 솔직하게 30분 전에 왔다고 털어놓으면 뭐 그리 빨리 왔냐고 타박받을 게 뻔했다. 그러니까, 세리자와는 입을 다물기로 했다. 타마키 씨는 여전히 아름답다. 목덜미를 아슬하게 덮는 검은 머리카락도, 반듯하게 차려입은 세미 정장도 그렇다. 어떻게 봐도 40대라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다. 몸짓 하나하나에 우아함이 깃들어있다. 허나 세리자와의 시선은 어쩔 수 없이 그 입술에 일순 머물고 만다. 그 위에 발린 립스틱이 유난히 반짝였다. 전에도 이런 색이었을까. 립스틱 아래의 색깔은 무엇일까. 남자는 감히, 불순한 생각을 한다. 아니, 이 정도면 불순한 축도 아니지. 그는 애써 스스로를 변호해버린다.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세리자와 차에 두고 내렸을 줄이야. 연락해줘서 고마워.”

“타마키 씨가 아직 도쿄에 계셔서 다행이죠.”

타마키 씨가 뱉는 순수한 감사의 말이 그는 껄끄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이 만남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사심만 잔뜩 묻어 있었으므로. 곧 도쿄 소재 대학에 입학하게 될 스즈메가 먼저 소타에게 조만간 자취방 계약을 위해 이모와 함께 도쿄에 올라갈 거란 연락을 했고, 소타가 흘러가듯 말한 이야기에 먼저 타마키 씨에게 연락한 게 세리자와였다. 도쿄 오신다면서요. 시간 맞으면 술이라도 한잔하실래요? 가볍게 던진 라인에 타마키 씨는 흔쾌히 응했다. 덧붙여 그 후 세리자와는 스즈메에게 감사 인사를 받았다. 소타 씨랑 둘이 있을 시간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나 뭐라나. 아니, 이쪽은 이쪽대로 사심이 가득해서 그런 말을 듣는 건 좀 양심에 찔리는데. 물론 그런 답장을 보내지는 않았다. 스즈메가 그 답장을 보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것 같았으므로. 아무튼.

일상 속에서 다시 만난 타마키 씨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억지로 흠을 잡아 보려 해도 그럴 틈이 없었다. 애초에 이런 사람이겠지. 세리자와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낯설었다. 그에게 ‘이와토 타마키’는 처음 만난 남자의 차에 막무가내로 올라타고, 사정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으면서 어린 애처럼 울음을 터트리는 사람이었다. 그 인상은 선명하게 남아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어른스럽고 상냥한 타마키 씨도, 아이처럼 엉엉 우는 타마키 씨도 그는 사실 어떤 쪽이든 상관없었다. 타마키 씨 앞에서는 괜히 투정을 부리고 싶다가도 어른스럽게도 굴고 싶었다. 이미 성인이지만 좀 더 제대로 된 어른처럼. 적어도 조카와 동일선상에 놓이고 싶지는 않았다.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기 위해 숙취해소제를 꾸역꾸역 먹은 덕택에 그날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건 피했다. 그럼에도 집에서 속은 몇 차례 게워 냈지만.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약속 장소에서 타마키 씨를 만나 언젠가처럼 조수석에 태우고 이자카야까지 갔을 때 타마키 씨는 가디건을 자리에 놓고 내렸다. 세리자와 토모야는 알고 있었다. 허나 부러 입에 올리지는 않았다. 그것을 집어 들기까지는 했다. 단지 타마키 씨에게, 이거 놓고 내리셨어요. 하고 말을 걸지 않은 것뿐이었다. 다만 다음 날 그걸 구실로 라인을 보내긴 했다. 타마키 씨. 제 차에 가디건 두고 내리셨는데요. 미야자키로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더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 라인도 하고 만나기로 약속도 하고. 뭐,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남자는 가디건과 쇼핑백을 넘겨주었다. 타마키 씨는 기쁘게 그것을 받아 든다. 이걸로 또 끝인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미야자키, 미야자키. 지명을 곱씹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멀다.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이 사람을. 애초에 처음부터 좋아할 생각은 없었다. 없었, 는데. 왜 이렇게 됐을까. 의미 없는 생각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에 특별한 이유 따윈 없는 법이다.

