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즈메의 문단속

[세리타마] 식은 커피는 아무도 입에 대지 않고

2023. 04. 02

불투명한 창 너머로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세리자와 토모야는 언제 어디서든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평소였다면 그 창을 두드리며 여자가 이쪽을 바라보게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그럴 날이, 아니었다. 세리자와는 이따금 눈치 없는 척 굴곤 했으나 정말로 그런 건 아니었다. 남자는 무언의 각오를 하고 이 자리에 섰다. 알 수 있었다. 오늘 여기서 무슨 말을 듣게 될지. 그럼에도 그는 달아나지 않았다. 마주해야만 했다. 입에서 비린 맛이 났다. 틀림없는 피의 맛이었다. 입술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카페 문을 연다. 딸랑. 경쾌한 소리가 그를 맞이한다. 남자는 그 소리에 오히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창가 테이블 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얼굴을 든다. 아주 잠깐 그 위로, 옅게 미소가 스치다 이내 덤덤하게 돌아왔다. 이와토 타마키는 오늘도 아름답다. 여전히 예쁘다. 이 사람은 영원히 이렇겠지. 그는 여자에게도 자신이 그런 식으로 남기를 바랐다.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래 기다리셨어요?”

“아니…….”

여자가 드물게 말끝을 흐렸다. 입술에 발린 립스틱이 옅었다. 타마키 씨 역시, 입술을 잔뜩 깨문 것 같았다. 당신도 이 순간이 초조하긴 할까.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이 자꾸 부정적인 방향으로 튄다. 여자가 빠져나온 머리카락을 귀에 건다. 컵을 들어 입을 가져다 댄다. 컵에서는 김이 올라오지 않는다. 나도 약속 시간보다 일찍 도착했는데. 이 사람은 대체 언제부터 여기서 자신을 기다린 걸까. 미지근한 액체가 잔 속에서 흔들린다. 하얀 컵에는 립스틱 자국이 남는다. 그는 자리에 앉지 않는다.

“주문하고 올게요.”

“다녀 와.”

아메리카노는 다른 메뉴에 비해 빨리 나오는 반면 오래도록 마실 수 있다. 그게 좋았었다. 쓰고 검은 액체를 언제부터 마시게 되었더라. 시기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계기는 틀림없이 뒤편에 앉아 있는 타마키 씨였다. 어린애처럼 괜히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을 따라 하고 싶던 때가 있었다. 당신의 모든 게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 마음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변한 것은 당신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당신은 연정이 아니라 그저 동정만으로 제 손을 잡아준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좋았었다. 허나 왜 나쁜 예감은 엇나가는 법이 없을까. 세리자와는 부러 뜨거운 커피를 시켰다. 그걸 마시는 동안은 아직까지는 연인인 여자와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손안의 진동벨이 울린다. 자리에 앉지도 않았는데. 아니다.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혼자 남겨지는 일은 없으리라. 심장이 자꾸 불안하게 뛴다. 타마키 씨와 어떤 식으로든 마주할 때면 늘 심장은 쿵쾅거리곤 하였으나 이번만은 달랐다. 이것을 감히 특별이라고 불러도 될까. 커피가 올라간 쟁반을 든 손이 자꾸만 불안하게 떨린다. 트레이를 내려놓는 손에 당신의 시선이 닿는다.

“손이 자꾸 떨리죠?”

“그렇, 네.”

“전 타마키 씨를 만날 때면 늘 이런데.”

“……”

내용은 장난스럽지만 어조는 그렇지 못했다. 늘, 그랬다. 사실이었다. 세리자와 토모야의 인생은 지금껏 무척 평탄했다. 남들이 주변에서 법석을 떨어도 그는 늘 덤덤하게 굴곤 했다. 큰 굴곡 없는 삶이었다. 그 이상한 만남만 아니었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여자가 조카를 찾기 위해 도쿄로 올라오지만 않았더라도. 남자는 늘, 그런 가정을 했다. 아무 소용 없는 짓이었다. 여자와 만나지 않았더라도 자신은 삶을 이어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만나버렸으므로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던져 놓은 말에 타마키 씨는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세리자와는 애써 웃어 보였다. 입꼬리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제대로 웃고 있는지 확신이 없다. 괜찮았다. 그 미소를 볼 사람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으므로.

“우리, 그만하자.”

