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타마] 루즈의 전언
2023. 04. 29
감독님 부산 무대 인사에서의 발언이 기뻐서 정말 가볍게 썼습니다.
제목은 아라이 유미의 곡, 마녀 배달부 키키 삽입곡이자 세리자와 플레이리스트 중 하나인 <루즈의 전언> 에서.
이와토 타마키는 꿈을 그렇게 잘 기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감각은 옅게 몸에 남아 있으나 꿈에서 마주한 풍경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애초에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이라고 자각해 본 적도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다. 여자는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음을 안다. 세상이 미묘하게 일그러져 있다. 비틀린 흑백 속을 여자는 걷는다. 왜 걸음을 옮기는가. 그건 그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걸을 때마다 풍경이 일렁인다. 낯선 광경이다. 완전히 생경하지는 않았다. 익숙하지 않을 뿐이었다. 발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앞으로 나아간다. 흐릿한 인상의 사람들이 돌아다닌다. 타마키는 이곳을 안다. 도쿄. 오차노미즈 역 개찰구다. 아, 스즈메를 찾아냈던 장소구나……. 제 손을 내려다본다. 살이 흐릿했다. 꼭 흑백 영화에 애매하게 녹아든 기분이었다. 꿈에서는 뭘 하면 좋을까. 걷는 것밖에 할 일이 없다. 여자는 발을 내디딘다. 그러려고 했다.
“타마키 씨.”
몸이 굳고 만다. 걸음을 멈춘다. 마찬가지로 아는 목소리가 났다. 목소리는 여자를 부른다. 이와토 타마키는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움직인다. 세리자와. 입은 움직이지 않았다. 밝은 갈색 머리칼. 어디에서 샀는지 모를 요란한 무늬의 셔츠. 선글라스 탓에 잘 보이지 않는 눈. 그는 꿈속에서조차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있었다. 세상은 온통 흑백인데 세리자와 토모야와 그 차만이 색을 갖고 있다. 오늘은 스즈메가 없다. 오차노미즈 역 앞인 것도 가난한 호스트 꼴을 한 남자가 있는 것도 같은데 스즈메만이 없다. 여자는 이게 꿈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타세요.”
내가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은데. 여자는 어느새 붉은 스포츠카의 조수석에 앉아 있다. 아, 이것조차 그때와 같다. 사뭇 그리운 느낌이 든다. 털털거리는 낡은 중고차조차 반가웠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난 이후로 세리자와를 만난 적이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여자는 제법 오랫동안 규슈에 살고 있었고 남자는 도쿄에 살고 있었으므로. 분명 미야자키로 돌아간 후에 차 수리비와 기름값을 보냈었는데 차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이미 고쳤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것은 이와토 타마키의 꿈속이므로. 여자는 새삼 궁금해한다. 어째서 내 꿈에 다른 사람도 아닌 이 남자가 나오는지.
붉은 스포츠카는 타마키를 태우고 도로를 달린다. 도로에는 차가 한 대도 없다. 시원하게 뻗은 길은 끝이 없다. 목적지도 알 수 없다. 차는 계속해서 달릴 뿐이다. 음악조차 흐르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는 오로지 정적뿐이다. 조금, 지루했다. 타마키는 네비게이션을 들여다본다. 화면이 지직거린다. 전에는 네비게이션은 멀쩡했는데.
“어디 가는 거야?”
“알고 싶어요?”
“아냐, 됐어.”
세리자와가 그제야 능숙하게 휴대폰을 조작한다. 익숙한 노래들이 연이어 흘러나온다. 전부, 그날 들었던 곡이다. 아무리 진짜 같다고 한들 꿈은 꿈이다. 결국 과거의 반영뿐이다. 그런데 그 꿈이, 하필 이 남자를 비추고 있는 이유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는 그게 정말로, 궁금했다. 타마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세리자와도 마찬가지다. 이와토 타마키는 세리자와 토모야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기껏해야 그가 도쿄에 있는 대학의 교육학부 학생이란 것과 이 차에 엄청난 애착이 있다는 것 정도. 그러니까 이와토 타마키가 알고 있는 세리자와를 구현한 꿈속의 남자는 말수가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노래 하나가 점차 끝나간다. 남자는 휴대폰을 건들지 않는다. 다음 곡이다. 익숙한 전주가 흘러 나온다. 루즈의 전언. 귀에 익은 노래다. 경쾌한 전주가 끝나고 가사가 연이어 튀어나온다. 그 사람의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네비게이션이 켜진다. 목적지는 미야자키.
“타마키 씨를 만나러 가고 있어요.”
그 순간 여자는 잠에서 깼다.
뭐 이런 꿈이 다 있어. 여자는 그런 생각을 했다. 휴대폰을 뒤집어 본다. 시간은 알람이 울리기 전이다. 눈이 평소보다 빨리 떠졌다. 시답잖은 라인 알림이 몇 개 와 있다. 특별한 건 없었다. 그랬어야 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보고 말았다. 세리자와 토모야로부터 온 여섯 통의 라인을.
오랜만이네요
뜬금없지만
저
미야자키
가고 있어요
만날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그건 예지몽이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액정을 멍하니 들여다 본다. 이것도 꿈이라고 넘기기에는 세상의 모든 색채가 선명했다. 미야자키에는 왜 오는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남자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있으므로. 여자는 손가락을 움직인다. 답장을, 보낸다. 손가락 끝에는 립스틱 색을 닮은 붉은 매니큐어가 발려 있었다. 루즈의 전언이었다.
댓글 0
추천 포스트