세리자와의 마음을 관통한 말이 있기야 했다. 너, 의외로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남자는 그 순간을, 언제나 생생히 떠올릴 수 있었다. 쏟아지는 햇빛 속 자전거를 타고 달려 나가는 여자의 뒷모습. 울려 퍼지는 상쾌한 목소리. 그리고 그게 꿈이 아님을 보여주듯 바닥에 덩그러니 남은 가디건까지.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뒤를 돌아보면 그곳에는 너덜너덜한 차가 있다. 그것조차 그의 현실이었다. 나쁘지만은 않았다. 자동차 서비스를 불러 차를 끌어내고 그에게는 선택지가 두 개 주어졌다. 이대로 돌아가거나 혹은 타마키 씨와 스즈메를 쫓거나. 세리자와 토모야는 후자를 골랐다.

심각한 꼴을 한 차를 끌고 네비게이션을 따라 빈 도로를 내달린다. 바람이 얼굴을 마구 때렸다. 그는 여자에게 묻고 싶었다. 대체 자신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한 것인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세리자와 자신조차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어버리면 어찌 됐든 끝까지 해보자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언가 제대로 다시 시작하기 전에 그 말의 이유를 제대로 알고 싶었다.

스즈메가 네비게이션에 찍어 준 주소 근처에 차를 세우고 근처를 둘러보면 초원이었다. 언젠가 사람이 살았었을 장소다. 세리자와는 담배를 꺼냈다. 습관이었다. 세리자와. 그때 들려온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불을 붙였을 것이다. 타마키 씨, 담배 연기 싫어했지. 그는 장초를 다시 집어넣었다. 아무렇지 않게. 큰 소리로 가볍게 묻는다.

스즈메는요?

문에 들어갔어.

문이요?

응.

타마키 씨의 시선이 돌아간다. 그의 시선이 그 뒤를 쫓는다. 거짓말이죠? 그렇게 되묻고 싶어지는 풍경이 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타마키 씨의 표정은 너무나도 진지했다. 여자는 안절부절못한 채로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다. 이 일에 자신은 아무런, 자격이 없다. 간섭할 수 없다. 스즈메는 더 이상 그때의 어린애가 아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불안했다. 세리자와는 풀을 헤치고 타마키 씨에게 다가간다. 어깨 위에 가디건을 걸쳐 준다. 여자가 그를 올려다본다. 놀란 기색이, 얼굴에 가득 차올랐다.

이거 떨어트리셔서.

그거 주러 여기까지 따라온 거야? 차는 어쩌고?

뭐, 어떻게든 됐어요.

세리자와는 앞의 질문을 넘겼다. 고의였다. 그조차 제대로 규명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는 그대로 콘크리트 벽 앞에 주저앉았다. 처음으로 여자를 올려다본다. 새삼스럽지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예쁜’보다는 ‘아름다운’ 쪽이 더 어울렸다. 타마키 씨는 그를 내려다본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다.

타마키 씨도 앉으시죠. 스즈메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실 거잖아요.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넌 안 돌아가도 되니?

제가 돌아가면 두 사람은 누가 데려다주는데요.

세리자와는 역시 좋은 선생님이 될 것 같네.

아, 또 그 말이다. 거기에 취해 있는 사이 타마키 씨가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만나자마자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는데. 좀처럼 입에서 그 말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은 나의 무엇을 보고 그런 말을 하는가. 나조차 발견하지 못했는데. 조금 쑥스러웠고 이유도 없이 울고 싶어졌다. 어쩌면 그런 말을 누군가에게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걸 하필 제 일상과 가장 거리가 떨어져 있을 법한,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었던 사람에게 들을 줄은 생각도 못 했지만. 세리자와는 입을 다물었다. 대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편안했다. 낯선 사람과 폐허에 자란 풀밭에 앉아 있는데도 그런 느낌이 든다는 게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라인 좀 알려줄래?

네?

이번에 여러모로 신세 졌으니까. 미야자키에 돌아가서라도 보답하고 싶어서.

아니, 굳이 그러실 필요는…….

너, 대학생이잖아. 그때는 기름값도 차 수리비도 아까울 때라고. 받을 수 있을 때 받아.

타마키 씨는 호쾌하게 웃었다. 아, 어른의 얼굴이다. 이와토 타마키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본 낯이었다. 그게 낯설었고 호기심이 일었다. 이 사람의 다른 얼굴도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두 사람은 라인 주소를 공유했다. 그는 타마키 씨의 프로필 사진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귀여웠다. 그리고 일순 생각했다. 예쁘다거나, 아름답다기보다, 그런 것보다 귀여워 보이면 누가 끝이랬는데. 나 이제 끝난 건가?

스즈메는 좀처럼 나올 생각을 안 했다. 스즈메가 들어갔다는 문을 아무리 열고 닫아도 별다른 점이 없었다. 타마키 씨의 진지한 표정만 아니었으면 솔직히 그 안에 스즈메가 있다는 말을 못 믿었으리라. 여자는 한참 그 앞을 서성였다. 둘 사이의 자세한 사정은 아직도 모르지만 그럴 만하다는 건 이제 알 수 있었다. 서서히 해가 진다.