“……”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놓았다. 세리자와는 귀를 제 귀를 잘라 내고 싶었다. 이 순간을 오려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로 정적이 두껍게 쌓인다. 보이지 않는 벽이 이곳에 있다. 남자는 막연히 제 입술을 깨물었다. 담배가 피고 싶었다. 여기, 실내 금연이던가. 근데 타마키 씨, 연기 싫어하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물든다. 불을 붙이지도 않은 담배에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무도 새로운 말을 던지지 않는다. 여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는 그런 여자를 바라본다. 당신은 이 말을 위해 휴가를 내면서까지 나를 만나러 온 걸까. 전화나 라인으로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그러면 마지막으로 만나주지나 말지. 끝까지 너무했다. 아니다. 너무한 건 나일지도 모른다. 세리자와 토모야는 지금이 여자를 마주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임을 안다. 남자는 그 끝을 물고 늘어진다.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응.”

“한순간이라도 절 좋아한 적 있어요?”

그제야 타마키 씨가 고개를 든다. 눈가가 붉다. 길고 가느다란 속눈썹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것은 곧 뺨을 타고 떨어진다. 눈물이 얼굴에 길을 냈다. 그것조차 아름답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울고 싶은 건 오히려 이쪽이었다. 이별을 고한 건 당신인데. 한 번쯤은 꺼내 보고 싶던 질문이었다. 남자는 관계를 이어 나가면서도 늘 불안하고 조급했다. 이와토 타마키는 좋은 어른이었으나 좋은 연인은 될 수 없었다. 세리자와는 그걸 알면서도 여자를 붙잡았다. 이 관계의 근간에 있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한낱 동정이라도 그 옆을 차지하고 싶었다.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남고 싶었다.

“어떻게…… 그런 걸 물어?”

“……”

“늘, 좋아했어. 아직도. 항상.”

여자는 눈물을 닦지 않는다. 연신 그것을 흘려보내면서 말을 잇는다. 늘. 아직도……. 그 말에 남자는 목을 매달고 싶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있었다. 세리자와는 겨우 입을 다문다. 대신 그는 몸을 일으킨다. 손수건을 꺼내 여자의 뺨을 닦는다. 언젠가를 떠올린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터트리던 당신. 제대로 달래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던 나. 이제는 다르다. 나는 이제 당신을 달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울릴 수도 있다. 타마키 씨가, 눈을 감았다 뜬다. 제 손에 기대오는 얼굴이 좋았다. 무의식이라는 걸 안다. 여자가 곧 얼굴을 떨어트린다. 세리자와는 자리에 앉았다. 여자는 여전히 이쪽을 바라본다. 그 눈동자가 담는 건 이 순간 오직 한 명뿐이다. 거기에 무심코 말을 뱉어내고 만다.

“그럼 왜 그만하자고 해요? 아직 좋아하면서?”

“넌 나한테 너무 과분하니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당연하잖아! 세리자와는 나보다 훨씬 어리고, 미래도 있어. 내가 붙잡고 있는 거…….”

“타마키 씨!”

점차 서로의 목소리가 격양된다. 세리자와는 조금, 아니 많이 울고 싶었다. 서서히 주변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게 느껴진다. 이것까지 예전과 닮을 필요가 있을까. 그것 때문에 울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당신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별을 고해서. 그래, 그것뿐이었다. 눈앞이 흐려진다. 차라리 그냥 내가 싫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면 과정은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는 이 헤어짐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이런 말을 들어버리면 그저 당신에게 얽매일 수밖에 없다.

“제발, 다른 이유를 대주세요.”

“……”

“싫어졌다고, 말해주세요.”

“세리자와.”

“……네.”

“미안해.”

그 순간 남자는 답을 들었다. 이게 당신의 선택이구나. 그렇다면 나는 영영 당신에게 얽매여 있을 수밖에 없구나……. 서러웠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도저히 얼굴을 보일 수가 없어 다리 사이로 고개를 파묻고 만다.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갈 것만 같다. 허나 울음은 멈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타마키 씨는 자리를 뜨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아주 조금은 괜찮았다. 당신은 여전히 내 맞은편에 있다. 제 것이 아닌 훌쩍이는 소리가 났다. 여자는 적어도 이 눈물이 끝나기 전까지는 떠나지 않으리라. 서로에게 더는 아무것도 아닌 두 사람이 가만히 마주 앉아 서로 울고 있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커피가 서서히 식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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