이대로 그 애가 영영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일단 눈이라도 좀 붙이세요.

그치만…….

엄청 피곤해 보이거든요. 스즈메가 돌아오면 깨워 드릴 테니까요.

타마키 씨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린 말이 귀에 날카롭게 박혔다. 목소리에는 조금 물기가 어려 있었다. 이 사람은 정말 눈물이 많구나. 여전히 제대로 달랠 능력은 없어 애써 그는 모른 척했다. 외면한 게 아니다. 누구에게나 가끔은 울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기를 바랄 때도. 남자는 그게, 지금 타마키 씨가 놓인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세리자와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옆에 있어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뿐이었다. 스즈메가 돌아오기 전까지 별일은 없었다. 많은 얘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다만 그저 그 순간을 공유했다는 것만으로도 차오르는 감정이 있는 법이다. 남자는 기억한다. 밤하늘을 채운 별과 다소 쌀쌀하게 불어오는 바람. 거기에 흔들리는 풀들. 옆에서 이따금 훌쩍이는 여자. 여자는 그러다가 곧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그는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 보기로 생각했다. 생각만 했다. 곧 그도 잠의 노예가 되었으므로. 장장 7시간이나 운전을 하고 나면 누구나 지치는 법이었다. 꿈은 꾸지 않았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남자는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누군가의 존재를 느꼈다. 누군가라고 희미하게 말할 필요는 사실 없었다. 틀림없이 타마키 씨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즈메는 소타를 데리고 돌아왔다. 꽤 많이 지났을지도 모른다. 제법 멀쩡하게 돌아온 스즈메를 향해 타마키 씨는 몸을 벌떡 일으키고 달려갔다. 그게, 전날 자전거를 타고 떠난 뒷모습과 퍽 닮아 있었다. 가디건을 떨어트린 것까지. 세리자와는 바닥에 두 번이나 떨어진 가디건을 들고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소타를 인근 역까지 바래다주고 스즈메가 그와 작별 인사를 하는 동안 그는 또 타마키 씨와 단둘이 남겨졌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정적을 피하고자 그는 입에 담배를 물었다. 불은 붙이지 않았다.

불 안 붙여?

뭐, 네. 담배 싫어하시잖아요. 근데 입에 뭐가 없으면 심심해서.

타마키 씨가 의아한 눈치로 물었다. 그가 건넨 답에 여자는 그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웃는 게 더 예쁘네. 세리자와는 그 옆 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어쩌면 이미 다 글러 먹은 걸지도 모른다. 그저 비일상에 기인한 착각일지도 모르고. 그는 애써 후자로 생각하기로 했다. 그야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가. 나이는 어찌 됐든 사는 곳이 도쿄와 규슈인데.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만나러 가기에는 너무 거리가 멀다. 그 생각을 후회하게 된 건 좀 더 나중 일이었다.

모든 일이 마무리된 이후 세리자와는 타마키 씨와 라인을 몇 개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타마키 씨는 왠지 비즈니스에서나 쓸 법한 문장으로 구성된 라인을 보냈다. 타마키 씨답다면 다웠다. 공적인 문장으로 가득 찬 라인을 보며 남자는 웃었다. 기름값이랑 차 수리비, 그리고 답례 명목의 적지 않은 돈이 계좌에 들어왔을 때는 아쉽기도 했다. 액수가 아쉬운 게 아니었다. 이걸로 이 사람과 얘기할 일은 끝이겠지. 좋아한다는 감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찾아온다. 어떤 극명한 사건을 계기로 심장을 꿰뚫기도 하고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스멀스멀 기어오르기도 하는 법이다. 세리자와는 후자라고, 생각했다. 생각했었다. 허나 생각해보면 전자이기도 했다. 이따금 미야자키에서 아무렇지 않게 생활하고 있을 이와토 타마키를 떠올리며 작게 원망하기도 했다. 당신이 그 순간 그 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허나 아무 소용 없었다. 더 이상 메시지가 오지 않는 라인 창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남자는 마침내 제 마음에 이름표를 붙였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연락할 만큼 용기가 나지는 않았다. 그는 늘 기회를 기다렸고, 마침내 그것을 붙잡은 셈이다.

“모처럼이니까, 숙소까지 태워다 드릴게요. 오늘은 술도 안 마셨고.”

“뭐? 그러면 너무 미안하잖아.”

“아녜요. 어차피 오늘 한가하고.”

사실 안 한가하다. 할 일 많다. 그런데도 이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었다. 정말로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는 사람이다. 여차하면 스즈메와 소타의 결혼식 때나 재회할지도 모른다. 세리자와는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씹었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어쩐지 초조했다.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비일상 속에서 만난 타마키 씨와 좀 더 일상적인 관계가 되고 싶었다. 이를테면 그저 달이 예쁘다든가 꽃이 피었다든가 하는 사소한 일로도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사이가. 세리자와는 아무렇지 않게 조수석 문을 열었다. 손에서 조금 땀이 배어 나왔다.

그의 빨간 스포츠카가 시내를 매끄럽게 내달린다. 옆에는 타마키 씨가 있다. 그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웃음이 나는 사람. 시답잖은 이유를 붙여서라도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사람. 아마, 아니, 틀림없이 좋아하는 사람.

“오늘은 음악 안 틀어?”

“듣고 싶은 거 있으세요?”

“아니, 난 딱히. 네 차니까 네가 듣고 싶은 거 들어야지.”

조금 익숙한 대사였다. 언젠가를 연상시키는 말에 그가 새삼스레 웃었다. 아, 좋다. 이 지극히 일상에 가까운 광경이 좋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지 않았다. 이 길이 영원히 이어져 있으면 좋을 텐데. 네비게이션이 뭐라고 중얼거릴수록 마음이 왠지 조급해졌다. 그럴 이유가 없는데도. 그러니까, 무언가 나아가고 싶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대체 뭘 해야 하지.

핸들을 쥔 채로, 세리자와는 연신 타마키 씨를 흘끔댔다. 고작 며칠 전에 봤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운 사람이다. 몇 번을 더 만나야, 당신을 아름답지 않다고 느끼게 될까. 언제쯤 익숙해질까. 그는 그게 궁금했다. 매번 가디건을 떨어트리는 여자가 유리구두를 떨어트린 신데렐라처럼 느껴졌다. 그럼 나는 뭐지? 빨간 스포츠카를 모는 운전사인가. 왕자님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줄. 아니, 이왕이면 내가 왕자님이면 안 되나? 괜찮은 생각인 것 같은데. 애초에 유리구두를 찾아 준 건 왕자님이잖아. 가디건을 주워준 건 나고. 소규모 연극에는 1인 2역도 흔한 법이다. 전혀 이상하지 않다. 문제는 그걸 생각하는 사이에 아무 진전 없이 호텔에 도착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도착했네.”

“그렇네요.”

“그럼, 이번에는 여러모로 고마웠어. 세리자와. 덕분에 즐거웠어.”

“그걸로 끝이에요?”

“뭐?”

조수석 문을 열고 여자가 차에서 내린다. 내릴 필요가 없는데, 세리자와도 그 뒤를 따른다. 여자를 내려다본다. 순간적으로 내뱉은 말에 타마키 씨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동요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악취미라는 건 안다. 허나 어떤 식으로든 각인되고 싶었다.

“가디건, 역시 택배로 보내드릴게요. 아니면 조만간 직접 미야자키에 만나러 갈 테니까 기다려주시죠.”

“잠깐, 세리자와!”

세리자와 토모야는 여자의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낚아챘다. 청년의 낯에 소년 같은 장난스러움이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그 손끝을 어루만진다. 이 사람은 정말, 손톱까지 예쁘구나. 손톱 위에 발린 매니큐어 색깔이 선명했다. 그 끝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역시 그것까진 무리였지만. 언젠가 당신의 손끝과 입술에 입을 맞출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그 립스틱을 지울 날이 오기를. 그는 틀림없이 불순한 생각을, 한다. 갑자기 일어난 일에 당황해서 아무 말도 뱉어내지 못하는 타마키 씨를 가볍게 끌어안는다.

“이건 전에 제대로 못 달래준 거 대신으로.”

세리자와는 그대로 도망치듯 차에 올랐다. 시동을 건다. 뒤에서 세리자와! 하고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났으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필경 제 얼굴은 분명 붉게 달아올라 있을 테니까. 타마키 씨의 얼굴을 볼 여유도 없었다. 적어도 이걸로 더는 타마키 씨 안에서 더는 조카 또래의 남자아이로 남아 있을 수 없겠지. 그것만으로 남자는 만족스러웠다. 음악을 튼다. 선곡은 발렌타인 키스. 일 년에 한 번 있는 기회. 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나 살짝 최후의 수단으로 성공하고 말 거예요……. 노래가 서서히 차내에 울려 퍼졌다. 남자가 가사를 흥얼거린다. 살짝 뭉개진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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